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카뮈의 <전락>에 대해 적었는데, 이로써 카뮈의 주요작에 대해서 한번씩 다룬 듯하다. <전락>은 <이방인>이나 <페스트>와 비교해선 번역본이 많지 않다. 내가 읽은 건 창비판, 책세상판, 범우사판, 3종이다. 읽은 순서는 역순이다...

 

 

 

한겨레(13. 09. 02) 고해하는 재판관 클라망스의 회한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가운데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고등학생 때 읽은 <이방인>이나 <페스트>가 아니라 대학생 때 읽은 <전락>(1956)이다.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당시엔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나와 있었다)를 읽은 뒤여서 더 흥미로웠는지 모른다. 두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같이 떠올리지 않는다는 게 불가능할 만큼 서로 닮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화자의 장광설로 채워진 형식을 비교해보더라도 그렇다.

 

도스토옙스키의 영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악령>의 각색가였던 카뮈는 무대에 올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이반 카라마조프 역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사상적으로 이반의 대척점에 놓이는 조시마 장로가 죽기 전에 남긴 설교의 한 대목. “당신은 어떤 사람의 심판자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아니 자기야말로 다른 누구보다도 그 범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는 아무도 죄인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심판자가 될 수 있다.” 요는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인정할 때 심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전락>의 주인공 클라망스가 자처한 형상 아닌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술집에서 자신을 ‘고해(告解) 판사’(범우사), ‘재판관 겸 참회자’(책세상), ‘속죄판사’(창비)라고 소개하는 클라망스는 원래 파리의 유능한 변호사였다. 육체를 향유하도록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그는 항상 정상에 오르고자 하는 성향을 지녔으며 약간은 초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우쭐대며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우월감은 성격의 기본 옵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센강의 한 다리를 건너던 중에 그는 등 뒤에서 웃음소리를 듣는다. 깜짝 놀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환청을 들은 것이다. 대개 그렇듯이 그의 환청은 그가 억압한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 그날 저녁보다 2~3년 전에 그는 센강의 또다른 다리를 건너던 중 다리 난간에 허리를 굽히고 있던 젊은 여자를 본다. 외면하고 계속 가지만 아니나 다를까 물에 첨벙하고 뛰어든 소리가 들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비명이 잦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라고 자위해볼 따름이었다.

 

그렇게 상기하게 된 사건은 그에게 오점, 곧 제거할 수 없는 얼룩이자 상처가 된다. 이 상처는 그의 표식이 돼 사람들이 곧 그를 심판대에 올려세우고 마치 식인어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을지 모를 일이었다. 인간은 모두가 재판관이고 남의 눈에는 죄인이기에 그렇다. 더는 ‘재판관’(판사)의 지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클라망스는 방책을 고안해낸다. 그건 남들보다 먼저 자신을 심판대에 올려 단죄하는 것, 곧 자발적 속죄자, 참회자가 되는 것이었다. 타인의 심판을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선택이라고 할까.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었지만 수년 동안 억눌러 왔던 말을 털어놓는다. “오, 아가씨, 이번에는 내가 우리 둘을 모두 다 구원할 수 있도록 한 번 더 몸을 내던져주십시오!” 물론 이건 클라망스의 회한이자 유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기회가 종종 주어지는 듯하다. 혹은 억지로 기회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13. 09.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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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50호) 특집 '출판전문지가 사는 길'의 한 꼭지를 청탁받아 쓴 글을 옮겨놓는다. 주제는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잡지를 받아보니 '나는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란 제목이 붙여졌는데, 머리글은 '책에 살고 책에 죽는 서평가'다. 아마 두 가지를 두고 왔다갔다 했던 듯싶다. 나대로는 '서평가는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붙여놓는다. 공식적으론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와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현암사, 2012), 두 권의 서평집을 냈지만, 특집의 다른 꼭지 글을 보니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0)도 서평도서로 분류돼 있다. '독서에세이'가 더 적당할 듯하다. 아무튼 터울로 봐서는 내년쯤에 세번째 서평집을 내게 될 것 같다...

