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의 북섹션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과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의 '한국 공습'에 관한 기사다. 지난 월요일에 전철에서 읽었는데, 두 꼭지로 저널에 소개된 기사들 가운데 가장 충실하고 유익하기에 챙겨놓을 만하다.  

시사인(08. 03. 04) 내몰린 자들이야말로 체제의 얼굴이다

올해는 유럽의 철학자 아감벤과 랑시에르의 저작이 한국에 도착한 원년으로 기록될 만하다. 어느 전문지에서는 아예 ‘한국 공습’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상륙을 알렸다. 유럽은 1990년대 후반부터 이들이 제기한 논제로 떠들썩했거니와 그 풍문은 한국에도 일찌감치 알려졌다. 정작 그들의 주요 저작은 제대로 소개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2004년 이후에는 ‘왜 그들의 저작이 번역되지 않는지 의아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 사이 젊은 연구자가 알아서 번역 작업에 착수해 그 내용이 사이버 공간에 돌아다니기도 했다. 늦었지만 거세다.



올해 쏟아져 나올 두 철학자의 번역물은 줄잡아 10여 편에 이른다. 먼저 선을 보인 것은 자크 랑시에르의 저작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펴냄)를 비롯해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펴냄)이 출간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의 저작 <호모 사케르> 1권(새물결 펴냄)도 첫 테이프를 끊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통해 한국에 첫 발을 디딘 랑시에르는, 반목의 철학자 혹은 불화하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평등의 옹호자로도 알려졌다. 기회의 평등이 아니다. 오히려 기회의 평등이란 무한경쟁과 그로 인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될 뿐이라는, 근본 태도를 취한다.



근대국가의 폭력 혹은 무능력에 대한 성찰
랑시에르는 1970년대에 일찍이 자신의 스승인 알튀세르를 ‘기성 엘리트 권력의 옹호자’라고 비판하면서 떠들썩하게 절연했고, 이후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활발한 저작 활동을 벌였다. 그는 끊임없이 정치와 철학을 말하지만, 전통 의미의 정치철학자는 아니다. 오히려 기성의 정치철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를 품평 대상으로 삼는다고 평가받는다. 

이를테면 그는 사람들이 보통 ‘정치’라고 받아들이는, 분배에 관한 합의 절차가 사실 정치가 아닌 ‘치안(Police)’에 속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치안은, 협의의 질서 유지뿐 아니라 구성원에게 몫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가 행하는 모든 활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그런 분배의 과정이란, 이미 분배받을 권리를 인정받은 사람이 자기 몫을 찾아가는 것일 따름이다. 분배 방식을 놓고 논란할 수 있겠지만, 누가 분배받을 자격이 있는가는 묻지 않는다.   

랑시에르가 보기에 본래 의미의 진짜 정치란, 기성의 관점에서 볼 때 공동체에 별반 기여한 것이 없어 자기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이 ‘뻔뻔스럽게도’ 평등주의 논리에 입각해 자기 몫을 주장할 때 발생한다. 몫이 없는 자들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아 공동체를 완전히 새로운 원리에 따라 재구성하도록 강제하는 ‘범법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민주주의라는 것 자체가 기득권자에게는 불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등장했음을 환기시킨다. 데모크라시의 어원인 데모스, 즉 평민이 귀족 정치인이나 과두 독재자와 동등한 자격을 요구하고 나선 과정을 보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데모스로부터 폴란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배제된 자들이 통치하는 엘리트에 항의했을 때, 그들은 단지 임금 인상이나 작업 조건 따위 드러난 요구뿐 아니라 동등한 상대자로 인정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 진정한 목표였다고 말한다. 달리 보자면 폴란드의 기성 지배층인 노멘클라투라가 자유노조(솔리데리티)를 동등한 상대자로 받아들여야 했던 그 순간 지배층은 이미 패배했다고 본다. 

그가 현대 사회에서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정체적 주체로 인정받은 노동계급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미 발언권을 얻은 노동자 외에도 정당하게 자신을 대변하지 못하는 다양한 특수집단, 사회에서 배제되어 있으나 자기들의 곤경을 정치화하는 데 더더욱 가로막혀 있는 ‘이주자’ 등에게 눈을 돌린다. 그들이 말을 해도, 사회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혹은 듣지 않는다. 목소리가 없는 자인 것이다.



