교수신문에 실린 해외출판 소식을 옮겨다가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국내에 <유럽의 발견>(까치글방, 1997)과 <제국의 몰락>(까치글방, 2003) 등이 소개돼 있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신작 <민주주의 이후>(2008)를 소개하고 있다.   

교수신문(09. 03. 23) [해외 출판 소식] ‘민주주의의 몰락’, 거부할 수 없는 대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은 요즘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일시적인 보수 정권의 출현이나 경제위기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동시에 인구학자이기도 한 엠마뉘엘 토드는 최근 저서인 『민주주의 이후』에서 프랑스와 서구 사회를 감싸고 내입해오는 일련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민주주의 시스템의 소멸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시스템이 그것(민주주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토드는 1976년 약관 27세의 나이에 『최종적 몰락 : 소비에트의 몰락에 관한 시론』으로 소련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책에서 토드는 출산율의 저하를 중심으로 다양한 통계 지표를 통해 소련의 역사적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냉정히 기술하면서, 특유의 실증적 성향을 나타냈다. 이후 토드는 한 공동체(국가, 민족, 지역)의 가족 체제 유형이 그 공동체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내세우며, 이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잇달아 내놓게 된다. 



가족 모델을 포함한 중층적 체제 분석
그 성과는 다음과 같은데, 일단 1988년에 출간된 『새로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각 지방의 정당 투표율이 그 지방의 대표적인 가족 유형이라는 변수에 종속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1990년 출간된 『유럽의 발명』에서는 유럽 각국과 각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적 다양성은 4가지의 대표적 가족 체제(부모-자식 관계의 권위/비권위성, 형제간의 관계의 평등/불평등성의 조합에 의한 4가지)라는 결정인자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점을 치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가족 체제인 독일은 교육, 경제성장 등에서 높은 성과를 보였지만, 파시즘 등이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 반면 비권위적이고 평등한 가족 체제인 프랑스 파리 분지와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창궐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토드의 연구는 대단한 지적 충격을 안겨 주었고,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연구틀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 토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 제국주의, 세계 경제, 이민자 사회 등 보다 정세적인 문제에 대해 문제작을 내놓으며 학문적인 입지를 더욱 다지기 시작했다.
최근 출간된 『민주주의 이후』역시 그러한 중층적 연구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토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과 가족 구조의 변화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토드는 종교의 사회적 힘이 ‘공허’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했으며, 교육의 약화로 문화적 비관주의가 지배적이며, 과두제에 가까운 사회 계층화의 재출현, 세계화로 인한 자유교환의 충격, 계급투쟁 격화 가능성 증대 등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곧 우리가 민주주의로 인식해온 서구의 기존 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책의 주제로 이어진다.

토드의 진단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르코지의 집권과 같은 일시적이고 정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인류학적이고 사회 심층적이며 구조적인 변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몰락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를 들자면, MB 정권이 출현했다는 사실보다도, 그러한 보수 정권을 출현시키게 만든 대중의 의식과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구조의 심부에 있는 변화가 더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다. 

독자들 찬사와 논란 이어져
충격적인 테마를 다룬 탓인지, 출간된 지 4개월 정도 밖에 안됐지만, 책에 대한 프랑스 독자들의 반향은 뜨겁다. 프랑스 독자 중의 한 명인 뒤께스느와이 씨는 아마존 프랑스의 독자평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함에 있어 비관습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책”이라고 언급하면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나타난 성찰의 부록으로 기입될만하다”고 평하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다. 또 리챠드 아페이안 씨는 “사건들을 새로운 빛으로 해명해주고,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이상 기성 미디어와 정당의 바보 같은 이야기를 참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러한 참을 수 없음은 고통스러울 것이므로, 이 책을 읽지 말 것”을 역설적으로 권했다.

파리에 거주하는 리티티라는 닉네임의 독자는 “특히 가족모델과 정치모델 사이의 관계를 국가 혹은 지역의 범위에서 설명하는 역사적 분석을 높게 평가한다”면서 “가능한 해결책을 심화시킬 다른 저작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또 발마에 거주하는 장 마리 필로씨는 조금 색다른 평을 내놓았다. 그는 “저작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공존하는데, 낙관주의적 시나리오는 유럽 보호주의의 조숙”을 촉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 필로씨는 “현재의 지배적인 관점과 배치되는 것이고, 드문 관점”이라고 지적하면서 “향후 경제적, 환경적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건설적인 토론이 심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책은 여러 토론 및 서평 사이트에서도 화제가 됐다. 시사 토론 사이트 중 하나인 지평선에서는 수 십 명의 네티즌들이 책의 논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과녁의 심장’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은 종교에 대한 토드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엠마뉘엘 수녀는 종교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선에 대한 갈망이 지금처럼 강한 적도 없었다”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말라킨느라는 네티즌은 “이슬람 혐오증의 증가는 종교적 공백의 징후”라면서 “가톨릭의 붕괴는 거대한 지표의 상실을 야기한 바, 이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적을 스스로 발명하고자 함에 이른다”고 응수했다. 특히 이는 이민자 수나, 이슬람의 종교 행위가 저하된 시점에서 오히려 인종, 종교적 적대주의가 부상하는 현상을 설명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필립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도 토드의 주장에 수긍하면서 “우리는 사르코지 및 정부 관료의 문화적 결핍을 겪고 있다. 그들에게 휴머니즘은 없다”고 코멘트 하는 등,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적 보호주의 등 토드가 제기한 다양한 테제가 논의됐다.