 

 

 

기획회의(13. 08. 20) 나는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이란 주제의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일단 떠넘기기가 어려웠다. 누구누구가 더 적임자라고 ‘대타’를 내세울 수 있었다면 빠져나가기가 용이했겠지만, 남들이 다 ‘현역’ 서평가로 알고 있는 처지라 둘러댈 수가 없었다. 물론 서평가로 살아가는 건 아니라고 정색할 수는 있었겠다. 엄밀히 말하면 내게 서평쓰기는 생계의 방편이 아니라 책값의 방편이니까. 게다가 ‘시인’처럼 명예를 드높여주는 직함도 아니기에 명함에 ‘서평가’라고 박아놓지도 않았다(그렇다고 명함에 다른 직함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결국은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하는 자리에 이렇게 내몰리게 됐다. 하긴 '서평가'란 호명에 구시렁거리는 일도 서평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일부인지 모를 일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책 얘기를 좋아했을 뿐이다. 전공은 러시아문학이었지만, 철학책을 취미로 읽었고 영화비평을 기웃거렸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공간이 열리면서 책에 관한 이런저런 잡담과 촌평이 조금씩 눈길에 올랐다. 다음카페 비평고원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알라딘 블로그로 거점을 옮겼고 북매거진 <텍스트>에 서평류의 글을 싣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7년쯤 “인터넷상을 어슬렁거리는 책벌레들”을 가리켜 한겨레 고명섭 기자가 ‘인터넷 서평꾼’이라고 호명했고, ‘로쟈’는 그 대명사가 됐다(특이하게도 '인터넷 서평꾼'이란 호칭은 내게만 붙어 다닌다). 이후에 시사주간지와 일간지 등에 서평과 칼럼을 연재하는 생활이 수년째 이어지면서 두 권의 서평집까지 출간했고, 서평가란 직함까지 얻게 됐다. 무슨 일이든 오래 하다보면 어떤 직함이건 얻기 마련이다. 하지만 잘해서 오래 하는 게 아니라 마땅한 후임이 없어서 오래 하게 됐다고 가끔 투덜거린다(왜 없는지는 ‘책값의 방편’이란 대목에서 추측해보시길).


그래도 서평가라고 하면 제법 출세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혹은 고작해야 자투리 서평을 쓰는 주제에 무슨 서평가 행세를 하느냐고 못마땅해 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나로선 언제라도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할 용의가 있다. 서평가는 내게 어떤 역할이지, 결코 천직이 아니다. 부러워하는 이들은 나보다 열심히 할 사람들이고, 못마땅해 하는 이들은 나보다 잘할 사람들이다. 이들이 조금만 용기를 내거나 엉덩이의 무거움을 떨쳐낸다면, ‘서평계’의 앞날이 지금보다 훨씬 창창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나는 덕분에 책을 읽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를 한껏 누리면서 ‘서평가 이후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게 서평가로서 갖는 꿈이다.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  

 

서평과 비평의 차이
서평가를 꿈꾸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직함으로 활동하는 이상 나름대로의 서평관이 없을 리 없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의식은 갖고 있어야 하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서평은 비평의 한 갈래에 속할 터이지만 언제부턴가 과거와는 다른 위상을 갖게 됐다. 달라진 배경으로는 두 가지를 짚어볼 수 있다. 일단 어느 때보다도 많은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점. 누구도 더 이상 모든 책의 독자를 자임할 수 없게 됐다. 어떤 책에 대한 독서는 동시에 다른 책에 대한 비독서를 뜻하는 게 오늘의 독서 현실이다. 어떤 타개책이 있는가. 필독할 만한 책을 서로가 걸러주고, 동시에 미처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해선 핵심이라도 챙겨놓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서평의 역할이다.  


