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의 시작
배시시 웃는 꽃양배추를 멀뚱하게 바라보는 부리는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어제의 기억을 되살리던 부리는 새초롬너구리의 언니인 새처럼너구리가 보여줬던 편지를
기억하며 잠시 쓴웃음을 떠올린다.
"훗..그래 우리들의 사랑이 결국 이런 거였나.."
복잡한 마음을 한편으로 몰아버리고 어디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문뜩 들기 시작한다. 앞에 배시시 웃고 있는....비록 새초롬너구리보다 약간씩은 모든면에서
떨어져 보이는 꽃양배추 팬더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처지에는 과분한 여자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진 부리의 머리속을 정리라도 해주 듯 응급실 커튼을 젖히는 날카로운
소리에 그는 상상의 나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봐요..의식 찾으셨으면 그만 일어나세요...여긴 여관이 아닙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레지던트 한명이 당직으로 날밤을 까고 까칠한 피부와 충혈된 눈을 들이밀고
무뚝뚝하게 형식적인 말을 내뱉었다.
"앗...당신은....!"
순간 레지던트의 동공은 급속도로 팽창되면서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킨 채로 누워있는 부리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은....신의 손 외과의 장부리...!"
레지던트와 눈이 마주친 부리는 다급하게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속히 자리를 뜨려고 준비했다.
"부리씨 왜 그러세요..조금만..더 안정을 취하는 편이...."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꽃양배추 팬더는 부리를 말리기에 급급했으나 이미 부리는 옷을 챙겨입고
황급히 응급실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놀란 레지던트를 뒤로하고 꽃양배추의 손을 낚아 챈 부리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오기에 시작한다.
그들의 신속한 행동에 놀란 레지던트는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머리를 새차게 흔들며
핸드폰을 꺼내 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예,.저 외과 레지던트 짱구아빠라고 합니다. 원장님 좀 빨리 바꿔주시기 바랍니다..예?? 아침에 골프 치러 나가셨다고요?? 어딥니까..그 필드가...예..? 큰일 났습니다.장부리..그가 돌아왔습니다..!"
흥분한 그는 심하게 엉덩이 춤을 추면서 계속해서 원장의 행방을 전화로 쫒고 있었다.
병원을 빠져나온 부리와 꽃양배추 팬더는 정신없이 걷기 시작한다. 사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부리에게 거의 끌려가는 모습이였다. 한참을 끌려가던 꽃양배추는 더이상 참을 수 없어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부리씨..대체 왜 그러세요..왜 그렇게 병원에서 빨리 뛰쳐 나오는 건데요..왜요.??
"팬더씨...그건...말할 수 없습니다...이 사실은 새초롬너구리도 모르는 사실입니다..그러니 제발..
병원에서의 일은 발설해주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부탁입니다."
순간 꽃양배추 팬더의 머리속에는 반짝거리는 전구 하나가 켜졌다.
'그래..새초롬이도 모르는 사실이란 말이지...나만 아는 비밀이라는 거지...이걸 빌미로 부리를
내 남자로 만들 수 있어..이거 잘 이용해 먹어서 이번엔 기필코..새초롬이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고 말겠어.'
머리 속으로 한참 이러한 생각을 하던 팬더는 속마음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방긋 웃으며 부리에게
말을 건넨다.
"알았어요..부리씨...부리씨가 비밀이기를 원한다면 제가 입을 다물겠어요..하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꼭 저에게 진실을 말해주셨으면 좋겠어요...그리고 우리..밥 먹으러 가요 배고파요.."
다정하게 부리의 팔짱을 낀 꽃양배추 서둘러 밥집을 찾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식당가에는 여러가지 간판이 현란하게 그들을 유혹했다.
"세실댁 해장국", "실비네 청국장", "유기농 염소국밥 파란여우네", "홍수맘매운탕"
"아영엄마네 산채비빔밥", "새벽별을 보며 해장술을.." "달밤에 고기파뤼"
파란색을 좋아하는 팬더는 부리를 끌고 "유기농 염소국밥 파란여우네"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필드에서 골프를 치던 병원장 로쟈는 이제 막 12홀을 돌고 있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았는지 지금까지의 스코어대로라면 분명 기록을 경신하고도 남음이였다. 보기를 기록하지도 않았으며 이글도 잡는 신기를 보여주기까지 했었다. 13번홀 티샷을 날리기 위해 고도의 정신집중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멀리서 봐도 달려오면서 좌삼삼 우삼삼 엉덩이를 흔드는 모양으로 보아 분명 레지던트 짱구아빠임을 한번에 알 수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달려온 짱구아빠는 마침내 병원장 로쟈의 앞에 당도하게 되었다.
티샷을 날릴려다 짱구아빠를 본 병원장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이보게...짱구아빠...무슨 일인가... 숨이 턱까지 차서 이곳까지 달려오고..."
"헉...헉..헉....병원장님....큰일났습니다...그가....나타났습니다..그가요..!!"
"누굴 말하는 거지..??? 이보게 숨 좀 돌리고 좀 차근차근 말해보게..."
"헉..헉....오늘 아침....병원 응급실에서....신의 손 장부리..를 봤습니다...
그가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들고 있던 롱드라이버를 필드에 떨어트린 병원장 로쟈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뭐..??? 장부리....그가 돌아왔다고..??? "
한참동안 생각이 잠긴 병원장은 이윽고 원래의 얼굴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평소 그의
성격답게 냉정 침착한 어조로 짱구아빠에게 명령을 내린다.
"잉과장 호출하고, 마교수도 호출하게...연락이 되는대로 바로 원장실로 집합시키도록...그리고
자네..엉덩이만 안 흔들면 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을텐데..?? 쯔쯔.."
명령을 하달받고 달려가는 짱구아빠의 뒷모습을 보면서 병원장 로쟈의 표정은 비장하고 엄숙하게
굳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