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양식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5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이것으로 시리즈 전 권을 다 읽었다. 이 작품이 제일 두꺼워서 마지막에 읽은 건데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성 심리가 기반인 요 시리즈는 주인공이 전부 여자였는데 이 책만 유일하게 남자가 주인공이다. 그것도 의아했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해 주제가 영 선명치 않아서 애 좀 먹었다. 여튼 주인공과 함께 여러 남녀의 서사도 담겨있어 종합선물세트 같았던 작품이다. 무엇보다 스토리가 미쳤고요.


절친 삼인조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음악을 극혐하던 버넌은 억지로 갔던 음악회를 계기로 각성하여 작곡가의 길을 간다. 남사친은 비상한 감각으로 잘나가는 사업가가 된다. 예술인의 고독을 동경하던 여사친은 조각가가 되려 한다. 목표도 성향도 제각각인 세 사람은 각자 인생의 쓴맛을 보면서 우정을 다져나간다. ㅡ 긴 생략 ㅡ 버넌이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하자마자 전쟁이 일어난다. 이후 군에 입대한 버넌의 전사 소식이 들려와 모두를 좌절시킨다. 무엇보다 음악계의 샛별이 사라졌다는 게 쓰디쓴 아픔이었다. 그 이슈가 잠잠해질 때 즈음에 갑자기 뿅 하고 등장해버리는 버넌. 그런데 이 친구,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단다. 기억이 돌아온다 한들 쓰라린 현실의 연장일 터. 그럼에도 다시 천재 음악가로 복원시키는 게 맞는 걸까.


저마다 삶의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스위치가 있다. 여사친은 예술가들의 불행 속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하곤 했다. 돈도 집안도 없지만 꿈에 대한 갈망이 꾸준한 친구였다. 반대로 부와 능력, 명성까지 다 갖춘 남사친은 자신의 힘이 사회에 보탬이 될 때에 기쁨을 느꼈다. 모든 게 완벽했으나 사랑만큼은 복이 없는 딱한 친구였다. 이들에 비하면 주인공은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였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외면해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성장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애정 과잉의 엄마였다. 엄마는 훌륭한 엄마 역할 놀이에 심취에 있었다. 버넌도 그걸 알고서 내적 손절했으나 겉으론 무난하게 지내는 편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신경 쓰기 싫은 일들을 무시해오다 보니 사회성마저 결여되고 말았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게 엄마의 행동까지 따라 하게 된 버넌이었다.


가뜩이나 사회성 부족한 애가 작곡에 빠져서 더더욱 마이웨이가 된다. 낌새를 느낀 친구들은, 버넌이 늦게라도 기쁨을 찾았다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응원만 했다. 얼마 안 되어 옛 친구를 만나 적극 구애 활동에 들어간 버넌은, 사랑만 있으면 어떤 난관도 이겨낼 거라는 일방적인 신념을 밀어붙인다. 반면 애인은 버넌이 가난을 우습게 여기는 것과, 여자의 마음에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속을 앓는다. 여기서 주변인들의 생각도 반으로 나뉜다. 사랑과 이상만을 고집하는 버넌의 이기심과, 풍요로운 삶을 소망하는 애인의 속물근성. 누가 맞는지는 모르지만 상대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버넌의 방식은 그토록 꺼려 했던 엄마한테 물려받은 인생의 양식이었다. 혐오하던 음악을 사랑하게 된 것도 그렇고, 버넌은 성향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 삶의 원동력인 셈이었다. 겨우 세상을 살아갈 목적이 생겼으나 동시에 꺼져가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마치 뜨거운 물을 못 느끼고 죽어가는 개구리처럼.


버넌의 시련은 계속된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버넌 부부. 그리고 전쟁에서 사망한 버넌 소식을 듣고 재혼한 아내. 근데 하필 연상의 부자와 재혼하여 질타를 받게 된다. 사랑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체 가난을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다 나타난 버넌한테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무방비 상태의 기분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이윽고 버넌의 기억이 깨어나 재회하고, 그녀는 다시 버넌에게로 돌아오는데 오히려 난 이 장면에서 욕이 잔뜩 나오더랬다. 그렇게 인격을 되찾은 버넌은 옛 천재성을 잃어버려 좌절했지만 기억을 잃은 동안 행복을 만끽했던 것과, 기억을 잃기 전의 고통스럽던 삶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기쁨을 조율해나간다. 멀리 돌아오긴 했지만 다 잘 됐구나 싶을 때쯤 관자놀이에 하이킥을 꽂는 애거사 크리스티. 하, 정말 이러기 있습니까요.