서평은 어떤 책이 읽을 만한가를 식별해주는 데 일차적인 의의가 있다. 반면에 비평은 어떤 작품을 재발견하고 재평가한다. 서평은 일독의 권유이지만 비평은 재독의 제안이다. 서평이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염두에 둔다면, 원칙적으로 비평은 한번 읽은 독자를 상대한다. 만약 한번 읽은 독자가 많지 않다면, 즉 독서 경험이 공유되지 않는다면 비평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바로 오늘의 상황이 그렇다. 독서량이 현저하게 부족한 마당에 독서 경험의 공유까지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 결과 한국에는 비평 독자보다 비평가 수가 더 많다는 웃지 못 할 얘기까지 나온다. 한마디로 그렇게 비평의 역할이 쇠퇴하는 가운데 서평의 역할은 증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한편 서평의 역할 증대는 온라인서점에 독자 리뷰 공간이 마련된 것에도 힘입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올리는 활동이 독서활동의 자연스런 일부가 되면서 서평쓰기도 대중화되었다. 아무래도 진입장벽을 가질 수밖에 없는 비평과 달리, 서평은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제 몫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영역이다. 각자 자기가 선호하거나 일반 독자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분야에서 책을 읽고 그 정보나 판단을 공유하는 ‘품앗이 서평’이 가능한 것은 그 때문이다. 게다가 서평은 분량 부담에서 자유롭다. 어떤 책이 일독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발 빠르게 일별해주는 것이 서평의 핵심적인 기능이기에, 40자평, 100자평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 분량의 글을 누구도 비평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서평이라 부르는 건 결코 억지가 아니다. 오히려 서평은 너무 길어질 경우 그 의미가 반감된다. 적은 분량을 통해서 책에 대한 평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면 서평으로선 최적이다.


자격불문, 분량불문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서평을 쓸 수 있다면 굳이 서평가가 필요할까? 그렇다, 온라인에서라면 필요하지 않다. 전문가와 대중의 구분조차도 무의미해진 지 오래인 게 인터넷이라는 집단지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터넷 서평꾼들의 지치지 않는 활발한 활동만이 기대될 뿐이다. ‘로쟈’는 좀 유명한 인터넷 서평꾼 정도이지 그 대명사일 수 없다. 하지만 오프라인은 사정이 좀 다르다. 그 영향력이 점차 줄어가는 추세라지만, 일간지와 주간지 등의 서평란에는 출판담당 기자 외에도 서평가나 북칼럼리스트, 출판평론가 등 유사 직함의 필진이 아직 필요한 상황이다. 나로선 그러한 수요에 부응하는 활동을 6-7년째 해오고 있는데,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자칫 10년도 넘어갈 기세다.

 

 

서평가, 책만큼 대단하고 책만큼 하찮다
소위 서평가는 어떤 일을 하는가? 현재 내가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 등에 쓰고 있는 서평은 대략 원고지 8-12매 정도의 분량이며 보통은 신간으로 나온 책 한권을 다룬다. 그런 서평이나 북칼럼을 평균적으로는 1주일에 한두 편, 마감이 몰릴 때는 서너 편 정도 쓴다(지면에 쓴 글을 옮겨놓는 경우도 많지만, 온라인에서 인터넷 서평꾼으로 활동하는 건 별도의 일이다). 지정된 책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기도 하지만 보통 서평도서는 스스로 선택한다. 서너 권의 후보도서를 미리 골라서 중복여부를 확인한 후에 최종적으로 그중 한권을 골라 쓴다. 1주일에 두 편을 쓴다면 산술적으로는 6-8권 정도를 일단 손에 들 수 있어야 한다. 물리적으로는 다 읽을 수 없지만 적어도 책의 실물은 확인하려고 한다.


그렇게 고른 책을 4-5시간 안에 읽고, 3-4시간 안에 원고를 작성한다. 급하게 쓸 경우에는 2시간 안에 원고를 완성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3시간가량이 소요된다. 그러면 평균적으로 원고지 매당 1만원의 원고료를 받는다. 전체적으로 읽고 쓰는 데 8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원고 노동자로서 서평가의 일당은 10만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일당은 통상 도서구입비로 쓰인다. 서평이 ‘책값의 방편’이란 얘기는 그래서 나온다. 외국에는 전업 서평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서평가가 직업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적절한 명칭은 ‘서평 알바’다).  


