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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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피부 타입처럼 말투에도 웜톤과 쿨톤이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각자의 스타일을 인지하고 존중하자는 뭐 그런 거였는데, 그 작성자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자칭 인류학자인 내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관찰하고 연구해 본 결과, 말이란 건 썩 믿을만한 게 못된다는 점이다. 이 말투라는 건 얼마든지 위장이 가능해, 쿨톤이고 메가톤이고 간에 그걸로는 상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웃는 얼굴을 하면서 등 뒤로는 칼을 쥐는 것이 사회생활 아니던가.


하지만 글은 다르다. 말은 입술을 떠난 즉시 휘발되지만, 글은 손끝을 떠난 즉시 박제된다. 또한 머릿속에 떠다니는 조각들을 정제하여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 글을 보면 필자가 어떤 사람일지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은 맘에 없는 말을 할 순 있어도, 맘에 없는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가진 게 말뿐이다 생각되면 조용히 거리를 둔다. 반면, 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저절로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쩐지 나는 닫힌 사람이고 싶지 않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책을 잘 읽지 않는 한국인들이 그나마 읽는 게 자기계발서, 실용서, 과학도서다. 듣기만 해도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딱 그려지지 않는가. 그런데 간혹 이 척박한 땅을 뚫고 나오는 문학책들이 있다. 이번에 읽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그중 하나인데, 빨치산의 딸이 부친의 조문객들을 맞으면서 자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아버지를 알아간다는 내용이다. 다소 무거운 소재를 작가는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빨치산의 집안 분위기는 어땠고, 바깥에선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출세나 결혼도 가로막는 꼬리표에 좌절했던 지난날들을. 십수 년의 옥살이에도 변함없이 빨갱이로 살다 가신 아버지. 불화와 탄식을 몰고 다니는 그의 사상은, 자식조차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철옹성이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다녀갔다. 아버지의 인맥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전혀 예상 밖이었다. 국가에 반기를 들고 민족을 팔아먹는다던 빨갱이의 죽음을 왜 다들 기념해 주는 걸까. 언제나 매정하고 인색했던, 주변과의 교류도 잘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아버지께 은혜를 입었다며 연신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이제 딸은 ‘나‘의 아버지와 ‘모두‘의 아버지를 대조하여 기억의 오류를 찾아낸다.


출소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려던 아버지를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다. 빨치산의 낙인을 찍고 연좌제를 시행해 집안 전체를 철저히 짓밟아버린다. 그렇게 온 가족이 피해를 입는데도 아버지의 신념은 아주 굳건했다. 다만 술에 취해 시대를 탓하고, 정권을 욕하고, 혁명 타령하는 게 전부였을 뿐. 이건 뭐 사회 부적응자의 구차한 변명 밖에 더 되는가.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문객들은 아버지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상과 무관한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래, 이 정도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혁명 운동의 최선이었지 싶다. 여러 번의 배신과 상처에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아버지는 이 시대의 진정한 혁명가였다.


아버지의 해방은 죽음으로써 완성되었다. 빨치산의 사슬과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딸도 오해와 편견의 굴레에서 겨우 해방이 되었다. 당신의 뼈와 살이 재로 변한 다음에야 간과했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화해를 시도하고 싶어도 아버지는 이제 여기에 없다. 하여 아버지께 바치는 소설로 용서를 구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많은 독자들이 울컥한 건 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문장마다 스며있는 작가의 열린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민감한 과거와 감정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백의 시간을 가졌을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글을 쓴다. 그러나 정지아 작가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직접 내리기보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난 이렇게 투명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참 좋다. 또 이런 분들이 각박한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부디 가정과 사회 모두 윈윈하는 언젠가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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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2-19 14: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류학자 물감님 제 mbti 나머지도 맞춰주세염

물감 2023-02-19 14:27   좋아요 1 | URL
istj요ㅋㅋ

은오 2023-02-19 14:32   좋아요 1 | URL
🫢 마지막 빼고 맞아요!! j처럼 보이는 요소도 꽤 있긴 한데 결국 제 하루와 지금까지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스스로 p라는걸 납득할 수밖에 없는.... 그렇습니다. 근데 세개 맞추신것도 신기하네요 인류학자 인정ㅋㅋㅋ

물감 2023-02-19 14:40   좋아요 1 | URL
방정리 잘 하시던데 p인 건 의외네요?
하긴 j들도 게으를 때 많죠 ㅋㅋㅋㅋ
자 그럼 잇팁만의 시니컬한 리뷰 자주 써주세요^^

공쟝쟝 2023-02-22 20:14   좋아요 1 | URL
난 방 정리 못하는 J ~~ !
물감님 투명한 글을 쓰는 저를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

물감 2023-02-22 21:11   좋아요 2 | URL
그럴게요!

