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월요일부터 서재의 문을 닫아놓았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습관(!)대로 흥미를 끄는 기사들은 간간이 스크랩해놓는다. 남의 얘기 같은 않은 기사가 눈에 띄기에(나의 오랜 고민거리이기도 하고) 옮겨놓는다. 중대 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것이지만 학술저널 담비에서 가져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 제239호(07. 05. 30) 주여, 책으로부터 구원하소서!
나는 가끔 사람들을 만날 때 책을 선물한다. 새 책을 주기도 하지만, 내가 이미 읽은 책들 중에 그 사람들에게 맞을 법한 것을 골라 안겨주기도 한다. 선물의 의도는 두 가지.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인 동시에 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의 양을 줄이기 위해서다.
대체 책이 얼마나 되기에 그러냐고? 많지는 않지만, 남들만큼은 된다. 대충 이천여 권 정도. 고향집에 천 권, 서울에 천 권. 서울에 있는 내 방 책장이 열 개인데, 이것으로 책들을 다 정리할 수가 없어서 방 안이 온통 난잡하다(*나는 그 네 배 정도 되는 듯하다).
당연히 이사 따위는 엄두도 못 낸다. 이전에 살던 기숙사에서 나올 때 책 박스가 서른 개 정도였다. 그 때 고향에 보낸 책 박스가 스무 개. 부모님에게 더 이상 책 사지 마라는 질책을 일 년 넘게 들었건만 이제 그 때를 훌쩍 넘어서는 분량으로 늘어났다(*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책이 늘어나는 만큼 고뇌도 늘어간다. 사랑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고통을 낳는 법. 무소유를 외치는 법정 스님도 유일하게 책에 대한 소유욕만은 뿌리치지 못하셨다지 않는가. 책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현실이다.
이는 아마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민인 듯하다. 대학원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책을 사서 모은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하물며 대학강사는?). 생물학적 연령과 주름이 비례하듯이 재학기간과 장서량 또한 비례하기 마련이다. 성욕은 감퇴할지라도 책 욕심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 대학원생들의 잔혹한 현실이다.
내세의 이미지는 현세의 욕망을 반영한다고 보면, 대학원생에게 있어서 천국의 이미지는 도서관이다. 원하는 책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그게 곧 천국이 아닌가! 다치바나의 ‘고양이 빌딩’처럼 내게도 개인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욕망은 향락의 근원인 동시에 고통의 원인이기도 하다(苦集). 어린 자식 키울 때는 마냥 예쁠지 모르지만, 다 크고 나면 말썽만 피우듯이 새 책을 손에 쥘 때는 행복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면 번뇌만 쌓여간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원생의 지옥 또한 도서관일 것이다. 책을 감당 못해 허덕이면 그게 바로 지옥인 것이다. 대학원생에게 텍스트의 외부는 없다. 바벨의 도서관을 벗어날 방도가 없는 것이다(*아래는 다치바나의 서재).
내가 바라는 구원은 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사진 같은 기억력이나 번개같은 속독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나는 알라딘의 서재가 짐을 덜어줄 걸로 기대했지만 오산이었다.) 그러니까 브로델처럼 한 번 본 책은 본문과 쪽수까지 다 암기한다거나 장정일처럼 십여 권의 대하소설을 하루 만에 다 읽어치운다거나……. 아니다. 설혹 그런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절판 도서에 대한 나의 페티시즘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 주여, 이 대학원생을 책의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소서!(이원석 문화연구학과 박사과정)
07. 06.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