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나가는 대신에 집에 있을 때 가장 불편한 건 신문을 사보는 일이다. 가는 길에 전철역 가판을 편하게 이용하는 대신에 일부러 짬을 내어 동네 편의점을 기웃거려야 하는데 대개는 좀 늦을라치면 찾는 신문이 없는 게 다반사이다. 나는 대개 한국일보를 보는데(8할은 고종석 탓이다. 나는 금요일에만 한겨레를 찾는다) 오후 늦게 편의점에 가보니 중앙일보와 경제신문만이 남아 있다.

공치고 돌아와서 온라인으로 기사 몇 개를 읽는다. 그 중 작가 김종광씨의 신작 소설집을 미리 소개하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필자는 최윤필 기자이고, 타이틀은 "김종광씨 소설집 '낙서문학사'"이다. 이 밋밋한 제목의 부제가 "21세기 문학은 낙서라고?… 상업화한 기존 장르 신랄한 조롱"이어서 이 페이퍼의 제목이 '21세기 문학은 낙서라고?'가 됐다. 이로써 21세기 한국문학은 두 징후적인 지표를 갖게 되었다. 김연수의 '유령작가'와 김종광의 '낙서문학'. 

한국일보(06. 06. 21)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그 다섯 장르가 문학을 주름잡던 20세기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21세기. “21세기에는 21세기에 맞는 문학이 필요했던 겁니다….” 곧 ‘낙서문학’이다.

-사뭇 저릿한, 하지만 어딘지 찜찜한 이 ‘썰’(說)은, 평론가 ‘김성연’이, 낙서문학의 창시자이자 대가인 ‘유사풀’의 문학사적 업적을, 유사풀 평전을 준비중인 어떤 작가에게 하는 말이다, 김종광씨의 소설집 <낙서문학사>(문학과지성사)의 표제작 ‘낙서문학사 창시자편’ 속에서.

 

 

 

 

-이번 책은 <모내기 블루스>, <경찰서여, 안녕> 등의 작품으로 쫀득쫀득한 이야기의 맛과 구수한 입담을 선뵌, 등단 9년차 김종광 씨의 세 번째 작품집이다. 그는 이야기에 충실한 작가다. 충청도 사투리에 얹어, 여유작작한 의뭉과 해학, 날렵한 냉소로 버무려내는 특유의 이야기는 그래서 늘 재미있다.

-표제작은 ‘낙서문학사 발흥자편’이라는 작품과 연작 형식으로 씌어진 작품이다. “‘광부의 아들’이며 ‘작부의 새끼’이며, 의붓어미와 배다른 형제를 둔” 유사풀. 어려서부터 시 소설을 썼고, 일찍 신춘문예로 등단하지만, 25살에 요절한 문재(文才).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학을 ‘낙서문학’이라고, 온 작품과 온 생애를 걸고 고독하게 고집한다. 그의 ‘문학’은 죽어서야 빛을 본다. 두 작품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채록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그의 생모, 계모, 유년 친구, 중ㆍ고교시절 친구, 그의 여자들, 출판인, 평론가….

-하지만 전언을 통해 ‘유사풀’이라는 동시대 실존 인물의 실체를 파악하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자신들의 기억과 입장, 처지, 그와 공유한 특별한 경험 등에 연루된 다양한, 심지어 상반되기까지 한 말들을 전한다. “나는 문학이라는 게 영 사기판 같았거든요. 그의 낙서문학 때문이죠.”(유사풀의 동거녀)

-작품집에는 9편의 단편이 실렸다. 표제작 연작이 문학의 ‘미적 모델’이 만들어지고 소통되고 관리ㆍ조작되는 과정의 분열적 모습을 드러냈다면, 다른 여러 작품들은, 지배적 가치기준을 지니지 못한 상태에서(아니, 지니기 힘든 현실에서) 가치 판단을 동반하는 말들(혹은 소음들)이 일구는 사회적 관계들을, 다양한 맛의 이야기들을 통해 조망한다.(비평가 최성실씨) 그의 소설이 이야기의 재미에 매몰되지 않고, 그 너머 문학 속에 굳건히 선 자리도 바로 그 언저리일 것이다. 책은 이번 주말쯤 나올 예정이다(*기자는 어떻게 읽은 것인가?).

 

 

 

 

06.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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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06-06-22 17:51   좋아요 0 | URL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 깊이 공감합니다. 문학의 자리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06-06-23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한국 '근대문학'도 종쳤다는 얘기를 고진의 말을 빌어서 한 적이 있는데, 현장의 육성을 들으니까 더 실감이 납니다. 물론 '다른 문학'은 여전히 가능하며 계속 번성해나갈 수도 있지만, 얼마간의 허전함은 지울 수 없을 듯합니다...