은오 2023-02-22 21:1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3-02-19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요즘 엄청 읽히던데 좋은가봐요.
딸의 입장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어요^^
투명하다, 좋으네요^^

물감 2023-02-19 18:36   좋아요 2 | URL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의외의 감동이었어요.
화제가 된 책들은 거품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도 않은가봐요ㅎㅎ
원하지 않은 삶을 물려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았지만, 좋았던 기억마저 원망에 가리워있었다는 걸 깨달은 작가님의 라떼이야기 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23-02-19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해방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뿌려졌기에 그 완성의 의미도 더 깊은 것 같아요. 저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리뷰를 쓰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말은 휘발되고 글은 박제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물감 2023-02-19 18:52   좋아요 1 | URL
죽고서야 의미를 가진다는게 참 아이러니 하죠. 근데 세상은 더 아이러니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생각하면, 이웃과의 화평을 중시하는 아버지의 사상이 필요하다 생각도 들었거든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승주나무 2023-02-19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삶은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반면, 실제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것 같아요.

물감 2023-02-19 19:16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고것이 자칭 인류학자로서 풀어야 할(그러나 풀지 못할) 숙제입니다. 에휴...

coolcat329 2023-02-20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읽어보려고 했던 책이에요~~소문이 진짜였군요. 물감님 리뷰 읽고 꼭! 읽기로 맘 굳혔습니다.

물감 2023-02-22 20:15   좋아요 1 | URL
소문난 줄도 몰랐는데 운이 참 좋았네요.
작가님이 연배와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글맛이 대단했어요.
쿨캣님도 읽고 리뷰 써주세요 ㅎㅎ
 
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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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벽돌책 다음은 얇은 책 읽는 게 국룰 아잉교. 그래서 사내 도서관을 갔다가 이 책이 있길래 빌렸다. 사실 나는 어린이/청소년 문학에 별로 관심이 없으나 문학수상작이면 볼만하겠다 싶더라고. 표지 그림대로 코뿔소와 펭귄의 이야기인데 이건 또 무슨 조합일까 해서 빠르게 읽어봤다. 어린이 책이라 유쾌한 내용을 기대했더니 오히려 어두워가지고 좀 의외였던.


코끼리 보육원에서 나고 자란 코뿔소 한 마리. 때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 가정을 이루지만, 얼마 못 가서 밀렵꾼들에게 아내와 딸을 잃는다. 이후 어찌어찌해서 옮겨진 동물원이 정체 모를 폭발로 불바다가 된다. 그곳을 가까스로 탈출한 코뿔소와 펭귄 한 마리, 그리고 알을 담은 양동이. 이들의 발걸음은 어딘지도 모를 바다로 향했고, 결국 펭귄의 죽음으로 또다시 혼자가 된 코뿔소. 다행히 부화한 새끼 펭귄과 여행을 이어가지만 이번에는 코뿔소가 걸음을 멈추고 만다.


먼저 알아둘 것은, 집단생활하는 코끼리나 펭귄과 달리 코뿔소는 혼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종마다 차이는 있어도 대개 그렇단다. 이 같은 태생의 코뿔소가 코끼리들과 지내면서 공동체를 배웠다는 점이 핵심이라 하겠다. 독립을 선언한 뒤로도 코뿔소는 더불어 사는 삶을 꼭 기억했다. 그래서 소중한 이들이 죽어 방황도 많이 했지만, 그때마다 곁을 내어준 누군가로 인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물원을 떠나온 코뿔소와 펭귄. 두 친구는 종을 초월한 우정을 다진다. 그러나 펭귄은 죽고, 코뿔소는 또다시 혼자 남겨진다. 무엇보다 알을 맡아달라는 부탁은 코뿔소에게 난처한 과제였다. 그럼에도 그는 정성으로 알을 부화시킨다. 자신이 친구에게 입었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새끼 펭귄에게 전해주게 된다. 보다시피 이 작품의 화두는 유대관계를 말한다. 코끼리와 코뿔소, 코뿔소와 펭귄. 모습이 전혀 다른 서로가 애정을 나누고 마음과 마음을 잇는다. 그것은 마음이 여유롭고 풍족한 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힘없고 소외된 사회의 약자들까지도 얼마든지 사랑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랑에는 적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참 좋아하는 문구인데, 오래전에 들었던 이 말의 진가를 이제서야 깨닫고 있다. 코뿔소와 펭귄이 다르듯이 남들도 나랑 다르다는 걸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사랑의 모양과 방식은 전부 제각각이지만 유대감은 다 같은 성질이다. 지구상에 혼자 남은 흰바위 코뿔소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은 나에게도 긴긴밤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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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2-16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유명하죠~어린이 문학상 받았지만 어른들의 동화라고... 들었어요. 😊

물감 2023-02-16 10:08   좋아요 0 | URL
북플에서 자주 보이던 이유가 있었네요 ㅎㅎㅎ
짧고 굵은 임팩트의 작품들하고 다르게 담백해서 좋았어요.
자꾸 기분이 센치해지려 하네요. 봄이 와서 그른가... ^^

