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해서 사실 할말이 없다. 연휴 전에 수사 발표가 난다고 하지만 정부나 여당쪽에선 연일 철거민과 희생자들에 대한 비판이나 쏟아내는 걸 보면 별로 기대할 것도 없어 보인다. 요즘은 그들이 입에 담는 한국어 자체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 같은 한국어를 쓴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지경이며, 그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혐오스럽다. 여러 모로 정신건강에 극히 유해하다(안 그래도 머리는 복잡하며 늘상 무거운데 말이다). 그나마 철거민 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제기했던 한국문학의 계보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마음을 좀 가라앉힌다. 그래도 미더운 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험한 시절을 맞아 30년전 문학에나 의지해야 한다면 좀 슬픈 일이긴 하지만... 

경향신문(09. 01. 23) 다시 주목받는 30년전 철거민 문학 ‘난쏘공’

지난 20일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은 마치 우리 사회의 시계추를 30년 전으로 되돌려놓은 듯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켰다. 1970~80년대 ‘민중문학’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현실에 재현해놓은 듯했다. 30년 전 철거민 문제를 다룬 조세희씨(67)의 <난장이를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인터넷 서점 판매가 늘며 다시 주목 받고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70~80년대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농업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근대적 도시사회로 탈바꿈해나갔고, 급격한 도시화는 도시빈민 문제 등 갖가지 문제를 양산했다. 이 시기 문학의 키워드는 도시빈민, 철거민과 같은 ‘민중’이었고, 그 속에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모순이 생생히 담겼다.  



조세희씨의 <난쏘공>(1978)이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히는 철거민 문학이라면, 철거민 문학의 ‘효시’는 윤흥길씨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1977)다. 경기도 광주의 철거민 임시수용소의 폭동 사건을 다룬 이 소설은 산업화·도시화의 그늘에서 소외된 계층의 삶을 날카롭게 포착한 수작으로 꼽힌다. 1980년대, 도시빈민운동이 대두되면서 이동철씨의 <꼬방동네 사람들>(1981)이 판자촌 동네를 무대로 빈민들의 현실을 생생히 그려 화제가 됐고, 이는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역시 주목받았다. 황석영씨의 <객지>(1971)와 <삼포가는 길>(1973)은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로 부상하고 있던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소설로 꼽힌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씨는 “당시 급격히 이뤄진 도시화·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이 도시빈민·철거민 문제였다”며 “특히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정리사업이 진행되면서, 집중부각된 철거문제가 문학적 테마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민중문학’은 급격히 퇴조했다. 민주화 속에 문학의 리얼리즘적 경향은 80년대 말에 사그라들고, 서구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을 수용하거나 상업주의 문화에 물드는 경향을 보였다.   

인하대 국문과 김명인 교수는 “90년대 문학에선 80년대 민중문학이 가진 문제 의식이 많이 사라졌다. 가난의 문제를 다루더라도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공선옥씨가 철거민, 옌볜 동포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난의 문제에 천착해왔고, 교사·작가에서 스스로 철거민 투쟁가로 변신한 김하경씨는 소설집 <속된 인생> 등을 통해 철거민 문제와 노동자 문제를 그려냈다.   

외환위기를 겪은 세대의 소설가들에 의해 새로운 양상의 ‘민중 문학’의 출현에 대한 분석도 나온다. 문학평론가 정홍수씨는 “최근 박민규·김애란씨 등의 소설을 들여다보면 청년백수 등 새로운 도시 빈민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70~80년대 문학과 같은 양상은 아니지만 그런 흐름들이 복귀하는 것을 짚어낼 수 있다”고 했다. 3월쯤 출간될 예정인 서울을 테마로 한 소설집 <서울이야기>(가제·강)에서 김애란씨는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의 상황을 벌레에 빗댄 소설 <벌레들>을 발표할 예정이다.

김명인 교수는 “최근 20년 동안 신자유주의의 진행 방향과 한국 문학이 개인화되고 왜소화되는 방향이 일치한다”며 “90년대 이후 문학은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정의감, 사회 약자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위축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아직도 <난쏘공>이 널리 읽히고 팔리는 것은 그 이후 문학 작품의 빈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꼬집었다.(이영경기자) 

09. 01. 23.   

