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99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한상범, 이철호 교수의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삼인, 2012)를 읽고 쓴 것이다. 찾아보니 두 사람은 <전두환체제의 나팔수들>(패스앤패스, 2004)도 공저한 바 있다. 법치라는 명분이 어떻게 군사독재 정권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악용되고 남용됐는지 일람하게 해주는 책이다. 다만 이 주제에 대해서는 '작은 책자'를 넘어서 좀더 무게 있는 책이 나왔으면 싶다. 한홍구 교수가 한겨레에 연재한 '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가 단행본으로 나온다고 하니까 기다려봐야겠다...

 

 

 

주간경향(12. 09. 25) 군사독재 굴레서 어떻게 벗어나야 하나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헌법학자 한상범·이철호 교수가 <법은 어떻게 독재의 도구가 되었나>의 서두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민주냐 독재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게 저자들의 문제의식이다. 민간인 사찰과 불온서적 목록 부활, 국가인권위의 파행적 운영 등 민주화에 역행하는 일들이 횡행하는 현실은 우리의 시침을 1970∼80년대로 되돌려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퇴행이 어떻게 가능한가. 저자들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의 복고를 바라는 구세력이 준동하고 있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군사독재 시절의 의식구조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독재시대에 대한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여전히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현실인식 하에 책은 독재정권의 지배법리와 지배수법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과거 독재체제의 부정적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려면 먼저 그것이 어떤 수단들을 통해서 작동했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제헌헌법 자체가 쿠데타 세력과 독재정권에 악용될 소지가 많았다. 독일 바이마르헌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일본 헌법의 영향이 더 컸고, 특히 계엄제도에 관한 조문들은 메이지헌법에서 그대로 따왔다. 군이 계엄사무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게끔 했고, 군부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장치는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예산제도도 재정 민주주의나 재정 입헌주의의 규정이 아주 취약한 행정부 본위의 제도로 메이지헌법의 개악판이라는 게 저자들의 평가다. 결과적으로 제헌헌법의 이러한 구멍은 쿠데타 세력에게 이용당하게 된다.
 
일제 법제의 잔재와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은 법문화이다. 일본의 경우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법학과 법제에서 자유주의적인 것이 말살되고 천황제 파시즘이 절정에 이른다. 때문에 ‘악법에 대한 거부’와 ‘폭군에 대한 저항’이라는 핵심적 시민의식이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고 근대적 자유주의 시민문화도 일본에서는 부재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고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배출된 친일 관료들이 해방 이후에도 법조계뿐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급 인사로 활동하게 됐다는 점이다. 1945년 이후에도 일제의 구(舊)법령 체제가 지속됐으니 해방이 됐다고는 하지만 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일제가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배우고, 한국의 독재정권이 일제로부터 다시 배워서 써먹은 통치수법이 “법률의 기술을 악용하는 관료의 통치술”이다. 그리고 그러한 지배수법의 최고 절정이 “계엄제도의 정치적 악용과 국가정보기관을 이용한 정치적 탄압 자행, 형사 범죄자의 날조와 조작”이다. 민족일보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같은 사법살인이 비근한 예이다. 이렇듯 법은 약자를 위한 보호장치가 아니라 강자를 위한 지배수단이었다. 게다가 법을 악용한 이러한 독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실무 법조인뿐 아니라 법학자, 어용언론이 동원됐던 게 우리의 독재정치사였다.
 
과연 우리는 그러한 과거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실질적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해야 하는데, 이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시민적 주권의식이다. 권력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돼야 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과거 군사독재정권이 어떻게 법을 악용해서 국민을 우민화하여 지배했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 그러한 주체로 서는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군사독재가 시민사회를 붕괴시킨 황폐화된 폐허”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겐 아직 남아 있다. 민주냐 독재냐,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12.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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