페크pek0501 2023-02-16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이민자들과도 화합하며 잘 지낼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는 좋은 책이네요.
젊은이들의 노동력이 적은 한국으로선 이민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화합이 언젠가는
시대의 화두로 떠오를 수 있겠다 싶어요.
알라딘의 좋은 점 하나. 내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정보를 알 수 있음, 이에요. 잘 읽었어요.^^

물감 2023-02-16 14:16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한 범위는 글로벌하지 않았는데, 페크님의 댓글에 또다른 시각을 얻었네요. 역시 인생 선배님이십니다 ^^ 그렇죠, 타국인과의 화합에도 의미를 가지지요. 한국도 이제 단일민족이 아니니까요.
말씀하신 좋은 점은 양날의 검입니다. 구매비용이 계속 나간다는... ㅎㅎㅎ

북깨비 2023-02-1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런 국룰이 있었나요? 다독도 단짠단짠이 비결이군요. ㅎㅎ

물감 2023-02-16 16:44   좋아요 1 | URL
두꺼운 거 연속으로 읽었다가 슬럼프에 자주 빠져봐서요. 건강한 독서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입니다 ㅋㅋㅋ네박자 인생에는 강약 중강약 아니겠어요?ㅋㅋㅋㅋㅋ
 
[세트] 돈키호테 - 전2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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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팅만 해오던 <돈키호테>를 드디어 완독했다. 한 2천 장쯤 되는 이 작품은 놀랍게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다, 나처럼 느려터진 독자라도 후다닭 읽어낼 정도의 가독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압도적인 자태에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사실 벽돌책을 읽을 때마다, 이게 그렇게까지 길게 쓸 내용인가 싶은 생각이 꼭 있었다. 그 편견을 완전히 깨부순 게 <돈키호테>이다. 전세계 독자에게 검증된 이 작품은 뭐랄까, 백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고 해야겠다. 포장지는 코미디 소설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실상은 온갖 팩트로 무장된 하드코어 인생교과서였다.


1권의 내용은 대강 이렇다. 시골사는 하급 귀족 영감님이 기사 소설에 심취하더니 직접 기사가 되기로 한다. 제 이름을 돈키호테라 칭한 뒤 불의로 가득 찬 세상을 구원하고자 모험을 나선다. 그는 출간된 기사 소설들이 전부 실화라 믿었으며, 소설에 나온 설정을 모조리 따라 한다. 아사 직전인 말을 타고, 옆집 농부를 종자 삼고, 가상의 귀부인까지 만드는 등 기본 조건들을 갖춘 다음 본격적인 기사 노릇을 시작한다. 이제 너무도 유명한 양떼 사건, 풍차 사건 등 별별별 해프닝이 반복된다. 이렇듯 가는 곳마다 사고 치는 초 역대급 민폐 아이콘이 바로 돈키호테 되시겠다.


환상 속에 빠져사는 이 영감님은 눈에 비친 모든 것을 왜곡되게 해석한다. 또 모든 상황을 제 입맛대로 끼워 맞춘다. 그렇게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보다시피 과한 덕질은 정신건강에 해롭다는 걸 명심하자. 기사 역할에 극도로 취한 돈키호테는 누구와도 멀쩡한 대화가 불가했고, 그래서 반박과 태클이 끊이질 않았더랬다. 간혹 말빨이 딸려 불리해질라 치면 꼭 마법사들의 장난을 탓해버린다. 이런 걸 가리켜서 인생 날로 먹는다 하는 건지도. 요 광기 충만한 능구렁이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는 돈키호테만의 역발상을 손꼽는다. 갖은 우롱에도 자신을 의심하긴커녕 애초부터 당신네들이 틀려먹었다는 우리 영감님의 뇌구조가 지금 봐도 쇼킹한데 뭐 당시에는 더했을 테지. 돈키호테의 넘사벽 언변과 신성한 기사도 앞에서는 되려 손가락질한 이들만 바보가 된다. 이게 참 웃기면서도 기분이 묘했다. 그는 자기를 무시하는 이들과 싸우지 않고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위대한 뜻을 시기하는 날파리 정도로 여겼다. 역시 정신승리가 답이었던가.





고품격 젠틀맨의 껍데기와 달리 가슴에는 사랑과 낭만이 들끓는 떠돌이 기사님. 예고도 없이 폭발하는 감수성은 그냥 뭐 갱년기라서 그런 걸로 하자. 숨 쉬듯이 운명을 탓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돈키호테가 전혀 낯 뜨겁지 않았던 건 아마도 진지함과 망가짐을 왕복하는 텐션의 온도차 때문이렸다. 그래 뭐,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정말x100 피곤한 타입이다. 그 곁에서 고생은 고생대로 한 산초는 왜 손절하지 않았을까. 주인과 싸우기도 참 많이 했고, 그래서 몇 번이나 종자를 관두려 했던 산초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동행한 이유는 언제나 자신의 허물을 덮어준 주인의 온화함 덕분이다. 결국 돈키호테는 '좋은 사람'이었고, 그걸 알아본 산초와 동료들은 어떤 빌런 짓을 해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었다. 과연,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다는 말씀.