P.S. 작가 조세희씨의 오마이뉴스 인터뷰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3772&cmpt_cd=A02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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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1-23 05:20 
    다시 주목받는 철거민 문학
 
 
2009-01-23 0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3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4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표지와 제목만 보고 그저 그런 작품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가 리뷰를 읽고서 자세를 고쳐 잡은 작품이 있다. 도미니카계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의 데뷔 장편소설, 이자 2008년 퓰리처상 수상작, 그리고 벌써부터 '2009년 최고작'이란 평까지 들려오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문학동네, 2009)이 그것이다. 이미 알라딘에는 주간 베스트셀러에도 올라와 있으므로 뒷북성 멘트가 되겠지만, 여하튼 '물건'을 못 알아보고 지나칠 뻔했다. 관련기사들을 챙겨놓는다. 그리고 드는 건, 역시 아직도 가능한 문학은 '제3세계'(내지는 '제3세계적 체험')에서 나오는구나란 생각. 요즘은 정치경제적으로 우리도 제3세계 뺨치는 만큼 혹 '물건'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종언 이후의 물건'에 대한 기대는 아직 버리지 말고 모셔두어야겠다...   

경향신문(09. 01. 17) 운명의 저주에도 삶은 계속된다  

“그것의 이름이나 유래가 무엇이든, 유럽인이 이스파니올라(아이티와 도미니카를 포함하는 서인도제도의 두번째 큰 섬)에 도착하면서 푸쿠를 세상에 풀어놓았고, 우리는 그후로 줄곧 그 염병할 저주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모두 푸쿠의 자식이다.” 



도미니카계 미국 작가 주노 디아스(41)의 첫번째 장편소설이자 2008년 미국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작품에서 ‘푸쿠’는 중요한 모티브다. 삶과 운명에 스며든 저주쯤으로 옮겨지는 푸쿠는 유럽인의 라틴아메리카 침략과 함께 시작됐고 도미니카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를 통해 계승됐다. 푸쿠가 지배하는 삶은 개인사, 가족사를 한 국가의 정치 및 역사와 묶어놓는다.

자못 심각한 주제이지만 소설은 때로는 경쾌하고 발랄한 문체로, 때로는 가슴 찢어지는 감동과 애절함으로 미국에 이민 온 도미니카 가족 레온가의 삶을 따라간다. 주인공은 110㎏에 육박하는 거구에 못생기고 사교성도, 운동신경도 젬병인 검둥이 오스카 와오. SF와 판타지 소설에 열광하면서 ‘도미니카의 톨킨’을 꿈꾸는 그는 형편없는 외모와 오타쿠 기질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한다.
그는 자신에게 절대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무력감에 빠져있다. 반면 오스카의 누나 롤라는 긴 생머리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 그러나 청소년 시절 갑자기 찾아온 ‘변해야 한다’는 느낌 때문에 방황한다. 자신을 진정 변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지만 그 실체는 쉽사리 잡히지 않고 상실감만 커진다.  


유럽의 식민지배와 독재정치 속에서 도미니카 주민들은 나쁜 운명인 ‘푸쿠’와의 싸움을 계속해 왔다. 사진은 도미니카의 주민들이 홍수로 물이 넘친 거리를 보트를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다. 

남매의 엄마인 벨리시아의 삶도 질곡을 헤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아버지 아벨라르가 트루히요에게 찍혀 온 집안이 몰락한 순간 태어난 그녀는 열렬했던 사랑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우여곡절끝에 미국에 건너오지만 고된 노동과 외로움에 시달리고 마침내 유방암에 걸린다.

