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웠고, 탈나서 기진맥진했던 우리는 따뜻한 남부에 도착하니 기운이 좀 돌았다. 이집트의 상징 호루스(매)가 건너편 비행기 머리에 보인다.
우리를 마중 나온 이는 '만수' 이집트인인데 어쩌다 한국 이름 만수로 더 통한다. 원래 우리는 숙소에 짐 풀고 옷 갈아입고 펠레 신전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행기 시간이 한참 늦어졌기 때문에 시간 관계상 펠레 신전을 먼저 가야 했다. 문제는 이곳 아스완이 엄청 덥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아프리카의 날씨랄까. 차 안에서 부랴부랴 썬크림을 바르고 하차했다. 다들 단체 관람인데 우리만 개인 관람. 입장료가 할인이 되질 않아서 너무 비씼다. 펠레 신전은 학생 할인이 되질 않아 50기니 입장료를 다 내야 했다. 나중에 만수 통해서 알아보니 할인되는 게 맞는데 매표소 직원이 속인 거란다. 이런 종류로 몇 차례 더 속는다.ㅜ.ㅜ
모터 보트는 1인당 편도 40기니를 불렀다. 고작 30분에. 보통 5기니 수준인데 8배나 부른 것이다. 결국 흥정에 들어가서 2인 왕복 1시간 코스로 40기니로 맞췄다. 바가지 요금이 속상했지만, 도착해보니 너무 아름다웠다. 푸른 나일강이 넘실넘실~
(사진 펑!)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 펠레 신전은 아스완 댐 건설로 물에 잠길 뻔한 걸 유네스코와 국제 모금으로 조금 더 고지대로 옮겨 다시 세운 신전이었다.
저기 수평선 끝에 보이는 것이 바로 아스완 댐.
(사진 펑!)
진정 이집트스러운 곳에 도착했건만, 너무 덥다는 게 문제였다. 내 상의는 칠부였고, 바지도 칠부였는데, 추웠던 카이로에서 두꺼운 레깅스를 속에 입고 있었다. 그나마 나는 아래쪽이 미치도록 더웠을 뿐인고, 내 친구는 모자티 안에 폴라 티까지 껴입고 바지 속엔 내복도 입고 있었다. 우리의 붉게 익어가는 얼굴이 볼만했다. 주변에 반팔 차림 백인들의 피부는 화상 수준으로 이글거렸고, 대머리 아저씨 하나는 당장 병원에 가야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만큼 타오르고 있었다. 저 신전 기둥 뒤에서 속의 옷을 벗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꿈틀댔지만, 모두 개방된 곳이라 그저 꿈으로 끝났다. 더워도 버텨야지 어쩌겠나.
(사진 펑!)
다행히 습기가 없기 때문에 그늘 안에 들어서면 엄청 시원하다. 파리 떼가 자꾸 입안으로 침입하려고 애썼지만 꿋꿋이 버텼다.
신전 기둥마다, 돌조각마다 그림이 모두 새겨 있다.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훼손의 흔적이 많다. 기독교인들 짓이다. 저 십자가 표시라니...ㅜ.ㅜ
기둥 장식에 연꽃과 파피루스가 보인다.
50분의 관람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기 중인 보트가 다 똑같이 생겼고, 사공도 모두 똑같아 보여 난감했다. 다행히 우리 사공이 우리를 먼저 알아보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일강을 다시 건너가서 만수를 기다렸다. 만수가 데려다 준 호텔은 딱 여인숙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친절해서 다행이었다.
빨리 옷갈아 입을 생각에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당황스러웠다!
내 친구가 서 있는 딱 저 어깨 폭이 엘리베이터의 깊이다. 들어가서 두명이 서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들어설 공간이 없다. 4층에 도착했는데 문은 열리지 않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알고 보니 자동문이 아니라 우리가 문 열고 나가야 하는 건데 몰랐던 우리는 아래층까지 재차 왕복한 것이다.
점심은 나일강이 보이는 맥도날드에서 버거 세트를 먹었다. 가장 안전한 식사였달까. 모험이 필요없었다.^^
만수를 통해서 투어 계약을 했다. 공항 픽업과 다음날 새벽에 떠날 아부심벨 픽업, 숙소와 낙타 대여, 그리고 펠루카 대여와 누비안 마을 방문과 다음 날 크루즈 여행까지 일체를 맡겼는데 나중에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뭐,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이때까지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강을 건너 낙타를 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멋드러진 하얀 돛단배 펠루카를 타고 강을 건너기로 되어 있는데 바람이 안 불어서 못 띄운다며 로컬 페리를 타라고 한다. 로컬 페리는 우리 식으로 마을 버스 같은 개념? 현지인보다 4배 비싼 1기니에 건너갔다. 그래도 돌아올 때는 펠루카를 탈 줄 알면서...
낙타 가이드를 맡으신 분은 누비아인이다. 우리 형부와 많이 닮아서 친근하게 느껴졌다. 내가 탈 낙타 이름은 피카소.
원래 우리는 해를 등지고 사막을 건너기로 계약되어 있었다. 이집트에서 가이드 17년을 했던 친구 교회 집사님이 소개해준 코스였다. 그렇게 진행하면 건너편으로 넘어가면서 지는 해를 맘껏 감상할 수 있고 해를 등져서 더위를 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약속이 틀리다고 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하여간 그래서 우리는 또 출발.
낙타는 손잡이가 앞에 뭉툭한 것 하나 밖에 없어서 쥐기가 아주 힘들었다. 양쪽으로 잡을 수 있는 모양새면 좋겠지만 그냥 말뚝 하나를 꽂아둔 형태라서 낙타가 갑자기 일어설 때 정말 무서웠다. 갑작스레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데 떨어지는 줄 알았다.