보다시피 작중 인물들은 삶을 지탱하는 열정의 재료가 전부 다르다. 그 재료물이 하찮고 보잘것없는 걸 수도 있고, 남들에게 눈총과 비난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삶이란 내가 나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을 사랑해야 유지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건 여러 리뷰에 적었던 말이기도 하다. 내 생각과 일치하고 공명하는 작품을 만났을 때의 기쁨, 이것이 지금 내 인생의 양식이 아닐까 싶다. 먹고 자고 독서 밖에 안 하는데도 질리지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행복이 별거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하고 친하게 지내시면 다 됩니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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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6-0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분명 읽은 것 같은데 이 리뷰 읽는데 완전 너무 새로워서 지금 제 독서앱을 켜봤거든요? 2015년에 읽었다고 되어 있네요. 허허 그것참.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모르겠죠? 도대체 뭣하러 독서를 하는건지 원.
저도 애거서 크리스티 이 시리즈 좋아했어요. 읽는 족족 팔아버렸는데 이건 모았어도 괜찮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책들 모아두면 예쁘더라고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 읽을 때도 느낀거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란 사람은 한 명이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았을텐데 어떻게 책마다 개성있는 인물들의 전혀 다른 삶의 이야기를 썼을까 신기하고 존경스럽더라고요. 이 책은 재독 찜입니다. 슝~

물감 2023-06-05 11:08   좋아요 0 | URL
ㅋㅋㅋ다락방 님의 글들을 분석해보면요, 읽다가 딱 꽂히는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타입이시더라고요. 특정 부분에 대한 개인의 감상을 위주로 기록하셔서 기억이 안남는 게 아닐까요 ㅋㅋㅋㅋ 이건 N과 S의 독서방식 차이일 거에요.

이 시리즈 정말 좋죠! 작가가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싶어요. 인생 몇회차인가 궁금하고요 ㅋㅋㅋㅋ다락방 님의 재독과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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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다 보면 읽고 있는 책이 나랑 맞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내 경우는 첫 만남에서 아무런 삘도 받지 못했을 때 칼같이 손절하는 편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 예외인 경우가 있는데 말하자면 이런 거다. 소개팅에 나온 저 시시껄렁한 상대한테서 알 수 없는 태평함과 여유로움이 막 느껴진단 말이지. 어쩐지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좀 아쉬워. 그래서 모른척하고 기회를 줘봤더니 과연 내 직감에 딱 적중했지 뭐겠어. 이런 식으로 리스트업 해둔 작가 중 하나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앞전에 읽은 <한 달 후, 일 년 후>가 라이트한 일본 문학에 가까워서 적잖이 실망했더랬다. 헌데 요상하게 문장 곳곳에 뼈가 있어가지고 이건 또 뭐냐 싶어서 한 권 더 읽어봤더니 결과는 대만족쓰. 이번 건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였어.


<한 달 후, 일 년 후>의 재탕이라 해도 될 만큼 설정이 똑같았다. 사교모임을 즐기는 남녀들의 뺏고 뺏기는 사랑 이야기.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면 별 다섯 개는 거뜬히 주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재탕이어서 별 하나 뺐다. 이번에도 비슷한 류의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중 나이차가 있는 연상의 애인을 둔 남녀가 사교모임에서 눈이 맞는다. 그러나 이들은 유명인의 공식 애인인지라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다. 하여 숨 막히는 비밀 연애를 병행하다 결국 커플이 되어 사교계를 떠난다. 그리고 얼마 못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삐걱대기 시작한다. 부자 애인에게 빨대 꽂았던 생활 방식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한 달 후, 일 년 후>와 똑같다면서 왜 높은 점수를 줬냐면, 이 책에는 풀이 과정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앞전에 읽었던 건 온통 문제하고 답밖에 없었으니까. 프레임이 자꾸만 끊어지던 그 책에 비하면 이 책은 얼마나 친절하고 상냥한지. 한 가지 더. 이번에는 딱 주인공 두 사람끼리만 스파크가 일어난다. 곁가지가 좀 있긴 한데 거의 둘만의 내용이라서 전개도 깔끔하고 주제도 명확했다. 비교는 이쯤 해두고, 작품을 논하기 전에 문란한 캐릭터를 즐겨 쓰는 저자의 정신세계부터 알아둘 필요가 있다. 술-담배-약물 중독은 기본이요, 스포츠카 사고에 요트 사고, 카지노 죽순이에 도박으로 재산 탕진 등등, 급이 다른 저자의 비행 앞에 전 국민이 떠들썩했더랬다. 사강은 제 기분을 표출함에 있어 몸 사리질 않았으며,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굉장히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허황된 환상보다 날것의 고독을 쫓았다는 걸로도 유명하다. 여하튼 그 불안한 사상과 자유가 도덕적 관념을 깨뜨리는 문학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쉬쉬해오던 사회적 금기사항들을 대중화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이렇듯 사강이 꺼림직한 문장을 쓰고도 살아남은 건, 독자들의 은밀한 욕망을 어루만져 준 문화충격 반항아였기 때문이지 싶다. 단짠단짠의 아이콘이랄까.


