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어제 수유너머N에서 발표한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의 나머지 대목을 마저 옮겨놓는다. '코뮌적' 공간에서 '레닌주의'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한다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밤기차로 지방에 문상을 가야 했던 탓에(오늘 새벽차로 올라왔다) 뒷풀이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발표회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아래의 글은 약간 조정한 걸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이다. 단, 오탈자를 바로잡고 'wholesome terror'의 번역을 수정했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는 제가 작년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길, 2009)과 함께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지만, 소위 ‘지젝의 혁명론’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대단히 흥미로우면서도 자극적인 책입니다(들뢰즈적 감응(affect)을 불러일으키는 책입니다!). ‘과거로부터의 교훈’은 전체 3부 가운데 제2부에 해당하며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4장), 스탈린주의(5장), 포퓰리즘(6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기에, 저로선 책의 내용을 조금 더 편하게 풀어서 전달하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먼저 로베스피에르의 주장입니다.   

 

“평화로운 시기 인민정부의 동력이 덕(virtue)이라면, 혁명의 와중에 있는 인민정부의 동력은 덕과 동시에 폭력이다. 덕이 없는 폭력은 맹목적이며, 폭력 없는 덕은 무력하다. 폭력은 즉각적이고 엄중하며 불굴의 정의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덕의 분출이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가장 절박한 필요에 조응하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특별한 원칙이다.”(<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240쪽)
“평상시에 인민정부를 움직이는 동인이 미덕이라면, 혁명의 시기에 그 동인은 미덕과 공포 양쪽 모두입니다.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가 없는 덕은 무력합니다. 공포는 신속하고 엄격하며 강직한 정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포는 미덕의 발현체이며, 구체적인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이 조국의 절박한 필요에 응답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로베스피에르: 덕치와 공포정치>, 13쪽, 231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It is less a special principle than a consequence of the general principle of democracy applied to our country's most pressing needs.”입니다. 요점은 ‘혁명적 폭력(terror)’ 혹은 ‘공포정치’가 특수한 원칙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 일반원칙을 긴박한 상황적 요구에 적용한 결과라는 것이죠. 더불어, 로베스피에르에게서 혁명적 폭력은 정확히 전쟁과 대립하는 것이었다고 지젝은 지적합니다. 국가 간 전쟁은 보통 개별 국가 내부의 혁명적 투쟁을 봉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죠(물론 이것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지적입니다). 실제로 루이 16세는 체포되기 며칠 전에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프랑스와 유럽 국간들 간의 대전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왕은 애국자연하면서 프랑스 군대를 이끌다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이고 그의 권력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었을 겁니다. 즉 ‘평화로운’ 루이 16세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유럽을 전쟁으로 내몰 준비가 돼 있는 군주였던 것이죠. 지젝은 자코뱅의 혁명적 폭력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 법과 질서의 ‘초석적 범죄’라고 절반쯤 정당화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것을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참고한 건 엥겔스의 말입니다.

최근 사회-민주주의적 실리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에 대해 건강한 폭력을 마음속에 떠올리고 있다. 좋다. 신사 양반들, 이 독재가 무엇과 같은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뮨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다.”(<잃어버린 대의>, 244쪽)

최근 들어 사회민주주의적 속물들이 다시 한 번 이 말을 듣고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좋습니다,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까? 그럼 파리코뮌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습니다.”(<덕치와 공포정치>, 16쪽)

첫 문장의 원문은 “Of late, the Social-Democratic philistine has once more been filled with wholesome terror at the words: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입니다. 요즘 들어 사민당의 속물들이 ‘프롤레타리아독재’란 말에서 공포감을 느끼는데, '독재'라는 말의 어감을 고려하면 그럴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두려울 게 없다, 파리코뮌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독재였다는 것이 엥겔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지젝은 엥겔스의 말을 받아서 1892-94년의 혁명적 폭력 또한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함께 ‘신적 폭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신적 폭력=비인간적 폭력=프롤레타리아독재’라는 등가관계가 성립되는 것이죠. 거기서 ‘신적 폭력’이란 말의 해석은 정확히 ‘백성의 소리는 신의 소리(vox populi, vox dei)’라는 고대 로마의 격언을 따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중요하지만 오해된 대목이기도 해서 다시 인용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인민의 의지를 수행하는 도구로서 행위하고 있다’라는 도착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고독한 주권적 결정의 영웅적 승인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이뤄진(살인의 결정, 자기 자신의 삶을 상실할 위험을 무릅쓴) 결정. 대타자에 근거하거나 그것에 보호받지 않는 결정이다. 만약 그것이 삶의 유한성을 초월하지 않는다면, 즉 ‘불멸’이 아니라면 그 실행자에게 천사의 무고함으로 살인할 면허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신적 폭력의 모토는 ‘세상이 망하더라도 정의는 세우라’이다. ‘인민’(익명의 ‘몫 없는 자들’)이 테러를 강요하고 다른 몫 있는 자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은 정의를 통해서, 정의와 복수 사이의 구분 불가능한 지점을 통해서이다.”(<잃어버린 대의>, 246쪽)
“‘우리는 인민의 의지를 반영하는 수단으로서 이 폭력을 사용한다’는 식의 왜곡된 의미가 아니라, 자주적 결정의 외로움에 대한 대담한 가정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위험에 빠뜨리거나,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결정은 거대한 타자가 떠맡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도덕 외적인 것이라고 해서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천사와 같은 무구한 마음으로 분별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도 아니다. 신성한 폭력의 모토는 ‘세상이 무너질지라도 정의를 세워라’이다. 이것은 정의와 복수를 구별할 수 없는 지점에 존재하는 정의를 말한다. 이 정의로움으로 ‘민중’(역할이 없는 상태에서 익명의 역할을 맡은 부분, 즉 비부분의 부분)은 공포를 부과하고, 다른 역할을 맡은 부분이 대가를 치르게끔 만든다. 그때라 바로 기나긴 억압과 착취와 고통의 역사에 대한 심판의 날이다.”(<덕치와 공포정치>, 17-18쪽)

첫 문장에서 ‘고독한 주권적 결정의 영웅적 승인’ ‘자주적 결정의 외로움에 대한 대담한 가정’이라고 옮겨진 것은 “the heroic assumption of the solitude of a sovereign decision”입니다. 저는 ‘고독한 주권적 결정의 영웅적인 수임(受任)’이란 뜻으로 이해합니다. ‘결정’과 ‘수임’의 주체는 동일합니다. “만약 그것이 삶의 유한성을 초월하지 않는다면, 즉 ‘불멸’이 아니라면 그 실행자에게 천사의 무고함으로 살인할 면허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는 착오에서 빚어진 오역인데, 원문은 “If it is extra-moral, it is not 'immoral,' it does not give the agent the license just to kill with some kind of angelic innocence.”입니다. “이 정의로움으로 ‘민중’(역할이 없는 상태에서 익명의 역할을 맡은 부분, 즉 비부분의 부분)은 공포를 부과하고, 다른 역할을 맡은 부분이 대가를 치르게끔 만든다.”도 부정확한 번역입니다(‘몫이 없는 자(part of no-part)’는 랑시에르가 즐겨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로 그러한 입장에서 혁명적인 ‘신적 폭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휴머니즘적 동정을 비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코뱅의 역사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지젝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혁명적 폭력의 (자주 탄식할 만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폭력의 이상 자체를 거부하도록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오늘날의 전혀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여 그 현실화로부터 그것의 잠재적 내용을 부활시킬 방법이 있는가?” 지젝의 대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사건을 반복하는 가장 정확한 방식은 (로베스피에르의) 휴머니즘적 폭력으로부터 반-휴머니즘적(오히려, 비인간적) 폭력으로 이행하는 것”이라는 게 지젝의 주장입니다.