이 소설은 오스카와 롤라, 어머니 벨리시아와 할아버지 아벨라르 등 3대에 걸친 가족이야기를 롤라의 남자친구인 화자 유니오르의 시선에서 시·공간을 옮겨가며 펼쳐보인다. 소설 속의 남자들이 전형적인 남성성에 도전하는 것, 시대 배경과 화자가 계속 바뀌는 것, 소설에 주석이 달린 것은 작가의 포석이다. 전형적인 남성성을 거부하는 건 독재자에 대한 반발이며 산산조각인 듯하면서도 기적적으로 붙어있는 건 카리브해 섬나라들의 이미지다. 주석은 여러가지 목소리를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아무튼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오스카는 휴가를 보내러 산토도밍고로 떠나고 자기 인생의 단 하나뿐이라고 믿어지는 진정한 사랑, 이본을 만난다. 그러나 이본과의 사랑은 오스카의 목숨을 대가로 한 것이고 그는 기꺼이 평온한 표정으로 화염에 휩싸인다. 오스카 가족의 삶은 독재자 트루히요, 나아가 서인도제도를 지배한 유럽 식민자들과 연결돼 있다. 그러나 푸쿠가 그들을 완전히 지배하는 건 아니다. 힘차게 사랑하고 살아낸 오스카의 가족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채 푸쿠에 저항하면서 사람들을 살아있게 만드는 역주문인 ‘사파’를 외쳤던 것이다. 나아가 작가 디아스가 도미니카인들의 삶을 미국 주류문단에 불러내는 것 역시 모종의 ‘사파’인 셈이다.(한윤정기자)   

 

씨네21(09. 01. 15) 어쩌면 2009년 최고의 독서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읽고 나니 불 켜진 극장 안에 혼자 남은 듯 머리가 얼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혀 같다. 이야기를 삼키고 역사를 삼키고 정치를 삼키고 그 땅에 사는 인간의 삶을 삼켜 토해내는 붉은 혀. 주노 디아즈의 첫 장편소설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그 탄생에 걸린 11년조차 너무 짧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저주와 마녀가 그 힘을 잃지 않은 땅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 시작된 오스카의 선조 데 레온 가족의 피와 체액이 흐르는 연대기가 시공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오스카는 저자 주노 디아즈와 여러 면에서 겹치는 역사를 가진 젊은 도미니카계 미국인이다. J. R. R. 톨킨을 꿈꾸는 체중 140kg의 오스카는 도미니카계 남자라고 믿을 수 없게도, 동정이다. 동정없는 세상에서 홀로 동정인데다 코믹스와 판타지, SF소설에 빠져 살며 말은 <스타트렉>에 나오는 컴퓨터처럼 하다 보니 친구도 없다. 그와 대학 기숙사 방을 함께 쓰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은 오스카의 누나 롤라에게 반한 유니오르인데, 그가 이 책을 끌어가는 화자다.

미국에서의 이들 삶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독재자 트루히요하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의 어머니, 할아버지의 삶으로 건너간다. 주노 디아즈는 어째서 인간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정치 때문에 자유를 박탈당했던 오스카의 할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로 들려준다. 정치와 멀리 있었음에도 정치 때문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긴 이들. 하지만 갈비뼈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뭉개지는 순간에조차 비꼬고 풍자하는 화자의 혀는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가 독재자 치하의 사람들처럼 화자 1인의 의견만 접할 수 없다는 주노 디아즈의 신념은 도미니카의 역사와 트루히요에 대한 독재에 얽힌 작가 주석을 권말에 두툼하게 달아놓았다. 그마저도 재미있다. 거시사와 미시사,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이 맞물려 돌아가는 양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한 셈이다. 내용과 형식에서 두루.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퓰리처상을 비롯해 미국비평가협회상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히지 않을 정도의 상을 수상했고 아마존과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휩쓸었다. 닉 혼비는 “최근 책들 가운데 이 책과 견주어 나가떨어지지 않은 책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라고 이 책을 추워올렸다.(이다혜)  

09. 0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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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영화 개봉과 맞물려 뒤늦게 화제다(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3931.html). 하지만 개인적으로 12월 화제의 작가로 꼽고 싶은 이는 존 치버다. 별다른 입소문도 없이 한꺼번에 6권이나 최근에 출간됐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카버와 함께 미국 단편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이 작가도 진작에 소개된 바 있지만(내가 기억하는 건 90년대 초반이다) 이토록 출판계의 환대를 받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작년에 예고탄으로 <블릿파크>가 출간되긴 했다). 아무튼 '교외(郊外)의 체호프’라고도 불리는 그의 단편들을 누구 말대로 '월동(越冬) 식량'으로 마련해둠 직하다(12월엔 월동용 책들이 나오나 보다!). 물론 카버도 아직 안 읽으신 분이라면 카버 먼저, 아니 체호프 먼저 읽으시고. 순서가 그렇게 된다...    

