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모중석 스릴러 클럽 34
마커스 세이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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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양재진, 양재웅이 말하길, 인간은 모호한 정보 즉 정보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단다. 자아의 강도가 낮을수록 판단하고 결정짓는 게 빠르다는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일명 ‘빠‘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다. 정치관여, 종교활동, 사회운동, 철학논쟁, 심지어 MBTI 과몰입자까지도 일컫는다. 확증편향에 빠진 찬양론자들은 여론에 휩쓸리기 쉽고, 설령 확실한 정보와 근거가 있다 해도 이미 프레임에 갇혔기 때문에 온전한 분별력을 지녔다고 보긴 어렵다. 그건 마치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을 잡아먹는 어미 사자를 비난함과 같다. 사냥에 실패하면 새끼 사자들이 굶는다는 생각을 못 하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문제를 정의하는 게 ‘앎‘이라고 착각해선 안된다. 이처럼 프레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을 소개하겠다. 이름하야, 대니얼 헤이스 두 번 죽다!


해변에서 깨어난 한 남자.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질 않는다. 근처에 있던 BMW를 끌고 아무 숙박지나 들어갔는데 경찰이 와서 체포하려는 게 아닌가. 영문도 모른 채 도주하던 그는, 자신이 아내를 살해한 용의자로 지명되었음을 알게 된다. 살인은커녕 집과 아내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지만 사태를 알기 위해 몸이 기억하는 대로 집을 찾아가 본다. 유명 배우였던 아내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운전하다 벼랑 너머로 추락한 것으로 돼있었다. 억울하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지금, 혹시 몰라 당분간 몸을 숨기고 보자는 대니얼. 한편 두 명의 괴인이 그를 노리고 추격해온다. 대체 그는 어떤 사건에 휘말렸었고, 무얼 하다 기억을 잃어버린 것일까.


오래간만에 보는 클래식한 스릴러였다. 근래 출간된 스릴러들은 소재며 수사며 여러모로 너무 세련되어져서 좀 질리는 맛이 있다. 반면 옛 작품들은 교과서대로 쓰여서 뻔하긴 하지만 그만큼 실패가 낮고 호불호도 잘 없다. 현대 감각에 피로도가 쌓일수록 사람들은 옛 것을 그리워한다. 이제 와 레트로 패션이 유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따라서 요즘 읽을 책이 없다거나 슬럼프가 온 독서가들은 나처럼 옛 작품들을 둘러보는 걸 권한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면, 먼저 기억상실이 매우 진부한 설정이란 걸 작가가 모를 리 없다. 그렇기에 주인공을 국민의 적으로 간주하여 심각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가 쫓겨 다니게 된 이유를 감추어 독자가 군말 없이 따라오게 하는 등 외부 설정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런 데서 작가의 영리함이 잘 드러난다. 보통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가면 의문이 풀리거나 실마리가 제공되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나중의 나중까지도 의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끝까지 의심하게 만들라는 스릴러소설의 규칙을 철저히 지킨 프로페셔널한 작가다. ‘제2의 데니스 루헤인‘으로 불리던데, 내 눈에는 세이키가 루헤인보다 훨씬 더 나아보인다.


자, 그럼 앞서 말한 프레임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이제 막 깨어난 대니얼은 범죄자 취급에 억울해하면서도 스스로를 범죄자라 가정하고 행동하기 시작한다. 기억을 잃었다한들 떳떳하게 수사에 협조하고 사태를 바로잡으면 될 터인데, 뭐가 자꾸 켕기는 건지 도망만 다녀서 경찰의 의심에 확신만 심어주었다.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자처럼 행동하다 보니 사고 회로 또한 이상해져버린 것이다. 도움 청할 데도 없으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지낼 건가 보는 내내 답답했지만, 대니얼은 희미하게 찾아드는 기억의 파편에 운명을 걸고자 했다. 하여 자기 집을 도둑처럼 드나들어 노트북을 훔치고 그간의 정보를 파악한다. 여기서 자신의 담당 변호사를 알게 돼 찾아가지만, 한발 먼저 변호사를 다녀간 괴인의 소식을 듣게 된다. 아내가 죽고, 자신이 해변에 버려져 기억을 잃고, 경찰의 사냥감이 된 이 모든 배경에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는데 이제 뭘 어쩌나 싶을 때쯤에 등장하는 두 번째 괴인. 심장 떨어지게도 그의 죽은 아내였다.