그나저나 늘 진지풀한 우리 기사님은 왜 그리도 에너지를 낭비하시는 걸까. 여기에도 나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가 모든 상황을 모험이라 하듯이 우리네 인생 또한 매 순간이 모험의 연속이라 하겠다. 생각해 보라.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드는 시련과 고난은 어느새 소소한 안줏거리가 되어있을 것이다. 그토록 심각해하던 고민도 나이 먹고 돌아보면 그렇게까지 감정 낭비할 일은 아니었구나 생각들 한다. 대부분 해프닝이었던 게지. 결론은 몸에 힘 좀 빼고 살자는 건데 그게 말이야 쉽지. 인생은 실전이고 두 번의 기회는 잘 없기에 물 들어오면 노 저어야지 별 수 있나. 나 같은 예민러들은 인생 공부를 두 배로 해둬야 한다.


자칭 기사라면서 기사 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더러 있다. 그는 자신의 모욕만큼은 절대 못 참으면서, 모욕당한 동료가 화내는 건 정당치 못한 연고로 그냥 참으란다. 거참, 완전무결해서 인간미 한두 방울 넣었다기엔 내로남불은 좀 킹 받지 않는가. 동료들은 이 궤변론자를 그러려니 했고, 일반인들은 기사님 비주얼에 그만 납득해버린다. 옷빨과 장비빨이 이렇게나 중요... 이게 아니고 암튼. 좀생이처럼 굴면서도 기사도를 외치는 게 난센스이긴 하나, 이렇게 양보 없이 내 방식대로 사는 것도 필요하겠더라. 혹여 이 책을 읽는다면 화려한 대사에만 집중하지 말고 상황별 행동에도 주목하길 바란다.


세상만사에 풍부한 학문과 식견을 갖춘 돈키호테는, 어떤 주제라도 막힘없이 설교하는 초 달변가이다. 그를 보필하는 산초 또한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본투비 입담꾼이다. 두 명 다 주옥같은 명대사를 잔뜩 남겼는데, 작가는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았을까나. 듣자 하니 당시 스페인은 정치, 문화, 종교 등등 문제가 많았던갑다. 세르반테스는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사회를 풍자하고자 <돈키호테>를 써서 디스며 팩트며 온갖 뼈 있는 개드립을 사정없이 갈겨댄다. 그렇게 하고도 욕먹지 않을, 또는 욕을 먹어도 끄떡없을 캐릭터가 필요해 만든 것이 미쳐버린 돈키호테와 덜떨어진 산초였다. 이런 친구들이 비판 좀 했다고 정색해버린다면 스스로 바보 인증하는 꼴이 될 테니까. 작가가 짱구를 참 잘 굴렸다.





10년 뒤에 나온 2권의 내용은 이렇다. 누군가 돈키호테의 모험기를 책으로 출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또다시 모험을 하려던 차에 한 속보가 날아든다. 마법에 걸린 돈키호테의 귀부인이 그만 추녀가 되었단다. 이 마법을 풀기 위해 여기저기를 떠돌던 두 사람은 어느 공작 부부의 성을 방문하게 된다. 부부는 극진히 대접하며 교묘히 장난치고 조롱한다. 그런 줄도 모른 채 기사 제도의 부활을 만끽하는 돈키호테. 그의 약속대로 섬의 통치자가 된 산초는, 공작 부부가 꾸민 계획에 고생만 하다가 돌아온다. 마침내 귀부인의 마법을 푸는 방법을 찾았으니, 그것은 종자가 자발적으로 엉덩짝을 수천 대 맞으면 된다는데...


1권에서는 돈키호테가 세상을 바보로 만들고, 2권에서는 반대로 세상이 그를 바보로 만든다. 동네방네 소문난 인플루언서 돈키호테의 무늬만 기사였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사랑 타령하고 기사도 운운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가장 큰 변화는 주인공들이 확 점잖아졌다는 건데, 돈키호테는 둘째치고 산초가 뭐랄까, 제법 성숙한 말과 생각을 자주 한다. 주인 나리의 유식함이 물든 것처럼 말하지만 솔직히 세르반테스의 설정 미스 같았다. 이 설정 오류들 때문에 1권은 말이 많았는데, 안되겠는지 2권에서는 작가가 직접 개입하여 오류들을 바로잡아준다. 이 같은 전개와 연출은 처음 보는 방식인데 되게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이런 사기캐들은 왜 다 옛날에 태어난 걸까.