로쟈 2006-06-23 00:23   좋아요 0 | URL
제가 궁금한 건 책의 형태였습니다. 가제본 상태로 배달되는 건가 해서요. 그게 아니면, "책은 이번 주말쯤 나올 예정이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2006-06-2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6-23 11:26   좋아요 0 | URL
**님/ 한겨레에 실린 좀더 자세한 리뷰를 읽어보니까 2030년 한국문단을 배경으로 한 '미래소설'이더군요. 정공법을 취하지 않은 건 다소 불만이지만, 그랬다면 하고 싶은 얘기를 맘껏 하지 못했겠지요...
 

미국의 저명한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위험한 열정 질투>(추수밭, 2006)에 대한 한겨레(06.06. 16)의 리뷰를 옮겨온다. 이유는 질투 때문이 아니라 기말시험 채점 중에 잠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기자는 일단 '질투는 진화의 힘'이라는 멋들어진 제목을 뽑았고, 마지막엔 이 책이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청림출판, 2003)의 재출간본이라는 점을 명시해줌으로써 점수를 땄다(출판사의 상호가 변경된 듯하다). 데이비드 버스의 책들에 관해 이전에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 조명해보는 이유이다(이 정도의 초보적인 진화심리학은 이젠 상식이 될 만하다).

 

 

 

 

-“어서 털어놔. 그 사람이랑 잤지?” “당장 고백하지 않으면 당신을 칼로 찌르고 말거야!” 남편에게서 살기를 느낀 아내는 공포에 질린 채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맞아요. 당신 말이 맞아요. 이제 절 놓아줘요.” 순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분노에 질린 남편이 아내의 머리를 잡고 탁자에 내리친 것이다.

-에밀 졸라의 소설 <수인>에서 주인공 루팽이 아내를 다그치는 이 장면은 불행히도 소설로 그치지 않는다. 매일같이 어디선가 질투 때문에 권총이 발사된다. 또 어디선가는 질투 때문에 휴대폰이 날아다니고 또 한편에선 질투 때문에 울부짖는다. 배우자의 외도를 목격하거나 파트너가 자기 곁을 떠나버릴 때 질투라는 감정은 격렬하게 경고음을 울린다. 밑바닥엔 “내가 널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널 가져선 안돼”라는 위험한 열정이 도사리고 있다. 극단적으로 흘러 ‘살해 환상’에 시달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한두 번쯤 겪었을 이 음습한 열정,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악마적 본성은 대체 뭔가.

-“질투란 계속 생존하고 생식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감정이다. 질투하지 않는 사람은 질투심 많은 경쟁자에게 밀려 진화에서 도태되었다.” 질투라는 파괴적 본능을 건설적으로 본 사람은 미국 오스틴 텍사스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 그는 여자친구가 없던 젊은 시절, “내 여자친구의 몸은 완전히 그의 것이고 자기가 원하는 누구와도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으며, 질투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미성숙한 감정일 뿐”이라고 ‘쿨하게’ 생각했지만 사랑에 빠지자마자 태도가 180도로 돌변해 잠자고 있던 심리의 저변을 인식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진화심리학을 탄생시킨 배경이다.

 

 

 

 

-인간의 짝짓기 전략을 탐구한 저서 <욕망의 진화>(백년도서, 1995)를 더 구체화한 <위험한 열정 질투>(추수밭 펴냄)는 자기 짝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욕망과 외도 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설계된 ‘질투’라는 안전판을 주목한 책이다(*<욕망의 진화>도 재출간되는 게 좋지 않을까? 책을 읽어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사랑하는 만큼 질투하지만 질투만큼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는 감정도 없다. 질투는 상처와 위협, 상심, 당혹, 배신감, 거부당함, 화남, 소유욕, 혼란, 좌절, 우울, 분개 등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주요한 애정관계에 위협이 왔음을 알리는 적응적 신호이다. 예컨대, 위협적인 언사와 매서운 눈초리로 경쟁자를 몰아내고, 배우자에게 애정 공세를 퍼부어 한눈을 팔지 못하게 만들고, 흔들리고 있을지도 모를 배우자에게 변치 않는 애정을 알리는 구체적 행동을 유발시켜 사랑을 붙잡아두도록 한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면 질투는 사랑을 지키는 ‘방어 메커니즘’인 셈이다.