그렇다면 서평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명감으로 산다고 적으려다가 어쭙잖아서 자기만족으로 산다고 고친다. 책에 파묻혀 지내는 게 소원인 분이라면 서평가는 최적의 소임이다. 좋은 책을 읽고 널리 알리는 일에서 보람을 느낀다면 서평가로서 적격이다. 요컨대 책에 살고 책에 죽고 하는 것이 서평가다. 그게 대단하다면 딱 책이 대단한 만큼이고, 하찮다면 딱 책이 하찮은 만큼이다.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묻는다면 적어도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은가, 정도로만 답하겠다. 조금 범위를 좁혀서 출판계에는 얼마만큼 도움이 되느냐고 질문한다면 대답은 ‘글쎄’다. 나대로는 ‘독서 전도사’ 역할도 꽤 오랫동안 해왔다고 자임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한국인의 평균독서량은 계속 떨어지고 있고 출판시장도 지속적으로 하향세다. 그런 고민을 떠안느니 그래, 그냥 ‘자기만족’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13.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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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40호)에 실을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북한 관련서 가운데 황재옥의 답사기 <국경을 걷다>(서해문집, 2013)을 골라서 읽고 적었다. 북한학 전공인 저자의 책으론 번역서로 <북한의 기아>(다할미디어, 2002)와 저서로 <북한 인권 문제, 원인과 해법>(도서출판선인, 2012)가 더 있는데, 기아 문제에 관심이 생겨 <북한의 기아>는 주문해놓은 상태다. 저자는 국제구호기관인 월드비전의 부의장과 미국 평화연구소 상임연구원을 지낸 나초스로 1995년~1999년에 발생한 북한 기아에 대해 쓴 것이다. 

 

 

 

주간경향(13. 08. 27) 북·중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나

 

며칠 전 여름양복 상의의 품질표시를 무심코 꺼내보고 놀랐다. 제조사는 한국 업체인데, 제조연월이 ‘2010년 5월’, 제조국명은 ‘Made in DPRK’로 찍혀 있었다. 개성공단에서 만들어진 ‘북한산’이었던 것이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나라 북한의 존재를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 놀람이라고 할까. 안 그래도 가동이 중단된 지 넉 달여 만에 개성공단 정상화에 대한 합의가 최근 남북 당국간에 이루어진 터여서 새삼스레 북한을 다룬 책에 눈길이 갔다. 북한 연구자 황재옥의 북한 국경 답사기 <국경을 걷다>(서해문집)이다.

저자는 2012년 8월, 전임 통일부 장관 및 동료 학자들과 함께 8박 9일 동안 북한과 중국의 접경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압록강 하류에서 상류를 거쳐 백두산까지, 그리고 백두산 정상에서 두만강 상류를 거쳐 하류까지 전장 1376.5㎞에 이르는 북·중 국경선을 종주하는 여정이었다. 실제 이동거리는 2800㎞, 곧 7000리나 됐다고 한다. 남북관계가 교착된 상황에서 북·중관계가 어떤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는지, 변방이긴 하지만 북한 지역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감지해보는 게 답사의 목적이었다. 무엇을 볼 수 있었을까.

세 가지 핵심을 미리 간추리면, 첫째, 중국 변방, 특히 그동안 낙후된 동북 3성에 대한 중국 쪽의 투자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투자의 목적은 물론 북한과의 교역·교류를 확대하는 것이다. 둘째, 중국의 ‘동북공정’이 학문적 단계를 넘어서 실질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기획이 동북공정인데, 2012년 7월에 지안에서 발견된 ‘제2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조사·연구에 동북공정 참여학자를 대거 투입한 사실에서도 중국의 의도를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셋째, 중국의 경제발전과 맞물려 북한 주민들의 생활상도 예전보다 나아진 것으로 보였다.

물론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큼 북·중관계는 북한의 대외관계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최근의 북·중관계는 과거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양상을 보여준다. 그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곳으로 저자는 황금평 특구를 지목한다. 위화도와 함께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섬이 황금평인데, 이 지역이 경제특구로 지정돼 2011년 말부터 개발이 시작됐다. 공개된 공동개발 총계획에 따르면 중국은 여의도 면적의 약 1.5배에 달하는 황금평을 북한으로부터 100년간 임차하고 매년 5억 달러의 임대료를 건네기로 했다. 중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중국의 대북진출 행보도 가속화하고 있는 양상인데, 이러한 현실이 우리와는 무관한 ‘남의 나라’ 일로만 볼 수 있는지 저자는 우려한다.

북·중간의 이런 긴밀한 교류·협력 분위기 때문에 환기하게 되는 것은 중국의 ‘항미원조’(抗美援朝), 곧 한국전쟁 참전이다. 1950년 10월, 중국은 총사령관 펑더화이의 지휘하에 세 차례에 걸쳐 무려 180만명을 참전시켰다. 특히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펑더화이의 비서로 참전했다가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전사했는데, 그 유해가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에 안장돼 있다고 한다.