물론 “자코뱅이 급진적 테러에 의존한 것은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동화(acting out)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란 비판은 이미 제시한 바 있습니다. 사실 지젝이 보는 자코뱅의 위대함은 테러의 연출이 아니라 일상의 재조직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에 두어집니다. “여성의 자기-조직화에서부터 모든 늙은이가 평화와 존엄 속에서 말년을 보내는 공동체 가족까지, 불과 2-3년 사이에 응축된 열광적인 활동”을 지젝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진정한 혁명의 순간은 1917-18년의 봉기도 아니고 이어진 내전 상황도 아닌, 1920년대 초반에 새로운 일상생활의 의례들을 창안하려고 했던 강력한 실험에서 찾을 수 있다는 그는 주장합니다. “어떻게 혁명 이전의 결혼 의례나 장례 의례를 바꿀 것인가? 어떻게 공장과 집단 거주지에서 공산주의적 교류를 조직할 것인가?” 같은 문제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상을 재조직하기 위한 ‘구체적 테러(concrete terror)’가 없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론 충분하지도 완결되지도 않았던 것이죠. 지젝이 여기서 도출하는 결론은 “민주주의적 절차보다 상위에 있는 이런 과잉의 평등-민주주의는 오직 자기 대립물로서 혁명적-민주주의의 테러의 형태로만 ‘제도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마오의 모순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모순의 보편성이 내재하는 곳은 정확히 모순의 특수성 속에서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교조적 맑스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마오는 옳았습니다. 또 ‘변증법적 종합’을 ‘대립물간의 투쟁을 포괄하는 고차원적 통합’ 내지 대립물의 ‘화해’로 보는 통상적인 관점을 거부할 때 역시 옳았다고 지젝은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가 이 거부를 정식화하여 ‘대립물이 영원한 투쟁’에 대한 일반적인 우주론-존재론에 따라 일체의 종합이나 통합에 대해서 갈등과 분열의 선차성을 주장할 때 그는 틀렸다는 게 지젝의 주장입니다. 마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엥겔스는 세 가지 범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 범주들 중 두 가지는 믿지 않는다.(...) 부정의 부정이란 없다. 긍정, 부정, 긍정, 부정... 사물의 발전 속에서, 사건들의 연쇄 속의 모든 연관은 긍정인 동시에 부정이다. 노예제 사회는 원시사회를 부정한다. 하지만 봉건사회와 관련해서는 거꾸로 긍정을 구성했다. 봉건사회는 노예제 사회와 관련해서는 부정을 형성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와 관련해서는 긍정을 구성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봉건사회에 대해서는 부정을 형성했지만 사회주의 사회와 관련해서는 긍정을 구성했다.”(<잃어버린 대의>, 284쪽; <마오쩌둥: 실천론․모순론>, 21쪽, 241-2쪽)

‘부정의 부정’에 대한 마오의 이러한 부정은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일까요? 지젝은 “혁명적 부정성을 진정으로 새로운 긍정적 질서로 이동시키는 시도의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봅니다. “모든 혁명의 일시적인 안정화는 결국 낡은 질서의 복권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그래서 혁명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부정이라는 ‘가짜 무한성’으로, 이것은 결국 거대한 문화혁명에서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입니다. “문화혁명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길과 공간의 청소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성에 대한 무능의 지표라는 의미에서 그 자체로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혁명이란 ‘혁명고 함께 하는 혁명’, 혁명과정에서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전제 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이지만 마오는 그 ‘부정의 부정’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죠(<터미네이터2>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T-101)가 스스로 용광로 안으로 들어가 ‘자살’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혁명적 시도의 문제는 ‘너무 극단적’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충분히 극단적이지 못했다’는 데, 그리하여 혁명적 시도 자체를 문제 삼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 데 있다는 것이 지젝의 핵심적인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혁명적 과정의 두 가지 계기는 무엇일까요? 프레드릭 제임슨을 따라서 지젝은 첫째, ‘극단적인 부정의 제스처’, 그리고 둘째 ‘새로운 삶의 창안’이라고 말합니다. 그 창안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 정신분석에 대한 참조를 통해서 지젝이 말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근본적인 혁명 속에서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오래된 꿈을 실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꿈꾸는 방식 자체를 다시 창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의 꿈을 위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만 하고 이런 꿈들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조만간 우리는 과거의 현실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문화혁명의 실패는 바로 이런 점에서 실패했다고 그는 보는 것이죠. 물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은 새로운 경제적 조직과 일상생활의 재조직을 겨냥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유토피아 실행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새로운 일상의 형식을 창조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지젝이 들려주는 흥미로운 뒷담화도 들려줍니다. 문화혁명의 마지막 시기에, 마오 자신에 의해서 소요사태가 봉쇄되기 전에 ‘상하이 코뮌’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의 공식 슬로건에 따라 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국가의 소멸과 심지어는 당 자체의 소멸을 요구했고, 직접 코뮌적 사회를 조직하고자 시도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오는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합니다. 인민에게 ‘반란의 권리’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독려하고 부추긴 문화혁명의 온전한 결론 앞에서 그 자신이 후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마오가 충분히,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 오늘날 중국에서 자본주의적 폭발을 위한 공간을 연 것이라는 게 지젝의 평가입니다. 그리하여 마오의 사례에서 얻는 교훈은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베케트)입니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스탈린의 공포정치도 보도록 합시다. 참으로 대단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는데, 1937-38년 2년 동안에 이루어진 결과만 보아도 이렇습니다.  

“다섯 명의 스탈린 정치국 동료들이 살해되었고, 139명의 중앙위원 중에서 98명이 살해되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 중앙위원 200명 중에서 오직 세 명이 살아남았고, 93명의 콤소몰 조직 중앙위원 중 72명이 죽었다. 1934년 제17차 대회에서 1,996명의 당 지도자들 중 1,108명이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385명의 지방 당 비서 중 319명이, 2,750명의 지역 비서들 중 2,210명이 죽었다.” (<잃어버린 대의>, 376쪽) 

이 대숙청은 네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933년과 1935년에는 무력한 하급 당원들을 체로 숙청하기 위해서 모든 계층의 노멘클라투라를 동원합니다. 이때 지역 지도자들은 자기 조직을 강호하고 ‘불편한’ 사람들을 쫓아내는 데 숙정작업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1936년에는 모스크바의 노멘클라투라가 지역 엘리트를 숙청하기 위해 하급 당원들 편을 듭니다. 그리고 1937년에는 노멘클라투라에 대항하는 당 대중(party masses)을 동원합니다. 이로써 당 엘리트들을 초토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1938년에는 지역 노멘클라투라의 권위를 강화함으로써 숙청 기간 동안 무너진 당내 질서의 회복을 꾀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초자아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공산당에 의해 공산당원들 자신을 향해 가해진 이 폭력은 체제의 극단적 자기-모순을 증명한다. 즉, 그것은 체제의 기원에는 ‘진정한’ 혁명적 기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끝없는 숙청은 체제 자체의 기원적 흔적을 지우는 것일 뿐 아니라 일종의 ‘억압된 것의 귀환’ 속에서 체제의 중핵에 있는 근본적인 부정성의 잔여물이기도 하다.”(<잃어버린 대의>, 379쪽)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 시대는 노멘클라투라가 지배한 사회가 아니었으며 ‘관료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탈린체제는 효과적인 ‘관료조직’이 결여된 체제였습니다. 노멘클라투라가 사회적으로 안정화되는 것은 브레주네프 시기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현실 사회주의’라는 것이 출현하게 됩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체제가 자신의 공산주의적 전망을 포기하고 실용적인 권력 정치에 안주한다는 징표입니다.       

