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도서리뷰를 둘러보다가 두 권을 관심도서로 골랐다. <세계화의 덫>(영림카디널)의 공저자 하랄트 슈만이 공저한 <글로벌 카운트다운>(영림카디널, 2009)과 언론학자 바그디키언의 <미디어 모노폴리>(프로메테우스,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 각각 세계화와 미국의 미디어 시장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의 처지와도 무관하지 않아서 눈길을 끈다. '정의인가 자멸인가'는 <글로벌 카운트다운>의 표지문구인데, <미디어 모노폴리>에도 들어맞는 듯싶어서 페이퍼의 제목으로 정했다. 관련리뷰를 스크랩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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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09. 03. 20) 공생이냐 공멸이냐… 갈림길에 선 ‘세계화’
세계화와 오늘날의 경제위기, 그리고 지구촌의 앞날에 대해 이 책만큼 풍부한 사례를 바탕으로 총체적 분석과 전망을 보여주는 책은 거의 없다. 한마디로, 오늘의 세계를 파악하고 내일을 예측하기 위해선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단순한 현황 분석이 아니라 역사적 고찰까지 세세하게 곁들이고 있어 읽는 이를 감탄케 한다.
10여년 전 출간된 ‘세계화의 덫’을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저자 하랄트 슈만은 이 책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진가를 알렸다. 독일의 저명한 도서상인 ‘정치학 도서상(Das Politische Buch)’을 수상한 것. 지난해 4월 독일에서 출간된 책은 경제위기의 한복판에서 높은 파고를 맞고 있는 우리에게도 매우 시의적절하다.
우선, 저자들이 파악하고 있는 세계화의 역사를 보자. 우리는 세계화란 단어가 1990년대에 등장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미 100여년 전에 세계화는 급속도로 진행됐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리처드 엘리가 “국가별로 조직된 국민경제는 종말을 고하고 있다”며 “다음 단계는 세계경제일 것이고 화폐시장은 이미 진정한 세계시장이 되었다”고 말한 것은 1903년이었다. 다국적기업, 국제경쟁, 세계적인 자본흐름은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이미 지난 세기 초에 세계를 움직인 것과 똑같은 경제적 힘이 오늘날 다시한번 인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저자들은 다양한 연구성과와 역사적 사실들을 통해 인류가 20세기 초에 이미 강력한 세계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첫 번째 세계화는 강대국 간의 정치·경제적 경쟁과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종말을 고했다. 저자들은 “전 세계 가치창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측정할 때 세계무역이 1913년에 도달한 수준에 다시 도달한 것은 60년 후인 1973년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급성장하는 세계경제에 제동을 건 1차 세계대전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저자들은 “세상 일이 시장논리만 따랐다면 1차대전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1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도 이미 ‘도덕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에서’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노먼 에인절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0년에 “전쟁 같은 폭력을 동원해서 한 나라의 복지를 증대시키거나 보전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커다란 환상’”이라고 지적했다. 독일 자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함부르크 은행가인 막스 바르부르크는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독일은 평화가 유지되면 해마다 더욱 강해질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기다리기만 하면 이익이 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 모든 ‘정확한 분석’은 파국을 맞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분명한 사실은 ‘많은 국민의 방황과 불안이 전쟁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쟁에 반대하는 이성적인 대항세력의 목소리는 갈수록 약해졌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세계화는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 긴장이 고조되면 또다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 수천만, 아니 수억 명이 사망하고 수십년의 경제후퇴가 발생할 것인가.
저자들은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서로 너무나 밀접하게 엮여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분석한다. 전쟁을 통해 한 쪽의 일방적인 패배와 승자의 경제적 이익 확보가 이뤄질 수 없다는 것. 세계경제를 얽고 있는 복잡한 상호작용들은 모든 국가들을 ‘상호의존’이라는 틀에 집어넣었다.