또 다른 저명 토론 사이트인 ‘아고라-시민의 미디어’에서는 34년 간 고전 문학 교사로 활동했고, 인권 옹호 협회의 회장인 폴 빌라쉬 씨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엠마뉘엘 토드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심층 서평을 게재했다. 이 서평에서 빌라쉬 씨는 “이 책은 미래의 최악을 시사한다”면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토드에게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의 징후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예로 그는 토드의 책으로부터 사르코지와 그를 선출한 사회의 5가지 결점을 읽어낸다.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에 의한 사고의 뒤죽박죽 △지적인 핍진함 △비시민의 배제로 표현되는 공격성 △돈에 대한 사랑 △정서적이고 가족적인 불안정성 등이 그것이다.

토드의 책이 일으키는 이러한 반향은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연구에 충실하면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앙가주망을 지향하면 학문적 공력 쌓기에 소홀한 국내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주훈 기자) 

09. 0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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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가장 관심가는 책, &lt;민주주의 이후&gt;
    from 자기치유 : I am NOT such a person. 2009-03-28 18:17 
    사실 지난 주 로쟈의 블로그에서 서평과 소개를 읽으며 가장 끌렸던 것은 프랑스 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를 소개한 글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주제인 데다가 저자가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새로운 관점의 역사서들을 냈던 엠마뉘엘 토드라는 점, 현재 한국에 적용가능한 시의성을 지닌다는 점, 지적 난이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점 등 여러가지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아직 출간되지 않은..
애도와 우울증
푸슈킨의 죽음을 애도함
레르몬토프의 고독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이별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은 부제이고, 제목은 '푸시킨 VS. 레르몬토프'이다. 러시아 두 낭만주의 시인의 사랑시(실연시)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비교한 글이다. 개인적으론 '푸슈킨'이란 표기를 선호하지만 지면에는 외국어 표기안에 따라 '푸시킨'으로 표기됐다.    

고교 독서평설(09년 3월호) 푸시킨 VS. 레르몬토프

영원한 문학의 주제, 사랑
“아,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을 가져다줄 것인가/그 첫사랑의 날을/아, 누가 그 아름다운 시절의 오로지 한 조각만이라도 돌려줄 것인가.”라며 첫사랑과 청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했던 시인 괴테(1749~1832). 그러나 그는 지난 세월에 대한 영탄으로만 생의 말년을 채우진 않았다. 전 생애에 걸쳐 여인들과의 사랑을 통해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던 그는 74세의 나이에 19세의 처녀 울리케 폰 레베초와 사랑에 빠져, 주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청혼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만년의 사랑은 맺어지지 못했고, 괴테는 천국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며 「마리엔바트의 비가(悲歌)」를 남겼다. “꽃이 모두 져 버린 이날/다시 만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천국과 지옥이 네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있다./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더 이상 절망하지 말라! 그녀가 천국의 문으로 들어와/두 팔로 너를 안아 주리라.” 

사랑의 기쁨과 그 상실의 슬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의 단골 소재이자 시적 영감의 가장 강력한 원천이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감성을 예찬하며 숭배했던 낭만주의 시인들에겐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모든 시인이 사랑의 열병을 앓으면서 똑같이 들뜨고 똑같이 슬퍼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개성과 품성에 따라 사랑을 노래했으며 상실의 슬픔을 위로하였다.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두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과 미하일 레르몬토프(1814~1841)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두 시인은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모두 결투로 세상을 떠났다. 낭만주의 시대의 시인다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사랑의 시들은 여러모로 대조되며, 각각 사랑과 실연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대표한다. 무엇이 다르며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살짝 들여다보기로 하자. 



사랑은 움직이는 것 - 애도적 유형
정신 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1856~1939)는 「애도와 우울증」이란 글에서 상실에 대한 반응 태도를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으로 구분했다. 이 두 유형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몰입과 그 대상의 상실로 인한 정서적 충격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나뉜다. 애도적 유형의 경우에는 일단 사랑하는 대상이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대상에 쏟아 부었던 모든 감정적 에너지를 거둬들여야 한다는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며, 그럼으로써 상실의 충격에서 차츰 벗어나게 된다. 반면 우울증적 유형의 경우에는 상실한 대상과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에,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전환된다. 이는 이미 상실한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낳고, 자기 자신, 곧 자아에 대해서는 애증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응 태도는 과연 시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을까?  

