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미단은 절에서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단상을 이야기 합니다. 아무래도 숭배의 대상이다보니 사람의 눈이 조금은 올려다 봐야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불상은 단상에 올라 있게 마련인 모양입니다. 이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수미단은 약간의 조형성을 가지고 꾸며지고 있습니다. 그냥 밋밋한 널판지로 만든다면 조금은 불경스럽기도 하지만 원래 연꽃으로의 탄생(연화생)을 이야기 하기에 불단도 아름답게 장엄(장엄이란 존귀한 분을 모시기 위한 꾸밈을 말하는 불교적 용어입니다)하고자 합니다.
1. "불교와 문화"라는 책을 발간하는 불교 진흥원에서 경북 청도시 하양읍에 있는 환성사의 수미단 촬영 제의를 받게 되었습니다. 잠시 쉬는 중이라 시간도 있고 널부러진 마음도 추스릴겸 혼쾌히 승락을 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려 경산 I/C 에서 내려 하양읍에 도착 하였습니다. 출발전에 "環城" 이라는 의미를 곰곰히 새겨 보았습니다. 성이 빙 둘려져 있다는 의미인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城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절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의 수미단은 우리 나라에서도 꽤나 알려진 아름다운 수미단으로 정평이 나 있었고 저도 20여년전에 찾았던 기억이 있던지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는데 그 동안 집들도 들어서고 새로운 길도 뚫려 찾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물어가면서 절을 찾았습니다.
2. 절은 마을 뒷산을 조금 더 올라가서 있었습니다. 매번 사찰을 찾을 때 마다 느끼는 것입니다만, 전국 대부분의 사찰은 아주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는 물이 흐르고 뒤에는 숲속에서 새가 노래를 부르며, 가끔 산 허리를 감도는 바람결에 수행승이 졸지 말라고 풍경이 댕강~ 댕강~ 울리는 곳.... 이런 곳에 자리잡은 사찰이니 그 자리잡은 곳마다 명당이요 명당에 자리 잡으니 바로 명찰이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절 앞에서 둘러진 산을 한바퀴 둘러보니 역시 산 능선에는 석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을 둘러쌓고 있는 성을 환성이라고 했던 모양이며 마치도 그 한가운데 움푹 분지처럼 들어간 너른 마당에 절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3. 미리 이야기를 했는지 스님들이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아직 초봄임에도 꽃은 왕벗꽃이 만개해 있었고 어디서 왔는지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호랑나비가 꽃위에 앉아 느릿느릿 날개짓을 하며 꿀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환성사는 오랜 옛적에 4000명이 넘는 스님들이 생활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사찰의 모습은 대웅전을 비롯한 몇개의 초라한 모습이지만 임진왜란 때 까지는 매우 번성했던 사찰이었음은 그곳에 남아 있는 많은 석축을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절의 앉은 형태는 부석사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 놓은것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지금은 겨우 대웅전만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남아 있어 예전의 영화는 불에 그을린 장대석(집을 짓기 위해 축대 처럼 쌓아 올린 석축)으로만 느껴야 했습니다. 부석사와 형태가 같다는 것은 불교에서의 극락을 구품으로 나누어 맨 마지막에 극락에 이르는 형태로써 매 품마다 그 격을 달리하여 사찰을 계단식으로 지은것인데 부석사에는 이런 형태로 힘들게 계단을 올라 안양루 밑을 통과하면 극락인 무량수전이 한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환성사도 이와 같은 형태로 지어졌음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4. 이곳의 수미단은 전면에는 12개의 목조각상이, 그리고 양 측면에는 각각 4개의 조각상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장식되고 있습니다. 높이 두 자, 길이 한 자 의 액자 형태에 들어가 있는 목조각은 원숭이가 과일을 바치는 형상, 극락조가 과일을 따는 형상, 연꽃 이나 연잎 밑에서 유유자적하는 물고기 등등 비교적 회화적 요소를 그대로 담고 있는 조각장식인데 그 조각의 세밀함이 무척 높은 예술적 가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 원숭이나 코끼리도 등장을 하는데 실제로 본적이 없이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린듯 실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런대로 제법 ~답게 조각되어져 있습니다.