저자들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예로 들며 소비자 계급의 세계화 현상과 더불어 국민국가 단위의 경제가 무의미해졌음을 밝힌다. 또한 세계화를 통해 부상한 신흥강대국과 오일달러로 부를 축적한 중동 국가투자자들의 세계경제 참여가 기존 경제강국을 위협하고 있음도 강조한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움직임이 거의 모든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움직임도 있다. 세계적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경제적 패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이들이 민족주의적 정치가들과 함께 주도권을 잡는다면 세계를 얽어매고 있는 생산사슬과 국경없는 자본 흐름, 초국적 소유구조가 한 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또한 기후변화와 더불어 지역 주민이 생활기반을 잃어버린다면 정치는 국민국가적 요구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체제의 취약점은 명확하다. 금융시장은 붕괴 위험에 처해 있으며, 에너지 수요의 증가는 석유와 가스를 둘러싼 갈등을 고조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기후변화는 수백만 인류를 기아와 자연재해, 유랑의 위협에 노출시키고 있다. 서구 복지국가에서조차 중산층은 점점 빈곤해지는 반면 부유한 상류층의 자산은 몇 배나 증가하고 있다.
결국 저자들은 오늘날 인류가 ‘세계적인 협력’과 ‘세계적인 재앙’의 두 가지 갈림길에 서 있다고 결론내린다. 그렇다면 당면 과제는 무엇인가. 저자들은 세계화된 금융산업의 제어, 개발도상국의 대중빈곤과 복지지대의 사회적 분열의 극복, 재생에너지원에 의한 화석연료 및 핵연료의 대체 등을 들고 있다. 이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만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인류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지만 이를 가로막고 있는 암초들도 만만찮다. “에너지정책과 기후정책뿐만 아니라 빈곤퇴치에서도 세계의 공익을 각국의 국익 위에 두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세계사회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라고 저자들은 단언한다. 어느 나라가 가장 먼저 이 길에 앞장설 것인가. 과연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교훈을 얻기는 했을까.(김영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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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09. 03. 20) 여론 조정·왜곡… 다양성 사라지는 美 미디어 시장
1998년 배리 레빈슨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꼬리가 개를 흔든다, 즉 본말이 전도됐다는 뜻을 지닌 ‘왝 더 독’이다. 이 영화에서 재선에 나선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약점을 덮기 위해 저명한 정치선전가 ‘스핀닥터(로버트 드 니로 연기)’를 부른다. 그는 대담한 아이디어를 낸다. 전쟁을 선포해 국민의 관심을 국내 문제에서 외부로 돌리자는 것이다.
현실로 돌아와 보면, 아들 부시 대통령은 2002년 중간 선거(한국식으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실업률과 대량해고, 기업 사기 스캔들, 추락하는 주식시장 등 국내 문제로 궁지에 몰린다. 그는 대량 살상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와 사담 후세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다. 미국 언론의 주요 뉴스에서 국내 문제는 사라진다. 공화당은 상·하원에서 모두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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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 살상용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벤 바그디키언은 “미국의 적지 않은 뉴스 미디어가 (대통령의 거짓말에)기꺼이 동의하며 함께 꼬리를 흔든 격”이라고 평가했다. 언론학계와 저널리즘 분야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는 바그디키언의 저서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미디어 모노폴리’(프로메테우스출판사 펴냄)다. 1983년 세상에 나온 뒤 미디어 비평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책이다. 인터넷 분야를 추가한 2004년 개정증보판을 언론학자 정연구 교수 등이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는 언론 또는 미디어 독과점 상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신문·잡지·출판·영화 스튜디오·라디오·텔레비전 방송사를 거느린 타임워너, 월트디즈니,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 비아콤, 베텔스만 등 5대 미디어 그룹이 어떤 전제 군주나 독재자가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커뮤니케이션 파워를 누리고 있다.