 

먼저 모든 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을 자신의 의무로 간주하기도 했던 시인 푸시킨의 경우를 보자. 사랑의 상실 또는 사랑의 종결을 다루고 있는 시들 가운데 「모든 것이 끝났다」(1824)는 이런 내용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 ;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의 무릎을 껴안고,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이 끝났어요 - 너의 대답을 듣는다.
다시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우수로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일들은 아마도 다 잊게 되겠지 -
사랑이 날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전체 10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내용상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1~4행), ‘나는 너와의 사랑을 잊을 것이다.’(5~8행), ‘다른 사람들이 너를 사랑해 주길 바란다.’(9~10행)로 구분된다. ‘나’와 ‘너’의 사랑은 이미 끝났으므로, 이 시의 화자는 이렇게 종결된 관계를 다시 회복한다거나 계속 유지시켜 나가려는 의지가 없다. 이러한 체념의 바탕에서, ‘너’는 아직 젊고 아름다우므로 (‘나’ 말고도) 다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게 되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바로 이런 식의 단계적 진행을 밟는 것이 전형적인 애도적 유형의 시다. 이 공식을 전형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또 다른 시가 푸시킨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1829)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어쩌면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에서 아직 다 꺼지지 않았는지도.
하지만 그 사랑이 당신을 더는 괴롭히지 않을 거라오.
나는 당신을 무엇으로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소.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말없이, 아무런 희망 없이,
때론 수줍게, 때론 질투에 괴로워하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그토록 진실하게, 그토록 부드럽게,
신이 당신을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게 해 주길 바랄 만큼.

이 시에서 세 차례 반복되는 동사 ‘사랑했다’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했다’라는 과거 시제다. ‘나’의 ‘사랑’은 한때 ‘당신’에게 집중되었던 열정이 이미 식어 가기 시작했지만, 아직 조금 남았다는 걸 확인하는 정도의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을 거라는 서정적 화자의 진술은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어떤 행동의 원동력이 되기에 ‘다 꺼져 가는 사랑’은 너무 모자라는 사랑이다. 이 모자라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 시의 끝부분에서 진술되고 있는 관대한 사랑이다. “신이 당신을 다른 이에게도 사랑받게 해 주길 바랄 만큼”의 사랑 말이다. 요컨대, 이 시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시인의 겸손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방식이다. 사실상 시에서 ‘당신’에 대한 묘사는 거의 부재하며, 전체 내용은 “나는 이러이러하게 당신을 사랑했소.”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한 시’라는 일부의 평가는 좀 과장된 게 아닐까도 싶다.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 우울증적 유형 
이러한 푸시킨의 사랑의 시학(詩學)과 대조되는 작품이 레르몬토프의 「우리는 헤어졌지만」(1837)이다. 이 시는 푸시킨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으로도 읽히기에 흥미롭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을
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좋은 날들의 창백한 환영처럼
그것은 내 영혼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새로운 열정에 빠졌어도
나는 그 초상을 그만 사랑할 수 없었다.
버려진 사원도 여전히 사원이고,
쓰러진 우상도 여전히 신이니까!


이 시는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와 마찬가지로 8행으로 되어 있지만, 2연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에 간결하게 공식화되어 있는 레르몬토프의 사랑의 공식은 어떠한가? 먼저, 1연의 처음 두 행 “우리는 헤어졌지만, 너의 초상을/나는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에서, ‘너의 초상’은 ‘너’를 대신하는 부분 대상이다. 이는 ‘너’의 흔적이자 ‘나’에게 남긴 일종의 각인이다. 이 각인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지만 완전히 헤어진 게 아닌 이중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곧 ‘나’는 ‘너’를 상실했지만 ‘우리’의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너의 초상’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행에서는 그것이 갖는 효과를 진술한다. ‘너의 초상’은 “좋은 날들의 창백한 환영처럼” ‘나’를 즐겁게 하고 들뜨게 만든다. ‘너’는 이제 없지만, ‘너’의 효과는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연을 시작하는 접속사 ‘그래서’는 1연에서의 효과가 계속 이어짐을 뜻한다. ‘우리’가 헤어진 뒤에 ‘나’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서 열정에 빠졌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너의 초상)’을 내버릴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열정은 지난날의 열정을 더욱 강하게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버려진 사원이 여전히 사원이고, 쓰러진 우상도 여전히 신인 것처럼, 떠나간 ‘너’는 여전히 ‘나’의 사랑이라는 게 이 시의 최종적인 고백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라고 다소간 열정적으로 시작한 푸시킨의 시는 결국엔 사랑의 종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달리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헤어졌소.’라고 사랑의 종결을 선언하면서 시작한 레르몬토프의 시는, 역설적으로 종결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확인으로 끝난다. 여기서 두 시의 차이, 더 나아가 두 시인의 사랑관의 차이가 드러난다. 통속적인 어법으로 비교하자면, 푸시킨이 “사랑은 움직이는(변하는) 거야!”라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니?”라고 반박하는 식이다. 푸시킨의 ‘성숙’은 레르몬토프에게는 ‘배신’을 의미하고, 레르몬토프의 ‘영원한 사랑’은 푸시킨에게는 ‘미숙함’의 표지다. 둘은 사랑을 읽는 코드가 서로 다른 셈이다. 내친 김에 레르몬토프가 짧은 생애의 막바지에 쓴 「아니야,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1841)까지 읽어 보자.