포퓰리즘에 대한 지젝의 시각도 간단히 정리해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을 때로는 실용적 타협의 일부로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 개념 차원에서는 비판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주장입니다. 2005년 유럽 헌법 제정안에 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부결을 사례로 들면서 지젝은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의 교훈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은 한물 간 퇴물이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로부터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신비화시키는 것에 대칭적으로 ‘아이 씻은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리는’ 듯이,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은 은폐하고 그것을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와 대립시키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용에 대한 단순한 주장은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이다.”(<잃어버린 대의>, 402쪽)

두 번째 문장 이하의 원문은 “the lesson the Left should learn from it is that one should not commit the error symmetrical to that of the populist racist mystification/displacement of hatred onto foreigners, and to "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 water," that is, to merely oppose populist anti-immigrant racism with multiculturalist openness, obliterating its displaced class content - benevolent as it wants to be, the simple insistence on tolerance is the most perfidious form of anti-proletarian class struggle...”입니다.   

여기서 ‘its displaced class content’를 ‘다문화주의적 개방성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이라고 옮겼는데, ‘populist anti-immigrant racism’의 ‘전치된 계급적 내용’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the most perfidious form of anti-proletarian class struggle”을 “반-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의 가장 은혜로운 형식”으로 옮긴 것은 착오로 보입니다. <레닌 재장전>에서 같은 문단을 다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우파 인종주의 포퓰리즘은 오늘날 ‘계급투쟁’이 시대에 뒤떨어진 퇴물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좋은 사례다. 여기서 좌파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포퓰리즘적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증오를 외국인들에게 전치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려서는 안 된다. 즉 다문화적 개방을 명분으로 포퓰리즘적 반-이민 인종주의에 대해 그 전치된 계급적 내용을 간과하고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호의적 의도에서라 하더라도 단순히 다문화주의적 개방만을 고집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에 반대하는 가장 기만적인 형식이다.”(<레닌 재장전>, 132쪽) 

포퓰리즘이 갖는 이러한 ‘계급적 내용’ 때문에 지젝은 거기에서 ‘네오-파시즘’의 그림자를 읽어내는 자유주의적 태도에 반대합니다. “새로운 포퓰리즘적 우파와 좌파가 공유하는 것은 딱 한 가지다. 본래적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인식 말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점입니다.  

반면에 “다문화주의적 관용에서 가장 웃기는 점은 물론 계급 구별이 그 안에 기입되는 방식이다. 상층 계급의 ‘정치적으로 올바른’ 개인들은 그런 다문화주의적 관용을 이용하여 하층 백인 노동자들의 ‘근본주의’를 꾸짖는데,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공격에 (정치 경제적인) 모욕까지 더하는 꼴이다.”(<지젝이 만난 레닌>, 278쪽)  

마지막 문장은 “adding (ideological) insult to (politico-economic) injury”를 옮긴 것으로 앞뒤가 전도돼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상류계급 사람이 다문화주의적 관용을 말하면서 하층 백인들의 ‘근본주의’(혹은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경제적) 상처에다가 (이데올로기적) 모욕까지 더하는, 말하자면 상처에다 소금까지 뿌리는 짓이라는 것이죠(우리 같으면 빈곤층의 부도덕과 무교양에 대한 비판에 해당할 듯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훈은 분명하다고 지젝은 말합니다. “근본주의적 포퓰리즘이 좌파적 꿈의 부재한 공백을 채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포퓰리즘은 제도화된 탈정치의 어두운 분신으로 출현하고 있지만, 그 한계 또한 분명합니다. 지젝의 주장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포퓰리즘’은 정의상 부정적인 현상, 거절에 기반한 현상, 심지어는 무력함의 암묵적 승인이다. 우리 모두는 가로등 아래 흘린 열쇠를 찾는 한 남자에 대한 오래된 농담을 알고 있다. 어디서 잃어버렸느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캄캄한 구석에서 잃어버렸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그는 왜 여기 불빛 아래서 찾고 있는가? 왜냐하면 여기가 훨씬 더 잘 보이기 때문이라고. 포퓰리즘에는 항상 이런 종류의 속임수가 있다. 이것이 포퓰리즘이 오늘날의 해방적 기획이 기입되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만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의 해방적 정치의 주된 임무는 - 그것의 생사를 건 임무는 - (포퓰리즘처럼) 제도화된 정치를 비판하면서도 포퓰리즘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정치적 동원의 형식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제안해야 한다.”(<레닌 재장전>, 152-3쪽)

10.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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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풍경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5 23:55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빵가게재습격 2010-02-2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로쟈 2010-02-24 18:34   좋아요 0 | URL
고생이랄 건 없는데, 다른 일들이 밀려서 문제지요.^^;

2010-02-24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4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4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2-27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도 생각보다 번역이 좋지 못한가 보군요. 역시 꼼꼼히 독해하려면 원서와 대조하는 수밖에 없겠군요.

글을 읽으면서 생각난점 몇가지만 적어보겠습니다.

위에 문화혁명당시 소위 상하이코뮌에 대한 마오의 대처를 보면 마치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레닌의 대처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마오나 레닌은 혁명이 인민 스스로에 의해 급진화되어 당의 통제를 벋어나는 시점에서 일종의 반혁명?을 통해 당에 의한 통제력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젝의 말대로라면 마오나 혹은 스탈린의 문제점은 혁명을 오히려 충분히 급진화시키지 못했다고 말하고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레닌의 전략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좀 모순되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관되게 급진적이려면 레닌이나 마오 혹은 스탈린등이 주장한 당 주도의 혁명이 아니라 인민의 코뮌적인 직접지배를 목표로하는 그런 혁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 레닌이나 스탈린 혹은 마오식의 당주도에 의한 혁명이 될 경우 위에서 예로든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에 대한 숙청도 그리고 마오의 문화혁명도 결국은 스탈린이나 마오의 개인숭배나 독재를 위한 통치전술의 일환으로서의 폭력일 뿐이 라는 해석도 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 민주주의"를 위한 신적 폭력이라기 보다는요.

따라서 지젝이 간과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당주도에 의한 혁명이나 권력의 속성이 가진 치명적 문제점을 과소평가하는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고 또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급진적인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레닌이나 마오적 혁명전략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스트적인 코뮌적 권력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지요.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이와같은 실패를 반복하기 위해서 참조해야 될것은 비록 권력투쟁과정에서 일종의 권력의 공백상태를 허용하게 되어 실패하기 쉬운 혁명인 일종의 코뮌적(혹은 아나키즘적) 혁명전략이 오히려 더 필요한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파리코뮌이 러시아혁명보다도 더 인민에 의해 주도된 혁명이라는 점에서는 시사점이 많은 사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로쟈 2010-02-28 14:49   좋아요 0 | URL
지젝의 주장은 레닌이 실패한 자리에서, 하지만 그가 열어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레닌 이전'이나 '레닌 말고'가 아니고요. '아나키스트적인 코뮌적 권력'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레닌주의와의 거리는 분명해보입니다...

yoonta 2010-03-01 21:01   좋아요 0 | URL
코뮌적 권력이라는 건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주도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레닌이나 스탈린이 열어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시작하자는 이야기도 여기에 마찬가지로 적용시킬수있는 것이지요. 레닌이나 스탈린 혹은 마오가 실패했던 방법들을 반복하지 않기위한 것이므로.