 


중국 최고지도자의 장남이 북한을 도우러 왔다가 전사해 북한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북한은 중국에 크게 빚을 진 거”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상기시키려는 듯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한다며 접경의 단둥에는 펑더화이 동상을 세우고, 허커우에는 마오안잉 동상을 세웠다. 북·중 경제협력을 재개하는 시점에서 중국이 양국의 혈맹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 의도를 품은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는 막혀 있는 상황에서 중국인들의 대북사업은 활기를 띠며 큰 돈을 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저자는 북한 경제가 중국에 점점 예속돼가는 것은 아닌가라는 우려를 표한다. 비단 저자만의 우려는 아닐 듯싶다.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더 넓어져야 한다는 점을 이 답사기는 깨닫게 해준다.

 

13. 0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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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책&(421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이달의 주제는 '의사들'로 골랐다. 조슈아 퍼퍼와 스티븐 시나의 <닥터 프랑켄슈타인>(텍스트, 2013)이 출간된 게 계기였는데, 관련서를 찾다가 아툴 가완디의 책들을 발견한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책&(13년 8월호)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

 

한때 잘못 이해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에서, 실은 ‘예술’이 ‘의술’을 뜻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더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짧고, 의술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까마득하구나.” 곧 ‘의술의 길은 멀다’라는 게 히포크라테스의 진의에 가깝다. 사정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히포크라테스의 후예인 의사들은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낭독하며 의사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의학은 완벽하지 않으며 의술의 길은 여전히 멀다. 그런 조건에서 의사의 역할은 무엇이고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이달에는 의사들의 세계를 다룬 책을 몇 권 들여다보기로 하자.

조금 파격적인 서두는 어떨까. 미국의 법의학자 조슈아 퍼퍼와 스티븐 시나가 쓴 <닥터 프랑켄슈타인>(텍스트, 2013)은 의사들의 어두운 행각을 다룬 ‘의료 잔혹사’라고 할 만한 책이다. 원제 자체가 ‘의사는 언제 죽이는가(When doctors kill)’이다. 특별한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의 의사들은 집단학살과 생체 실험에서 무수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그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미국의 의사들도 사회적 약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윤리적 실험으로 많은 이들을 다치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

 

 


가령 1943년 미국 신시내티 대학병원의 연구원들은 ‘차가운 온도가 정신이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서 정신장애 환자 16명을 120시간 동안 영하 1도의 냉장실에 가두었다. 뉴욕대학의 솔 크루그먼은 1956년부터 1972년까지 한 공립학교에 다니는 정신이상 아동을 대상으로 간염 감염 연구를 진행했다. 아이들에게 감염된 혈청을 주사하거나 간염 환자의 배설물을 먹여 의도적인 감염실험을 하면서도 부모에게는 간염 백신을 주사한다고 속여서 동의서를 받아냈다. 그럼에도 크루그먼은 1972년에 미국 소아과학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한다. 그나마 이런 정도는 책에서 언급된 온갖 ‘범죄’에 비하면 약소한 사례에 속한다. 그렇다고 고발이나 폭로가 저자들의 의도는 아니다. “그저 의사가 언제, 어떻게 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지 그 정황을 정확히 전달하고자 할 뿐”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닥터 프랑켄슈타인’만이 의료살인을 저지르는 건 아니다. 좋은 의사들도 과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때론 나쁜 의사가 될 수 있다. 아툴 가완디의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소소, 2003) 부제대로 ‘볼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이다. 외과 레지던트로서의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저자는 현대의학이 아직 “불완전한 과학이며, 부단히 변화하는 지식, 불확실한 정보,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모험이며, 목숨을 건 줄타기”라고 담담히 인정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의사도 초인이 아닌 이상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태만에 빠질 수도 있다.