5. 이 대웅전은 16세기에 지어진 대웅전으로 단청 또한 초기 건축 당시의 단청이 남아 있고 중간에 한번 보수를 했는데 "땜단청(이는 기존의 단청을 벗겨내고 새로 단청을 하는것이 아니라 퇴락되고 박락이 심한곳 위주로 원 그림위에 덧칠하듯 단청을 하는 일)"이었으며 시간이 경과하여 땜단청은 모두 퇴락하여 벗겨졌고 오히려 원래의 단청이 은은하게 도채되어 있었습니다. 기왕 이곳까지 온것이니 단청도 찍자고 하여 스님께 허락을 받고 수미단 위로 올라가서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불상이 있는곳에 올라가는 것을 스님들은 매우 싫어 하십니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 처럼 단상은 모두들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지만 학술자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허락을 해 주시는 편이며 이런 경우에는 상당히 조심을 하여 작업을 하게 됩니다. 어느 경우에는 부처님 등판에 엉덩이를 기대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럴때는 힐끗 스님의 얼굴을 한번 처다보게 되는데 그 때 마다 스님들의 얼굴은 무척 곤혹스러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답니다,.
6. 우리 문화재는 70% 정도가 불교 문화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지정된 문화재의 경우이고 오랜동안 불교속에서 생활을 했기에 우리 문화재가 불교와 떨어져서 발전한 것은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되고 그러다보니 지정 비지정 문화재의 90%는 모두 불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미술사학의 대부분도 이런 이유로 불교 조형물과 밀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인데 그나마 다행인것은 대부분 방치될 수 있는 상황이었슴에도 사찰에서 관리하고 보존하여 오늘날 우리 문화재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것이 아닐까 합니다. 언젠가 석굴암에 갔는데 기독교 신자이신분이 우상이기에 관람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시는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 문화재는 어떤 특정 종교의 이해관계와 관련지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그냥 단순하게 문화재적 가치만 보시면 되는 것이기에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지정하는 사람은 바로 기독교인인 코쟁이 아저씨 였습니다. 종교를 대입한다면 당연히 지정에서 제외가 되었을것이 아닐까요? 문화재를 구태어 타 종교의 숭배의 대상이기에 관람을 거부하는 행위는 배타적이고 편협한 마음에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가 아닐까 합니다. 종교적 의미보다는 문화재에 담긴 역사적 의미나 공예적 예술성을 위주로 감상하신다면 마음속에 담긴 거부감을 어느 정도 누그려 뜨릴 수 있을 겁니다.
7. 사진을 촬영하면서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원래가 실내에서 찍는지라 어두운것은 당연하지만 후래쉬를 사용하는것과 그냥 자연광에서 촬영하는 사진은 그 느낌이 완연히 다르기에 저는 주로 자연광을 이용하는데 이럴 때는 당연히 삼각대를 사용하여야 하는데도 평시에 2초 정도는 움직이지 않고 촬영을 해 왔던지라 맨손에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했는데 나중에 현상을 하고 보니 예닐곱장은 흔들린 사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로 자만심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시 촬영을 하려면 그 먼길을 또 다녀와야 하는데... 다행히 큰 카메라 말고도 35mm로도 찍어서 흔들린 사진은 작은 필름으로 대신할 수 있었습니다.
8. 산사에서 저녁 공양을 하고 가라는 스님들의 말씀을 뒤로하고 절을 떠나 하양읍에 접어드는데 비가 올것 같았던 하늘에서는 구슬 크기만한 우박을 던져대기 시작을 했습니다. 차 앞창에는 유리가 깨질듯 두두둑 거리며 우박이 쏟아지고...저는 우박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려고 차를 세우고 밖에 나갔다가 2대의 우박으로 어깨를 맞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더군요. 하늘 높은 곳에서 중력에 의한 가속도까지 더해서 떨어지니 맞은 어깨가 아플 정도로 충격이 심했습니다. 뉴스로는 여러번 우박으로 인한 피해 상황을 보았지만 실물을 본것은 처음이었는데 이런 커다란 얼음 덩어리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당연히 비닐하우스나 연약한 채소는 상처를 입게 되고 농민들은 매정한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불교와 문화" 5/6월 합본호는 6월 초에 발간이 됩니다. '테마가 있는 문화 산책'이라는 코너로 곽동해 교수가 글을 씁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나중에 참고로 하시기 바라며, 제가 찍은 사진은 나중에 스캐닝 작업을 마치면 이 글에 첨부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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