2권의 절반 이상이 공작 부부와 관련된 장면들이다. 부부는 돈, 장소, 사람, 시간을 다 써가며 방문객들을 놀림거리로 만든다. 나중에는 이걸 웃어도 되나 할 만큼 장난질의 사이즈가 달라진다. 그 많은 장난들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 위한 빌드업이니까 참고들 하시고. 것보다 돈키호테가 성에서 꽤 오래 머문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산초의 부재로 모험할 기분이 안 든다 쳐도, 귀부인 걱정을 너무 안 한다 싶을 정도다. 그거 때문에 떠나온 모험인데 말이지. 캐릭터가 바뀐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나는 속편의 주인공을 산초라고 본다. (솔직히 '반지의 제왕'도 샘이 주인공 아님?) 어느새부턴가 주인 나리의 화법을 따라 하면서 명석함까지 생겨난 산초. 그가 누구였던가. 수많은 지적과 호통에도 끄떡없는 철밥통 관심 종자 아니신가. 그랬던 산초에게 일어난 변화와 성장은 이제야 철 좀 들었네 하고 끝날 일이 아니란 말씀. 잘 먹고 잘 살면 땡이라던 그는 섬에 간 이후로 크게 달라진다. 꿈꾸던 통치자의 삶이란 고생 끝 행복 시작이 아닌, 불안과 고통의 허리케인 그 자체였다. 하여 육신은 고달파도 마음은 평온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고, 마침내는 욕심에서 벗어나 본인에게 맞는 옷을 찾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관통하는 예라 하겠다. 극 현실주의자인 산초는 평소 이상만 추구해대는 돈키호테를 이해치 못했었다. 그딴 게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주인 나리는 왜 거기에 빠져서 이 나이 먹도록 앞가림도 잘 못할까 싶었겠지. 헌데 그렇게나 무시했던 이상주의가 알고 봤더니 인간 다운 삶의 유지 비결인 셈이었다. 아 물론 돈키호테는 도가 지나치긴 했다. 여튼 현실만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계의 해결만으로는 결코 건강한 삶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테스형의 말씀이니 잘 새겨듣자.


그와 반대로 돈키호테는 서서히 현실에 눈을 뜬다. 이제 더 이상 멋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일은 없다. 대체 무엇이 그의 심경을 바꿔놨을까? 추측건대 산초와 마찬가지로 자기 욕심을 깨달은 연고이지 싶다. 산초가 적극적으로 희생해 줘야 귀부인의 마법이 풀릴 텐데 자꾸 회피하고만 있으니 이 얼마나 괘씸할랑가. 계속되는 닦달에 못 이겨 제 몸에 채찍질을 시작하는 산초와, 그 메소드 연기에 껌뻑 죽는 돈키호테의 맹렬한 현자 타임. 나 좋자고 둘도 없는 친구를 죽게 할 셈인가. 피로 물든 이상이 과연 신성하다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이상주의가 그릇된 욕심인 것과, 어긋난 기사의 도리를 깨달은 후 점점 제정신을 찾아가는 주인공. 이야기를 끝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극단적인 두 인물의 변화를 보여준 데에는 '중용'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뭐든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쳐지면 균형을 잃고 넘어지게 된다. 그러니 난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래야만 해, 하며 자신을 가두고 채찍질하는 건 이제 그만들 하자.


1권 출간 이후, 가짜 후속작이 잔뜩 돌아다녔다나. 원작이 파괴돼가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작가는 직접 후편을 쓰고 더 이상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인공을 퇴장시켰단다. 그리고 출간 1년 뒤에 세르반테스도 그만 퇴장했다고 한다. 알고보니 절망 그 자체였던 일평생이던데 이 같은 유머와 희망 가득한 글이 어떻게 나온 걸까. 그 답은 작중에서 언급한 작가의 인본주의에 달려있다. 인본주의는 절대 그냥 생겨나지 않는다. 완전히 밑바닥을 찍고 소망이 다 끊어졌을 그때에, 손길을 내어준 누군가에게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 자만이 얻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현자라 불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여하튼 평소에 내가 글 쓰는 방식도 이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눈치챈 사람이 몇이나 있을진 모르겠지만. 자 여기까지, 내 평생 가장 긴 리뷰였는데 정말 글 쓰면서 설레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더라. 다시 한번 읽기를 잘했다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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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3-02-14 16: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게 완독이 가능한 책이군요. 사놓은지 이제 반년이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엄두를 못내고 있어요. 😭

물감 2023-02-14 16:50   좋아요 4 | URL
저도 제가 해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왜 이제사 읽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북깨비 님과 같은 분들을 위해, 나름 신경써서 적어봤어요 ㅎㅎㅎ 앞에 서문 같은거 건너뛰고, 한 5장만 읽어보세요. 그대로 푹 빠지실 거에요! 스토리도, 번역도 되게 현대적입니다. 정말 걸작이라고 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3-02-15 0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 먼저 고전 중의 고전 돈키호테 완독 축하드려요. 이 책이 이리 재미나군요. 저는 물감님의 글도 너무 재밌어서 웃으며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 삶이 참 고난의 연속이던데 어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저도 신기하네요.
저도 돈키호테 다시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

물감 2023-02-15 08:4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쿨캣님 ㅎㅎㅎ 정말이지 너무 만족했던 책이었어요. 그 많던 찬사들이 정말 거짓 하나 없었음을 온 몸으로 느꼈습니다. 특히 저의 성향이나 가치관과도 너무 잘 맞는 작가여서, 리뷰에도 정성을 좀 들여봤어요 ㅎㅎㅎ 고달픈 삶이지만 유머를 잃지 않으려는 테스형의 속내를 저는 알 것 같아요. 이와 관련된 리뷰도 쓸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꼭 읽어봐주세요!