로쟈 2010-03-01 22:37   좋아요 0 | URL
그렇담 '소비에트'도 그런 '코뮌적 권력'이 아니었던가요?..

yoonta 2010-03-02 00:21   좋아요 0 | URL
어떠한 소비에트인가에 따라 다르지요. 10월혁명이후 볼셰비키에 의해 장악된 소비에트냐 아니면 10월혁명의 추동력이 되었던 자발적 저항조직으로서의 소비에트냐. 10월혁명이후의 소비에트를 본래적 의미에서의 노동자나 인민의 평의회로 보기는 힘들죠. 어디까지나 볼키를 위한 조직이 되었으므로. 따라서 레닌이 4월테제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외쳤을때의 그 소비에트는 10월 이후에 볼셰비키주도로 운영되는 소비에트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라고 봐야합니다.

러시아아나키스트들은 10월 혁명이후 볼셰비키로의 권력집중현상을 이런 시각으로 비판하였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로라는 표어는 아나키스트들에게 결코 전적으로 수용뢸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월봉기 이전까지는 그래도 행동을 촉구하는 '진보적 '외침이었다고 그는 (그리고리 막시모프) 설명했다. 그 당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진영에 몰려들었던 자위주의자들이나 기회주의자들과 달리 혁명세력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러나 10월의 일격이후 레닌과 그의 무리들은 혁명적 역할을 포기하고 대신 정치적 지배자가 되었으며 소비에트를 국가권력의 저장소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소비에트가 권력의 매개체로 남아있는 한 모든 아나키스트들은 그것에 항거할 의무가 있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러시아아나키스트 1917> 101~102쪽)

이처럼 문제는 어떠한 소비에트냐 즉 파리코뮌적 소비에트냐 볼키라는 국가권력을 위한 소비에트냐를 구분해야 하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오늘 저녁에 수유너머N에서 발표하는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발표문 가운데 일부를 옮겨놓는다. 혹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면 좋겠고, 나머지 부분은 발표 이후에 다시 정리해서 올려놓을 예정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 - 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되고 난 뒤 - 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오랜 평화로운 확장이 끝난 1914년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난 1990년 사이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레닌이 1914년에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해야만 한다.”(<레닌 재장전>)

지젝이 편집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 <레닌 재장전>에 수록된 글들은 대부분 2001년에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컨퍼런스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레닌의 복구”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그것이 영어본으로는 <Lenin Reloaded: Toward a Politics of Truth>(2007)로 묶여서 나왔습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도 영어본 <Revolution at the Gates>(2002)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습니다. 9.11을 다룬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1) 직후에 나온 것인데, 그의 다산성과 순발력에는 자주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1년엔 논문 한두 편 쓰는 게 버거운 한국 학계의 현실과는 대비됩니다. 물론 ‘괴물’과 ‘사람’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긴 하지만요). 올해만 하더라도 알랭 바디우와의 공저 <현재의 철학(Philosophy in the Present)>이 출간됐고,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 Times)>가 이번 봄에 나올 예정입니다(슬로베니아에서 출간한 책과 공저들까지 포함하면 대략 56번째 책입니다). 2001-2002년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지젝의 ‘레닌을 반복하기’론은 1991년 소비에트 몰락 이후 숙고되어 90년대 후반에는 이미 전체적인 윤곽이 잡힌 걸로 보입니다.   



<지젝이 만난 레닌>의 기본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던가요? “우리가 양보할 수도 없고 양보해서도 안 되는 ‘레닌주의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실질적인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273쪽)는 것입니다. 지젝이 보기에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합의’만 유지된다면 아무리 과격하고 급진적인 주장이라 할지라도 관용/용인된다는 것입니다(똘레랑스는 언제나 강자의 윤리/논리죠. 한때의 프랑스 같은). “네 마음대로 말하고 써라. 단 지배적인 정치적 합의에 실제로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것을 방해하지만 마라. 비판적 논제로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아니, 제발 그렇게 해 달라. 지국 생태계의 파국에 대한 예상. 인권 침해. 성 차별, 동성애 혐오, 반페미니즘. 멀리 떨어진 나라들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거대 도시에서 점점 늘어나는 폭력. 제1세계와 제3세계, 부유한 사람들과 빈곤한 사람들 사이의 간극. 디지털화가 우리 일상생활에 가하는 강력한 충격...” 등등.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성문법적으로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합의만 유지될 수 있다면 무얼 해도 괜찮다는 것이고, 그러한 ‘자유’에 실상은 어떤 ‘금지’가 기입돼 있다는 것이 요점입니다(우리는 우리의 부자유를 말할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조차도 제한받고 있는 우리의 경우엔 사정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지젝이 나열한 여러 주제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가 국가나 기업의 지원하에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죠. 지젝이 들고 있는 한 가지는 이런 것입니다. 인도에서 맥도널드가 감자 칩을 동물성(소의 지방에서 나온) 기름에 튀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납니다. 맥도널드는 바로 사실을 시인하고 인도에서 파는 모든 감자 칩은 식물성 기름으로만 튀긴다고 약속합니다. 신속한 조치에 만족한 힌두교도는 다시금 감자 칩을 우적우적 씹기 시작하고요... 힌두교도가 자신의 전통을 방어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근대성의 논리에 기입/포섭돼 있는 것이죠. 지젝이 보기에 맥도널드의 힌두교도 ‘존중’은 어린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와 같은 ‘생색내기’입니다. 우리가 어인아이들을 진지하게 대하진 않지만 그들의 환상을 굳이 깨뜨리지 않으려고 무해한 습관들을 ‘존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외부인이 어떤 마을에 가서 그곳 관습들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서투르게 시도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관용은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불에 태워 죽이는 힌두교의 전통에 이르면 쉽게 ‘불관용’으로 바뀝니다. 즉 ‘타자’가 ‘진짜 타자’가 아닌 경우에만 ‘관용’은 유지되며, 이것은 언제나 타자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함정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모든 타자의 향락에 무관심한 ‘성자적’ 태도, 보편적 대의를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또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감정을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서사의 권리’는 “오직 동성애 흑인 여자만이 동성애 흑인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하고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귀결됩니다(“니들이 게맛을 알어?”). “이런 식으로 보편화할 수 없는 특수한 경험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명백하게 보수적인 정치적 제스처”입니다(“구관이 명관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 “정치도 해본 놈이 한다” 등).  

반대로 지젝이 말하는 레닌주의적 제스처는 어떤 근본주의적 태도입니다. “오늘날 재발명되어야 할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다. 자유주의적 정치적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는 모두 진리의 정치를 배척한다. 물론 민주주의는 소피스트들의 통치다. 오직 의견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체주의’ 체제 역시 진리의 닮은꼴만을 강요한다. 독단적인 ‘교시’의 기능은 통치자의 실용적 결정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근본적 좌파의 목표는 “원칙 없는 관용적 다원주의”와 정반대입니다.