한국일보(08. 12. 13) 속이고 감추고 비밀로 얼룩진 삶

"아이린은 다이얼을 계속 돌려 서너 집의 아침식사 테이블을 침범했다. 그리고 소화불량과 육체적 사랑, 병적인 허영, 신앙심, 그리고 절망이 표현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녀는 가정부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재빨리 라디오를 껐다."



미국 작가 존 치버(1912~1982)의 단편 '기괴한 라디오'. 결혼생활 10년차에 접어든 부부인 짐과 아이린은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산다. 1년에 10번 이상 연극 혹은 영화를 보러다니고, 두 자녀를 둔 전형적인 미국의 중산층 부부. 슈베르트와 모차르트를 즐겨듣지만 고장이 잦은 라디오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는 아이린을 위해 짐은 새 라디오를 선물한다. 새로 산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상한 잡음을 듣게 되는 아이린은 그것이 옆집 이웃들의 소리임을 알게되자 심란한 심정이 되는데.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안정적인 이웃들이었지만 그들은 퇴근 후 피아노 연습을 하는 문제로, 혹은 은행에서 초과인출한 금액 문제로 말다툼을 하고 있었고, 아내를 구타하거나, 건물의 잡역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린은 "다른 사람들 모두가 하루종일 싸우고 있어요. 모두들 싸우고 있었어요"라고 울부짖으며 중산층의 일상에 숨겨진 황폐한 내면세계를 고통스럽게 들여다보게 된다.



'교외(郊外)의 작가'로 불리는 존 치버의 작품이 최근 잇달아 국내 번역되고 있다. 그는 평생 150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발표, 너대니얼 호손-오 헨리-스콧 피츠제럴드 등으로 이어져온 미국의 단편소설 전통을 계승한 작가로 꼽힌다. 그의 문학세계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기괴한 라디오>와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등 단편 61편을 실은 선집 4권(문학동네 발행)이 얼마 전 번역돼 나왔고, 1950년대 후반 장편작가로 변신한 그의 무르익은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왑샷 가문 연대기>와 <왑샷 가문 몰락기>(민음사 발행)도 번역됐다. 모두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그의 작품들이다.

치버 작품의 주된 시대적 배경은 1950~60년대의 미국이다. 2차대전 승전에 따른 경제적 번영으로 두텁게 형성된 중산층이 대도시 교외의 주택단지로 몰려가 드라이브와 영화관으로 상징되는 소비문화를 만끽하고 있었던 시대다. 그러나 존 치버는, 라디오를 엿듣는 아이린처럼, 물질주의의 세례를 받지만 내면적으로 무력감과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중산층의 분열적 행태에 바짝 귀를 대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에 서식하는 인물들은 서로에 대한 진짜 감정은 감추거나 억누르지만 내심 신경을 곤두세우고 강박적 행동을 일삼는 이들이다. 꽉 끼는 옷을 입고 파티에 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젊은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 몇 년 만에 만난 동생이 염세적 태도를 보이자 살의를 표출하는 형('참담한 작별'), 아내가 알코올중독에 빠졌다는 이유로 혹은 중년에 이르러 자신이 가족 밖의 존재로 전락하자 젊은 여인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거나 그들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지는 남편('교외의 남편' '망상') 같은 이들이다.

치버는 왑샷 가문 연작 장편을 통해서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의 '세인트 보톨프스'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가문의 흥망성쇠사(史)를 통해 미국의 물질주의적 성공 신화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현대인들의 정신적 공허감의 실체는 어디에 기인하는가를 묻는 작업이기도 하다. 치버는 <왑샷 가문 연대기>로 전미도서상(1958), <왑샷 가문 몰락기>(1965)로 미국 예술원이 수여하는 하우얼스 메달을 받았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는 "치버는 때로는 조금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대리석을 정교하게 조탁하여 조각품으로 만들 듯 어휘 하나하나에 신경을 쓴다"며 "이를 통해 겉으로 화려한 미국적 생활의 가려진 어두운 면을 잘 포착하고 있는 작가"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시사IN(08. 12. 09) '카버’를 다 읽으셨습니까 그럼 ‘치버’를 보십시오