 

저자가 드는 사례 중 하나는 정형외과 의사 행크 굿맨이다. 솜씨가 뛰어난 최고의 정형외과의였고 의대생들이 주는 교수상까지 받았지만 과중한 스케줄에 노출되면서 그는 차츰 의료에 무감각해졌다. 가장 바쁜 의사로서 주당 100시간까지 일을 했던 굿맨은 점차 사소한 일정 변동에도 참지 못하게 됐고 환자들에게 어이없는 결정을 내리면서 의료소송에 연이어 휘말리는 ‘평범한 나쁜 의사’가 됐다.

 

 


그렇다고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러한 의료 현실은 더 나아져야 하고 실제로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 아툴 가완디는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하다>(동녘사이언스, 2008)에서 의료현장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으며 좋은 의사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는지 살핀다. 그는 의료계가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핵심요소로 성실함과 도덕적 투명성, 그리고 새로운 사고를 든다. 외과의 수련과정을 마치고 인도에 교환의사로 간 저자가 하루는 중증 뇌수종(뇌척수액이 정상적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두개골을 팽창시키고 뇌를 압박하는 질환)에 걸린 한 살배기 아이를 보게 된다. 긴급한 수술이 필요했지만 신경외과 전문의도 없고 수술 장비와 무균튜브도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외과의들은 열악한 도구를 이용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을 시작했고 동네시장에서 모사품 튜브를 소독하여 무균튜브를 대신했다. 그렇게 과감한 결단과 사고의 전환으로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좋은 의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의사’라고 하면 199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국경없는의사회’도 빼놓을 수 없다. 2년간 직접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신창범의 <국경 없는 괴짜들>(한겨레출판, 2013)은 전 세계 분쟁지역과 자연재해 지역에서 아무런 차별 없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구호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국경없는의사회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더불어 베네수엘라의 공공 의료혁명을 다룬 스티브 브루워의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검둥소, 2013)은 ‘좋은 의사’를 넘어서 ‘좋은 의료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사회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요시타 타로의 르포르타주 <의료천국, 쿠바를 가다>(파피에, 2011)와 함께 읽어볼 만하다.

 

13. 0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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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프레시안 books'에 실린'3인 1책 수다'를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809150602§ion=04 참조). '납량특집'으로 다루게 된 작품이 제임스 엘로이의 (알에이치코리아, 2013)이다. 영화는 흥미롭게 봤지만 하드보일드 느와르 장르에 대해선 과문하다 보니 김용언 기자의 설명을 듣는 청문회 형식이 됐다. 김용언 기자는 <범죄소설>(강, 2012)의 저자이기도 하다...

 

 

 

프레시안(13. 08. 09) 천사들이 노래하는 '죽음의 도시', 연쇄 살인마 알고 보니… 

 

김용언 : 예전에 무척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고 현대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에서 손꼽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주저 없이 을 8월의 '납량 특집' 책으로 골랐습니다. 그런데 일단 분량이 어마어마하고 워낙 장대한 세월에 무수히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인지라, 제임스 엘로이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더라고요. 아무래도 오늘은 미스터리 장르의 팬인 제가 말을 많이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에 대한 선생님들의 첫인상이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이현우 : 예전에 봤던 커티스 핸슨 감독의 동명 영화만 믿고 골랐다가….(웃음)

이권우 : 전 그나마도 다른 영화와 착각했었습니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원작인 줄 알았거든요.(웃음)

 



김용언 : 커티스 핸슨 감독의 영화는 소설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덜어낸 버전인데요, 이 영화는 199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받았지요. 이 정도 분량의 소설을 2시간 20분짜리로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당연히 탈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각색의 모범으로 불리는 작품이에요. 그에 비해 제임스 엘로이의 또 다른 대표작 <블랙 달리아> 같은 경우,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2006년 영화화했지만 설득력 있는 각색에 완전히 실패한 경우입니다.

은 제임스 엘로이의 'L.A. 4부작' 중 한 편입니다. <블랙 달리아>가 1편, 이 작품은 3편이에요.

 

 

이권우 : 2편은 뭐에요?

김용언 : 이건 번역이 안 되었는데요. <빅 노웨어(The Big Nowhere>라는 작품이고, 4편이 <화이트 재즈(White Jazz)>입니다. 1940년대 말에서 50년대 말의 L.A.를 배경으로 한 범죄소설 시리즈입니다.

이권우 : 연작은 아니겠군요.