사강의 캐릭터들은 꼭 하루살이 같다. 내일은 생각지 않고 오늘만을 살아간다. 주인공 두 남녀는 자신들의 썸씽이 사교계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고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를 알았으면서도 그저 본능에만 충실한다. 갈수록 양심은 희석되고, 서로를 탐하고 소유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두 사람. 그래 그렇지, 남이 끓인 라면은 무조건 맛있는 법이거든. 정작 주변인들은 이들의 불장난을 눈치채고도 그저 방관한다. 자신들의 평판이 바닥난 것을 정녕 모르는 건지, 아님 모른 체 하는 건지. 아무튼 본격적인 서민생활과 함께 멘탈이 털린 이들의 코믹 쇼가 펼쳐진다. 돈에는 욕심 없는 남주와, 돈에만 관심 있는 여주는 몇 번의 시행착오로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겨우 알게 된다. 여주의 속물근성을 보고도 반했던 남주는 이제 와서 일 안 하고 돈만 밝히는 그녀에게 실망한다. 그리고 고생길 훤한대도 가난한 남주를 택했던 여주는 뻔뻔하게 전 애인을 찾아가 도움을 받는다. 그걸 또 받아주는 전 애인도 참 뭐라 할 말이 없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은 쓰지 않는다던 사강 언니, 대체 어떤 삶을 사셨던 검까...


그렇게 여주는 전 애인에게로 돌아간다. 이별 후에야 비로소 자신한테 확신을 갖게 되는데, 그녀는 단조로운 일상 말고 속물대로 살 때라야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다. 손가락질 받을지언정 지금 이 모습이야말로 자신의 본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거짓된 삶을 연기하다 튕겨져 나가는 것보단 나을 테지. 저자도 이런 생각으로 자기 파괴적인 마인드를 고집했으리라. 사강을 보고 있으면 1급수에서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느껴진다. 근데 또 탁한 물에 사는 물고기가 더 맛있긴 하거든. 그 맛을 잘 아니까 독자들이 계속 사강을 읽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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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9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옷 이거 재미있겠는데요? 오오.. 여기요, 150원.

물감 2023-05-29 10:39   좋아요 0 | URL
으잉? 다락방님 사강 책 다 읽으신 줄ㅋㅋㅋ 이책 강추합니다. 재밌어요😎

다락방 2023-05-29 11:02   좋아요 1 | URL
아뇨 저는 한두권 읽고 저 쪽에 밀어둔 작가입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9 11:15   좋아요 1 | URL
저는 아니 에르노보다 사강에게 한 표 던집니다 ㅋㅋㅋ
(이래놓고 또 실망하면 안되는 데....)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1 | URL
사강은 알라딘 책덕후분들 사이에서 꾸준히 다시 듣게 되는 존함입니다만
아직 저는 이름 들어본 작가의 영역으로만 남기고 있어 죄송하네요

에스프레소 강도라니!^^ 물감님의 평을, 혹 이 책 올해 안에 읽게 된다면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물감 2023-05-29 18:03   좋아요 1 | URL
왜 저는 사강 보다 에르노를 더 많이 본 것 같죠? 상 타서 그런건가ㅋㅋㅋ 여튼 적당히 자극적이고 좋습니당. 읽어보세요🙂

새파랑 2023-05-29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천원 이었나요? 😑 그래도 별 넷이라니 다행입니다~!!
전 아니에르노 보다 사강입니다~!!

물감 2023-05-29 16:53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삼세번의 기회를 주는 작가가 있고 곧바로 손절하는 작가가 있고 그렇습니다.
다행히 사강은 재밌는 작가였어요! 여기도 후에 전작을 읽어볼까 해요 ㅋㅋ
새파랑 님도 아니 여사 보다 사강 언니파!!!!!

얄라알라 2023-05-29 17:57   좋아요 2 | URL
글쵸! 사강하면 새파랑님 자동 떠오릅니다요!