아니야,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아,
너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야 ;
네게서 내가 사랑하는 건 과거의 고통과
스러져 간 나의 젊음이야.

때때로 너의 눈동자를 오랫동안 응시하며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나는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지만,
나는 너에게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와 말한다.
너의 모습에선 다른 모습들을 찾고,
살아 있는 입술에선 오래전부터 말이 없는 입술을,
눈동자에선 이미 꺼져 버린 눈빛을 찾는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현재의 ‘너’를 사랑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지만, 심층적으로는 부재하는 과거와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시에서의 사랑은 푸시킨의 경우처럼 ‘변화하는 움직이는 사랑’이 아니라, ‘변치 않는 고정된 사랑’이다. ‘나’의 사랑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붙박여 있다. 이를 압축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1연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건 ‘너’를 통해서 ‘나’의 ‘과거의 고통’과 ‘스러져 간 젊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의 ‘너’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매개다. 곧 ‘나’는 ‘너’의 눈동자를 바라보지만, 정작 내가 대화를 나누는 이는 ‘너’가 아니다.  

이어서 3연에는 1연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내’가 사랑하는 ‘과거의 고통’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실패와 상실에 따른 고통으로, 사랑의 대상은 ‘어린 시절의 여자 친구’로 지목된다. 어린 시절로 한정되어 있는 ‘그녀’와의 사랑은 그 시절로의 회귀만큼이나 불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랑이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현재 연인의 모습에서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과 상처를 찾아 나선다. 그런 의미에서 ‘너의 모습’과 ‘입술’, ‘눈동자’는 모두 부재하는 사랑의 대상을 대신하는 부분 대상이고, 그 흔적들이다. 이 시에서는 사랑의 대상이 두 가지 등장하는데, 이 둘이 겹쳐지면서 궁극적으로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집요한 사랑을 드러낸다.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우울증적 사랑이다.  

몇 편의 제한된 사례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푸시킨과 레르몬토프의 시에 나타난 사랑과 그 상실에 대한 시적 형상화가 각각 애도적 유형과 우울증적 유형에 대응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간단히 공식화하자면, 애도적 유형은 ‘상실 → 슬픔 → 위안’의 단계를 거치고, 우울증적 유형은 ‘상실 → 각인 → 우울’의 경로를 따른다. 이렇듯 사랑과 이별에 대처하는 방식에 최소한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면 좋겠다. 그러면 자신의 감정만을 절대화하는 오류에서 혹시 자유로울 수도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09.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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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도적 유형의 이별시
    from Emergence 2009-03-22 17:57 
    모든 것이 끝났다 ;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너의 무릎을 껴안고 나는 애처롭게 호소했었지 모든 것이 끝났어요 - 너의 대답을 듣는다 다시는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너를 우수로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지난 일들은 아마도 다 잊게 되겠지 사랑이 날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넌 젊고, 너의 영혼은 아름다우니 또 많은 사람들이 널 사랑하게 되리. 이 시는 푸시킨의 (1824)이다. 로쟈님이 프로이트의 이별 유형에..
  2. 푸슈킨과 레르몬토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31 00:55 
    새로 책을 냈다. 새로 쓴 것은 아니고 박사학위논문을 단행본으로 단행본으로 다듬어서 펴낸 것이다. 제목은 <애도와 우울증>(그린비, 2011)이고,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무의식'이 부제다. 모두 편집자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원래는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 문학적 태도로서의 애도와 우울증>(2004)이란 제목으로 제출됐던 논문이다. 이번에 편집자와 여러 사람의수고로 깔끔하게 예쁘게 출간돼 반갑고 다행스럽다. 그들의 공이 크
 
 
다락방 2009-03-21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로쟈님.
푸시킨의 시도, 레르몬토프의 시도 너무 좋아요. 봄이고 게다가 밤이기도 한 지금 읽어서 그런걸까요. 이참에 푸시킨의 시집을 한권 사봐야 겠어요. 아, 정말 좋아요.

로쟈 2009-03-22 00:01   좋아요 0 | URL
번역은 직역에 가까워서 시에는 못 미치는데요.^^; 아무래도 봄밤이어서...

바라 2009-03-22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주전공이시군요^^ 제가 고등학생 때 이런 글을 봤다면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어요ㅎㅎ

로쟈 2009-03-22 14:48   좋아요 0 | URL
네, '주전공'이 그런데, 요즘은 돌볼 새가 없네요.^^;

2009-03-22 0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22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03-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쉬킨의 시를 읽으니 우리네 사랑이 참으로 매번 다른듯 하면서도 참으로 닮았나보다 싶습니다. 아 밤에 읽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

로쟈 2009-03-24 00:22   좋아요 0 | URL
보편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글샘 2009-03-25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전공이라 재미있게 잘 쓰셨네요. ^^
근데... 황무지는... 싫어욧! ㅠㅜ 문학책에 가끔 나오는데, 저도 넘 어려워서 모른답니다. ^^

로쟈 2009-03-26 01:26   좋아요 0 | URL
앗, 4월달 원고에서 다룬 책이 <황무지>인데, 벌써 읽어보셨나요?..