책읽는나무 2023-02-15 08: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완독!! 해내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산초가 주인공!! 맞는 말씀 같기도?ㅋㅋㅋ

물감 2023-02-15 08:53   좋아요 2 | URL
ㅎㅎㅎ 감사합니다. 축하받으니 리뷰 당선된 듯한 기분도 들고 좋은데요? ^^
책 추천을 잘 안하는 제가 이 작품만큼은 적극 추천을 해봅니다~
산초가 주인공!! 그래보이죠? ㅎㅎㅎ

페크pek0501 2023-02-16 14: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돈키호테는 동화책으로만 읽었고 유튜브나 팟캐스트로만 들었어요. 저도 언젠가는 원작을 읽어야지, 하고 있었네요.
길게 쓰신 리뷰, 알이 꽉 찬 리뷰 같네용^^

물감 2023-02-16 16:40   좋아요 2 | URL
이 책은 동화나 요약본으로 읽은 사람이 많아서,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중 하나라던데요ㅎㅎ
그렇게라도 읽으면 좋지만, 완독한 사람으로써 반드시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겠습니다^^
스토리도 메세지도 촥촥 감겨서 그냥 리뷰쓰는 맛이 절로 나더라고용ㅎㅎㅎ

서니데이 2023-03-13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메인 - 꿈이 끝나는 거리 모중석 스릴러 클럽 26
트리베니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카티야의 여름>을 읽고 반해서 이번에도 많은 기대를 했는데 아 웬걸, 이렇게 텐션 낮은 스릴러라니. 뭐랄까, 티저 영상만 보면 박스오피스 1위인데 막상 보니까 그 티저가 전부였던 그런 느낌이다. 무엇보다 누아르 작품인 줄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거다. 나님은 누아르 안 좋아하거든. 그나마 타 작품에 비하면 문장에 힘을 뺀 편이라 읽기에는 덜 부담이라는 거. 본토에서는 베스트셀러를 여러 번 갱신한 작가라는데 국내에는 세 작품밖에 출간이 안 되어있다. 왜인지 알만하다. 저자의 감성이 우리나라한테는 그리 먹혀들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특유의 그 감성이 좋아서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진다. 애매하게 취향 저격을 하는 애매한 작가이다.


슬럼가인 메인 거리를 순찰하는 라프왕트 경위. 아무리 질 나쁜 인간들로 득실거려도 라프왕트는 사명을 다해 이곳을 수호한다. 그러나 그의 거친 방식은 매번 민원을 낳았고, 경찰국은 이 최고참을 자르냐 마냐 하는 중이다. 어느 날 뭔가에 찔려죽은 피해자를 발견한 경위는 또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낸다. 이 신성한 구역에서 나 라프왕트를 무시하고 감히 살인을 해? 잡히면 다 뒤졌어 하고 있는데 아니 글쎄, 피해자들이 죄다 인간 말종이었다네? 흠흠. 그래도 살인은 안될 일이지. 잘리거나 말거나 오늘도 제 방식대로 메인을 주무르는 상남자 라프왕트의 이야기 되시겠다.


사건과 수사는 그리 중요치 않다는 듯 매우 느슨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사건에 관한 건 중간마다 한 번씩 집어주는 정도이고, 메인의 분위기나 인간 군상에 대해서 다루는 장면이 더 많다. 폭력과 음행이 난무한 이곳을 정화하고 질서를 잡아가는 주인공의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왜 사건 얘기는 안 하고 자꾸 옆길로 새냐며 욱하지 말길 바란다. 내가 그랬거든(소곤). 암튼 가까운 사람들이 차례차례 떠나간 그에게 남은 건 일 뿐인데 그마저도 없어질 판이다. 이곳 메인에서는 라프왕트조차도 소외와 고독을 피해 가지 못하였다.


할아버지와 아내를 떠나보낸 후로 긴 시간을 방황하며 지금까지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평생을 센 척하며 살았지만 누군가의 손길을 그리워하는 그였다. 그래서 어쩌다 탄생한 할배들의 카드게임을 매주 참여했고, 일부러라도 메인 거리를 순찰하며 사람들을 보러 다녔다. 늘 혼자였던 그의 앞에 두 젊은이가 등장한다. 하나는 사건 담당을 보조하는 신참 경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길에서 만난 어린 매춘부였다. 출근하면 신참과 종일 붙어있고, 퇴근하면 매춘부와 밤을 같이 보내는 나날이 반복된다. 나이가 든 탓인지 귀찮게 하는 이 둘을 딱히 뿌리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과 지내면서 허물어져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신참한테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매춘부한테는 죽은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회상에 빠진다. 과연 그는 현재를 살아가는 중일까, 과거에 머물러있는 것일까.