김용언 : 예, 그런데 살짝 겹치는 인물은 있어요. 예를 들어 <블랙 달리아>에 나오는 경찰 고위 간부 밀러드가 에도 등장합니다. 부패한 경찰 더들리 스미스와 대립각을 세우다 심장마비로 죽는 강직한 경찰이지요. 또 의 에드먼드 엑슬리와 더들리 스미스는 <화이트 재즈>에도 등장한다고 해요. 이들 작품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L.A.가 어떤 지옥도였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이권우 : 로스앤젤레스는 도시 이름을 잘못 정한 것 같아요. 아니, 잘 정한 건가?(웃음)

김용언 : 천사들의 도시라니, 무척 역설적인 이름이죠.

살해당한 어머니를 위한 글쓰기
이권우 : 그러니까 에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여성들이 폭력에 노출되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경찰 버드가 엘로이 자신의 모습인 거지요? 실제 작가가 10살 때 어머니가 살해당했는데 미제 사건으로 남은 걸 비춰봐선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김용언 : 네, 맞습니다. 제임스 엘로이의 자전적 논픽션 <내 어둠의 근원>(이원열 옮김, 시작 펴냄)을 보면 그의 과거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1958년 엘로이의 어머니가 끔찍하게 살해당했을 무렵, 어차피 별 볼일 없는 서민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비슷한 시기 유명한 갱스터의 살인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아예 주목을 받질 못했어요. 그 갱스터는 에도 등장하는 실존 인물인데요, 배우 라나 터너와 사귀는 이탈리안 갱스터 자니 스톰파나토를 기억하실 겁니다. 라나 터너의 딸이 그를 죽여 버리는 바람에 미국 전체가 들썩거렸고, 그 때문에 엘로이의 어머니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지요.

어머니와 그런 식으로 헤어지고 난 경험이 소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는 뻔합니다. 엘로이는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술과 마약에 절어 청년기를 보냈어요. 결국 재활에 성공한 뒤 독학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죠. 그는 일생 내내 자신을 괴롭힌 사건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어머니 사건을 몇 십 년 만에 다시 들춰보며 마치 자신의 소설 속 탐정처럼 치열하게 추적해갑니다. 그 내용이 <내 어둠의 근원>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요.

<블랙 달리아> 역시 어머니 사건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47년 벌어진 무명배우 엘리자베스 쇼트 살인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죽기 10년 전 쯤 벌어진 이 사건에 엘로이는 어린 시절부터 끈질긴 집착을 보였다고 합니다. 말할 수 없이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엘리자베스 쇼트 역시 엘로이의 어머니처럼 복잡한 남자관계 때문에 오히려 용의자를 찾기 어려웠고 호기심 어린 스캔들의 대상으로만 떠돌았지요. 엘로이는 <블랙 달리아>에서 극화한 엘리자베스 쇼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되살려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블랙 달리아>의 서문에는 아예 "어머니, 스물아홉 해가 지난 지금에야 이 피 묻은 고별사를 바칩니다"라고 쓰기도 했어요.

이권우 : 제임스 엘로이의 소설을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원래 이렇게 길고 복잡한 스타일인가요?

김용언 : 네.(웃음) <블랙 달리아>도 수많은 주인공들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두뇌 회전이 필요한 작품입니다.

이현우 : 이게 제임스 엘로이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하드보일드 누아르 장르가 일반적으로 이런 스타일인지 궁금하네요.

 

 

김용언 : 하드보일드가 대체로 이런 스타일이긴 한데, 엘로이가 또 강박적으로 핍진성을 따지면서 무척 자세하게 모든 것을 역사지리학적으로 기술하려는 작가인 것도 맞아요. 아마 똑같이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다룬 작가로는 <안녕, 내 사랑><빅 슬립>(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펴냄)의 레이먼드 챈들러가 원조 격일 텐데, 엘로이 소설은 챈들러 소설보다 서너 배는 더 복잡한 것 같아요.

이현우 : 엘로이가 챈들러를 깎아내렸던데요.(웃음) 본인이 훨씬 더 잘 쓴다고 자부하면서.

김용언 : 하지만 제 생각엔 챈들러를 깎아내릴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웃음) 두 사람 스타일이 굉장히 비슷하거든요.