글샘 2009-03-26 22:29   좋아요 0 | URL
그럼요. 매달 오면 로쟈님 글부텀 읽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ㅎㅎ

로쟈 2009-03-26 23:38   좋아요 0 | URL
네, 믿기진 않네요.^^;
 

오래전에 쓴 시를 옮겨놓는다. 대략 15년쯤 전에 쓴 듯하다. 제목이 '레몬 파파야'니까 '도쿄 소나타'와 얼추 운(韻)도 맞는다. 사실은 그 '운' 때문에 이 시가 생각났을 것이다... 

레몬 파파야 

레몬 파파야
나의 죽음에는 異國의 과일들을
나의 죽음과 무관한 異國의 과일들을
나의 죽음과 무관한 異國의 향기들을
레몬 파파야
나의 죽음의 침상에
내 것이 아니었던 불빛들을
내 것이 아니었던 불꽃들을
푸른 불꽃들을
물빛보다 엷게 타오르는 불꽃들을
한 번도 내가 나눠 갖지 못했던
레몬 파파야 불꽃들을
나의 소진하는 침상에
레몬 파파야 눈물을
나의 죽음과 무관한 異國의 눈물을
나의 죽음을 넘어서
푸르게 타오르는 눈물을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그대의 눈물을-

레몬 파파야
나는 아프단다 

 

09. 03. 21.

P.S. 시작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휴일이었던 것 같은데(아니면 강의를 빼먹은 날이던가) 감기 기운이 있었다. 문득 '레몬 파파야'란 말이 떠올랐다. 곰곰이 따져보니까, 레몬은 이상의 죽음에서 따온 것이었고, 파파야는 <그린 파파야 향기>라는 영화에서 따온 것이었다(영화는 여름에 봤다). 어쨌든 그렇게 떠올린 말에 의해서 이 시는 자동적으로 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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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란 성은 아직도 '아키라'란 이름을 떠올리게 하지만 젊은 세대 영화광이라면 '기요시'란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호러 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구로사와 기요시 말이다(나는 <큐어>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의 신작 <도쿄 소나타>가 이번주에 개봉했다. 영화를 보는 일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지만, 이번주에 한 편을 볼 수 있다면, 혹은 봐야 한다면 나의 선택은 <도쿄 소나타>다. 선택에 도움을 준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21(09. 03. 20) 도쿄의 먹구름이 서울을 뒤덮다 

가족의 위기는 뺑소니 사고처럼 찾아온다. 도쿄의 그 가족은 누구도 특별히 잘못한 일은 없지만 저마다 심각한 위기에 빠진다. 단지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사고를 당하는 속수무책의 피해자처럼, 더구나 피해 보상은 물론 원망할 구체적 대상도 찾지 못하는 뺑소니 사고처럼 위기는 찾아온다. 가족을 위기로 몰아넣은 원인은 강간범도, 사기꾼도, 살인범도 아니고 단지 ‘사회’(의 변화)다. 그리고 그 문화에 순응하며 살아온 무감한 기성세대, 자신이다.

엄마는 외롭고 아들은 답답했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도쿄 소나타>는 평생 고용의 신화가 깨진 일본에서 시작한다. 실직한 아버지, 외로운 전업주부인 엄마,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큰아들, 아버지의 권위에 눌린 작은아들. 그들도 우리처럼, 저마다 가족이라 더욱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가졌다. 아버지는 아침이면 꼬박꼬박 만원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서 야근도 했을 것이고,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정성껏 따뜻한 저녁을 준비했을 것이며, 아들들은 특별한 말썽을 부리지 않고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누구도 심각한 잘못을 범하지 않았고 누구도 이들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이들은 출구 없는 절망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속수무책으로 치고 지나가는 뺑소니 사고처럼 이들은 현실이란 괴물에 치였을 뿐이다. 또 다른 실직자인 아버지 친구의 말처럼 “서서히 가라앉는 배에서 구명보트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는 신세”, 그것은 오늘날 다수가 공감할 만한 현실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도쿄 소나타>에 대해 “나는 현재 도쿄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거의 과장 없이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평범한 가족의 오늘은 <밝은 미래> <큐어> <절규> 등을 만든 호러영화의 거장이 지나온 영화 세계만큼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절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암울한 <도쿄 소나타>의 세계가 설득력 넘치는 일본의, 또한 우리의 얘기로 들리는 것이다.

일본인 1명을 고용할 돈으로 중국인 3명을 쓴다, 너무나 자명한 논리라 이제는 한 인간에 대한 예의나 한 가족의 생계 따위를 들이대고 맞서기조차 어렵게 돼버렸다. 그렇게 비용 절감을 좇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아버지(가가와 데루유키)는 오랫동안 근무했던 일자리를 잃는다. 그리고 예정된 추락. 구직은 번번이 실패하고, 무료 급식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상이 이어진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부장인 그는 차마 가족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다. 아내(고이즈미 교코)는 우연히 무료 급식을 받는 남편을 목격하고, 오랫동안 삭여온 그녀의 외로움은 강도의 침입을 계기로 터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큰아들(고야나기 유)은 세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운운하며 미군에 입대한다. 구로사와 감독은 일본 시민도 미군에 입대가 가능한 세계로 현실을 비틀어, 일본 청년세대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에 대해 감독은 “나는 진심으로 우리의 상황이 걱정스럽다”며 “하지만 영화 속 아버지처럼 나에겐 청년들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설득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프리터(아르바이트로 돈을 벌고 남는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들)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본의 ‘88만원 세대’에게 미군 입대는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출구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막내인 켄지(가이 이노와키)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지만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결코 꿈을 꺾지 않는 소년은 급식비를 레슨비로 유용해 피아노를 배운다.  