저자는 1983년 영향력 있는 미디어 기업이 50여개에 달했던 반면, 이제 겨우 5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즉 오늘날 미국인들은 과거보다 훨씬 많은 매체를 볼 수 있지만, 과거보다 훨씬 적은 수의 미디어 소유자들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이런 현상은 미연방통신위원회(FCC)가 정보 독과점과 편향적인 여론형성을 막기 위해 신문사와 방송국을 함께 운영할 수 없게 한 규제를 1996년 대부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미디어 그룹들은 미국인의 다양한 기호와 배경·활동을 반영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보다 시청률 조사에서 승리한 프로그램을 수 없이 반복해서 서로 베끼며 수 천 개의 미디어 창구를 통해 내보낸다. 또한 여론을 조정하거나 왜곡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한다. 특히 보수적이고 극우 성향의 프로그램을 지배적으로 생산하며 미국의 정치를 변화시킨다. 친기업적인 부유한 사람들은 조명받고, 약자 계층은 배제된다. 그 결과 40년 전 극우는 오늘날 중도로, 개방적 성향은 급진이나 심지어 반애국자로 왜곡됐고, 미국의 정치 스펙트럼은 더 우익으로 편향됐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저자가 ‘실패’로 진단한 미국의 미디어 모델을 따라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미래가 미국의 우울한 현재와 겹쳐 보이는 순간이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균형잡힌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정보들이 너무 개방적이라거나 좌익으로 간주되며 외면당했다. 그 결과 월스트리트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양극화는 심화됐다. 9·11 테러를 겪었지만 아직도 많은 미국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왜 미국을 미워하는지 의아해하고 있다. 여론 독과점으로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가려진 결과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홍지민기자)
09. 03. 21.
P.S. 한겨레에 실린 역자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5414.html).
한겨레(09. 03. 21) 정연구 교수 “한국 방송법, 국민 눈귀 막은 미국 선례 따를건가”
10여년 전부터 언론개혁운동을 해왔고 지난해 3월부터는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정연구(51)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미디어 모노폴리>가 “언론학계에서는 널리 읽혀온 유명한 책”이라며 이번에 번역한 것은 최근의 변화된 언론환경을 반영한 제7판(The New Media Monopoly, 2004. 초판은 1983년)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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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심을 가진 건 아이피티비(IPTV) 같은 뉴미디어 등장에 맞춰 방송법을 새로이 고치려는 한국이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신문·방송 겸영, 대기업의 방송 참여 등을 허용하는 정부 여당의 새 방송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미디어 겸영 등을 허용해 지금의 난관에 부닥친 미국의 선례를 비판적으로 들여다 보면 한국의 잘못된 방송법 개정을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그는 이 책이 “미국의 미디어산업이 미국인의 입과 귀를 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게 되는 구조와 그 연원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면서 유능한 언론인의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인 만큼 “설득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엠비(MB) 악법’이 통과되면 대자본의 미디어 독과점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되풀이될 구조조정과 인수합병 부작용으로 언론 종사자들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걸 미국 사례들은 보여주고 있다며, 군소 미디어들 역시 생존을 위해 기자를 줄이고 광고를 확보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에선 라디오 방송사가 수익을 높이기 위해 광범위한 지역방송 네트워크를 만들고 인원을 정리한 뒤 중앙에서 일률적으로 제작한 프로를 녹음해서 틀어주기 때문에 갑자기 발생한 지역 긴급사태조차 알리지 못한 일들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의견의 다양성은 말살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제위기 또한 미국의 기업 총수들이 자행한 숱한 부정행위들을 이미 대자본에 포섭된 미디어가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대자본은 그 자체가 권력이기 때문에 감시와 견제를 받아야 하는데 그들이 뉴스를 생산하고 여론을 조성한다면 대자본의 횡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 교수는 “방송 공영체제, 일부이긴 하나 자본으로부터의 신문 독립성 등은 한국이 미국보다 오히려 낫다”고 했다. “미디어 산업 문제를 거론할 때 너무나 생각없이 쉽게 툭 내뱉는 ‘미국은 이러하니 한국도…’라는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런 미국의 제도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누구의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 먼저 생각해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