이러한 근본주의는 위험한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요? 지젝은 ‘좌익 소아병’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상기시킵니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 극단주의(extremism) 혹은 과잉 근본주의(excessive radicalism)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전치(displacement) 현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반대이자 제한으로, “끝까지 가는 것”의 거부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코뱅이 급진적 테러에 의존한 것은 경제 질서의 근본적 기초를 흔들어놓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일종의 히스테리적인 행동화(acting out)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의 이른바 ‘과잉’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또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의 현실적(경제적 등) 원인들을 흔들어놓는 것으로부터 후퇴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아닐까?”라는 것이 지젝의 반문입니다. ‘순수 정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됩니다. 그것이 정치 투쟁이 경제 영역을 참조해야만 제대로 독해될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통찰(정치경제학!)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지젝은 알랭 바디우가 ‘경제주의’와 결별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을 <국가와 혁명>의 레닌보다 더 좋아하는 것도 ‘순수 정치’를 주장하는 입장의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경제와 정치 사이의 시차(視差)에 대한 고려라고 봅니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두 옆얼굴이냐 꽃병이냐’라는 시각적 패러독스와 유사하다는 것이죠. 즉, 정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면 경제는 고작 ‘재화의 공급’으로 격하되고, 경제에 초점을 맞추면 정치는 한갓 기술 관료주의의 영역으로 축소됩니다. 레닌의 위대한 점은 이 두 수준을 함께 사고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다는 데 있으며 ‘레닌을 반복하라!’는 지젝의 요구는 거기서 비롯됩니다. 경제가 핵심이지만 그 개입은 경제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거나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일면적 슬로건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반세계화(반지구화) 운동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자명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실상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때에만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거꾸로 1990년 공산주의의 붕괴에 이어진 정치적 민주화는 사적 소유에 대한 광적인 충동을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두 겹의 싸움을 해야 한다. 첫째는, 그래, 반자본주의다. 그러니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자유주의적 의회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아무리 ‘급진적’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유산을 실제로 문제로 삼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오늘날의 핵심적인 유혹이다.”(485쪽) 가령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나 <인사이더>처럼 무자비한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대기업에 대한 비판을 다룬 영화들이 ‘반자본주의’를 표면상 내세우더라도 “대기업의 음모를 무너뜨리는 정직한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는 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의 견고한 중핵(민주주의) 자체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지젝이 ‘진정한 마오주의자’라고 칭하는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한편, 자본주의의 혁명적인 ‘탈영토화’ 효과는 마르크스도 매혹되었을 만큼 강력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동력으로 인간 상호작용의 모든 안정된 전통적 형식을 무너뜨렸습니다(“모든 견고한 것은 녹아 허공으로 사라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자체가 자본주의의 궁극적 장애라고 진단했지만, 한편으론 이 내재적 장애/적대는 그 ‘가능성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도 대단히 막강한 체제라고 해야 할까요? 이런 진단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는 수세기 만에 국제 질서가 가장 극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 출발점에 서 있다. 이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유럽 열강들이 처음으로 패권 질서를 형성했던 시절 이후에 가장 대대적인 변동이 될 수 있다. 이 변화는 불가항력적이다. 전염성도 강하다. 그것은 우리의 일, 은행계좌, 희망 그리고 건강까지, 우리 삶의 모든 구석구석으로 번질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나 소련의 몰락, 금융위기처럼 단발성 변동이나 혁명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의 눈사태다.(...)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이 세계가 더 안정적이거나 이해하기 쉬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혁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죠수아 쿠퍼 라모, <언싱커블 에이지>)

 

“정치적 자유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시장경제 요소를 최대한 도입하는 중국식 발전모델”을 지칭하는 ‘베이징 컨센서스’를 주창한 컨설턴트 지식인의 주장입니다.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는 좌파들만 “혁명이 문 앞에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니죠. 그보다 한 걸음 먼저 내달리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혁명, 혹은 혁명적 자본주의가 아닌가 합니다(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자신의 원리 자체가 끊임없는 자기 혁명인 질서를 혁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컨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꿔라”는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마누라와 자식도 바꾸는 것밖에 없지 않을까요? 지젝은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회상장면을 한 예로 듭니다.  



주인공 카이저 소제가 집에 돌아와 보니 라이벌 갱들이 자기 아내와 작은 딸의 이마에 권총을 대고 협박을 합니다. 소제는 즉각 자기 아내와 딸을 쏩니다. 그리고 그는 라이벌 갱단 한 놈 한 놈을 그들의 부모, 자식, 친구들까지 모두 찾아내 죽여 버리겠다고 선포합니다. “강요된 선택의 상황에서 카이저 소제는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죽임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는 미치거나 불가능한 선택을 한다. 이런 행동(act)은 무력한 자기 공격이 아니라, 그 속에서 주체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상황의 좌표를 바꾸는 행동이다.”(<잃어버린 대의>, 258-9쪽) 이제 그러한 행동의 역사로서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를 잠시 훑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0. 0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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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24 13:01 
    어제 수유너머N에서 발표한 글을 마저 옮겨놓는다. '코뮌적' 공간에서 '레닌주의'에 대해 발표하고 토론한,다는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 밤기차로 지방에 문상을 가야 했던 탓에(오늘 새벽차로 올라왔다) 뒷풀이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발표회는 여러모로 유익한 경험이었다. 아래의 글은 약간 조정한 걸 제외하면 거의 그대로이다.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
  2.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풍경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5 23:55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아포지 2010-02-23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표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

비로그인 2010-02-24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젝.. 카이저 소제를 그렇게 호명했군요..

수유너머.. 후끈한 시간이었을 것 같아요.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도 기대 됩니다.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기대에 부응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카스피 2010-02-2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주얼 서스펙트,반전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준 영화지요.근데 유주얼 서스펙트2란 영화가 나와서 기대했다가 벙 쩌버린 일인이었죠ㅡ.ㅜ

로쟈 2010-02-24 18:43   좋아요 0 | URL
제목 사기였던 것 같은데요...
 

제목은 거창하지만, '공지' 페이퍼이다. 수유너머N의 초청을 받아서 내주 화요일(23일) 저녁에 제목으로 내건 주제를 갖고서 발표를 하기로 했다(http://nomadist.org/xe/freeboard/10728).  



주제는 어제 정해서 주최측에 보냈는데, '과거로부터의 교훈'이란 건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2009)의 제2부 제목이기도 하다. 토론자가 책의 역자인 박정수 수유너머 연구원이다.   

아마도 <레닌 재장전>(마티, 2010)과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 등에서의 레닌론과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의 혁명론, 포퓰리즘론을 어떻게 엮어서 발표문을 쓰게 될 거 같다. 그것도 써봐야 아는 것이고, 당장은 세 마리 늑대에 쫓기고 있는 형편이어서(처음엔 세 마리 토끼를 내가 쫓는 줄 알았다) 제 시간에 발표문을 작성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여하튼 주최측의 요청에 따라 공지는 해놓는다.  

10. 0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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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23 01:36 
    오늘 저녁에 수유너머N에서 발표하는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발표문 가운데 일부를 옮겨놓는다. 혹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면 좋겠고, 나머지 부분은 발표 이후에 다시 정리해서 올려놓을 예정이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2.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풍경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5 23:55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홈피에 올려놓았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2010-02-17 0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7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7 0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7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2-17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일반자유시민이 참여해도 되는 건지요?