<도쿄 소나타>는 사회 기사처럼 전형적인 4인의 핵가족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서술한다. 그들 하나하나엔 극단적 면모가 없지만, 그들의 일상을 퍼즐처럼 맞춘 그림은 해결이 어려운(혹은 불가능한) 악몽이다. 인물은 담담한데, 영화는 쓸쓸하고, 관객은 서글프다. 도대체 이들을 위한 대안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탓이다. 여기에 배우들의 사실감 넘치는 연기는 영화를 살아 있는 현실로 만든다. 아버지 역의 가가와는 <유레루>에서 오다기리 조와 함께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한국의 봉준호(<도쿄!>), 중국의 장원(<귀신이 온다>)이 선택하는 아시아의 배우다. 엄마 역의 고이즈미는 <구구는 고양이다>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 배우로 <도쿄 소나타>로 일본의 영화지 <키네마준보>가 주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켄지를 연기한 1995년생 가이는 야무진 얼굴로 놀라운 연기를 펼친다. 마치 <아무도 모른다>의 야기라 유야를 보았을 때처럼 아역이라 믿기 어려운 연기다. 

실직한 가장, 기성세대 권위주의
구로사와 감독이 가리키는 어둠의 원천은 단지 어쩌지 못하는 현실만이 아니다. 가장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가족의 숨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도 불행의 근원이다. 왜 큰아들이 전쟁의 위협을 감수하고 미군에 입대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 막내에게 피아노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허공에 뻗은 아내의 손에서 떨어지는 외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가장인 그는 살피지 못한다. 그도 대부분의 아버지처럼 ‘무신경의 평범성’을 넘어서지 못한 인물이다. 그렇게 그는 일본이고, 아버지다. 그러나 <도쿄 소나타>가 절망의 침묵으로 끝나진 않는다. 가족들 모두가 집 밖에서 보내는 하룻밤 동안에 격렬한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울리는 아름다움 피아노 연주곡. 이렇게 끝나는 <도쿄 소나타>는 ‘서울 소나타’처럼 들린다. 지금 여기도 도쿄의 하늘처럼 불황의 먹구름이 가득하고, 가부장의 무신경도 일본의 그것 못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켄지가 사는 도쿄의 어느 동네는 마치 서울의 성북구나 구로구 어디쯤 같기도 하다. 2008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도쿄 소나타>는 3월19일 개봉한다.(신윤동욱기자) 

09. 03. 21.  

P.S. '평생 고용의 신화가 깨진 일본'이란 구절에서 다시 떠올리게 되는 책은 리처드 세넷의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2009)이다(요즘 가방에 넣고 다니는 탓도 있다). 덧붙여 일본의 반빈곤 네트워크에 관한 소개기사 '자르지 말라, 빈곤에 반대한다'(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4555.html)도 떠올려본다.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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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 2009-03-2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루는 이야기도 그렇고, 카가와 테루유키와 코이즈미 교코 주연이라는 얘기에 봐야겠구나 했어요. 가능한 빨리 보지 않으면 금방 내려갈 듯 하니 서둘러야겠지요;

로쟈 2009-03-24 00:25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그러할 듯합니다...
 

이번주 도서리뷰를 둘러보다가 두 권을 관심도서로 골랐다.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의 공저자 하랄트 슈만이 공저한 <글로벌 카운트다운>(영림카디널, 2009)과 언론학자 바그디키언의 <미디어 모노폴리>(프로메테우스,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 각각 세계화와 미국의 미디어 시장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의 처지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눈길을 끈다. '정의인가 자멸인가'는 <글로벌 카운트다운>의 표지문구인데, <미디어 모노폴리>에도 들어맞는 듯싶어서 페이퍼의 제목으로 정했다. 관련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문화일보(09. 03. 20) 공생이냐 공멸이냐… 갈림길에 선 ‘세계화’   

세계화와 오늘날의 경제위기, 그리고 지구촌의 앞날에 대해 이 책만큼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총체적 분석과 전망을 보여주는 책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오늘의 세계를 파악하고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선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단순한 현황 분석이 아니라 역사적 고찰까지 세세하게 곁들이고 있어 읽는 이를 감탄케 한다.

10여년 전 출간된 ‘세계화의 덫’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저자 하랄트 슈만은 이 책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진가를 알렸다. 독일의 저명한 도서상인 ‘정치학 도서상(Das Politische Buch)’을 수상한 것. 지난해 4월 독일에서 출간된 책은 경제위기의 한복판에서 높은 파고를 맞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시의적절하다.