-반면, 외도는 진화적으로 가치 있는 자원의 일부가 다른 데로 새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은 자기 짝이 낳은 자식이 실제로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여성은 자신의 짝이 다른 여성과 그 자식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원’을 몽땅 갖다 바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늘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다음 문제는 진화과정에서 생긴 남녀의 차이를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상상해보라. ① 그가 다른 사람과 감정적으로 깊이 교류하고 있다, ② 단지 다른 사람과 성욕만 나누는 사이다, 어느 쪽이 화나고 충격적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은 감정적 배신에, 남성은 성적 배신에 더 괴로워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배우자의 질투심에 맞선 남녀는 숨바꼭질하듯 ‘나선형 공동진화’를 해왔다. 낯선 냄새나 수상한 외출 따위의 낌새를 느끼면 배신행위의 비언어적 신호를 해독하는 심리적 안테나가 극도로 민감해진다. 동시에 감쪽같이 속여 넘길 상대의 기술도 연마된다. 또 짝시장에서 ‘남성은 자원, 여성은 외모’를 갖춘 선호도가 높은 경쟁자가 나타날수록 ‘질투 방어체계’가 크게 작용하도록 진화했다.

-거꾸로 배우자를 지키려는 질투와 모순되는, 다른 사람을 욕망하는 위험한 열정은 왜 품는가. 지위, 명예, 결혼, 심지어 신변의 안전까지도 송두리째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한 여성의 말이 흥미롭다. “남자들은 수프와 같은 거죠. 늘 여분의 한 냄비를 불 위에 올려두어야 하거든요.” 저자는 여성의 외도를 질병과 전쟁 등 짝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한 ‘짝보험’을 들려는 습성으로 설명한다.

-여성 생식기에서 발견된 또다른 진화론적 증거를 보자. 돌돌 말린 이상한 모양의 정자, 수영속도가 형편없는 일명 ‘가미가제’는 두 남자의 정자가 동시에 한 여성의 몸 속에 서로 섞여 있을 경우 근원이 다른 정자를 감싸 안고 함께 죽어버린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려는 오랜 경쟁의 역사가 없었다면 전투 담당 특수정자가 등장했을 리 만무하다. 일부일처 이전, 생래적으로 폴리아모리(다자간 사랑)였음을 추정케 한다는 풀이다.

질투 숨기되 질투 유발시켜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책의 마지막장은 사랑으로 이끄는 대처법에 할애한다. 첫째, 질투를 숨겨라. 질투 경험이 있는 사람의 50%는 의도적으로 질투를 감춘다. 상대적 매력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질투를 유발시켜라. 다른 이성에게 시시덕거리며 미소를 짓는 건 “제가 곁에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지 말아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셋째, 경쟁자를 폄훼하라. 이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한 전략이다.

 

 

 

 

-“깊이 사랑하지만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한다.” 질투의 늪에 빠진 오셀로가 남긴 이 말은 ‘오셀로 증후군’을 앓고 있는 모든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올바로 사용될 경우 질투는 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열정에 불을 붙이며 헌신을 강화한다. 질투가 전혀 없다면 연인에게 그만큼 불길한 신호도 없다”고 말한다. 2003년에 나온 <오셀로를 닮은 남자, 헤라를 닮은 여자>를 재출간했다. 37개 문화권에서 무려 1만여명을 사례 조사했다. 구구절절한 사랑의 열정과 파멸이 소설책보다 극적이다.

 

06. 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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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17 16:40   좋아요 0 | URL
ㅎㅎ 퍼가고 싶지만, 애인이 볼까봐서 -_-; 안 퍼갑니다. 진화생물학은 흥미롭지만, 인문학도로서는 일정부분 이상은 땡기지(?)가 안습니다. 뭔가, 생물학적 환원론 같기도 하고. '통섭'같은 문제도 과연 가능할까 의문이네요. 하지만, 역시 재미는 있습니다 ^^;

로쟈 2006-06-18 08:33   좋아요 0 | URL
진화생물학의 관심은 "일정 부분 이상은 땡기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애인이 볼까봐서 안 퍼갑니다"인 것이죠.^^

호박 2006-06-18 05:45   좋아요 0 | URL
몰래 읽고 애인을 관찰해보는 재미도... 풋.

evopsy 2006-06-29 05:56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2003년에 나온 [욕망의 진화] 개정판이 곧 재출간될 것 같은데요...^^

로쟈 2006-06-29 07:46   좋아요 0 | URL
좋은 소식이군요. 제가 다시 살 필요는 없었으면 싶지만.^^
 

'로쟈의 프리뷰'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다(이로써 중복카테고리까지 포함 15개가 되었다). 그간에 주로 '로쟈의 인용'으로 분류해놓았던 신간 리뷰들을 따로 모아놓으려고 한다. 신간에 대한 나의 '선입견'들을 늘어놓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언론의 신간 리뷰를 옮겨놓고 정리하는 자리로 활용할 예정이다(즉, 이 카테고리 또한 일종의 스크랩북이 될 터인데, '최근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는 부담을 얼마간 덜 수도 있다는 계산도 없지는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쏟아지는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없으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을 선별해주는 '리뷰'이다. 나는 이 리뷰들을 관심에 따라 선별해놓고자 한다(그래서 '프리뷰'라고 이름붙였다. 'preview'이면서 'freeview'인 '프리뷰'). 게으른 독자의 부지런떨기라고나 해야 할까?..