무슨 횡재한 기분이라고 할까. 레이먼드 카버와 나란히 거론되곤 하는 현대 미국 단편소설의 거장 존 치버(1912∼1982)의 단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레이먼드 카버와는 달리 장편도 여러 권 썼고 그 중 <팔코너(Falconer)>(1977) 같은 책은 ‘미국의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뉴스위크>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으니 그를 단편 작가라고 부르는 건 부당한 일이겠지만, ‘교외(郊外)의 체호프’라는 별칭 그대로 그의 매력은 단편에서 또렷하다. 그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준 책도 그가 말년에 엮은 단편 선집 <The Stories of John Chee ver>(1978)였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은 이 책을 완역하고 네 권으로 분권한 것이다.



단편 선집으로 퓰리처상 받아

자신이 존 치버와 궁합이 맞는지 확인하려면 우선 국역본 선집 제1권 <기괴한 라디오>의 첫 작품 ‘참담한 이별(원제: 굿바이, 나의 형제여)’을 읽어보면 된다. 초기작이지만 대표작 중 하나이니까. 떨어져 살던 형제들이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 위해 어느 바닷가 절벽 위의 집에 모인다. 그 중 막내인 로런스는 모든 게 못마땅하다. 그는 이를테면 ‘아, 행복해’라고 말하기보다는 ‘왜 사람들은 행복한 척하는 것일까’를 묻는 시니컬한 인물이다. 로런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가족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마침내 파국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메시지 따위에는 시큰둥해 보이던 작가가 날린 결정적인 한 방.  

“아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눈길이 사람들 속에서 여드름 난 뺨과 허약한 팔을 찾지 않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인류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 삶의 거친 외면적 아름다움에 반응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손가락이 엄연한 진실, 그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가 힘을 잃는 진실을 가리키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가끔 한국의 소설가들이 단편을 너무 ‘열심히’ 쓴다는 생각을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뛰어난 단편은 어쩐지 아주 경쾌하게 ‘대충’ 쓴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네 단편소설이 더 사소하고 더 건조하고 더 사악해졌으면 좋겠다. 좀 거창하고 좀 눅눅하고 좀 착하다는 얘기다. 모름지기 단편이라면, 크고 둔한 톱으로 슬근슬근 톱질할 것이 아니라 잘 갈아진 작은 칼로 날카롭게 한 번 긋고 가야 한다. 치버를 읽으면서 한 생각들이다.

이미 레이먼드 카버 전집을 다 읽어버려 속이 허한 분에게 월동(越冬) 식량으로 권한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8.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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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2-1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사인의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책에 관심이 간다니까요.

로쟈 2008-12-14 09:43   좋아요 0 | URL
그가 '사랑받는' 이유입니다.^^
 

이번주 시사인의 출판면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55#). 문학평론가 신형철 씨가 허연 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민음사, 2008)를 소개하고 있다.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란 시 등이 마음에 들어서 서평을 읽고 바로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주문했다(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알라딘에서 할인판매하고 있다). 시집을 받아들고 보니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와 종일 굶었을 고양이는 쓰레기통 앞에서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 다 절실해서 슬펐다." 같은 구절들을 거느리고 있는 시 '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가 맨앞에 실려 있다(미리 말해두자면 내 얘기는 아니다). 해서 나는 김경주의 두번째 시집 <기담>보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지지하기로 했다. 자기 나이에 맞는 시들에 끌리는 법이다(시인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2698&PAGE_CD=19 참조)...

 

시사IN(08. 11. 11) 이제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사는 그대에게

언제 나이를 실감하시는가. 내가 좋아하는 L선생님의 말씀. “예전에는 나랑 동창인 녀석들이 그라운드를 누볐어. 지금은 그 녀석들이 다 감독이 돼 있더라고.” 어르신들께는 민망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한 10년쯤 선배인 분들이 쓴, 삶의 피로가 흥건한 시를 읽다가 ‘어어’ 하면서 와락 공감이 되어버릴 때 나이를 느낀다. 20대였으면 ‘왜 이렇게 징징거려!’ 하고 말았을 것을. 시인 허연의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가 그랬다는 얘기다. 첫 번째 시집 이후 13년 만이다. 왜?