L.A.의 폭력의 역사
이권우 : 지나치게 꼬이고 복잡한 소설인데, 이 장르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마저 너무 불친절한 건 아닌가요?

이현우 : 리뷰를 몇 개 찾아보니까 은 한 달 동안 읽는 소설이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하지만 그 동안 내내 즐겁게 몰입하며 읽는다고 합니다. 이건 태도 문제인 듯 싶어요. 복잡하기 때문에 책장을 덮는 게 아니라, 복잡하기 때문에 아주 꼼꼼하고 주의 깊게 읽게 되는 거지요. 충성도가 높은 독자를 위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권우 : 워낙 등장인물이 많고 긴 시간 동안 벌어지는 얘기다보니, 아예 계보도를 그려서 책 앞에 붙였다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워낙 작가가 인물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때문에, 그 특징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흐름을 따라갈 순 있더라고요. 하지만 결코 편한 스타일은 아니지요. 장르소설 독자가 아닌 입장에선 책을 읽는 내내 방해물이 많다는 느낌이었어요. 미스터리 장르 팬들은 이런 소설에 왜 호감을 갖는지 궁금합니다.

김용언 : 특히 현대 하드보일드 미스터리가 대체로 방대한 인물과 사건을 다루는 경향은 분명히 있습니다. 범죄를 통해 어떤 사회의 초상화를 완성하려다보니, 현대사회의 복잡한 측면을 의도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특징은 공통적이에요.

제 생각엔 이렇습니다. 의 세 주인공, 다혈질의 버드와 부잣집 도련님 에드먼드, 할리우드와 친밀한 잭 모두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과 상처가 있습니다. 같은 L.A. 경찰국에 근무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겉돌기만 하던 이 세 사람이 '밤부엉이 커피숍' 살인사건을 계기로 어쩔 수 없이 결합합니다. 각기 다른 목적이 있었지만, 몇 년 동안 '밤부엉이 커피숍' 이면의 거대한 음모를 추적하다보니 인정하고 싶지 않던 상처를 서로에게 노출시키고, 결국 어떻게든 극복하게 되지요.

그 방식이 사실 되게 폭력적입니다. '악에는 악으로'의 공식인데, 그런 폭력적 희생제의를 통해 사건 해결과 스스로의 상처 치유를 동시에 성취합니다. 그 결말이 아주 깨끗하고 정의로운 해결이 아니고, 심지어 경찰 내부의 근본적인 부패의 핵심을 제거하는 데에는 실패하기까지 하죠. 그런데 제 생각엔, 그런 개운하지 못한 결말마저도 작가가 집요하게 추구하는 핍진성의 측면과도 잘 맞는 것 같아요.

 



사회학자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경우 L.A.의 역사를 기술한 책 <수정의 도시(City of Quartz)>에서 L.A.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로 제임스 엘로이를 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엘로이가 'L.A. 4부작'을 통해 "현대 L.A.의 역사를 성범죄와 악마적인 음모, 정치적 스캔들의 연속체로서, 하나의 지도로 완성시킨다"라고 평가하면서 "여기서 L.A.는 어떤 희망이나 빛도 남아있지 않고, 악은 법의학적인 진부함이 되어버렸다"고 썼어요. 그러니까 결말에 이르러서는 어떤 분노조차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과도한 부패가 로스앤젤레스 이곳저곳에 만연해 있다는 점을 적시한 작가라는 거지요. 게다가 80년대 말에 처음 등장한 'L.A. 4부작'이 1950년대 L.A.를 배경으로 하는데, 80년대 레이건 시대의 부패에 대한 작가의 환멸이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다는 지적도 해요.


에서도 디즈니랜드적인 공간이 계속 강조가 되잖아요. 에드먼드의 아버지 프레스톤과 월트 디즈니 같은 인물인 레이먼드 디털링이 건설한 꿈과 환상의 놀이공원 '드림 어 드림랜드'가 마지막에 이르러 무너지고, 아버지들은 전부 자살하며 끝장나지요. L.A.가 서부의 사막 위에 지어진 환상의 결정체 같은 도시라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 소설 속 디즈니랜드적인 공간이 부서지는 건 그런 환상의 파멸에 대한 명징한 비유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부분의 집단 자살에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웃음)


(...)

 

13.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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