이 페이퍼에서 프리뷰의 대상으로 고른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그와 관련한 책 두 권이 최근에 출간되었고 그 두 권을 함께 다루고 있는 언론의 리뷰 두 개를 옮려온다. 한겨레와 한국일보의 리뷰들이다(온라인에 떠 있는 한국일보의 리뷰 기사는 지면의 최종본이 아닌 초고본인 듯한데, 실제 지면 기사를 참고해서 보충했다).

 

 

 

 

한겨레(06. 06. 09) "보수세력 정체성은 미국 백인의 세계"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의 탈식민주의 문제설정을 한국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제3세계 실천적 지성의 상징이었던 사이드를 통해 혼란에 빠진 한국 지성계에 새로운 싹을 틔우려는 시도다.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책세상 펴냄)는 사이드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연구자들이 함께 쓴 책이다. 사이드로부터 직접 배우고 그를 국내에 소개한 김성곤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김상률 숙명여대 교수, 오길영 충남대 교수 등 영문학자 11명의 글을 모았다.

(*)'국내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이란 상투어는 좀 쑥쓰럽지 않을까? 사이드에 관한 국내 유일의 단행본 저작은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밖에 없는 데 말이다. 설혹 논문 한두 편을 쓴다 하더라도 그게 '국내 최고의 권위'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면 좀 부끄러운 일 아닌가?

 

 

 



-<오리엔탈리즘>으로 널리 알려진 사이드의 사유는 ‘타자에 대한 이해’로 집약할 수 있다. “다른 문명의 고유성을 억압하는 서구의 지배담론을 해체함으로써, 재현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를 복원”(김상률·오길영)하려는 이론적 작업이다. 그 뼈대는 ”서구가 그동안 어떻게 동양을 교화하고 문명화하고 지배해야할 ‘타자’로 취급”(김상곤)했는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한국은 21세기 오리엔탈리즘이 활개를 치는 땅이다. 애초 사이드는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에 주목했지만, 지금은 미국의 오리엔탈리즘이 문제다. 필자들은 “(한국) 지식층의 의식은 미국적 오리엔탈리즘에 적잖이 침탈당했고, 우리 삶 도처에서 덫처럼 도사린 구체적 현실이 됐다”(설준규)고 짚었다. “선/악, 문명/야만, 우수/열등 등의 이분법적 이야기에서 자신의 정체를 긍정적 세계인 백인의 세계와 동일시”(고부응)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한국의 미국화를 지향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한 결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고즈윈 펴냄)은 이 대목에 각별히 주목한 결실이다. 언론학자이자 언론인으로 일했던 성일권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연구위원이 썼다. 사이드의 저작인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을 국내에 번역·소개했던 그는 이 책에서 한국 보수 지식인들의 담론 체계를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빌려 비판했다.

-성 위원이 보기에 “‘악의 레짐’과 ‘선의 레짐’이라는 부시 미 대통령의 수사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 도식을 재현”한 것이다.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의 궁극적 목적은 동양을 관리·지배·억압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은 지옥과 같은 공산국가인 북한, 미국의 도움으로 아시아 자본주의의 총아가 된 남한이라는 신화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신화 속에 한반도가 갇혀 있길 바란다.”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사회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국 보수세력이 갖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독재정권의 분단논리, 강대국의 냉전논리, 일본의 식민지배논리가 만들어낸 허구들의 조합이다. 그 담론 체계는 당연히 실제 현실과는 무관하다.” 성 위원은 ‘신우익’(뉴라이트)을 그 대표주자로 꼽았다.

 

 

 



-신우익은 “미국식 오리엔탈리즘을 내재화하고 이상화한 ‘복제 오리엔탈리즘’”을 구현하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악의 축 북한과 남한의 친북정권을 무너뜨려 한반도를 명실상부한 팍스 아메리카나 제국의 일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성 위원은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자신들만이 친북, 좌파, 반미라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한국 사회를 구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성 위원은 류근일·김대중·조갑제·이영훈·유석춘·제성호·정진홍 등을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을 구현하는 미디어 지식인의 대표적 사례로 꼽고, 이들에 대한 비판도 시도했다.