“벽을 보고 누워야 잠이 잘 온다. 그나마 내가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다. 세상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밥이나 먹고 살기로 작정한 날부터 벽 보는 게 편안하다. 물론 아무도 가르쳐준 적은 없는 일이다. 여기는 히말라야가 아니다.”(‘면벽’에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슬픈 빙하시대2’에서)

생업에 시달리느라 시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죄와 어울리는 나이가 되었고 시와 그만 어색해진 것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유라서 새삼 더 쓸쓸하다. 김훈은 이렇게 썼다.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다들 끌어안고 울고 싶다.” 그래서 이 시인의 마음에도 슬픈 신경질이 차곡차곡 쌓였던가 보다. 가끔 술자리에서나 폭발할 그런 신경질. 게다가 신경질 한번 부릴라치면 후배는 얄밉게 말한다. “형, 좀 추한 거 아시죠?”(‘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에서)

쓸쓸하다. 이 쓸쓸함이 이 시집에 흥건하다. 그러나 밥을 버는 일, 그거 하찮은 일 아닐 것이다. 밥을 버느라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보다는 무언가를 희생하고 밥을 벌었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 시집의 쓸쓸함에도 마음이 짠했지만 밥벌이의 준엄함을 인정하면서 삶을 견뎌내는 시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일요일’에서) 체념인가 다짐인가. 나는 그냥 다짐으로 읽어버렸다. 이런 시가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나쁜 소년이 서 있다’에서) 다시 ‘나쁜 소년’이 되겠다는 이 오기가 멋지다. ‘밥과 시’가 과연 상극일지라도, 아니라고 호기롭게 외치는 ‘나쁜 소년’ 선배를 볼 때 후배는 막 살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선배님들, 힘내세요. 푸른 잉크 한 통을 다 마시는 한이 있어도.(신형철_문학평론가)

08. 11. 14.

P.S. 참고로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 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에 이어지는 마지막 연은 이 한 줄이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갔다."

아주 오래전 이상희의 시집 <잘 가라 내 청춘>(민음사, 1992)을 읽으며 이미 작별을 고했건만 굳이 '확인사살'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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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문을 넣어야겠군요.

로쟈 2008-11-15 16:44   좋아요 0 | URL
^^

PhEAV 2008-11-17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20대 중반인데도 읽고 싶네요. <기담>보다 더!
(아니 무슨 청춘이 갔다고!)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마음으론 중년이신가 보네요.^^
 

아침에 읽은 문학기사를 옮겨놓는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출간 30주년을 맞아 오늘 교보문고에서는 기념행사가 있었다 한다. 개인적으로 <난쏘공>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베스트셀러이다. 70년대 후반 매주 베스트셀러 통계가 방송될 때 언제나 1위는 <난쏘공>이었다(때문에 당시엔 <난쏘공>이 대중문학 작품인 줄 알았다. 그게 어즈버 30년 전이다!). 이번에 30주년 기념 문집까지 출간됐지만, 정작 작가가 바라는 세상은 <난쏘공>이 더 이상 읽히지 않는 사회이다. 아직 요원해 보인다...

한겨레(08. 11. 14) ‘난쏘공’ 안읽히는 사회 오길 그토록 바라건만…

자기 작품이 널리, 세대를 거듭해 읽히기를 원치 않는 작가가 있을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쓴 조세희(65)씨는 이 점에서 확실히 예외적인 인물이다. 그는 난장이 가족의 절규가 호소력을 갖지 않는, 상식과 순리가 지배하는 평범한 세상을 기다려 왔다. 그러나 <난쏘공>을 찾는 독자는 해마다 늘었다. 2만에서 4만, 다시 6만으로. <난쏘공>의 판매량은 이 사회에 미만한 ‘고통의 총량’에 정확히 비례했다.


지난 11일 <난쏘공> 발간 30년을 기념해 그를 만났다. 30년이면 ‘팬지꽃 앞에서 줄이 끊어진 기타를 치던 영희’ 세대의 여자들이 <난쏘공>의 대학생 독자 두엇은 능히 길러냈을 세월이다. 이명박식 토건논리대로라면 “낙원구 행복동 난장이가 살던 집을 부수고 지어진 그 아파트가 이미 재개발되어, 하늘을 찌르는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로 탈바꿈하기에 충분한 시간”(한홍구)이기도 하다. 그사이 <난쏘공>은 100쇄(1996년 4월)와 200쇄(2005년 11월)를 넘기고 100만부(2007년 9월)를 찍었다.