수유넘어 역시 온라인 강의는 들어보았었는데 참가는 아직 못해 봤어요..

선생님의 로쟈가 어디에서 왔을까.. 처음엔 신기했어요.
저는 나의 여인! 로자 룩셈부르크을 연상했었거든요.
박노자와 로쟈가 러시아에서 온것은 요즘에 알게 된거예요..
살아있다는 게 참 신기하고 재밌죠^^
저는 러시아와 러시아문학에 열광하고 있답니다.
선생님이 얘기해주는 그 모든 캐릭터들의 눈부심이란! 또 광대무변함, 공허함..또 철학이라니 성자라니.. 문학을 놓고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들을수 있는 곳이 있었다니 그저 대단하기만 해요^^ 올해는 정말 기뻐요~

로쟈 2010-02-17 23:17   좋아요 0 | URL
참가에 제한은 없는 걸로 알아요. 아현역 부근에 있습니다. 올해는 이제 시작인데요.^^

비로그인 2010-02-18 05:32   좋아요 0 | URL
수유넘어N에 가보았는데 엄청난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저는 이번엔 못갈거 같아요.. 제가 엄청 수줍고~ 또한 히키코모리라서.. 코뮨..!! 설레이는 마음은 있지만 아직은 제 이상 너머에 있네요~~~

그러나 한겨레엔 고고씽~.

로쟈 2010-02-18 21:56   좋아요 0 | URL
자주 뵙겠는데요.^^

비로그인 2010-02-18 22:47   좋아요 0 | URL
저는 선생님 맨날 뵙는 데... 온- 오프라인 동시 강의 정말 좋아요.

주머니에 넣고다니는 기분인걸요.
책을 읽다가... 아무때나...
나만의 즐거운 밀회.ㅋㅋ*^*---

高原 2010-02-1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샘을 직접뵙고 싶고...참가하려고 하는데 그날까지 한권이라도 읽고가야하는데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0-02-18 21:55   좋아요 0 | URL
두꺼워서 저도 완독은 못한 책들입니다.^^;
 

프레시안에서 <레닌 재장전>(마티, 2010)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긴' 서평이기도 해서 한번 일독해보기 위함이다. 필자는 진보신당 상상연구소의 장석준 연구기획실장으로 <레즈를 위하여>(공저, 실천문학사, 2003), <혁명을 꿈꾼 시대>(살림, 2007)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프레시안(10. 02. 06) '레닌 르네상스'…그가 돌아왔다!

'레닌 재장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레닌의 초상을 표지에 실은 책이 나왔다. 원제는 'Lenin Reloaded'. 아무래도 영화 <매트릭스>에서 따온 표현임이 분명하다. 할리우드 영화와 레닌의 이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 21세기도 새 10년을 맞이하는 지금, 레닌이 다시 서점가에 등장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근 베를린 시가 레닌 동상을 복구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마지막 레닌은 거의 스무 해 가까이 전 해체된 동상의 모습인 것 같다.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에 나왔던, 강에 떠내려가는 레닌 동상. 독일 영화 <굿바이 레닌>에 나온, 헬리콥터에 실려 공중에 떠 있는 그 동상. 



1980년대 변혁 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을 무렵 읽었던, <무엇을 할 것인가>니 <국가와 혁명>이니 하는 저작 속의 그 단호하고 신랄한 문구들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퇴장이었던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레닌 동상이 해체되던 그 무렵이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짧은 20세기'의 종지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레닌의 저작에 흥분하기도 하고 주눅 들기도 하다가 그 처연한 퇴장을 목도한 우리는 '짧은 20세기'의 끝물에 휩쓸렸던 것이겠다.

지젝-레닌 커넥션
이 씁쓸한 기억이 채 다 가라앉기도 전에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휘저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레닌이 했던 그 일을, 물론 100년 전과는 분명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이기는 하겠지만,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시대에 어긋난 몽상가, 선동가들인가. 아니면 <레닌 재장전>이라는 책의 부제('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처럼,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리'의 고지자들인가. 



레닌 컴백을 주도하는 사람은 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다. 2004년에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에서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한 <Revolution at the Gates>라는 책이 나왔다. 번역하면, '문 앞의 혁명' 정도가 되겠는데, 레닌에 대한 지젝의 글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에 쓰인 레닌의 글들이다.

국내에도 레닌에 대한 지젝의 저작이 두 권이나 나와 있다. 하나는 그의 독일어 논고들을 번역한 <혁명이 다가온다-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이서원 옮김, 길 펴냄)이고, 다른 하나는 위의 영어 저작을 번역한 <지젝이 만난 레닌-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다. 말하자면 '레닌 르네상스'는 어느 정도는 지젝의 노고의 결과다.

이번에 나온 <레닌 재장전>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편저자 중 한 명으로 지젝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글도 한 편 수록되어 있다. 사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집필 시점은 앞에 소개한 책들보다 앞서 있다. 비록 영어본이 나온 것은 2007년이지만, 2001년에 독일에서 열린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레닌의 복구'라는 국제 심포지엄의 발표문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젝은 왜 이토록 레닌에 집착하는가. 대중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를 소재로 삼아 헤겔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강의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 21세기 철학자가 잊혀진 20세기의 혁명가를 자꾸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지젝은 고국인 슬로베니아(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나라)에서 공산당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는 '자유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서기까지 했었다.

수많은 레닌들 중에서도 1917년의 레닌
여기에서 우리는 지젝이 주목하는 레닌이 그의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도 특히 1917년의 레닌임을 주목해야 한다. 차르 정권에 맞서기 위해 지하 정당을 만들던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도 아니고,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불철주야하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의 레닌도 아니다.

이미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곧장 나아가자고 주장하던,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의 레닌이다. 지젝이 여러 레닌들 중에서도 유독 이 시기의 레닌에 주목하는 것은 이 시기의 레닌이 펼친 그 '정치'가 지금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시기의 레닌의 정치는 마치 무소불위인 것처럼만 보이던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하는 역사적이자 집단적인 행위였다.

우리 시대 지구화의 미래가 어쩔지 예감케 해주는 지난 100년 전 지구화(흔히 '제국주의'라 불리는)는 1914년 세계 전쟁을 통해 그 모순을 폭발시켰다. 그 동안 일국 단위에서 사회주의 개혁 혹은 민주 혁명을 추진하던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사태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 계급의 전쟁 수행에 공범이 되어주든가 시대에 절망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당시 좌파의 맹목(盲目)이 재앙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절망하기보다는 시각을 전환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세계 전쟁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효과들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 즉 러시아에서부터 세계 혁명이 폭발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었다. 자본주의 지구화가 낳은 모순을 바탕으로, 그것을 극복할 또 다른 전 지구적인 연계(북반구의 노동자 혁명과 남반구의 민족 해방 혁명 사이의 연대)가 구축될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희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 미친 듯한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그는 1917년 2월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공간이 열린 조국 러시아에서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재촉했다. 본래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의 이론가이자 지도자였던 그가 귀국하자마자 그 일성으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외친 것이다('4월 테제'). 다들 그의 정신 건강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소속 정당인 볼셰비키당 간부들조차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 10월에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세계는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의 거대한 균열선을 현실로서 마주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지구화의 시대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레닌이 마주한 순간들을 되새기려는 시도들
<레닌 재장전>도 이 시기의 레닌에 관심을 집중한다. 안 그런 글들도 있지만, 적어도 2장과 3장의 글들은 그렇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것이 이 2장(철학에서의 레닌)과 3장(전쟁과 제국주의)이다. 2장, 3장은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저자들의 글로 채워져 있다. 사실 가장 저명한 저자들의 글은 1장(레닌을 복구하기)에 모여 있다. 알랭 바디우, 알렉스 캘리니코스, 테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 우리 시대 좌파 저술가로서는 더 이상 호화로울 수 없는 캐스팅이다.