-아직 거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빌려 한국 지식사회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참신하다.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에서 정정호 중앙대 교수는 “(사이드의) 포스트식민이론이 해체이론·다문화주의론 등과 같이 또다른 ‘무장해제이론’으로 오용되어 아무런 실천적 역할을 해내지 못하다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새로운 형태로 계속 변장하는 신식민주의와 신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포스트식민론을 실천의 대항담론으로 전화시키자”고 제안했다.(안수찬 기자)



에드워드 사이드 → 제3세계 실천적 지성…차이를 우열로 왜곡시키는 제국주의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학위를 마친 ‘영원한 방랑인’이었다. 프린스턴대·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컬럼비아대에서 가르쳤다. 명저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통해 차이를 우열로 왜곡시키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아랍인이면서 기독교도였으며 동시에 이슬람을 옹호했다. 팔레스타인 망명 국회 의원을 지냈지만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을 비판하기도 했다.

 

 

 

 

-아랍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등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고, 수준급의 실력으로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던 천재였다. 미국 유대계 지식인들의 비난에 둘러싸여 테러 위협까지 당했지만, 백혈병과 싸웠던 말년에는 유대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비판적·실천적 지성인을 대표했지만, 마르크스주의 대신 좌파 지식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그는 생전에 “어디를 가나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지 낯선 나라처럼 느끼는 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라는 12세기 독일 수도승 후고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 갈수록 이 사회가 ’낯설어지는’ 한국인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사이드의 후예다.(안수찬 기자)

한국일보(06. 06. 10) "차이는 우열이 아니다" 끝나지 않은 외침

-평화와 공존이라는 인류의 소망을 조롱하듯, 21세기에 들어서도 증오와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세계는 한 지식인을 떠올린다. 서구의 일방주의를 비판하고 동서양의 교류와 소통을 강조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는 한국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이드의 삶과 학문 세계이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사이드로부터 배운 김성곤 서울대 교수 등 영문학 교수 11명이 저자다. 평전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생애와 철학을 함께 읽을 수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지만 아랍인과 유대인의 전쟁으로 이집트 카이로로 쫓겨났다. 그곳에서 명문가 자제만 들어가는 학교에 다녔고 나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사이 가족은 카이로에서 레바논으로 이주했고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아래는 누이와 어린시절의 사이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 그는, 에드워드라는 영국식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의 조합이 상징하듯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다. 사이드는 “미국인과 함께 있어도, 아랍인과 함께 있어도 언제나 불완전함을 느꼈다”면서 망명객을 자처했다. 이런 자의식은 그를 특권의 바깥, 안락한 삶의 외부로 끌어내 소외되고 박탈당한 이웃을 옹호하고 동양인과 식민지인, 소수 인종과 제3세계인에게 관심을 갖도록 했다.



-탈식민 연구라는 새로운 영역을 연 영문학 교수, 아시아의 대표 지성, 행동하는 지식인 사이드가 세계 지성사에 충격을 준 명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꾸짖은 것은 서구의 편견이었다. 서구는 식민지인을 자신과 다른 ‘타자’(他者ㆍthe other)로 취급했고, ‘차이’(difference)를 우열로 보았다. 그 바탕에는 서구인은 우월한 문명인인 반면 비서구인은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서구는 비서구를 교화하고, 문명화하고, 지배해야 할 타자로 여겼다. 야만적이고 열등한 비서구의 계몽과 교화가 서구의 사명이고, 따라서 서구제국주의는 식민지를 착취ㆍ억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근대화, 문명화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서구인은 자기 암시를 통해 그것을 사실로 믿었고, 제국주의의 실천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이드는 이 같은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새로운 상호 관계를 이루자고 주장한다. 특히 문명과 문화가 겹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해와 화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미국에 정착한 그가 아랍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은 67년 중동전에서 아랍이 패하면서부터이다. 그는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대변인이자 시인인 사촌 카말 나시르가 이스라엘의 테러로 살해되자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에 참여한다. 그러면서도 팔레스타인의 테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테러에는 반대했다. 말년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9ㆍ11 사태 이후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와 그것에 대응하는 미국의 국가 테러를 동시에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이드는 고향을 잃었다는 자각 때문에 죽을 때까지 한 평의 땅도 갖지 않았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신에게 집이란 의미 없는 공간이며, 만일 자신이 자기만의 집을 가진다면 그것은 곧 누군가를 노숙자로 만드는 일라고 생각했다.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은 사이드의 이론을 차용, 오리엔탈리즘의 덫에 걸린 우리 사회를 겨냥한다. 저자는 파리8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파리외교전략연구원과 런던정경대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서구제국주의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오리엔탈리즘이 유럽, 미국, 일본을 지나 우리 사회에도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미국과 한국의 오리엔탈리스트는 자신만이 인권과 자유를 말할 자격이 있는 이성의 소유자이며, 다른 목소리를 내는 자는 배제해야 할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책이 규정하는 오리엔탈리스트는 미국의 네오콘, 일본의 신우익, 우리나라의 극우 지식인이다. 극우 성향의 교수, 어론인, '386 전향자', 종교인 등에 대해서는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사이드가 그랬던 것처럼, 차이를 인정하자고 제안하면서 프란츠 파농의 글을 인용한다. "타자를 만지고, 타자를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박광희 기자) (*)마지막 제안/인용은 좀 안이하게도 느껴진다. 어딜 만지고, 무얼 느끼라는 것일까? Killing the others softly?..