물감 2023-05-29 18:00   좋아요 2 | URL
오 새파랑 님이 그정도였나요? 저한테도 연상되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네요ㅎㅎㅎ

새파랑 2023-05-29 18:10   좋아요 1 | URL
앗 ㅋ제가 사강 책을 많이 읽기는 하긴 했는데 그정도는 아닌거 같습니다 ㅡㅡ

coolcat329 2023-05-2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에게 사강이 이런 작가였군요. 모든 리뷰가 재미나지만 이번 글 참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읽었네요.
사강 책은 브람스...만 읽어봤는데 저는 사랑 이야기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이 책은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물감 2023-05-29 16:41   좋아요 2 | URL
전 절대 나쁜 여자 취향이 아닌데 이상하게 끌리는 거 있죠?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ㅋㅋㅋ 저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인생에 굴곡이 좀 있고 그래야 보는 맛이 있으니깐요. 이 책 강추합니다ㅋㅋ

잠자냥 2023-05-29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강은 읽다보면 질려서(도돌이표 같은 ㅋㅋ) 이제 그만 읽자, 하고 녹생광선에서 나온 책 중 유일하게 안 읽은 게 이 작품인데(심지어 도서관에서 2번이나 빌렸다가 2번 다 그냥 반납) 이 작품까지는 언젠가 읽어야겠군요….

물감 2023-05-29 23:40   좋아요 1 | URL
앗 도돌이표라! 그렇담 연달아 읽는 건 피해야겠네요ㅋㅋㅋ여튼 즐건 독서였습니다😀😀😀

잠자냥 2023-06-08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달의 당선작까지 되었어!

물감 2023-06-08 12:39   좋아요 1 | URL
따란! °_°v
 
한 달 후, 일 년 후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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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사강 책이나 파볼까 싶어 아무거나 골랐는데 어머나 세상에 완전 꽝이었다지 뭐니. 소문이 자자했던 사강 언니 신드롬을 구경할 기회가 전혀 없었어. 아니 핑크핑크한 책들은 왜 꼭 모 아니면 도인가 몰라? 일단 읽었으니 기록은 남기겠는데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은 상태야.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글쎄, 프랑스 정서와 맞지 않는 탓이 크겠네. 솔직히 내용도 좀 거시기해. 여러 남녀의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지저분한 러브 스토리인데, 그걸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세기의 사랑처럼 그려놨더라니까? 그게 뭐 젊은 날의 청춘 드라마라면 그러려니 해야지. 근데 이 책은 중년의 유부남녀들과 가족과 한참 어린 청년까지도 섞어대는 N각 관계였다니까? 그러면서 지들끼리 막 경쟁하는 것도 아니야. 네 사랑도 네 감정도 존중해~이러고나 있다야 증말. 과거에 사귀다 헤어진 남녀가 이젠 각자의 짝이 있음에도 다시 옛 연인에게 매달린다는 구질구질함, 그걸 알면서도 허송세월 기다리는 헌신짝들의 미련함, 감정도 없으면서 자꾸 여지를 남겨 썸 놀이에 재미들린 팜므 파탈의 뻔뻔함... 대충 감이 오지? 제목도 딱히 의미는 없어. 한 달 뒤면, 일 년이 지나면 죽을 만큼 힘든 지금의 당신도 이런 나를 사랑치 않게 될 거란 일종의 통보였어. 원래 사랑이란 게 구차해질 때도 있고 그런 거래. 헌데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면서까지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짐승 취급받아도 상관없다 이거야? 한국에서는 몽둥이가 답인데 프랑스는 어떤지 잘 모르겠네. 사강 언니는 좀 더 지켜보도록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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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24 1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아직 이 리뷰 읽기 전이고요, 서재브리핑에 한 달 후, 일 년 후 와 물감님 나란히 뜨는 순간, 물감님 별 세개 밑일거다!! 이러고 뛰어왔는데 두개가 똭!!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2: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다락방 님은 이제 저를 너무 잘 아시는군요.........

다락방 2023-05-24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리뷰 다 읽었고요, 저 앞으로 물감님이 사강 안좋아한다에 백오십원 겁니다!! 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3:17   좋아요 0 | URL
아 진짜 다른 책들도 이런 갬성인가요? 안되는데 ㅋㅋㅋㅋㅋ
저도 유교가이지만 나름 열린 마인드를 지향하는 편인데 아직은 갈 길이 먼가봐요 ㅋㅋㅋㅋㅋ 한두권 더 읽어보고 판단할게요!

잠자냥 2023-05-24 13:26   좋아요 1 | URL
근데 물감 님 사강 안 좋아한다에 저는 삼백원 걸겠습니다.