힘차게 떠오른 태양도 때가 되면 저물고 만다. 세상은 주인공에게 그만 좀 물러나라고 소리 지른다. 이렇게 억지로 설자리를 잃어야 한단 말인가. 어쩌면 메인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이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갈 곳이 없어진 그가, 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게 해오던 만행들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봤으면 한다. 여차여차해서 임팩트 없이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딱히 추리하고 범인 쫓는 이야기가 아니므로 주인공 인생사에 더 주목하시기를. 힘들게 쌓아 올린 피라미드가 점점 무너져내림을 지켜봐야 하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때론 떠오르는 태양보다 저물어가는 태양에게서 위로를 얻곤 한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사람일수록 무슨 말인지 공감하리라 믿는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들 하자.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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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3-01-25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물감 2023-01-25 20:06   좋아요 1 | URL
새해인사 감사합니다, 라파엘님도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하는 일마다 잘 되시길요!!

coolcat329 2023-01-25 1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작가인데 소설 <아이거 빙벽>은 또 알고 있어요. 누아르 감성이 강한 책인가 보네요. 저는 누아르 좀 좋아하는데 도서관에서 작가의 책 찾아봐야겠어요.

물감 2023-01-27 11:22   좋아요 1 | URL
누아르 좋아하시면 이분 좋아하실것 같은데요ㅎㅎㅎ
아이거 빙벽도 기회되면 읽어볼려고요. 리뷰에 언급한 <카티야의 여름>은 정말 좋았습니다. 나중에 읽어보세요 ^^

은오 2023-01-25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설연휴 잘 보내셨나요? 올해 복 많이 받으시고 리뷰를 많이 써주시길 바랍니다. 뭐든.

물감 2023-01-26 08:39   좋아요 1 | URL
은오님도 새해복 많이받으세요🙂
리뷰는... 노력해보겠습니다ㅋㅋ

레삭매냐 2023-01-27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이 소설 읽은 것 같긴 한데...
격이 가물가물하네요.

물감 2023-01-27 11:24   좋아요 0 | URL
미국의 거장이라고 하니 분명 매냐님도 알고 계시거나, 읽으신 적 있을거라 봅니다요 ㅎㅎㅎ 아마도 매냐님 취향과 잘 맞을 작가로 판단되고요!

공쟝쟝 2023-02-04 0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유 안녕?

물감 2023-02-04 21:39   좋아요 1 | URL
히사시부리, 쟝쟝~

공쟝쟝 2023-02-04 22:02   좋아요 1 | URL
슬램덩크 봤구나? ㅋㅋㅋ

물감 2023-02-04 22:48   좋아요 1 | URL
놉. 이건 아싸들의 인사법이라규ㅋㅋㅋㅋ

공쟝쟝 2023-02-04 22:53   좋아요 1 | URL
왜 안봤어요? 보고 울고 와야지!!!! 내리기 전에 봐요!!! ㅋㅋㅋㅋ 청추우우운을 돌려다오~~~~
 
자메이카 여인숙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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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들은 나를 남들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아싸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인류애가 넘치는 나님은 사람들과 지내는 걸 매우 좋아한다. 단지 직장에는 잘 통하는 사람이 없을 뿐이다. 대체 그 어느 누가 일부러 고립되고 싶어 할까. 분명히 나님은 싱글 플레이어에 가깝지만 약속을 잡는 것도, 집에 초대하는 것도, 남의 집에 놀러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들이 더더욱 귀중하게 느껴진다. 아무튼 말야 내가 이렇게나 사람 좋아하는 스몰 토커인데, 도대체가 맞지 않는 닝겐들 가운데서 몇 시간씩 있으려니 요즘 들어 아주 그냥 오지게 현타를 맞고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입사한 곳마다 인간들한테 데여서 퇴사를 했다. 이게 다 내가 너무 착해서 그렇다. 이 같은 애정결핍자들은 타인에게 칼같이 선을 긋거나 완전히 마음을 닫는 게 실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세상은 도통 내 맘 같지 않고 나에게 협조해 주지도 않아 어딜 가든 비주류에 속하고 마는 것이다. 보다시피 나님은 이렇게나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단다. 젠장할.


<자메이카 여인숙>은 듀 모리에의 장편 중 가장 무난하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나를 닮은 주인공의 어중간한 성격에 있다. 매 작품마다 뚜렷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던 반면에, 이번 주인공은 수시로 이랬다 저랬다를 하고 있다. 그게 딱히 인간미 있어 보이지도 않는 데다 솔직히 스토리마저 쏘쏘 해서 이래저래 아쉬움이 컸다. 따라서 큰 기대 없이 술술 넘긴다면 그냥저냥 무난한 재미는 볼 수 있을 거다. 그와 별개로 가독성 하나는 참 끝내준다.