 

06. 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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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6-12 09:16   좋아요 0 | URL
포스터 ㅎㅎㅎ 네가 저항할 수 없는 것에서 어떻게 도망갈 것인가?...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압축문구네요.포스터를 고르신 로쟈님의 센스가 ㅎㅎ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최근에 나온 책이네요.읽어야겠어요.

로쟈 2006-06-12 00:16   좋아요 0 | URL
책을 많이 보시는군요. 파농의 책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인용문구는 너무 '심심한' 편인지라 좀 '죽이는' 걸로 바꿔보았습니다...
 

오마이뉴스(06. 06. 05)에서 서평 하나를 옮겨온다. 데이비드 던컨의 <내 DNA를 갖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황금부엉이, 2006)에 대한 것이다. 사실은 오늘까지 서평을 쓰기로 하고 받은 책인데, 좀 늦게 배송되었다는 핑계로 서평을 미뤄두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바쁘기도 하지만). 그래도 좀 찔리는 마음이 없지 않은 탓에 이거라도 일단 옮겨놓는다. 아직 한 챕터도 다 읽지 못했지만 미리 윤곽이라도 잡아두기 위해서. 필자는 최향기 기자이고, 제목은 '생명과학자들의 열정, 그리고 갈등'이다.

 

 

 

 

-저널리스트가 보는 과학자들의 모습은 어떨까? <내 DNA를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를 단지 과학자들의 연구와 그 결과를 다루는 책이라는 면에서 흥미를 가지고 접한다면 실망을 금치 못할지 모른다. 이 책은 연구의 성과도 다루지만 그보다는 '과학자'에 대한 인터뷰와 그들이 평소 가지고 있는 생명과학에 대한 철학을 조명하고 있다.(*그나마 내가 읽은 책 중에서는 물리학자들을 다룬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과 유사한 성격의 책이란 느낌이 든다. 물론 이 생물학자들은 방을 다 제각각으로 쓰고 있지만.)

-이 책에서 얘기하는 미국의 생명과학자들 중 대중적으로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는 이는 제임스 왓슨이다. 바로 그가 젊은 시절 DNA의 구조가 이중나선 모형임을 밝혀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노벨상을 공동수상해 언론에 크게 부각된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E. 던컨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과학저널리스트로서 이렇게 짚고 넘어가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논란이 많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고 가는 과학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이런 과학자들의 이름은 분자생물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모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언론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언론은 단백질 유전정보학, 유전자 변형 생물체, 리보핵산(RNA), 유전형질 전환 동물, 줄기세포처럼 복잡한 용어를 설명하는 데만 열중하거나 벤처기업의 동향, 주식시장의 상황,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이런 과학자들을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물음과는 달리 해답을 주거나 어느 과학자에게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지는 않고 있다. 다만 연구 성과를 둘러싼 현존 생명과학자들의 암투와 갈등을 가감 없이 소개하며 모든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이 책에 나오는 콜린스 박사와 벤터 박사의 갈등은 인간 게놈 지도 분석을 둘러싸고 국가주도의 연구냐 민간주도의 연구냐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런 갈등 속에서 대중들은 대체 저들이 그것으로 어떤 이익을 얻을 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민간주도의 연구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악마'로 비난받는 벤터 박사는 국가주도의 연구도 다를 것이 없다는 입장을 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연구가 처음에는 배척 받아 밀려 났고 나중에는 도용이 의심되는 상황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쪽에 있는 콜린스 박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노벨상 수상자로 명성이 드높은 왓슨 박사에 대한 주위의 평가는 존경보다는 그의 태도를 비판하는 쪽으로 기운다. 70대에 접어든 왓슨 박사를 찾아간 저자는 그런 왓슨 박사에게서 변하지 않은 연구의 열정만 볼 뿐이다. 이렇듯 세간의 평가와 자신의 만남을 교차시키며 이 책은 과학자들에 대한 얘기를 병렬식으로 나열하며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본질은 '과연 이들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에 대한 대중적인 일깨움에 있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멜튼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가 두렵다는 이유로 새로운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면 정말 못 견딜 것이다. 위험에 대해서는 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한다. 왜 그런 실험을 하면 안 되는지를 말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연구하는 것에 대해 생물학적 재앙이 일어날 수 있지도 않겠냐는 저자의 직접적인 질문에 분자생물학자인 브레너 박사는 완고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과학이 그런 일을 하게 될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운을 남긴다. "내가 한 말을 다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나는 틀린 말을 자주 한답니다."