물감 2023-05-24 13:33   좋아요 1 | URL
아악 그렇게들 겁주지 마세요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9:20   좋아요 0 | URL
후후후 두분 다 입금할 준비 하십쇼ㅋㅋㅋㅋ

다락방 2023-05-24 20:03   좋아요 1 | URL
?????????????????

잠자냥 2023-05-24 20:06   좋아요 1 | URL
에이 물감 이 사람 450원에 영혼을 파네…. 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05-24 1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속시원하네 ㅋㅋㅋㅋㅋㅋㅋ근데 물감 님 작가의 대표적 망작을 뽑는 솜씨가 있는 거 같기도 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5-24 13:32   좋아요 0 | URL
나는 프랑스와도 맞지 않는갑다,라고 쓸 뻔ㅋㅋㅋㅋㅋㅋㅋ이제사 느낀건데 이건 저의 독서력하고는 완전 별개의 문제였어요ㅠㅠ

새파랑 2023-05-25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물감님과 사강은 안맞을거라는데 천원 걸겠습니다~!!
프랑스(?)가 좀 그런거 같아요 ㅋ 전 독특해서 좋아하지만요 ㅋㅋ

물감 2023-05-25 10:21   좋아요 1 | URL
ㅋㅋㅋ새파랑 님도 입금할 준비하셔요😎 다음거 읽는 중인데 재밌거등요ㅋㅋ

자목련 2023-05-26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데 물감 님 책장에 프랑스 문학 많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물감 2023-05-26 13:28   좋아요 0 | URL
말씀해주셔서 슬쩍 살펴보니 없진 않네요 ㅎㅎㅎ 북유럽 말고는 그렇게 국가를 따지는 편이 아니긴 해서요 ^^ 또 에밀 졸라의 광팬이기도 하고요!
 
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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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유정의 팬이다. 근데 나의 팬심은 작가가 아닌 작품으로만 향한다. 그래서인가 신간이 나와도 막 설레거나 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의 책도 마찬가지이고. 여튼 미루고 미루던 <완전한 행복>을 드디어 읽었는데, 개인적으로 정유정의 전작 중에서 가장 베스트라고 생각되었다. 2019년에 있었던 고유정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라는데, 그 사건이 전혀 연상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인 몰입감과 흡인력을 보여준다. 이 좋은 걸 대체 왜 미뤄왔나 했더니 읽고픈 마음이 1도 안 드는 저 구닥다리 표지 때문이었다. 진짜 은행나무 책들은 하나같이 멋대가리 없는 디자인뿐이다. 출판사는 드럽게 못 만드는 디자이너들을 싹 다 교체해야 된다. 책이 예쁘단 이유만으로 구매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게 무슨.


집안 사정으로 떨어져 살게 된 두 자매가 있었다. 시골에서 2년간 조부모에게 길러진 동생은 어찌나 칼을 갈았던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는 데에 집착했고, 언니한테는 증오로써 광기를 표출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동생에게 쩔쩔매며 세월이 흐른 뒤, 동생과 만났던 남자들이 전부 변을 당하는 기묘한 역사가 반복된다. 그러다 동생의 전 남편이 실종되었고, 현 남편은 실종자와 아내가 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아내가 두려워 뒷조사해 봤더니 섬뜩한 미스터리가 대거 쏟아졌다. 아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자신은 왜 그녀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일까. 거미줄에 걸린 상태에서는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공포에 잡아먹힐 수밖에.


늘 그렇듯 이번 작품도 요약이 쉽지가 않다. 그리고 여전히 독자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늘 불만이었는데 이젠 뭐랄까, 이 분의 작품은 그냥 냅다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지만 기존의 캐릭터들과 달리 나르시시즘에 기초한 광기라는 점이다. 내가 아는 나르시시스트란 완벽한 자신을 황홀해하는 신종 변태 정도였는데, 모든 사이코패스는 나르시시스트라는 작가의 말에 보는 눈이 좀 바뀌었다. 동생 신유나는 미적 요소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행복한 감정을 사수하는 일에만 집착한다. 그녀가 말하는 행복이란 불안요소를 전부 제거하여 완전무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했다. 불행과 싸워나가는 삶이 아니라 아예 불행 자체가 없는 완전한 삶이어야만 하는 거였다. 그래서 행복의 공식은 뺄셈일 수밖에 없다고.