한 사회에서 말할 공간이 없으므로 지워진 것으로 간주되는 ‘배제된 자’에 관한 랑시에르의  관심은,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aer)’라는 개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호모 사케르는, 직역하면 성스러운 자이지만 현실에서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이다. 로마법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희생양(제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그들은 희생 제의의 제물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누군가 그들을 죽여도 그 행위는 처벌받지 않는다. 체제가 체제 바깥으로 밀어낸 자인 셈이다.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은 이미 ‘미등록’ 이주 노동자, 흔히 불법 체류자로 불리는 이들의 처지를 환기시키면서 이 개념을 원용하곤 했다. 수유+너머 고병권 연구위원은 “미등록 이주 노동자야말로 한국 사회의 호모 사케르다”라고 지적한다.  산업적으로 엄연히 의미 있는 존재인 이들이, 정치 사회적 신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법 체류자에게는 고용주가 임금을 체불하고 폭행을 일삼아도, 가해자는 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가 출입국관리소에 넘겨질 뿐이다. 고씨는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예외 존재가 권력의 정상 작동을 폭로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사회의 예외적 존재인 미등록 이주 노동자 역시 우리 사회의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바로 우리 얼굴, 우리의 야만이다”라고 지적한다. 

<문학과 사회> 편집위원인 김태환은 ‘푸코가 법의 형식 속에서 작동하는 억압 권력의 기제를 밝혀내려 했다면 아감벤은 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어떤 예외적 상태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권력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문학과 사회> 2004년 가을호, 김태환, ‘예외성의 철학-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통치권력과 벌거숭이 삶>’).

"아우슈비츠를 절대악의 자리로 밀쳐내지 마라"
김씨의 분석대로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란 표면 말뜻과 달리 진정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 아니라 근대 주권자가 만들어낸 존재이다. 둘의 관계를 규정하면서 아감벤은 독일의 법철학자 카를 슈미트의 주권 개념에 줄을 댄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주권자는,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 상태, 즉 비상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런 카를 슈미트의 테제는, 아감벤에 이르러 주권은 누가 호모 사케르인지를 결정할 만한 권력이라는 것으로 변주된다. 보호받아야 할 보편 삶과 그렇지 않은 예외 삶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 그것이 주권이라는 것이다. 김태환씨는 아감벤에게 기대어 이렇게 의미를 확장한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주권자에게 사람들은 모두 ‘호모 사케르’이고, 호모 사케르로 낙인찍혀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사람에게는 모든 타인이 주권자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끄집어낼 때, 아감벤의 포부는 야심차다. 그는 푸코를 언급하면서 병원과 감옥의 ‘대감금’의 재구성에서 시작된 푸코의 연구가 수용소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지 않았는지 의아해한다. 전체주의 국가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한나 아렌트에 관해서는 통찰력 있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생명 정치의 관점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그는 “두 사람의 관점을 벌거벗은 생명, 즉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 결합시켜보겠다”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아감벤의 질문은, 유럽에 많은 불편함을 야기했다. 이를테면 그는 ‘20세기에 의회 민주주의 국가가 그토록 신속하게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하고, 또 전체주의 나라가 오늘날 거의 아무런 단절도 없이 신속하게 다시 의회민주주의 국가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또 세르비아의 인종 청소에서 볼 수 있듯이 옛 공산권 국가의 지배계급이 가장 극단의 인종 차별주의자로 전락하거나 유럽에서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재생한 현상에 착목하고 그 이유를 분석하는 데 골몰한다. 현대 사회에서 입 달린 이들은 누구나 전체주의에 혐오감을 표시하는데 사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기이한 인접성을 갖는다는 암시인 셈이다. 

그에게 난민과 수용소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범법자와 감옥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근대 국가의 정체를 드러내는 존재라고 본다. 우선 그는 1789년 인권선언문의 성격을 분석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제목을 단 인권선언은 ‘인간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나고 존재한다’고 선포한다. 출생 그 자체가 권리의 원천이자 담지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한 인간이 갖는 권리는, 오로지 특정 국가 시민의 권리 속에서만 보전된다. 그런 경향은 점점 더 강화된다. 국적을 잃은, 시민권 없는 이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생각해보면 그 괴리가 극명하다. 이제 인권은, 국민으로서 혹은 시민으로서 권리가 온전하지 않은 자를 위해서만 불려나온다. 아감벤이 난민, 즉 시민이 아닌 자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아감벤은 난민은 인간과 시민, 즉 출생과 국적 간의 연속성을 깨뜨림으로써 근대 주권의 근원적 허구성을 드러낸다고 본다.