-이렇듯 저자가 보는 생명공학은 아직 가치판단을 하기에 어려는 기로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과학자들을 프로메테우스, 이브, 바울, 파우스트, 제우스, 모세와 같은 실험적이고 때로는 무모한 행동을 하는 종교, 신화, 소설속의 인물들에게 비유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분명한건 무조건적인 재앙이나 무조건적인 축복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06. 06.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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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출간된 장 폴 브리겔리의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해냄, 2006)는 사드의 독자라면 탐을 낼 만한 전기이다. 이미 모리스 르베의 전기가 <사랑, 자유 그리고 거짓말>(창, 2001)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지만, 왠지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브리겔리의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책은 "프랑스 혁명기 몰락귀족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데다 당대와 이후에 수많은 전기 작가들에 의해 왜곡된 사드의 일생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했"는데, "1부에서 사드의 일대기를, 2부에서는 사드가 영향을 미친 분야와 그 기록들을 담았다. 58컷의 도판과 함께 바타이유, 보들레르, 바르트 등의 사드 연구 저작들이 수록되었다."

스튜어트 후드의 <사드>(김영사, 2005)와 함께, 그리고 기네스 기비 감독의 영화 <사드>(1996)와 함께 마르키 드 사드 후작의 세계를 여행하기 위한 지도이자 매뉴얼로서 갖춰둘 만한 책이다. 아직 재정형편상 구해놓지 못했는데, 마침 오마이뉴스(06. 05. 26)에 자세한 서평이 게재되었기에 옮겨다놓고 '예고편'으로 읽어보도록 한다. 필자는 지용진 기자이며, 타이틀은 "탐미주의자? 자유주의자? '사드'를 다시 보자"이다.

-이탈리아 감독 빠졸리니(*파졸리니 혹은 파솔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은 불쾌할 정도로 적나라하다(*오래전에 영화 전공자로부터 빌려본 적이 있는데, 요즘은 영화를 구해보는 일이 어렵지 않을 듯하다). 영화는 거친 영상을 통해 사도마조히즘의 직접적인 재현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현실 자체를 무마시킬 정도로 뇌를 얼얼하게 만든다. 영화에 녹아있는 사디즘의 정의(定義)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의 권력’을 통해 규정되면서 복종의 미학을 정당화시킨다. 사도마조히즘은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역겨운 대상으로만 기능하고, 그 의미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발휘된다.

 

 

 

 


-우리가 소비하는 사디즘의 실체는 무엇일까?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비정상적인 행위에 의한 쾌락과 음탕함 그리고 강제적인 유린을 추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본질을 벗어난 그야말로 편의적인 접근이다. ‘쾌락과 불쾌’의 단순한 구도 안에 ‘사디즘’의 의미를 가둬두는 것은 그래서 옳지 못하다.

-<불멸의 에로티스트, 사드>(장 폴 브리겔리 지음 / 성귀수 옮김)는 그러한 박제된 통념을 거두기 위해 인간 사드(1740∼1814)의 인생을 장황하게 서술했다. 사드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부터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간을 객관적인 자료와 역사적 근거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63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긴 서적에서 느껴지는 방대함은 사드에 의한, 사드를 위한, 사드의 이야기로 촘촘히 매워져 스펙터클 함마저 감돈다. ‘집대성’이란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 이유다.

-크게 2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 이 책은 제 1부에서는 그의 불꽃같은 인생을 다뤘고, 제 2부에서는 균형 있는 시각에 근거해 그를 에워싼 통설을 세세히 드러냈다.