동생의 광기는 어릴 때 부모와 헤어지고부터 생긴 듯 하나, 느낌상 그전부터 있었던 기질로 생각된다. 어린아이한테 잘 없는 거친 언행과 사고방식이 갑자기 생겨난 느낌은 아니었기에. 동생은 시골집을 방문한 언니를 죽일 기세로 위협했다. 자신이 가져야 할 전부를 언니가 훔쳐 갔다면서. 사정상 저렇게 발악하는 것도 이해한다만 집으로 돌아온 동생의 발악이 계속된다는 게 문제였다. 부모는 미안해서라도 동생한테 다 맞춰주었고, 억울하게 죄인 취급받은 언니도 찍소리 못하고 살아야 했다. 동생에게 밀려 케어 받지 못한 언니는 훗날 독립하여 가족과의 연을 끊다시피 한다. 이런 걸 보면 괴물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든다. 내 안의 증오와 복수심이 어디로 어떻게 뻗어나갈지 누가 알랴.


신유나는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다. 그래서 이혼했음에도 전 남편을 여전히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으며,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 또한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다. 한번 도장이 찍힌 사람들은 그녀의 행복을 완성시키기 위한 재료이자 밑거름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끔 유도하는 말들로 상대를 쥐락펴락하는 그녀는 화술의 달인이었다. 그런 그녀와 관계를 정리하려는, 즉 자신을 버렸다고 믿게 한 이들에게는 사고를 가장한 죽음으로 되갚아주었다. 또한 저항하는 소유물에게, 행복을 위한 내 노력들을 왜 알아주지 않느냐고 따져댔다. 이 완벽한 뺄셈 공식을 납득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처분 대상이었다. 도자기를 깨부수는 도예가처럼 말이다. 행복하기 위한 자기 파괴적 행동이라니.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려나.


흡사 좀비물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판은 갈수록 커지는 데 뭘 어떻게 마무리할 건지 감도 안 오고. 발작 버튼이 눌린 동생은 주변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기세였다. 심지어 딸아이의 폭행도 현 남편이 겨우 막았으니까.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더니 남편과 언니까지 불구로 만들고 감금한다. 이대로면 곧 죽을 텐데 하필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시골집이어서 빠져나갈 구멍도 없었다. 이 상황을 뒤집는 방법은 신유나의 가스라이팅을 깨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정신 지배에서 벗어남으로 겨우 죽음을 비껴간 피해자들. 정말 숨 참아가면서 읽었다. 역시 스릴러소설은 더울 때 읽어야 한다.


동생은 가족과 떨어졌던 그 시기에 성장이 멈춘 듯했다. 상대를 죄인으로 만들어 굴복시키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한 동생. 누구라도 설설 기게 만드는 그 방식은 자신의 인생론이 정답이라고 믿게 해줬을 터. 헌데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를 그저 내버려 둔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더라. 어째서 부모는 의료시설에 기대볼 생각조차 안 했을까. 아무리 교활하고 영악하대도 그렇지,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발악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는 게 말이 되냐고. 무조건 오냐오냐하는 것도 하나의 아동 학대란 사실을 모르는 부모가 정말 많다. 아무튼 동생이 사이코패스가 된 데에는 절반 이상이 부모 책임이었다. <종의 기원>의 사이코패스는 날 때부터 포식자의 DNA를 지녔다지만 이 작품에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케이스인데, 그것이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아주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저자가 끊임없이 파고드는 인간의 악에 나 역시 관심이 많다. 그래서 앞으로도 악을 연구한 작품들을 쭉쭉 뽑아내주시길 바란다. 아 그리고 은행나무 디자이너는 진짜 반성 좀 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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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5-23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물감님 별다섯이니 읽어보고 싶네요~!!
표지가 좀 그렇긴 한거 같습니다 ㅋ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포장도 중요한거 같아요 ^^

물감 2023-05-23 15:25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표지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 편인데 여기 출판사는 좀 심하더라고요. 그래도 정유정은 대형 작가인데 이렇게나 무성의한 표지라니. 보니까 이 책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책이 다 그렇더라고요. 당연히 내용물이 더 중요하지만 화가 나네요 ㅋㅋㅋㅋㅋ
정유정 작품은 늘 호불호가 있습니다만 전 대만족하며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자극적인 독서라 좋았어요ㅋㅋㅋ
 
로스할데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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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도 꽤 오랜만인데 역시나 재미있다. 아직까지는 독일 작가 중에선 헤세가 가장 좋다. 자기 고뇌에만 집중하는 타 작가들에 비해 이 분은 이야기에 먼저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루는 주제도 자아나 정체성에 대한 거라서 막 어렵지도 않고, 남녀노소 공감할 만한 내용이라 호불호도 거의 없다. 이렇게 작가로서의 헤세는 참으로 훌륭하고 위대한데, 인간으로서의 헤세는 과연 어떠할까. <로스할데>를 읽고나서 헤세가 마냥 옥구슬 감성러는 아니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이가 틀어져 버린 화가 부부. 남편은 로스할데 저택 별채에서, 아내는 안채에서 각자 별거하고 있다. 아들이 둘인데, 큰 애는 오래전부터 엄마 편에 가있다. 작은 애가 유일한 가족의 연결고리인 상황. 이에 화가의 절친은 자기와 인도에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고민 끝에 인도행을 결심한 순간, 그동안의 고통과 외로움이 전부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작은 애가 뇌막염으로 숨지고 화가의 생명도 반 토막이 난다.