하지만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모은 책이라 그런지 글의 완성도는 천차만별이다. 특히 스타급 필자들 중에서 몇몇은 뜻밖의 실망을 안겨준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그렇다. 1935년에 트로츠키가 꾼, 레닌이 나오는 꿈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뭇 비장하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글로 끝난다. 4장(정치와 그 주체)에 실린 안토니오 네그리의 글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네그리는 레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가 레닌에 대해 쓴 글이 더 흥미를 끌 수밖에 없는데, 막상 읽어보면 레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평소 자신의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장과 3장의 필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과 2월 혁명, 10월 혁명에 이르는 시기의 레닌의 사상적 고민과 발전을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가령 미국 사회과학자 케빈 앤더슨의 글은 레닌의 전망이 남반구 민족 해방 운동 및 유색 인종 해방 운동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을 잘 보여준다. 지젝과 함께 이 책의 공동 편집자인 스타티스 쿠벨라키스도 레닌의 헤겔 <논리학> 연구와 이 당시 정치 실천 사이의 연관을 분석하면서 레닌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다분히 철학적이라 읽기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말이다.  



2장, 3장 필자들 중 국내에 어느 정도 알려진 이들인 다니엘 벤사이드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글도 많은 시사와 영감을 던져준다. 벤사이드는 레닌의 성취뿐만 아니라 그의 시대적 한계도 가감 없이 지적하고 있으며, 발리바르의 글도 마찬가지로 냉정한 접근을 보여준다. 특히 벤사이드(68세대로서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 운동가였고 반자본주의신당의 산파 중 한 명이었다)는 지난 달 작고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느낌이 남 다르다.

이들 필자의 글들에서 일관된 것은 레닌의 특정한 주장을 반복하거나 그의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그가 1910년대(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이다)의 시간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이와 대결했는지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순간들, 그 속에서 레닌이 취한 포즈를 되새기려 한다.

이것은 곧 지젝이 "레닌주의적 제스처"라고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지젝은 다른 공동 편저자들과 함께 쓴 '서문'에서 이를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결단"이라고 풀어 말한다. "필요한 타협을 하고 현실적인 요구에 이론을 맞추려는 실용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을 물리치고, 오직 일이관지하는 급진적 입장(이를 통해서만 우리의 개입이 상황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 개입한다는 결정.

신자유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치적 선택 자체가 금기시돼온 지난 30여 년간의 시대를 끝내려면, 바로 이러한 제스처를 통해 한 시대를 갈라야 한다는 것이다. 100년 전 그것이 1917년 10월 러시아 민중들을 통해 작렬했다면, 우리 시대에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분출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금 '돌파'의 시대를 꿈꾸며
<레닌 재장전>에 실린 여러 글들에서 반복되는 한 단어가 있다. '돌파'라는 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레닌 자신이 1917년의 뜨거운 논설들 중 하나에서 이 말을 인상 깊게 쓰고 있다.

"1917년 2월에서 3월에 걸친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이 내전으로 전화된 시작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을 끝장내는 최초의 일보를 내딛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2보, 즉 국가 권력의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전 그리고 전쟁의 종결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의 '돌파(break-through)',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전선에서의 돌파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 전선의 돌파에 의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공포로부터 구해내고 인류에게 평화의 은총을 내릴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창조함으로써 이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것은 바로 자본주의 전선에서의 '돌파'로였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

'돌파'는 교착 상태를 깨는 행위다. 기존의 전선에 머물고 적의 강점과 우리의 약점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전선을 이동시키고 적의 강점을 약점으로,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탈바꿈시키는 행위다. 이것은 판박이를 벗어나기 위한 판갈이의 정치이고, 우선은 '판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지구화, 금융화된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흔들리고 있지만 정치적 선택지는 여전히 과거 그대로인 우리 시대, '반MB의 시간'이 '진보의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우리 시대 역시 하나의 교착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돌파'의 정치, '판을 깨는' 정치다. 다시 '레닌'을 꺼내는 게 느닷없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과거 레닌주의의 복고(復古)가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어떤 정치의 시의적절한 반복에 대한 대망이라면 말이다.(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10. 02. 08.  

P.S. 참고로, 지젝 등이 쓴 서문에서 '레닌을 반복하기'란 말의 의미를 밝혀놓은 대목을 옮겨놓는다.  

우리는 레닌을 반복하고 재장전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오늘날의 성좌에서 똑같은 추동력을 되살려내야 한다. 레닌으로의 변증법적 회귀는 "좋았던 옛 혁명기"를 향수 속에서 재연하는 것도,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으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맞추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 귀환은 제국주의, 식민주의, 세계대전 - 더 정확히는 1914년의 파국으로 진보주의라는 긴 시기가 정치적 이념적으로 붕괴되고 난 뒤 - 이라는 조건 속에서 혁명의 기획을 재창조하려는 "레닌의" 제스처를 현재의 지구적 조건 속에서 반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오랜 평화로운 확장이 끝난 1914년과 동구권의 붕괴 이후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식이 생겨난 1990년 사이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레닌이 1914년에 한 것을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해야만 한다.(23-24쪽) 

  

더불어, '레닌의 반복' ' 레닌 재장전'의 구호는 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의 마지막 문장이다(아직 국역본이 없다). '레닌과 변증법의 길'의 필자 사바스 미카엘-마차스가 인용하고 있는데, 지젝도 자주 사용하는 문구이다. 말하자면 캐치프레이즈이다. 

"너는 계속해야만 한다, 나는 계속할 수가 없다, 계속하고야 말겠다." 
"You must continue, I cannot continue, I will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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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토르넬르 2010-02-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캐치프레이즈가 인상적이군요. You, not I , Yes I

로쟈 2010-02-09 12:17   좋아요 0 | URL
지젝이 좋아하는 베케트의 문장은 <최악의 방향을 향하여>에 나옵니다. "다시 시작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카스피 2010-02-0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레닌이 다시 돌아오는군요^^

로쟈 2010-02-09 12:15   좋아요 0 | URL
20년만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이 이달에 인도 뉴델리에서 강연을 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인도는 MB만 간 것이 아니었다!). 오마이뉴스에 현지취재 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96580). 강연에서 새로운 내용을 더 알게 된 건 아니지만 '근황'과 '건재'를 확인할 수 있어 반갑다(반대로 지젝이 낯선 독자에게는 유용한 길잡이가 될 듯싶다). 사진과 글은 손석주 기자의 것이다.    