본의 아니게 스포 해서 미안하지만 리뷰를 위해 어쩔 수 없다. 근데 읽어보시면 아내가 살아있다는 게 다 티가 난다. 아무튼 두 번째 프레임은 아내의 사망 소식이다. 아내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음에도 경찰은 국민과 대니얼에게 사망했다는 거짓 프레임을 씌웠다. 그 후 종적을 감춘 대니얼이 자연스레 범인이 되게끔 마녀사냥을 하였다. 그리하여 대니얼은 여태껏 죽은 줄로 알았던 아내가 나타난 것도 놀랐지만, 이 모든 연극을 꾸민 게 아내였다는 사실에 더 놀란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그녀를 탓하기도 전에 앞뒤 사정을 듣게 된 주인공. 과거 연예계에 막 들어온 그녀는 누군가에게 약점을 잡혔었고, 그는 지금도 아내에게 거액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약점이고 뭐고 당당히 경찰에 신고해서 누명을 벗고 싶은 대니얼과, 뭣 때문인지 한사코 반대하는 그의 아내. 괴인이 보통 무서운 게 아니긴 했지만, 아내의 태도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 어쩜 이렇게 단타를 연속으로 날려대는지, 세이키도 참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내놓은 작품마다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하니 말 다 했다.


대니얼이 기억을 잃게 된 경위와, 괴인과의 심리전과, 커질 대로 커져버린 판국의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뒷심이 살짝 부족했으나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리뷰하지 않은 후반부에도 아내에 대한, 또 자신에 대한 프레임이 연거푸 나온다. 기억상실의 소재를 통해 작가는, 각자의 생각과 판단에 얼마나 많은 허점이 있는지를 지적한다. 사람은 저만의 프레임에 갇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정답이라 믿어버린다. 그렇게 긴 시간 함께했던 진실에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목숨마저 내버리기도 한다. 자살하고자 마음먹었던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작가는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다소 뻔한 얘기를 해준다. 그러니 잘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겠지만,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선택하는 극단적인 성향은 되지 말자고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MBTI 과몰입도 이제 그만해야겠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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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6-30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감님 저 질문하러왔어요!! 단편은 왜 안좋아하세요?! 물감님은 취향 주관 확실한 사람같아서 자꾸 이것저것 궁금하고 여쭤보고 싶어짐 ㅋㅋㅋㅋㅋ

물감 2023-06-30 21:38   좋아요 1 | URL
제가 주관이 진짜 뚜렷한 편이긴 해요ㅋㅋㅋ 단편이 싫은 건 별거 없어요. 잘 읽고 있는데 갑자기 끊기는 게 싫고, 그걸 리뷰쓰기도 애매하고요. 한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은데 단편집은 이야기가 계속 교체되잖아요? 유튜브 쇼츠처럼요. 뭔가 여운이 금방 휘발되는 것 같아서 좀 그래요ㅋㅋㅋㅋ궁금한 거 생기면 다 물어보셔요😎

은오 2023-06-30 22:50   좋아요 1 | URL
? 물감님 마지막 문장 후회하실텐데요? ㅋㅋㅋㅋㅋㅋㅋ무르기없기ㅋㅋㅋ 알겠습미당!!! 😆

다락방 2023-06-30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도 찜해갑니다.

물감 2023-06-30 21:53   좋아요 0 | URL
보니까 품절이네요. 중고책 찾아보세요!
 
우리 슬픔의 거울 오르부아르 3부작 3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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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르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을 읽었다. 사실 말이 3부작이지, 이어지는 내용도 아니라서 다 챙겨 본들 대단한 재미는 기대하기 어렵겠다. 공쿠르 상을 받은 <오르부아르>는 확실히 좋았다. 명확한 스토리라인과 탄탄한 전개와 입체적인 캐릭터 등등. 그런데 차기작인 <화재의 색>은 분위기가 확 어두워진 데다 이렇다 할 스토리도 없어서 굉장히 당황했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우리 슬픔의 거울>도 영 실망스러웠는데, 서사는 많으나 알맹이는 부실하고, 간간이 있는 블랙 유머가 되려 흐름에 방해만 되는 꼴이었다. 3부작이라길래 <오르부아르>의 진지한 듯 병맛스러운 코드로 쭉 밀고 나갈 줄 알았더니, 이거야 원 저자의 명성을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네 그래.