유럽에서 이런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적나라해졌다. 난민과 무국적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유럽 국가는 앞다투어 국적 박탈과 귀화 철회를 가능케 하는 법령을 도입했다. 한 국가가 보호할 인간, 즉 시민과 시민 아닌 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1915년 프랑스에 이어, 벨기에는 전쟁 기간에 반국가 행위를 저지른 시민의 귀화를 철회하는 법을 만들었다. 그 정점은 사람을 완전한 권리를 보유한 시민과 2등 시민으로 구분한 독일의 뉘른베르크 법이다. 시민권의 전제로서 의미를 가졌던 인권은 점점 시민권과 분리되었다. 이제 국제기구와 개별 국가는 ‘인간의 신성불가침한 권리’를 엄숙히 선언하곤 하지만 난민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지극히 무능하다.

아감벤은 수용소와 관련해서도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한다.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은 위선적이라는 것. 누구든 수용소에 오는 사람은 합법과 불법이 구별되지 않는 지역으로 들어서는 것이고, 그곳에서 개인의 권리나 법적 보호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떻게 모든 법이 멈추는 곳, 그런 장소와 제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나’를 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말한다. “수용소에서 잔혹한 일이 벌어질 것인지 아닌지는 그 시점에 주권자로 행세하는 경찰의 예의바름과 윤리 감각에 전적으로 달렸다.”



지난 2004년 전세계 사람은 아부그래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우연히 폭로된 사진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태에 관한 미국의 태도도 목도했다. 럼스펠드는, 약간 유감을 표했으나 테러와의 전쟁, 혹은 악의 제거라는 명분으로 인권 유린을 정당화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첫 권이 쓰여진 것은 1995년. 아부그래이브의 참상이 벌어진 것은 그 이후이지만, 아감벤의 지적은 마치 그런 사태를 예견한 것처럼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아감벤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숱한 수용소를 통해 그런 통찰에 도달한다. 이를테면 1991년 이탈리아 경찰이 알바니아 불법 이민자를 본국으로 송환하기 전에 임시로 수용했던 바리의 축구 경기장, 바이마르 정부가 동유럽 출신 유대인 피난민을 집결시켰던 코트부르-질로프의 외국인 집단 수용소, 심지어 프랑스의 국제 공항 내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를 희망하는 외국인을 억류하는 곳인 대기 구역 또한 수용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외국인 보호소라는 이름의 감금 시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기해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질 것이다.



수용소의 가장 극단 형태는 아우슈비츠였다. 그런데 아감벤은 그에 대해서도 불편한 발언을 해댄다. 아우슈비츠를 절대 악의 자리로 밀쳐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 아감벤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일종의 희생 제의적 아우라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무책임한 일이라고 꼬집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이다. 희생자 본인들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희생 제의라는 베일로 가리지 말아야 하는 진실은, 유대인은 광기 어린 거대한 홀로코스트 속에서 말살된 것이 아니라, 히틀러가 직접 언급했듯이 마치 ‘머릿니’처럼, 달리 말해 벌거벗는 생명으로서 말살되었다는 점이다’(<호모 사케르> 231쪽).

이에 대해 김태환은 ‘나치라는 절대 악과 서구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아감벤의 태도가, 특히 나치 문제에 민감한 독일에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아감벤은 첫 권에서 이미 독일의 수용소가 나치 체제 전에 세워졌음을 지적했다. 또  악명 높은 생체실험은 나치 체제뿐 아니라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판사 구실을 했던) 미국에서도 사형수와 장기수 등을 대상으로 버젓이 행해졌음을 환기시킨다.(노순동기자) 



시사인(08. 03. 04) "푸코는 법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팡테옹 뒤편에 있는 조르조 교수의 집을 찾아 내 손에는 마침 2007년 말월에 출간된 아감벤 교수의 <왕국과 영광>에 대한 안토니오 네그리의 서평이 실린 서평지가 들려 있었다. 대화는 서평을 실마리 삼아 시작되었다.

당신은 네그리와 함께 지금 세계 지성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논의되고 있다. 관계를 물어도 되는가.
네그리와 나는, 아주 가까운 친구이다. 하지만 사상적 입장은 전혀 다르다. 나는 네그리가 말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자본주의와 관련된 네그리 이야기 중 내가 가장 공감하는 테제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핵심이다’라는 말 정도이다. 내 생각의 수용과 관련해 최근 참으로 재미있는 일을 여럿 겪었다. 어제는 독일의 한 프란체스코회 수사가 찾아왔는데, 벤야민과 나의 종말론에 관한 빼어난 논문으로 박사 논문을 완성했더라. 물론 이곳 프랑스에서는 나를 전혀 다른 맥락에서 보지만.