우선, 저자들이 파악하고 있는 세계화의 역사를 보자. 우리는 세계화란 단어가 199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100여년 전에 세계화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리처드 엘리가 “국가별로 조직된 국민경제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며 “다음 단계는 세계경제일 것이고 화폐시장은 이미 진정한 세계시장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1903년이었다. 다국적기업, 국제경쟁, 세계적인 자본흐름은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난 세기 초에 세계를 움직인 것과 똑같은 경제적 힘이 오늘날 다시한번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다양한 연구성과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인류가 20세기 초에 이미 강력한 세계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첫 번째 세계화는 강대국 간의 정치·경제적 경쟁과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고했다. 저자들은 “전 세계 가치창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측정할 때 세계무역이 1913년에 도달한 수준에 다시 도달한 것은 60년 후인 1973년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급성장하는 세계경제에 제동을 건 1차 세계대전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저자들은 “세상 일이 시장논리만 따랐다면 1차대전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1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이미 ‘도덕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에서’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노먼 에인절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0년에 “전쟁 같은 폭력을 동원해서 한 나라의 복지를 증대시키거나 보전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커다란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자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함부르크 은행가인 막스 바르부르크는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독일은 평화가 유지되면 해마다 더욱 강해질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기다리기만 하면 이익이 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 모든 ‘정확한 분석’은 파국을 맞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분명한 사실은 ‘많은 국민의 방황과 불안이 전쟁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쟁에 반대하는 이성적인 대항세력의 목소리는 갈수록 약해졌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세계화는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긴장이 고조되면 또다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 수천만, 아니 수억 명이 사망하고 수십년의 경제후퇴가 발생할 것인가.

저자들은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서로 너무나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분석한다. 전쟁을 통해 한 쪽의 일방적인 패배와 승자의 경제적 이익 확보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 세계경제를 얽고 있는 복잡한 상호작용들은 모든 국가들을 ‘상호의존’이라는 틀에 집어넣었다.

저자들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예로 들며 소비자 계급의 세계화 현상과 더불어 국민국가 단위의 경제가 무의미해졌음을 밝힌다. 또한 세계화를 통해 부상한 신흥강대국과 오일달러로 부를 축적한 중동 국가투자자들의 세계경제 참여가 기존 경제강국을 위협하고 있음도 강조한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거의 모든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움직임도 있다. 세계적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경제적 패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들이 민족주의적 정치가들과 함께 주도권을 잡는다면 세계를 얽어매고 있는 생산사슬과 국경없는 자본 흐름, 초국적 소유구조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또한 기후변화와 더불어 지역 주민이 생활기반을 잃어버린다면 정치는 국민국가적 요구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체제의 취약점은 명확하다. 금융시장은 붕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에너지 수요의 증가는 석유와 가스를 둘러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기후변화는 수백만 인류를 기아와 자연재해, 유랑의 위협에 노출시키고 있다. 서구 복지국가에서조차 중산층은 점점 빈곤해지는 반면 부유한 상류층의 자산은 몇 배나 증가하고 있다.

결국 저자들은 오늘날 인류가 ‘세계적인 협력’과 ‘세계적인 재앙’의 두 가지 갈림길에 서 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렇다면 당면 과제는 무엇인가. 저자들은 세계화된 금융산업의 제어, 개발도상국의 대중빈곤과 복지지대의 사회적 분열의 극복, 재생에너지원에 의한 화석연료 및 핵연료의 대체 등을 들고 있다. 이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만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인류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지만 이를 가로막고 있는 암초들도 만만찮다. “에너지정책과 기후정책뿐만 아니라 빈곤퇴치에서도 세계의 공익을 각국의 국익 위에 두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세계사회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고 저자들은 단언한다. 어느 나라가 가장 먼저 이 길에 앞장설 것인가. 과연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교훈을 얻기는 했을까.(김영번기자)

서울신문(09. 03. 20) 여론 조정·왜곡… 다양성 사라지는 美 미디어 시장 

1998년 배리 레빈슨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꼬리가 개를 흔든다, 즉 본말이 전도됐다는 뜻을 지닌 ‘왝 더 독’이다. 이 영화에서 재선에 나선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 저명한 정치선전가 ‘스핀닥터(로버트 드 니로 연기)’를 부른다. 그는 대담한 아이디어를 낸다. 전쟁을 선포해 국민의 관심을 국내 문제에서 외부로 돌리자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아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중간 선거(한국식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실업률과 대량해고, 기업 사기 스캔들, 추락하는 주식시장 등 국내 문제로 궁지에 몰린다. 그는 대량 살상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미국 언론의 주요 뉴스에서 국내 문제는 사라진다. 공화당은 상·하원에서 모두 승리했다.   