늘 그렇듯 이 작품도 자전 소설이다. <로스할데>는 헤세의 가장 안 알려진 작품 중 하나란다. 기존 방식처럼 상반된 두 인물의 이야기도 아니고, 해설을 읽어야만 겨우 이해할 주제였기 때문이지 싶다. 여튼 지루한 초반만 잘 이겨내면 꽤 재미있는 이 작품은 ‘예술가한테 가족이 꼭 필요한가‘ 하는 고찰을 던지고 있다. 본업에 진심인 화가는 가족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 아내와는 한참 전에 멀어졌고 큰 애도 아빠를 싫어한다. 종종 찾아와주는 작은 애랑도 놀아주질 못한다. 말로는 작은 애가 삶의 전부라지만 딱히 애한테서 기쁨을 얻는 것 같지도 않다.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가정생활을 하고 있으니 친구가 보기에 얼마나 답답했겠나. 이 로스할데에 메여있다가는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작은 애를 아내에게 맡기고 떠나려는 주인공. 어떻게 보면 참 무책임한 냉혈한이지만 사실 예술가의 기질이란 게 지밖에 모르는 거라서 막 비난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아빠를 싫어하는 큰 애는 피아노를 전공 중이다. 작중에는 그런 묘사가 없지만, 아들은 아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중이었지 싶다. 막연하게 예술에 뛰어든 자신과 달리 아빠는 저 나이에도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실력과 명성까지 갖춘 아빠는 선망의 대상이자 목표였을 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본인 예술 하기에 바쁜 아빠는 아들의 일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철부지 동생만 이뻐하고 있으니 많이 서운했을 터. 한 번은 아빠의 예술 철학에 대해 들으며 내심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자신을 예술가라 생각하고 꺼낸 얘기였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같은 예술가로써 지도와 조언을 해줬었다면, 같은 예술가로써 대우하고 인정해 줬었다면 부자 사이가 틀어지진 않았을 텐데. 남자들이란.


작은 애가 점점 아파하다가 끝내 숨을 거두는 것은, 점점 시들해지다 끝나버린 헤세의 결혼생활을 표상하고 있다. 아홉 살 연상의 신경질적인 아내를 못 이기고 인도로 도피했다는 헤세. 근데 한편으로는 헤세의 부족한 현실감각 때문에 아내가 화딱지 났던 걸 수도 있겠다. 헤세가 워낙 이상주의자라서 말이지. 여하튼 집안에서 자그마한 희망의 끈이 돼주었던 작은 애처럼, 헤세도 어떤 가느다란 끈을 붙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그 희망마저 끊어지자 슬픔과는 별개로 놀랍도록 차분해지고 평안해지는 화가였다. 가족한테 받았던 방황과 소외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작은 애를 간병하며 아내와도 사이가 좋아져서 혹시나 했는데, 화가는 예정대로 로스할데를 떠나기로 한다. 슬퍼하는 아내가 그를 강경하게 막지 못한 것은, 실패한 결혼생활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음을 남편이 인지해서였다. 나는 이 장면 때문에 헤세의 아내가 공격수였던 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리 멘탈 헤세도 언제까지나 수비수는 아니었다. 반격할 틈을 찾자마자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걸 보면 말이다.


확실히 이 작품은 헤세의 스타일 같지가 않다. 일단 고뇌의 결과가 현실도피로 끝난 것도 그렇고, 묵직한 주제에 비해 이야기는 다소 싱거웠고. 게다가 그 주제들도 좀 모호하게 다루고 있다. 또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예술가와 기혼자가 아니면 썩 공감되지 않을 장면들로 가득했기에. 아무튼 헤세 작품은 늘 대만족이다. 올해는 헤세의 전작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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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9 1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최근에 <수레바퀴 아래서>를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 헤세를 다 읽어볼까 하던 참인데 마침 물감 님이 헤세를 똭!! 이 책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물감 2023-05-19 12:23   좋아요 2 | URL
<수레바퀴 아래서> 넘나 재밌죠! 그 책 리뷰에 영혼을 갈아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헤세 짱짱맨! 이 책도 재밌어요, 읽어보세요 ㅋㅋㅋㅋ 그다음은 어떤 거 읽으실 건가요? 다락방 님 따라가야지 ㅋㅋㅋㅋ

새파랑 2023-05-19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름 헤세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처음 봅니다 ㅎㅎ 헤세의 아내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예민한 헤세랑 사는게 쉽지는 않았을거 같아요 ㅋㅋ

역시 독일은 헤세~!! 전작을 응원합니다~!!