<호모 사케르>를 읽다 보면 푸코와 관련해 미묘한 차이를 느끼는데, 독일어본을 보면 당신이 푸코에 대해 조금 비판스러운 태도를 갖는 듯 보이는 반면, 영어본에서는 푸코의 말기 사상의 흐름에 속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판적이라…. 전혀 그렇지 않다. 번역본들이 여러 모로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점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nuda vita’(벌거벗은 생명)를 영어본은 ‘naked life’ 또는 ‘bare life’로 옮기고 있는데,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벤야민도 쓰고 있듯이) ‘mere life’에 가깝다. 푸코의 경우 어떤 푸코냐가 문제일 텐데, 적어도 푸코가 ‘법’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년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연할 때의 푸코는 이 문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기도 했다. 그가 통치와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법 또는 법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까닭은 반드시 밝혀야 할 핵심 과제이다.

당신의 사상의 형성에 있어서는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두 사람은 분명히 대학 시절부터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력을 대조해보면 명확하다. 물론 하이데거는 강사 신분이고 벤야민은 운동권의 팸플릿을 돌리고 있었겠지만 말이다. 하이데거 선생께 직접 여쭈어봤더니 ‘기억이 없다’고 대답했지만 강한 부정은 아니었다. 하이데거 선생은 카프카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보였는데, 나중에 아렌트 말로는 자기가 카프카 책을 잔뜩 갖다 드렸으니 분명히 읽었을 것이라고 하더라(웃음).



2001년의 9.11 테러와 함께 서구 지성계에서 급부상한 사상가를 두 명 꼽으라면 단연 ‘제국’과 ‘다중’이라는 다분히 논쟁적인 개념을 제시한 안토니오 네그리와 ‘호모 사케르’라는 독특한 정치철학 개념을 제출한 조르조 아감벤을 꼽을 수 있다. 물론 두 사상가 모두 이전부터 활발히 저작을 발표해오고 있었으나 9?11테러는 ‘잠에서 깨보니 유명해져 있더라’라는 바이런의 말처럼 두 사람을 일약 서구 지성계의 신데렐라로 등장시켰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두 사상가가 모두 미국이라는 자본의 제국,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사상의 제국과는 전혀 거리가 멀면서도 두 제국의 중심 자장에 놓인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두 사상가는 ‘제헌 권력’ ‘생명 정치’ 따위 몇 가지 핵심 개념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일부 좌파는 두 사람을 한데 묶어 좌파적 상상력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 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그러한 개념어일 뿐 그들이 각자 개념에 부여하는 위상학적 위치는 180도 다르다. 왜냐하면 네그리가 여전히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과 새로운 주체(‘다중’)의 창출이라는 좌파 정치학의 틀 안에 있다면, 아감벤은 근본적으로는 하이데거에 대한 정치 독해를 축으로 벤야민과 독일의 문제적 법철학자인 슈미트에 대한 비판 독해를 개념적 성좌로 갖기 때문이다.



<호모 사케르> 1권의 제목인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에서 그러한 영향사를 직감할 수 있다. ‘주권’에 관해서라면 아무래도 칼 슈미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며, 생명과 이어지는 ‘권력’ 문제라면 1970년대 말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한 푸코의 말년 강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벌거벗은 생명’ 하면 신칸트 학파의 헤르만 코헨으로부터 시작해 존재(Sein)와 단순한 존재자들(Seiende)을 대립시키는 하이데거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영향사는 아감벤의 개인 이력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는 프랑스의 노동자이자 철학자인 시몬 베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했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독일 법철학이었다. 그는 모라비아 같은 전위적 문학 서클과 교류하는 한편 파솔리니의 영화에 사도 빌립보로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이어 벤야민을 발견하게 된 그는 그 유명한 이탈리아 벤야민 전집 편집자로 일을 하지만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그가 찾아낸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원고 편집 문제와 관련된 격렬한 논쟁 뒤에 출판사와 결별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편집상 문제만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발굴한 원고 그대로 편집하게 된다면 벤야민은 (아도르노를 중심으로 한) 프랑크푸르트 학파(그리고 유대적 해석을 대표하는 친구 숄렘)와 결별하고 (슈미트와 칸토로비츠가 대변하는) ‘정치 신학적 흐름’으로 편입될 일대 지성사적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도 좌파 해석가들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이데거에서 출발한 다채로운 지적 횡단
하지만 그의 이처럼 다채로운 지적 횡단 중에서도 가장 이채롭고 결정적인 것은 하이데거와의 만남이었다. 1966~1969년 하이데거가 프랑스 남부의 한 수도원에서 은거한 채 동학 10명과 함께 헤겔과 헤라클레이토스를 주제로 한 세미나를 연 것은 이미 전설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는 이 세미나 명단에서 아감벤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아감벤의 가장 빼어난 저서로 꼽히는 소책자로, 그의 전체 개념틀 또는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언어와 죽음>은 바로 이 세미나 경험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이런 의미에서 연구 공동체인 ‘수유 너머’의 하이데거 세미나 안내문 중 하이데거의 영향 면에서 “아감벤이 부분적이라면, 아감벤이 크게 기대는 아렌트는 전면적으로 하이데거에 기대고 있으며”라는 부분은 정확히 정반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아감벤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하이데거 해석자이며, 동시에 아렌트의 정치철학에 맞선다고 말이다. 이는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이탈리아어 ‘nuda vita’가 ‘vita activa’라는 아렌트의 핵심 개념을 풍자적으로 겨냥한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푸코는 ‘대감금’을 이야기하지만 20세기 수용소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탐구하지만 막상 ‘정치철학’을 결여하고 있다는 그의 진단에서도 확인된다.

