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책&(424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포스트휴먼'이다.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제로 한 책들을 모아보았다.

 

 

 

책&(13년 11월호) 포스트휴먼

 

필멸과 불멸은 인간과 신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불멸을 꿈꿔왔지만 그것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유한성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하지만 생명연장 기술의 발달, 그리고 신체와 기계의 결합 가능성은 그러한 운명을 바꿔놓을지도 모른다. 바이오테크놀로지와 인공지능의 발전을 통해서 죽음 너머의 인간, 신체적 한계 너머의 인간이 가시화되고 있다. 오랜 진화의 산물이기도 한 현재 인간의 조건을 넘어선 인간을 ‘포스트휴먼’이라고 부른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들. 포스트휴먼 시대는 어떻게 도래하는가? 포스트휴먼도 인간인가? 포스트휴먼은 어떤 문제를 사유하게 될까? 궁금한 자가 책을 펼치는 법이다. 이번 달에는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을 다룬 책들을 살펴보자.

가장 평이하게 읽을 수 있는 건 프랑스의 미래학자 도미니크 바뱅의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이다. ‘포스트휴먼 1세대를 위한 안내서’를 자임한 책으로, 저자는 포스트데스(Post-Death), 포스트보디(Post-Body), 포스트에고(Post-Ego), 포스트릴레이션(Post-Relation), 포스트리얼리티(Post-Reality)라는 다섯 가지 범주를 통해서 포스트휴먼의 실현가능성을 검토하고 전망한다. 곧 우리가 죽음을 넘어서게 될 것이고, 신체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며, 자아관이 변화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사회적 관계의 양상과 아예 ‘현실’ 자체가 전혀 다르게 구성될 것이라는 예상이다. 포스트휴먼에 대한 통념적인 이해에 부합한다고 할까.

 

저자의 소개에 따르면 일부 미래학자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최초의 인간이 우리 중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한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노기술의 발달은 적혈구보다 크기가 작고 모세혈관보다는 가는 로봇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이 로봇이 인체에 들어가서 원격조정자치의 지시를 받아 특정 암세포를 제거하는 식의 나노의학이 현실화된다면 우리는 의학의 새로운 혁명과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얻게 될 불멸성은 자칫 환경적 재앙뿐 아니라 사회적 재앙이 될 가능성도 크다. 첨단기술은 너무 비싼 경비 때문에 극소수의 경제적 상위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것이고 그에 따라 사회적 불평등은 더 심화될 것이다. 더불어 인구 과잉 문제를 떠안게 될 포스트휴먼은 결국 우주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될 수도 있다. 포스트휴먼의 삶도 녹녹치 않아 보인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대한 훨씬 정교한 이론적 탐색과 비평은 캐서린 헤일스의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로봇 공학자 한스 모라벡이 『마음의 아이들』에서 인간 의식을 컴퓨터로 다운로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로봇 외과의사가 두개골 흡인술을 통해 정보를 읽어내고 그것을 컴퓨터로 저장할 수 있다는 발상은 신체와 정신이 분리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정보가 신체라는 기반을 갖지 않는다면 컴퓨터와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사이보그에 대한 관심을 거기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그의 기본 입장은 우리가 포스트휴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이보그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휴먼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특징은 비생물적 요소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주체성이 구성되는 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때 구성되는 주체성은 사이버네틱스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에서처럼 신체화를 경시하거나 말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복한다. 저자가 꿈꾸는 포스트휴먼은 “무한한 힘과 탈신체화된 불멸이라는 환상에 미혹되지 않고 정보기술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포스트휴먼”이다. 포스트휴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도 실상은 간단치 않은 문제다.

 

 

당연한 일이지만, 포스트휴먼의 가능성과 현실화에 대한 긍정적 시각 못지않게 부정적 시각도 존재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우리의 포스트휴먼 미래』에서 우생학의 귀환을 불러오는 생명공학에 대해 우려를 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독일 철학자 하버마스도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인간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고수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편에 선 ‘트랜스 휴머니스트들’은 인류가 새로운 디지털 종족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을 낙관하며 환호한다. 슈테판 헤어브레히터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이 두 입장을 중재한다. 저자는 포스트휴먼을 “인류화 과정에서 배척되었던 모든 정신적인 것을 포괄하고, 인류의 모든 ‘다른 것’을 포함하자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다른 것’에는 기계뿐만 아니라 동물, 신, 악마, 괴물 등도 포함된다.