오마이뉴스(10. 01. 07)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는 진보주의자" 

<역사의 종언>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대로 과연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자유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둔 것일까?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승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기는 쉬울지 몰라도, 사망한 공산주의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자본주의로 온통 물든 세상에서 사회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로 돌아가자고 핏대를 세우는 이가 과연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이는 책에서만 인용되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강연이 있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생긴 내가 가진 질문들 가운데 하나였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창한 역사의 종언이 9·11테러로 정치 부문, 2008년 금융위기로 경제 부문에서 틀렸음이 입증됐고 그리하여 역사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므로, 위기에 대한 대안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얼마나 유효한가? 1990년 슬로베니아 대선 후보로 출마한 경력을 가진 정치인이기도 한 그가 자신이 주창한 '재창조된 공산주의(Reinvented Communism)'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규율 있는 테러(disciplinary terror)'라며 도발적인 언사를 하는 이유는 뭘까?  



가장 위험한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동시대 '서양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비난과 동시에 문화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조롱받기도 하는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나는 강연장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뉴델리에 위치한 인디아 해비태트 센터 강당에서 화요일 5일 저녁 7시에 예정된 강연 시간에 맞춰 도착한 나는 정문 앞에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 깜짝 놀랐다. 2007년 10월에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 토마스 프리드먼의 강연을 별무리 없이 좋은 자리에 앉아서 들을 수 있었던 경험 때문에 느긋했던 마음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좌석이 매진되자 출입문을 걸어 잠근 주최 측은 시끌벅적한 항의에 시달리자 마지못해 '입석' 혹은 '바닥석'을 조건으로 문을 열었다.  



극좌파 낙살라이트, 공산당, 사회당에서부터 극우정당 시브세나까지 공존하는 나라다 보니 유명 정치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은 듯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린 탓에 15분 정도 지연된 후 강연이 막 시작되기 전, 통로 바닥에 앉아 있던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남인도 여성이 지나가는 걸 보게 됐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본 후 옆 사람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고서야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1997년 첫 번째 소설 <작은 것들의 신>으로 부커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아룬다티 로이였다. 숱한 화제를 뿌리며 소설가에서 반전, 반핵, 페미니즘, 하층민 인권을 위한 활동가로 변신한 그녀는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과격 공산주의자의 이데올로기 강연에 실망한다면 그녀를 본 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작정이었다.  



스타벅스 마시며 제3세계 돕는다?   
잠시 후, 불룩 나온 배에 검정 라운드 반팔티셔츠를 걸치고 턱수염을 기른 동유럽 얼굴의 늙은 남성이 등장하더니 퍼포먼스 같은 도발적인 강연이 시작됐다. 괴상한 영어 발음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수다'는 자신의 신간 <우선 비극, 다음은 희극>(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대부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족, 공장, 학교가 억압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자본주의의 승리를 위한 통합체로 발전되고 있다는 그의 주장은 안토니오 그람시와 루이 알튀세르 같은 좌파 이론가들의 주장을 따르고 발전시킨 듯했다. 이 시대를 행동하지 않는 '냉소의 시대'라고 단호하게 규정하면서, 그는 현대인들이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제3세계 노동자, 불우한 이웃 등을 간접적으로 돕게 된다는 광고 전략에 넘어가는 모습을 질타했다. 직접 행동이 불가능하다는 냉소주의로 인해서 자본가들에 놀아나는 현대 소비주의 행태를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중요한 태도라는 주장이었다.  



영화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야말로 진보주의자이며 그를 쓰러트리려는 세력은 왕정복고를 위한 반동 지배세력이라는 주장과, 영화 <죠스>의 상어는 미국 사회를 위협하는 사회주의를 상징한다는 주장은 그의 이어지는 파격적인 '막말'에 비하면 약과였다. 인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하느님만 찾았다면서 성녀 마더 테레사를 비난할 때 벌어진 내 입은, 프로이드나 라캉처럼 정신분석학자가 되고 싶었던 자신이 학창 시절 억눌린 성적 욕구로 여선생님과 성관계를 맺고 싶었다는 농담 섞인 폭로에는 더 이상 다물 길이 없었다. 불꽃놀이 같은 그의 언변 행간에 던져진 핵심은 바로 "바보들아, 문제는 이데올로기야"였다. 쉬운 예를 들어서, 물건을 만들고 사는 일이 더 이상 단순한 시장 행위가 아닌 경험을 사고파는 이데올로기적 행위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주창하는 '재창조된 공산주의'는 가난한 국가들만이 아닌 유럽 등 모순점들이 팽배한 어느 지역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면서, 그는 2008년 금융위기야 말로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의 망상이 파괴된 일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고 그는 경고했다.  

"1930년대 유럽에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히틀러가 등장했습니다. 나는 지금의 이러한 위기가 나오미 클라인이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라고 지적한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로 '규율 있는 테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데 대해서 그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한 수사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스탈린식의 공포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모든 문제를 대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새로운 대중적 규율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나의 동료인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말하기를 '자유와 자유를 위한 물질적 조건들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무기는 바로 규율'이라고 했습니다."

슬라보예 지젝, 당신은 '필로테이너'
이런 생각을 가진 그에게 <슬럼독 밀리어네어> 같은 영화는 재앙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소년이 행운을 거머쥔다는 할리우드 공식을 그대로 따른 겁니다. 거기다가 인도의 불행한 현실을 모두 다 섞어놓은 것에 불과하죠." 

할로윈 파티에 참석한다면 무슨 복장을 하겠냐는 짓궂은 질문에 그는 악마의 복장을 하겠다고 질문자의 기를 죽인 다음, 재치 있게 인도의 피에 굶주린 칼리(Kali) 여신을 예로 들었다. "팔이 100개나 달린 칼리 여신도 팔 하나는 선한 곳에다가 쓴 답니다. 그래서 나도 보기보다는 나쁘지 않으니까 두려워말라는 메시지를 주는 선한 악마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까발려 보여주는 그의 퍼포먼스 같은 강연에 박장대소와 아연실색을 오가던 청중들의 반응은 그가 상아탑 속에 갇힌 철학자도 권력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정치가도 아님을 보여주는 듯했다. 강연장을 나오면서 나는 그에게 요즘 유행하는 방식으로 그의 직업인 철학자 뒤에다가 엔터테이너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싶었다. 철학자이면서도 대중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사람, 바로 '필로-테이너(Philo-tainer)'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즐거움만을 주지는 않았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에 관계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창했던 케케묵은 공식을 바꿔야 합니다. 철학자들이란 세상을 해석하기만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마르크스가 말했죠. 하지만 20세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행동도 중요하지만, 사상 없는 행동은 재앙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10. 01. 28.  



P.S. 궂긴 소식도 있다. <미국 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1922-2010)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챙겨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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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10-01-2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닌 재장전>에도 필자로 참여한 다니엘 벤사이드가 지난 12일에 타계했다고 합니다. 저도 엊그제서야 알았는데, 한국에서는 거의 기사화가 안 된 것 같아요.

로쟈 2010-01-28 19:09   좋아요 0 | URL
람혼님의 포스팅으로 저도 알게 됐습니다. 하워드 진과는 달리 벤사이드의 책은 한권밖에 안 나와 있어서요...

2010-01-29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3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에 대한 안티팬도 있군요. 궁금했죠, 지젝이 어떤 사상가이길레 그의 인기나 관심이 큰 것인지, 아니면 동유럽이나 인도를 제외한 어떤 다른 사람들이 그를 비판하는 것인지, 그를 비판하는 저자들이 있다면 양쪽을 보고 싶더군요. 한쪽이 넘 열열하면 들추기 싫어지는 게으름이 있더라구요. 제 이런 선입견이 지젝의 책에 가까이 가지 못한 변명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