-수많은 정부(情婦)를 둔 외교관 아버지와 폭군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아래서 사드는 아버지의 성적 괴벽이 적힌 일기를 보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의 의식을 점령한 성(性)은 그로테스하게 변질되면서 애초부터 정상적인 성적 의식을 형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에 의한 강제 정략결혼으로 인해 사드는 ‘사랑’이란 감정을 싹 틔우기 전에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랑’의 본질을 오늘날 우리가 멋대로 해석하는 ‘사디즘’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사드 개인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린 시절은 ‘불행’으로 점철된 시기였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그의 불행을 밖으로 끄집어내 재해석하고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결론을 미리 고정시켜 놓고 이유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실패한 사랑과 그에 이은 정략결혼. 사드는 점점 알 수 없는 혼란에 침잠하게 되면서 그 안에 잠재돼 있던 성욕과 변태성을 긍정하기 시작한다. 젊은 시절 광란한 방탕함과 예수상(像) 모독으로 감옥에 가게 된 사드는 아버지가 남긴 원고를 꼼꼼히 읽으며 자신만의 세상을 조금씩 갖춰가면서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분야에서 인용되는 인물로 거듭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버지에 대한 사드의 기억이다. 그는 억압과 괴벽의 아버지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애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신화화를 이룩해냈다. 반면,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평가는 관대하지 못하다. 이른바 전복(顚覆)된 오이디푸스를 반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저서를 활용해 이를 입증하면서 사드의 삶에 관해 철저히 객관적으로 접근한다. 이 책의 의도가 바로 객관성에 근거한 ‘사드읽기’라는 점을 헤아린다면 저자의 자료수집과 인용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사드(Sade)’의 인생을 책 속에 옮겨와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오해의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지만 의도를 강요하거나 인위적인 결론을 맺지 않는다. 다만 수백 년 간 누적된 거대한 담론을 제시하면서 천재로 살다간 한 인간의 파란만장했던 삶 자체에 무게를 둔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드 만큼이나 포괄적으로 인용되는 인물도 드물다. 종교, 풍습, 철학, 예술 심지어 정치까지도 ‘사드’를 안으로 끌어들여 고정된 영역 안에서 재활용시키며 번식시켰다. 문제는 하나의 통일된 개념적 활용이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서 차별적으로 해석됐다는 데 있다. 사드의 불행은 여기서 출발한다. 그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은 추종자들은 자신의 영역에 맞게 사드를 활용했다. 하나의 사드가 여러 의미로 분열돼 다양한 색깔을 지니게 된 것. 저자가 가장 무게를 두고 이야기하는 문제점이다. 사드는 악마적인 천재였다. 동시대에서는 미처 포용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게 비쳐졌지만 그가 후세에 끼친 정신적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연의 정상상태로서의 사디즘은 ‘도착적인 자연주의’를 표방하지만 동시에 자연주의 문제 안에 머무름으로써 자연에 기댄다. 자연을 부정하면서 자연의 이름으로 사회의 인위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모순구조는 ‘사드’라는 개념을 더 모호하게 만든다. 이렇듯‘사드’의 모호성은 그를 종교로 삼는 탕아들에게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다. 이제는 하나의 개념이 돼버린 ‘사드’의 전설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프랑스 대혁명 동안, 무차별적인 살인과 폭동을 목격한 사드는 인간에 내재한 폭력성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인간에게는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적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탐구하게 되고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정당화한다. 이후 나폴레옹 시절에는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남은 일생을 사랑통 정신병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쥘리에트> 등의 불후의 명저를 남긴다.

-사드를 거론하는 것은 음담패설에서는 유용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왜곡된 사디즘에 경도된 나머지 전체를 보지 않고 작위적인 해석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자가 <사드>에 천착하는 목적은 ‘바로 알리기’다. 저자의 전방위적인 탐구는 사드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맞물리면서 진정성으로 독자들을 포섭한다. 다분히 다큐멘터리 적인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쫓으며 ‘사드’의 오용(誤用)을 걱정하는 저자의 노력이 눈부신 건 일차적으로는 방대한 분량에 있겠고, 그 다음으로는 진정성을 들 수 있다. 지면 곳곳에 묻어 있는 저자의 어법은 사드에 대한 몰이해의 실태를 지적하면서 동시에 안타까움이 스며있기 때문에 와 닿는다.



-사드의 실험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원적인 자각이었다는 사실은 스스로 내린 정의에 의해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인간은 혼자이고, 악은 필연적으로 만연한다.”소름끼치도록 자기 희열에 충실했던 한 인간의 고뇌는 절대본능을 추구한 방탕한 탐미주의자인가? 욕망의 충족을 선도한 희대의 성적 자유자인가? 선택은 온전히 ‘사드’를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갈린다.

06. 0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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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29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