모친마저 별이 되어 완전히 고아가 된 메리 옐런. 그녀는 모친의 유언을 따라 이모한테 가서 살기로 한다. 알고 보니 이모네는 타 지역 외진 길목에 덩그러니 있는 여인숙이었고, 지역민들은 그 근처만 가도 부정 탄다며 질색하더랬다. 아아 뭔가 쎄하지만 당장 돈 없고 갈 곳 없는 우리의 따님은 일단 여인숙 초인종을 누르고 본다. 이윽고 등장한 골리앗 체구의 아재가 하는 말, 아임 유어 이모부. 그 옆에서 달달달 떨고 있는 이모의 동공 드리블까지. 주인공이 느낀 불쾌와 당혹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치 똥밭에서 하는 10시간짜리 흠뻑쇼 같달까. 저자의 스타일을 알지만서도 볼 때마다 참 거시기허다. 자, 여기까지만 보면 느낌 있고 좋았는데 이다음부터는 RPM이 팍팍 떨어진다. 매번 기대했다가 김빠지는 패턴이 내내 반복되거든. 사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앞서 말한 주인공의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가 문제였다.


사납고 막돼먹은 이모부 앞에서 꽤나 센 척하는 메리. 그게 다 영혼까지 탈탈 털린 이모를 지키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밤중에 찾아온 밀수꾼들의 불법 현장을 목격하자 저절로 주제 파악이 된다. 이대로 달아나고 싶지만 저 불쌍한 이모를 놔두고 떠날 수야 있나. 그렇다고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나 있나. 이모부와 밀수꾼들을 신고한다 해도 증거가 없고, 이 외딴 구역을 지나려는 이조차 없다. 자메이카 여인숙은 밀수업 유통지로 딱이었고, 운영자인 이모부를 편드는 이모는 완벽한 인질이었다. 하여 이도 저도 못 가고 멘탈 바사삭 중일 때 등장한 모 남성이 하는 말, 아임 유어 이모부 동생. 결국 마음 뺏긴 그녀는 그에게 휘둘렸다가 반대로 휘어잡는 밀당을 반복한다. 또 세상 무서운 게 없다는 듯 굴다가도 막상 혼자가 되면 두려움에 쩔쩔매기도 한다. 몰래 집 나와서 떠돌기를 몇 번 하고, 밀수꾼들과 엮여 죽을 고비도 수차례 넘긴 주인공을 보며 역시 20대 초는 팔팔하구나... 아 이게 아니라. 아무튼 강인했다가도 한없이 쭈글어드는, 이 극과 극의 성격 때문에 몰입이 여러 번 깨지곤 하였다. 아무래도 초기 작품이라 그런지 좀 미흡하긴 해. 그럼에도 별점을 높게 준 것은 작가 특유의 서스펜스가 일품이라서다.


좀 더 잘 쓰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이 정도로 끝낼란다. 아직 안 읽은 분들은 얘기한 대로 기대 없이 읽기를 바란다. 적고 보니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서만 주절주절한 거 같네. 매리도 그냥 나처럼 착해빠져서 그런 거야. 그래서 현타 오지게 맞고 정신 못 차린 걸 거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여튼 이렇게 장편은 다 읽었고, 단편들은 뭐 언젠가 읽게 되겄지. 그럼 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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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17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모부 동생의 등장이 풀어낼 이야기가 궁금한데요? 저도 곧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은 물론,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ㅋㅋㅋ

물감 2023-01-17 09:08   좋아요 1 | URL
아니아니 기대하지 말고 읽으시라니깐요 ㅋㅋㅋㅋㅋㅋㅋ
이걸 레베카나 레이첼 급으로 생각하고 보시면 안됩니다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3-01-17 10: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어쩜 이리도 재미있게 쓰시나요?
주인공 성격에 일관성이 없어 독자가 좀 혼란스럽겠는데요. ㅎ
서스펜스의 여왕! 이런 타이틀 제가 작가라면 듣고싶을거같아요.

물감 2023-01-17 11:41   좋아요 1 | URL
쿨캣님 왜이리 오랜만인가요 ㅎㅎㅎ
컨디션이 나빠서 반쯤 포기하며 쓴 건데도 좋아해주시다니, 쿨캣님은 사랑 그 잡채!
작가가 된다면 뭐라도 타이틀이 생기는 게 유리할 것 같긴 해요 ^^

은오 2023-01-17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물감님은 저랑 비슷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20000.

물감 2023-01-17 17:09   좋아요 1 | URL
은오님의 알라딘 활동으로만 봐선 도저히 저랑 같은 과라고 믿기지 않지만 존중해드리겠어요 ㅋㅋㅋ 은오님의 독서와 글쓰기를 응원합니다아

호우 2023-02-01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착하고 선 못 긋고 세상은 내맘같지 않고. 제 얘기인듯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래도 힘냅시다^^

물감 2023-02-01 18:34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역시 착한 사람들은 이렇게 고생만 하다 갈 팔잔가봐요ㅎㅎ 힘내시고 알라딘서 자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