아마 이러한 의미에서 그를 20세기 사상사의 살아 있는 화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정치-생명-권력’이라는 삼각형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철학을 구축하는 아감벤의 작업에 전세계 지성의 관심이 모이는 것은, 바로 그것이 민주주의가 일상화한 테러로 대체되고 생명이 정치 권력과 과학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21세기의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조형준_새물결출판사 편집주간)

08.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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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 2008-03-07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츠와 굴락이 절대악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어지면 지젝의 전체주의론과는 다른 결론이 나오겠군요. 그리스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배제의 문제를 시공을 초월하여 동질적인 것으로 다루는 아감벤의 비역사성엔 뭔가 이론적 안이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로쟈 2008-03-07 17:06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비판도 듣는 듯합니다. 자세한 건 읽어봐야 알겠습니다...

Ritournelle 2008-03-0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아감벤의 것이 아니라 랑시에르의 것이 아닐까요?

로쟈 2008-03-07 17:0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기사의 오류네요...

람혼 2008-03-07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와 아감벤에 대해 깔끔하고 수려하게 정리한 좋은 기사로군요. 이렇게 갈무리해주시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했습니다.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출간 예정인 저 모든 책들이 좋은 국역본의 모습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나저나 전 최근에, 예전에 속독(速讀)으로 일독하고 제쳐두었던 불어본 한 권을 시간을 쪼개서 다시 정독하고 있는 중인데요, 아마도 예정에 없던 국역본을 한 권 따로 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두 작품의 작곡을 동시에 진행 중인 '조금' 바쁜 상황이기는 하지만, 꼼꼼한 비교 독해를 한 번 수행해야 할 것 같아서요. 최근 로쟈님의 개인적인 리스트에는 어떤 [수많은^^;] 책들이 속해 있을까 궁금합니다. 여담이지만, 개강의 열기(?)가 찾아온 캠퍼스의 봄은 어떤 분위기일까, 슬며시 궁금해지기도 한답니다.^^

로쟈 2008-03-07 23:51   좋아요 0 | URL
'예정에 없던 국역본'이 '그 책'인가요?^^; 캠퍼스의 봄은 아직 완연하다고는 볼 수 없고요, 첫주가 정신없이 지나갔는데, 몇몇 학생들이 눈빛이 그래도 노곤해지려는 강의에 채찍이 돼 주지요.^^

sommer 2008-03-0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이론적 탁월함은 그의 방법론 즉, '어원론적 추적'-벤야민과 하이데거가 동일하게 공유하면서도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겠지요-에 있지 않을까 싶네요. 호모 사케르, 오이코노미아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지요.

로쟈 2008-03-08 09:2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호모 사케르>의 초장에 나오는 '어원론적 추적'은 1급 철학자의 파워를 여실히 보여주죠...

마늘빵 2008-03-0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시사인 보면서 저걸 읽었는데, 첫번째 든 생각은, 아 시사잡지에 이런 내용을 담아도 될까, 였고, 또 하나는, 아 아감벤 확 끌린다 였습니다. :) 아감벤은 전 사실 모르고 있던 사람인데, 내용을 읽어보고는 저랑 코드가 확 맞아버렸어요. 아렌트도 아직 못 읽었는데 아감벤까지. -_- 두 사람 다 확 끌려버리는데, 기사 중엔 아렌트와 아감벤을 놓고 서로 다른 견해가 등장하기도 하더라고요. 재밌었어요.

로쟈 2008-03-08 09:27   좋아요 0 | URL
저도 뜻밖의 특집으로 읽었습니다. 우리의 '시사' 수준을 좀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