 

포스트휴머니즘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면서 그 새로움과 급진성을 상대화하려는 시도를 저자는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부른다. 포스트휴머니즘의 다양한 쟁점에 관해서는 이화인문과학원에서 펴낸 『인간과 포스트휴머니즘』도 참고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과 인간존재론의 문제, 윤리적 쟁점들, 그리고 예술 속에 나타난 포스트휴먼의 양상들을 살펴본 논문 모음집이다. 포스트휴머니즘 관련서는 모두 학술서 범주에 속하는데, 포스트휴먼의 중요 쟁점과 이슈를 다룬 교양서들도 더 나오길 기대한다.

 

1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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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321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보통 3-4권의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막판에 한권을 골라 쓰게 되는데, 지난주에 낙착을 본 책이 데이비드 베인브리지의 <중년의 발견>(청림출판, 2013)이었다. 면밀하게 읽어보려고 원서도 주문해 놓은 책이다. 바버라 스트로치의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해나무, 2011)와 나란히 읽으면 더 효과적일 듯싶다...

 

 

 

시사IN(13. 11. 09) 변하니까 중년이다

 

인생의 사계절이라면 흔한 비유에 맞추면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다. 여름과 겨울 사이, 한풀 꺾였지만 그렇다고 아직 한물간 건 아니다. 그렇다고 노년으로 가는 과도기이기만 한 걸까. 중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이런저런 생각에 손에 잡은 책이 데이비드 베인브리지의 <중년의 발견>(청림출판)이다. 생물학자인 저자도 딱 중년에 접어들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놀라워하며 쓴 책이다


청년기나 노년기에는 없는 측면들 때문에 중년은 독특하며, 중년기의 변화는 갑작스럽다. 게다가 중년은 다른 생물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간 고유의 현상이다. 수명이 늘어나 노년의 삶이 길어진 건 인류사에서 극히 최근에 일어난 이례적인 일이지만 중년은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 살아온 인간은 유아기의 고비를 넘긴다면 대부분 마흔 살 넘게까지 살았고, 이것은 자연선택의 결과다. 곧 용도가 다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다른 한 국면이라는 얘기다.

 

 


물론 ‘새로운 용도’는 예측 가능하다. 다른 생물종과 달리 인간은 유난히 미숙한 아기로 태어나 오랜 성장기를 겪는다. 따라서 다른 영장류에 비해 훨씬 많은 자원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며 이를 생물학에서는 ‘부양투자’라고 부른다. “자식이 너무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자연선택의 영향으로 우리가 번식을 멈추는 대신 자식에게 집중할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번식 대신에 부양’이 중년이 떠안은 과제이자 존재 이유다.


그렇게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중년에 접어들면 흰머리가 생기고 주름살이 늘며 피부는 탄력을 잃게 되는가. 새 과제에만 집중하라는 의미란다.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애자 커플의 출산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자식을 낳을 가능성은 줄어들며 따라서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외모의 매력도 필요가 줄어든다. 불필요한 투자를 하지 않는 우리의 몸은 외모에 그만큼 덜 신경을 쓰게 된다. 게다가 생식활동이 줄어듦에 따라 더 적은 에너지를 소모하게끔 몸을 재구성하기 때문에 중년이 되면 기초대사량이 줄어든다. 살이 찌는 것은 그 때문이며, 이를 막으려면 나이를 한 살씩 먹을 때마다 하루기준 10칼로리씩 줄여서 섭취해야 한다.


좋은 소식도 있다. 보통의 상식과는 달리 중년의 뇌가 인지력이 가장 뛰어나다. 외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는 점차 느려지지만, 전반적으로 중년의 뇌는 좋은 기능을 유지한다. 중년의 뇌는 구술능력, 공간인식, 계산, 추리, 계획 세우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청년기의 뇌를 앞선다. 저자는 그 이유를 더 많이, 더 열심히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생각해서인 듯하다고 말한다. 즉 중년이 된다고 해서 더 영리해지거나 더 어리석어지는 건 아닐 테지만, 동일한 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신적 수단을 다양하게 바꿔본다는 데 강점이 있다. 그런 ‘다른 생각’은 중년이란 나이가 갖는 이중성 혹은 양면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진화적 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의 충고는 우리가 거기에 속박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게 된 이후에도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젊은 외모를 유지하려 애쓰고, 늦둥이를 낳는 시도도 하고, 젊었을 때 못해봐서 아쉬운 짓도 한번 저질러보라.”