물감 2023-05-19 14:20   좋아요 2 | URL
새파랑 님도 모를 정도면 진짜 안 알려진 작품이 맞나봐요ㅋㅋ 저도 예민한 사람 만나서 고생 꽤나 해본 지라 할말은 많지만... 다음엔 나르치스 골드문트 읽을 예정입니다ㅋㅋ

잠자냥 2023-05-19 15: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잉 <로스할데>는 재미 없을 거 같아서 안 읽었는데 재밌어 보이네요.......
근데 저도 예술가도 기혼자도 아니라서...ㅋㅋㅋ 으흠... 그래도 일단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물감 2023-05-19 16:00   좋아요 2 | URL
이래서 마케팅이 중요한 거군요ㅋㅋㅋ근데 꼭 예술가, 기혼자가 아녀도 대강 알아먹을 내용이라 안 어려워요ㅋㅋㅋ자냥 님의 리뷰 기다리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5-19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채와 별채^^;; 한 집에서 별거가 가능한 구조네요 ㅎㅎ
저도 <로스할데> 이제야 알게 되네요.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서 그냥 지나친듯요^^

물감 2023-05-19 16:41   좋아요 2 | URL
보니까 별채를 더 지은 거더라고요ㅋㅋ이 책 읽을만 합니다요. 이렇게 된 김에 영업이나 해야겠어요ㅋㅋㅋ

coolcat329 2023-05-19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세 책 중에 이런 책도 있었군요.
헤세가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저도 헤세 책 조만간 읽어야 겠습니다.

물감 2023-05-19 22:36   좋아요 1 | URL
알라딘 고인물들이 다 모르는 작품이라니. 참 놀랍네요. 여하간 헤세가 좋은 남편감은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본인도 그걸 알았을 법한데 어째서 결혼을 했는지가 의문이에요. 여튼 쿨캣 님도 헤세 문학 읽기에 동참하시는 걸로!

모나리자 2023-05-20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세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아직입니다.헤세의 작품은 늘 감동과 생각거리를 안겨주지요.
헤세의 전작 읽기 응원합니다. 물감님.^^

물감 2023-05-21 04:36   좋아요 1 | URL
갈 길이 멀지만 부지런히 달려보겠습니다. 일단 대여한 책들 먼저 해치우고나서ㅎㅎㅎ

책읽는나무 2023-05-2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세 좋아하는데 이 책 제목은 처음이네요?^^
헤세 넘 좋아해서 작년엔 헤세가 그린 풍경 수채화 달력까지 사서 걸어놓고 헤세~헤세~ 했었는데, 책은 몇 권 안 읽었네요ㅋㅋㅋ

물감 2023-05-21 04:38   좋아요 1 | URL
헤세는 워낙 친숙해서 그런지 안 읽고도 읽은듯, 안 읽었어도 죄책감 같은 거 없는 작가 같아요ㅋㅋ 조만간 책나무님의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립니다🙂

꼬마요정 2023-05-21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헤세 좋아하는데 개인적인 삶이 그닥 훌륭하지 못해서 자꾸 책 읽는 데 방해가 되더라구요. 예를 들면 <크눌프>에서 가정을 두고 방황하는 작가가 생각난다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소설이 많아서 참 그렇습니다. <로스할데>는 처음 들어봅니다. 물감 님 덕에 또 주섬주섬 장바구니로 책을… 기대별적립금은 늘 쓰일 데가 있네요 ㅎㅎㅎ

물감 2023-05-21 04:46   좋아요 2 | URL
영업 성공했군요ㅎㅎㅎ 유명작만큼 재밌진 않지만 이름값은 합니다. 그래도 헤세가 본인을 파악할 깜냥은 된 인간이구나 싶어요. 안그러고서야 이런 작품을 쓸 수가... 신기하게도 누구나 공감하고 고민해볼 만한 고찰이어서 막 저격하지도 못하겠고 암튼 그렇습니다ㅋㅋ 같이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