친구가 탄 낙타는 내가 탄 낙타 피카소의 엄마다. 두 가이드가 부자 관계인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다. 가이드가 찍어준 사진은 대체로 한쪽으로 쏠려 있었는데 이 사진은 그나마 중앙을 지키고 있다. 카이로에선 칠부 바지 덕분에 발목이 시렸는데, 이날은 칠부 바지 때문에 발목 주위가 다 익었다. 이집트 날씨에선 무조건 긴팔이 정답이었다. 추울 때도 더울 때도.
다섯 살 피카소는 은근 성깔 있었다. 요동치는 낙타 등 위에서 엉덩이가 비명을 지른다.(나중에 숙소에서 확인해 보니 엉덩이가 다 까져버렸다..;;;) 엉덩이 아프고 무서우니 뛰지 말아달라고 해도 가이드는 자꾸 낙타를 자극시켜 뛰게 만든다. 우리가 무서워하는 게 재밌나 보다.ㅜ.ㅜ
사막을 넘어 오래 전에 폐허가 된 시몬스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렇게 폐허가 된 유적지에서 오히려 더 큰 감동을 느끼곤 했다. 만복사지에서 두 팔을 벌리고 눈감은 채 그곳 공기를 한껏 들이켰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곳에서도 그런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말할 수 없이 덥지 않았다면 좀 더 명상을 했을 것이다.
건너편에도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이 보인다. 저들은 우리가 원했던 반대 코스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다. 왜 우리는 저 코스로 안 데려갔는데...ㅜ.ㅜ
친구의 아이디어로 그림자 놀이 사진을 찍었다. 딱 봐도 보다 면적 넓은 왼쪽이 내 사진이다. 카메라는 내가 들고 있었구나.
떼로 몰려 쉬고 있는 낙타 무리들. 돌아가기 위해서 탑승할 때도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또다시 크게 놀랐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도 익숙해지기 힘든 공포다. 여기도 내 그림자가 보이는구나.
낙타 투어가 끝난 다음에 박시시로 달러를 내밀었는데 거부당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의 박시시를 요구한다. 여태까지 좋았던 인상이 마구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투어 방향이 바뀐 것에 대한 해명도 못 들었는데 말이다.
시간이 조금 남았기 때문에 예정에 없던 유적지를 하나 더 가기로 했다. 노블스 툼. 이곳에 올라가니 나일강 정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원래 시간이 지나 입장이 안 되는 곳이었는데 박시시를 주면 문을 열어준다나...;;; 결국 박시시 주고서 우리 둘만 입장했다.
내부 벽화는 성에 안 찼다. 펠레 신전에서 충분히 감탄을 하고 나온 뒤라서 그보다 조잡해 보여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둑한 시간에 미이라까지 있는 무덤 안에 들어가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오묘한 기분은 공포로 바뀌어 갔다. 빨리 나가야지!
문 열어줄 때 받아간 박시시를 또 요구해서 화딱지가 났지만, 갖고 있던 볼펜으로 땜빵했다. 우리네 볼펜이 무척 인기가 좋았다. 더 갖고 왔어야 했는데...
숙소로 돌아갈 때도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펠루카를 안 태워준다. 이런 버럭! 게다가 약속되어 있던 누비안 마을 투어가 이상하다. 아주 가까운 근처 마을을 그냥 한 바퀴 스윽 돌고 설탕 듬뿍 담긴 뜨거운(이 더위에!) 샤이 한 잔 주는 게 다지 뭔가. 콜라 있냐고 물으니 있지만 뜨겁다고 한다.ㅜ.ㅜ 구경거리라며 보여준 것은 전갈 같은 독충... 지금 장난하나. 이런 수준의 투어면 우리가 알아서 다니고 말지, 뭐하러 중간 소개자까지 내세웠을까. 우리 사기 당한 것 같다. 돌아가서 만수에게 제대로 따지리!(물론 내 친구가...;;;)
숙소로 돌아와 샤워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친구의 코이카 동료 단원들이 그 지역 사람들과 약속이 잡혀 있어서 우리도 그 자리에 끼었다. 씨푸드 식당이었는데 해물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난감한 메뉴. 어쨌든 시장했으니 맛있게 먹었다. 좀 짜긴 했지만...
친구는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즐겁지만 나는 너무 피곤했고, 바가지 쓴 것도 화가 나고 여러모로 힘들었다. 그래서 먼저 일어나서 가게에서 물을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길치인 내가 숙소로 돌아간 게 신기. 이날은 아프리카컵 축구 시합이 있던 날인데 이집트가 최종 우승한 날이다. 거리는 광란의 도가니. 이 사람들은 무슬림이라 술도 안 마시는데 술까지 마시면 유혈사태가 벌어질 것처럼 격하게 축하한다. 시합에서 지기라도 하면 폭력성까지 보여서 영사관에서 한국인들에게 단체로 메시지를 보낸다. 바깥 출입 자제하라고. 다행히 이집트가 우승해서 시민들은 모두 기쁜 얼굴. 하지만 밤새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고 해서 잠자기는 다 글렀다.
숙소로 돌아오고 친구도 곧 돌아와서 우리는 기분전환 겸 시장에 놀러갔다. 이곳은 면T의 질이 좋기로 유명한데 조카랑 언니에게 줄 티셔츠랑 엄마에게 선물할 스카프를 샀다.(비록 울 엄니가 한 번도 사용하진 않았지만....;;;) 누비아인들이 입는 시원한 옷을 사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의 습한 여름에는 먹힐 수 없는 옷이라 포기했다.
밤 12시에 귀가한 우리. 새벽 3시에 아부심벨로 출발이기 때문에 일찍 자야 했지만 너무 시끄럽고, 또 너무 피곤해서 오히려 잠을 자기 힘들었다. 그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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