 

13.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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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다뤘다. 알다시피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6-7종이다), 작중에 나오는 'nice'의 번역을 중심으로 세 가지 번역본을 골랐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 건, 혹은 대단한 건 개츠비, 아니 그의 본명인 개츠의 환상이라는 게 감상의 요지다. 이 환상은 곧 아메리칸 드림 자체이기도 하다.

 

 

 

한겨레(13. 11. 04) 위대한 건 개츠비의 ‘환상’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를 읽고 나면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어째서 ‘위대한’ 개츠비인가. 주인공의 이름대로 ‘제이 개츠비’라고 하거나 ‘개츠비와 데이지’라고 했어도 무방했을 작품이다. 정작 피츠제럴드는 아내와 편집자가 고른 ‘위대한 개츠비’란 제목을 막판까지도 꺼렸다는데, 그래도 그가 마음에 두었다는 ‘황금모자를 쓴 개츠비’나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보다는 훨씬 더 그럴듯한 제목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대신할 뻔했던 제목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에서 웨스트에그는 개츠비의 저택이 있는 지명이고, 트리말키오는 로마시대의 소설 <사티리콘>에 등장하는 벼락부자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화려한 볼거리가 되지만, 소설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건 벼락부자 개츠비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사치스런 파티다. 5인조 편성이 아닌 완벽한 오케스트라가 동원될 정도다.

 

단지 부를 과시하거나 기분을 내보려는 파티가 아니다. 개츠비는 만(灣) 건너편 이스트에그에 사는 첫사랑 데이지가 파티 소문을 듣고 찾아와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데이지와의 재회는 옆집 이웃이자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데이지와 친척뻘인 닉에게 부탁해 마련한 자리였다. 개츠비는 꿈에도 그리던 만남을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러워한다. “5년에 가까운 세월! 그날 오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에 미치지 못한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데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환상 때문이었다. 그의 환상은 그녀를 넘어섰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열림원)

 

데이지밖에 모르는 남자가 개츠비이건만 그의 환상은 놀랍게도 데이지를 넘어선다! 여기에 개츠비의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닉에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개츠비의 부모는 실패한 농사꾼이었다. 그는 한번도 그들을 부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열일곱 살에 ‘제임스 개츠’라는 원래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개명한다. 말하자면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적 자아’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기 이상 혹은 환상을 현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록 우연히 만난 벼락부자와 암흑가 거물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가 어릴 때부터 출세하기로 작정하고 철저하게 자기 계발에 애쓴 결과다. 개츠비판 아메리칸드림인 것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 아메리칸드림의 대미여야 했다. 그녀는 5년 전 그가 아직 출세하기 전에 처음 만난 ‘멋진’ 여자였다. ‘멋진’은 ‘나이스’(nice)의 번역인데, ‘우아한’(민음사)이나 ‘상류층’(문학동네)으로도 번역된다. 개츠비가 빈털터리라는 이유로 실연당한 걸 고려하면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다. 이제 자신 또한 상류층의 멋진 남자가 돼 돌아온 개츠비는 5년간의 공백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한다. 데이지에게는 톰 뷰캐넌과의 5년간의 결혼생활이다. 톰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해 달라는 개츠비의 요구에 데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요!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는 두 가지 환상에 도전한다. 처음엔 개츠비가 되는 것, 그리고 데이지의 완벽한 사랑을 얻는 것. 그 환상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고 또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진심이건 반어이건 위대한 건 개츠비가 아니라 그의 환상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13.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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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공지다. 푸른역사아카데미의 11-12월 강좌에서 '세계문학 다시 읽기'를 진행하기로 했다(신청은 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123).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에 견주어 제목은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2.0'이라고 붙여졌다(<이방인>과 <고도를 기다리며>는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에서 한번 다뤘던 작품이다). 내가 붙인 제목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여겨진다. 매주 한 작품씩 모두 8편을 다루게 되는데(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에 진행된다), 이 리스트는 내가 정했다. 언젠가 한번 읽은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참고하시길. 일정은 아래와 같다(수강은 월별로 하실 수 있다).

