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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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피부 타입처럼 말투에도 웜톤과 쿨톤이 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내용인즉슨 각자의 스타일을 인지하고 존중하자는 뭐 그런 거였는데, 그 작성자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자칭 인류학자인 내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관찰하고 연구해 본 결과, 말이란 건 썩 믿을만한 게 못된다는 점이다. 이 말투라는 건 얼마든지 위장이 가능해, 쿨톤이고 메가톤이고 간에 그걸로는 상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웃는 얼굴을 하면서 등 뒤로는 칼을 쥐는 것이 사회생활 아니던가.


하지만 글은 다르다. 말은 입술을 떠난 즉시 휘발되지만, 글은 손끝을 떠난 즉시 박제된다. 또한 머릿속에 떠다니는 조각들을 정제하여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 글을 보면 필자가 어떤 사람일지를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은 맘에 없는 말을 할 순 있어도, 맘에 없는 글을 쓰지는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가진 게 말뿐이다 생각되면 조용히 거리를 둔다. 반면, 글하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저절로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쩐지 나는 닫힌 사람이고 싶지 않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아닐까.


책을 잘 읽지 않는 한국인들이 그나마 읽는 게 자기계발서, 실용서, 과학도서다. 듣기만 해도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딱 그려지지 않는가. 그런데 간혹 이 척박한 땅을 뚫고 나오는 문학책들이 있다. 이번에 읽은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그중 하나인데, 빨치산의 딸이 부친의 조문객들을 맞으면서 자신이 알던 것과 전혀 다른 아버지를 알아간다는 내용이다. 다소 무거운 소재를 작가는 덤덤하게 풀어놓는다. 빨치산의 집안 분위기는 어땠고, 바깥에선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출세나 결혼도 가로막는 꼬리표에 좌절했던 지난날들을. 십수 년의 옥살이에도 변함없이 빨갱이로 살다 가신 아버지. 불화와 탄식을 몰고 다니는 그의 사상은, 자식조차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의 철옹성이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을 다녀갔다. 아버지의 인맥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전혀 예상 밖이었다. 국가에 반기를 들고 민족을 팔아먹는다던 빨갱이의 죽음을 왜 다들 기념해 주는 걸까. 언제나 매정하고 인색했던, 주변과의 교류도 잘 없었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하나같이 아버지께 은혜를 입었다며 연신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이제 딸은 ‘나‘의 아버지와 ‘모두‘의 아버지를 대조하여 기억의 오류를 찾아낸다.


출소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려던 아버지를 세상은 가만두지 않았다. 빨치산의 낙인을 찍고 연좌제를 시행해 집안 전체를 철저히 짓밟아버린다. 그렇게 온 가족이 피해를 입는데도 아버지의 신념은 아주 굳건했다. 다만 술에 취해 시대를 탓하고, 정권을 욕하고, 혁명 타령하는 게 전부였을 뿐. 이건 뭐 사회 부적응자의 구차한 변명 밖에 더 되는가. 딸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문객들은 아버지가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상과 무관한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래, 이 정도가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혁명 운동의 최선이었지 싶다. 여러 번의 배신과 상처에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아버지는 이 시대의 진정한 혁명가였다.


아버지의 해방은 죽음으로써 완성되었다. 빨치산의 사슬과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딸도 오해와 편견의 굴레에서 겨우 해방이 되었다. 당신의 뼈와 살이 재로 변한 다음에야 간과했던 사랑을 깨닫는 주인공. 화해를 시도하고 싶어도 아버지는 이제 여기에 없다. 하여 아버지께 바치는 소설로 용서를 구하는 빨치산의 딸, 정지아 작가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많은 독자들이 울컥한 건 이야기 자체로도 그렇지만, 문장마다 스며있는 작가의 열린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이 민감한 과거와 감정들을 하나로 엮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백의 시간을 가졌을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글을 쓴다. 그러나 정지아 작가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직접 내리기보다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다. 난 이렇게 투명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참 좋다. 또 이런 분들이 각박한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부디 가정과 사회 모두 윈윈하는 언젠가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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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2-19 14: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류학자 물감님 제 mbti 나머지도 맞춰주세염

물감 2023-02-19 14:27   좋아요 1 | URL
istj요ㅋㅋ

은오 2023-02-19 14:32   좋아요 1 | URL
🫢 마지막 빼고 맞아요!! j처럼 보이는 요소도 꽤 있긴 한데 결국 제 하루와 지금까지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면 스스로 p라는걸 납득할 수밖에 없는.... 그렇습니다. 근데 세개 맞추신것도 신기하네요 인류학자 인정ㅋㅋㅋ

물감 2023-02-19 14:40   좋아요 1 | URL
방정리 잘 하시던데 p인 건 의외네요?
하긴 j들도 게으를 때 많죠 ㅋㅋㅋㅋ
자 그럼 잇팁만의 시니컬한 리뷰 자주 써주세요^^

공쟝쟝 2023-02-22 20:14   좋아요 1 | URL
난 방 정리 못하는 J ~~ !
물감님 투명한 글을 쓰는 저를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

물감 2023-02-22 21:11   좋아요 2 | URL
그럴게요!

은오 2023-02-22 21:1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페넬로페 2023-02-19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요즘 엄청 읽히던데 좋은가봐요.
딸의 입장에서 끝까지 전향하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어요^^
투명하다, 좋으네요^^

물감 2023-02-19 18:36   좋아요 2 | URL
별 생각없이 읽었는데 의외의 감동이었어요.
화제가 된 책들은 거품이 많았었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도 않은가봐요ㅎㅎ
원하지 않은 삶을 물려준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많았지만, 좋았던 기억마저 원망에 가리워있었다는 걸 깨달은 작가님의 라떼이야기 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승주나무 2023-02-19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해방이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뿌려졌기에 그 완성의 의미도 더 깊은 것 같아요. 저도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리뷰를 쓰지 않을 수 없더라고요. 글 잘 읽었습니다. 말은 휘발되고 글은 박제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물감 2023-02-19 18:52   좋아요 1 | URL
죽고서야 의미를 가진다는게 참 아이러니 하죠. 근데 세상은 더 아이러니에요. 자기밖에 모르는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생각하면, 이웃과의 화평을 중시하는 아버지의 사상이 필요하다 생각도 들었거든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승주나무 2023-02-19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자본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삶은 희소가치가 매우 높은 반면, 실제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많아서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것 같아요.

물감 2023-02-19 19:16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고것이 자칭 인류학자로서 풀어야 할(그러나 풀지 못할) 숙제입니다. 에휴...

coolcat329 2023-02-20 14: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읽어보려고 했던 책이에요~~소문이 진짜였군요. 물감님 리뷰 읽고 꼭! 읽기로 맘 굳혔습니다.

물감 2023-02-22 20:15   좋아요 1 | URL
소문난 줄도 몰랐는데 운이 참 좋았네요.
작가님이 연배와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글맛이 대단했어요.
쿨캣님도 읽고 리뷰 써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