“내가 ‘난장이’를 쓸 당시엔 30년 뒤에도 읽힐 거라곤 상상 못했지. 앞으로 또 얼마나 오래 읽힐지, 나로선 알 수 없어. 다만 확실한 건 세상이 지금 상태로 가면 깜깜하다는 거, 그래서 미래 아이들이 여전히 이 책을 읽으며 눈물지을지도 모른다는 거, 내 걱정은 그거야.”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파괴를 견디고’ 따뜻한 사랑과 고통받는 피의 이야기로 살아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칼’의 시간에 작은 ‘펜’으로” <난쏘공>을 썼다고 했다. 이런 <난쏘공>을 향한 평가가 마냥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계급’과 ‘전망’에 대한 신경증적 강박이 짓누르던 시절, <난쏘공>은 곧잘 황석영의 <객지>와 비교당했다. “<객지>와 <난쏘공>의 차이는 노동계급에 대한 근원적 신뢰인가 감상적 연민인가, 동일시인가 대상화인가에 있다”는 평은 점잖은 축에 속했다. 민중문학 진영의 저명한 평론가는 “노동운동을 감상적 온정주의의 대상으로 만들어 혁명적 전망을 차단한다”고까지 날을 세웠다.

“80년대에 내 작품에 대한 비판이 쏟아질 때, 난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루카치의 리얼리즘 문학론이 뭔지 몰랐어. 따져보면 그 사람들 말이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당시 내 책을 ‘노동자 팔아먹는 지식인 소설’이라고 앞장서 공격하던 사람들이 돌연 태도를 바꿔 보수진영으로 투항한 걸 보면 쓸쓸해.”

30년을 기념해 후배·제자들이 펴낸 헌정 문집의 제목은 <침묵과 사랑>이다. 사랑은 조씨가 <난쏘공>에서 꿈꾸던 새로운 세상의 작동원리다. 30년 전 그는 난장이 아들 영수의 입을 빌려 썼다. “아버지가 그린 세상에서는(…)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 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그러나 완강한 현실은 그의 바람에 증오로 응답할 뿐이었다. 침묵은 그래서 조씨가 택한 세계와의 대면 방식이 됐다. 이런 점에서 <침묵과 사랑>이란 제목은 <난쏘공> 이후 조세희의 삶을 응축시킨 단어들의 조합이자, 침묵을 깨고 사랑이 필요한 현실을 다시 이야기하라는, 이 시대 수많은 난장이들의 간구와 염원의 표현이다.

후배들은 애초 이 책을 ‘80년 광주’의 역사적 기원을 다룬 조씨의 첫 장편 <하얀 저고리>와 함께 출간하려 했다. 그런데 조씨의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그는 “젊었을 때 막 뛰쳐나와 써 달라던 단어들이 사라졌다”고 털어놓았다. “집중하기 어렵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얀 저고리>는 어떻게든 살아 있는 동안 쓸 거야. 인생 일흔까지 채우면서라도 끝을 내고, 내가 찍은 사진과 함께 후손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글을 띄우려고 해. ‘난 300년 전 살았던 할애비인데, 이것 좀 확인해다오. 박정희는 아직도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지, 독일의 히틀러는 또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지. 우리는 광화문 네거리에 절박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뛰쳐나갔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헤어졌던 불행한 세대란다’라고.”

<난쏘공> 30돌을 기념하는 작품 낭독회는 14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열린다. 조씨와 배우 조재현, 소설가 이혜경씨 등이 참석한다.(이세영 기자)

08. 11. 14.

P.S. 작년 가을 <난쏘공> 100만부 돌파 기념 페이퍼로는 '조세희가 쏘아올린 큰 공'(http://blog.aladin.co.kr/mramor/1543793) 참조. 한편 계간 <작가세계>는 조세희를 두 차례 특집으로 다룬 바 있다. 미완의 <하얀 저고리>도 잡지에 연재됐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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