크게 세 명의 시점이 교차하는데 요약하려니 짜증 나서 그냥 생략하련다. 궁금한 분들은 다른 리뷰도 많으니까 그거 읽으시길. 각각의 이야기가 전혀 매력도 없고, 연관성도 없이 따로 놀고, 뭔가를 시사하려는 게 보이긴 하는데 계속 간만 보는 기분이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나 되뇌면서 꾸역꾸역 읽었다.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작가로서 의리로 버텼지만 르메트르도 이제 떠나보낼 때가 된 듯하다. 보아하니 옛날 같은 스릴러소설은 손을 떼셨고 이런 작품들만 쓰실 듯한데 글쎄요, 갈수록 약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단 말입죠. 아직 프랑스서는 먹어주는지 몰라도 코리아 갬성과는 점점 멀어지고만 있습죠. 내 혹시 몰라서 별점 높은 리뷰들을 싹 훑어봤걸랑? 어쩜 신뢰 가는 글이 단 하나도 없더라고. 별점의 정당성을 위해 억지로 늘어놓은 칭찬들, 싫다 증말. 날도 더운데 이런 영양가 없는 글에 에너지 쏟을 이유도 없지만, 적어도 르메트르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겠기에. au rev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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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문단의 글에서 빵 터짐. 하하~~
<스토너>를 읽으셨나요? 엄청 멋진 소설입니다. 이번에 읽고 반해 버렸어요. 물감 님께 추천합니다.
스토너의 리뷰를 쓰신다면 쓸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감 2023-06-28 16:25   좋아요 0 | URL
스토너는 명작이죠! 이달의 리뷰 당선도 되었답니다 ^^
갑자기 왜 그 책을 언급하셨는진 모르겠네요ㅎㅎ 혹시 몰라 링크 남깁니다.
https://blog.aladin.co.kr/loveoctave/13150048

페크pek0501 2023-06-28 16:37   좋아요 1 | URL
까르르~~ 물감 님의 리뷰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어쩐지 아까 댓글을 쓰면서 물감 님이 읽으신 것 같단 생각이 살짝 스쳤어요. 예감 적중!ㅋㅋ
스토너, 얘기를 꺼낸 건 제가 어제까지 읽어 완독한 책이라서요. 재독하고 싶을 만큼
멋진 소설이었어요. 마지막에 슬프기까지 하더군요. 스토너의 아내는 끝까지 악당이라 놀랐어요. 연민도 없는 것 같아요. 겉으로만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스토너가 안 됐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참을성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리뷰들을 보면 평범한 사람의 펑범한 인생이라는 글이 많았던 것 같은데 저는 다르게 봅니다.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인생, 으로 읽혔어요. 글감 님의 리뷰를 다시 보러 갑니다. 주소 남겨 줘서 고맙습니다...슝~~^^

2023-06-28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28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6-30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가 도서관에 신청해놓고 안 읽고 있는 책인데 ... 아 별로군요. ㅠ
저도 병맛스럽지만 서스펜스와 유머가 살아있는 <오르부아르>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두 번째 <화재의 색>은 좀 실망했거든요.
아쉽네요.😪

물감 2023-06-30 17:38   좋아요 0 | URL
원래 기획한 대로 쓴건지 스타일이 변한건지 통 모르겠어요 ㅋㅋㅋㅋ
글맛도 없고 재미도 없고 메시지도 뭐 딱히...
이거 말고 다른 3부작이 또 나올건가봐요. 전혀 기대가 안됩니다 ^^
어차피 읽을 건 많으니까요 하하핳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 스토리콜렉터 7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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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더워지니까 시원한 스릴러 한 권 때려줘야지. 오랜만에 로보텀 행님의 책을 집어 든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로 국내에 이름 좀 날리신 양반인데, 줄곧 폭발적인 재미를 보여주더니 어느샌가 시들시들해져 이빨 빠진 맹수가 돼버린 분이다. 현재까지 나온 시리즈 8편까지는 다 읽었고 실망감에 그만 하차했는데, 그놈의 정이 뭔지 스탠드얼론은 별개니까 의리로 읽어주자 싶어졌다. 근데 사실 <라이프 오어 데스>도 실망스럽긴 했다. 하여간 시리즈물 쓰는 작가들은 대체로 스탠드얼론을 못 쓴다는 팩트가 있는데, 어쩐 일로 이번에는 그 선입견이 빗나갔더랬다. 어쩌면 감각이 녹슬었다는 피드백을 반영했는지도 모르겠고.