 

 

11월

 

1. 11월 04일_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2. 11월11일_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3. 11월 18일_ 카프카의 <변신>

 

 

4. 11월 25일_ 카뮈의 <이방인>

 

 

12월

 

1. 12월 02일_ 오웰의 <1984>

 

 

2. 12월 09일_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3. 12월 16일_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12월 23일_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1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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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책&(423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얼마전 개봉됐던 신작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관련서들을 둘러본 글이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의 책들을 알게 된 개인적인 소득이다.

 

 

책&(13년 10월호) 저패니메이션의 거장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벼랑 위의 포뇨>(2008) 이후 5년만에 신작 <바람이 분다>(2013)를 내놓고 은퇴를 선언했다. 1963년 다카하타 이사오와 도에이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내디뎠으니 50년 경력이다. 과거에도 은퇴를 번복한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73세의 나이를 은퇴 이유로 들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번복이 어려울 전망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건 ‘나이 든 노인의 욕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평균적으로 5년에서 7년의 시간이 소요되기에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 거장의 창작활동이 마무리되는 듯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애니메이션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을 이룬 것일까. 몇 권의 책을 길잡이 삼아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단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겠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의 『이미지의 제국』은 부제대로 ‘일본 열도 위의 애니메이션’의 위상과 역사, 대표 작가들을 소개한 책이다. 입문서를 겸할 수 있지만 서술은 상당히 깊이 있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태동과 성장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함께 대표작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제시한다. 동시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1960-70년대가 중요한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신화적인 세 작품으로 저자는 <우주 소년 아톰>과 <우주 전함 야마토>, 그리고 <기동 전사 건담>을 든다.

1963년에 처음 전파를 타서 약 4년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우주 소년 아톰>은 일본의 국민적 서사를 제공한 작품이다. 고도 경제 성장기였던 1960년대 일본에서 텔레비전은 국민적 미디어였고,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은 월트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 같은 상징성을 얻었다. 70년대 중반 TV시리즈로 방영됐지만 <알프스 소년 하이디>(1974)에 밀려 중도 하차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우주 전함 야마토>는 마스다 도시오의 극장판으로 1977년에 개봉돼 침체에 빠져 있던 일본 영화의 붐을 가져온 작품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 공군의 공격으로 침몰한 전함 야마토는 2199년 미래 시점에서 부활해 초토화된 지구를 배경으로 인류의 장래를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우주전함이 고도성장의 엔진을 단 일본의 비유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우주 전함 야마토>에 의해 촉발된 애니메이션 붐은 1979년 도미노 요시유키의 TV시리즈 <기동 전사 건담>에 의해 더 확대되는데, 이 작품은 <마징가 Z>(1972)로 대표되는 거대 로봇 장르가 <우주 전함 야마토>의 하드보일드한 우주 전쟁 서사와 결합한 형태였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고쳐 쓰려고 시도한 <우주 전함 야마토>와는 다르게 <기동 전사 건담>에서의 진정한 전쟁은 두 국가 사이에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다. 국가와 개인의 이 분열은 저패니메이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 데뷔작 <미래 소년 코난>(1978)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의 SF작가 알렉산더 케이의 소설 『놀라운 홍수』를 각색하여 TV시리즈로 만든 이 작품은 전쟁에 의한 문명세계의 멸망을 서사의 바탕에 깔고 있어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와 함께 ‘포스트묵시록 3연작’으로 불린다. 이들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은 미야자키는 1985년 지브리 스튜디오를 세우고 <이웃집 토토로>(1988),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의 화제작을 발표하면서 세계적 거장으로 떠올랐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에게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영화상 등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한 소개와 함께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는 책으론 시미즈 마사시의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와 무라세 마나부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숨은 그림 찾기』가 있다. 전자는 개성 있는 시각의 작품 해석을 제공하며, 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유기체적 세계관을 분석한다. 국내서로는 김윤아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현대 일본 신화 3부작’으로 묶으면서 이들 작품에 내재된 일본의 정치신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조명을 한다.

바깥의 평가와 비교해볼 수 있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생각이다. 그의 인터뷰와 기고문들을 모은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이하 출발점)』과 『미야자키 하야오: 반환점 1997-2008(이하 반환점)』은 거장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다(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그의 『미야자키 하야오: 도착점』이 더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출발점』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에서부터 좋아하는 책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망라하고 있다면, 『반환점』은 네 편의 대표작에 대한 인터뷰가 중심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마디로 ‘잃어버린 세계로의 동경’이라고 말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이 공상에 세계에서 놀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 바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거장의 생각이다.

 

1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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