대량 살상용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벤 바그디키언은 “미국의 적지 않은 뉴스 미디어가 (대통령의 거짓말에)기꺼이 동의하며 함께 꼬리를 흔든 격”이라고 평가했다. 언론학계와 저널리즘 분야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는 바그디키언의 저서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미디어 모노폴리’(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다. 1983년 세상에 나온 뒤 미디어 비평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책이다. 인터넷 분야를 추가한 2004년 개정증보판을 언론학자 정연구 교수 등이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는 언론 또는 미디어 독과점 상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신문·잡지·출판·영화 스튜디오·라디오·텔레비전 방송사를 거느린 타임워너, 월트디즈니,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 비아콤, 베텔스만 등 5대 미디어 그룹이 어떤 전제 군주나 독재자가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커뮤니케이션 파워를 누리고 있다.  

저자는 1983년 영향력 있는 미디어 기업이 50여개에 달했던 반면, 이제 겨우 5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즉 오늘날 미국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매체를 볼 수 있지만, 과거보다 훨씬 적은 수의 미디어 소유자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런 현상은 미연방통신위원회(FCC)가 정보 독과점과 편향적인 여론형성을 막기 위해 신문사와 방송국을 함께 운영할 수 없게 한 규제를 1996년 대부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미디어 그룹들은 미국인의 다양한 기호와 배경·활동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 시청률 조사에서 승리한 프로그램을 수 없이 반복해서 서로 베끼며 수 천 개의 미디어 창구를 통해 내보낸다. 또한 여론을 조정하거나 왜곡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한다. 특히 보수적이고 극우 성향의 프로그램을 지배적으로 생산하며 미국의 정치를 변화시킨다. 친기업적인 부유한 사람들은 조명받고, 약자 계층은 배제된다. 그 결과 40년 전 극우는 오늘날 중도로, 개방적 성향은 급진이나 심지어 반애국자로 왜곡됐고, 미국의 정치 스펙트럼은 더 우익으로 편향됐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저자가 ‘실패’로 진단한 미국의 미디어 모델을 따라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미래가 미국의 우울한 현재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균형잡힌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정보들이 너무 개방적이라거나 좌익으로 간주되며 외면당했다. 그 결과 월스트리트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9·11 테러를 겪었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왜 미국을 미워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여론 독과점으로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가려진 결과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홍지민기자)  

09. 03. 21.  

P.S. 한겨레에 실린 역자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5414.html). 

한겨레(09. 03. 21) 정연구 교수 “한국 방송법, 국민 눈귀 막은 미국 선례 따를건가”

10여년 전부터 언론개혁운동을 해왔고 지난해 3월부터는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연구(51)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미디어 모노폴리>가 “언론학계에서는 널리 읽혀온 유명한 책”이라며 이번에 번역한 것은 최근의 변화된 언론환경을 반영한 제7판(The New Media Monopoly, 2004. 초판은 1983년)이라고 했다.  

이 책에 관심을 가진 건 아이피티비(IPTV) 같은 뉴미디어 등장에 맞춰 방송법을 새로이 고치려는 한국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신문·방송 겸영, 대기업의 방송 참여 등을 허용하는 정부 여당의 새 방송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미디어 겸영 등을 허용해 지금의 난관에 부닥친 미국의 선례를 비판적으로 들여다 보면 한국의 잘못된 방송법 개정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는 이 책이 “미국의 미디어산업이 미국인의 입과 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게 되는 구조와 그 연원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면서 유능한 언론인의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인 만큼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엠비(MB) 악법’이 통과되면 대자본의 미디어 독과점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되풀이될 구조조정과 인수합병 부작용으로 언론 종사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걸 미국 사례들은 보여주고 있다며, 군소 미디어들 역시 생존을 위해 기자를 줄이고 광고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에선 라디오 방송사가 수익을 높이기 위해 광범위한 지역방송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원을 정리한 뒤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제작한 프로를 녹음해서 틀어주기 때문에 갑자기 발생한 지역 긴급사태조차 알리지 못한 일들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의견의 다양성은 말살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제위기 또한 미국의 기업 총수들이 자행한 숱한 부정행위들을 이미 대자본에 포섭된 미디어가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대자본은 그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 하는데 그들이 뉴스를 생산하고 여론을 조성한다면 대자본의 횡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 교수는 “방송 공영체제, 일부이긴 하나 자본으로부터의 신문 독립성 등은 한국이 미국보다 오히려 낫다”고 했다. “미디어 산업 문제를 거론할 때 너무나 생각없이 쉽게 툭 내뱉는 ‘미국은 이러하니 한국도…’라는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런 미국의 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누구의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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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ilda의 생각
    from rotekatze's me2DAY 2009-03-21 21:23 
    로쟈서평 우선,저자들이 파악하고 있는 세계화의 역사를 보자. 우리는 세계화란 단어가 199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100여년 전에 세계화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2. 빈곤의 덫과 세계화의 미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2 09:40 
    흔히 전세계 인구의 1/6을 절대 빈곤층이라고 하는데, 이 '밑바닥 10억' 인구에 대한 해법을 모색한 책이 출간됐다. 옥스포드대학의 경제학 교수 폴 콜리어의 <빈곤의 경제학>(살림, 2010). 서구에서 이 사안을 이해하는 한 유력한 관점으로 참고해볼 만하다. 저자의 강의 동영상(http://www.ted.com/index.php/talks/paul_collier_shares_4_ways_to_help_the_bottom_billion.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