출산일이 비슷한 두 임산부가 있다. 출신, 교육, 가정 등 모든 게 완벽한 A를 동경하고 숭배했던 B. 언제나 멀리 숨어서 A의 행동거지와 취향을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그녀의 삶을 카피하고 싶어 한다. 마트에서 일하던 B는 장을 보러 온 A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고, A의 출산 관련 정보를 듣는다. 그리고 A가 출산하던 날, 해당 병원에 간호사로 위장하여 신생아를 빼낸 B는 태연하게 집으로 돌아온다. 품에 안긴 아기를 내 새끼라고 부르면서.


건축가 유현준이 그런 말을 하더라. 자기는 성서에 나온 스토리를 가지고 재해석한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고. 듣고 보니 나도 좀 그런 편이다. 성서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은 대개 선악의 대비를 모호하게 다루곤 한다. 그러면 꼭 딜레마가 생기는데, 거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어떤 고찰과 저자가 던지는 화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윤리를 뒤집어놓고 보는, 일종의 밸런스 게임 같은 발상의 전환을 나는 좋아하는 것 같다. 저자만이 알겠지만 <완벽한 삶을 훔친 여자>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두 어머니와 솔로몬의 재판‘을 재구성한 느낌인데, 각색을 잘했는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본 적 없는 신선함을 보여주었다. 가독성도 좋고 전개도 빠르긴 한데 명백히 분량 초과였다. 스킵 해도 될 장면이 많은 데다 일일이 설명하고 의미 부여하느라 숨이 턱턱 막혔다. 이건 로보텀의 직업병이자 고질병이다. 주로 정신/심리학을 다뤘다 보니 자연스레 투 머치 토커가 돼버린 것. 이 양반 혹시 책값 비싸게 받아먹을라고 이러는 건가?!


B의 과거는 역시나 한 복잡했다. 이부형제인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은 후로 B는 가족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후 중학생이 된 B는 교회 신부와의 성관계로 임신하게 된다. 낳은 아이는 어딘가로 보내졌고, 교회에서 파문당한 B는 집에서도 버린 자식이 되었다.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 외톨이가 된 B는 그때부터 아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갓난아기를 훔쳐다 엄마 노릇을 해보지만 훔쳐 온 아기들은 전부 죽었다. 하여 결혼 후 직접 아기를 낳고 싶었으나 겨우 생긴 아기는 유산되고 만다. B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그렇게 남편과 이혼하여 혼자 지내왔던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범죄를 저질렀다지만 한참 전부터 정신도 육체도 고장 나있던 그녀. 모두가 B의 흉악함을 논할 때, 심리학자 사이러스만이 그녀도 피해자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솔로몬께서 등장한 후로는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패턴과 비슷한 수사라 딱히 볼 거리는 없었다. 그나마 사이러스가 후반부에 나와줘서 다행이었지, 일찍 등장했으면 금방 김빠졌을 것 같다. 아니, 솔직히 스탠드얼론에서까지 심리학자를 갖다 써야겠어? 징허다 징해.



B가 그렇게나 침 흘렸던 A의 가정도 그리 정상은 아니었다. 남편은 여기저기 끼 부리고 다녔고, A는 남편의 절친과 불장난에 놀아났다. 그리하여 남편 절친의 애를 가져버린 A. 본인의 잘못은 숨기면서 남편의 바람만 물고 늘어지는 뻔뻔함이란. 그 와중에 남편을 용서하고 가정을 수호하는 고결한 엄마의 행색을 갖추려고 기를 쓴다. 물론 남편과 자식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찐이지만, 또 남편의 외도는 절대 봐줄 이유가 없지만, 그녀도 찔리는 게 있었기에 계속해서 합리화하기 바쁜 꼴이다. 아기 납치 사건이 전국에 알려진 지금, 애 아빠가 다른 남자라는 게 드러난다면 B를 향한 비난들이 곧 자신에게로 쏟아지겠지. 이런 멘붕에 빠져있던 그녀라서, 아기를 찾으려는 목적이 본인에 대한 평판 때문으로 변해버렸다. 상대적으로 B보다 A의 사정이 딱해 보이기 쉬운데, 결코 너그럽게 봐줄 문제가 아니다. B의 범죄가 자꾸 들통나려 했듯이 A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어째서 비밀을 감추기에만 급급할까. 정말로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다고 보는 걸까. 이건 아니다 싶지만 얽혀있는 게 너무 많아 달리 뾰족한 수도 없어 보인다. 내가 다 괴롭다.


작중에 등장한 사이러스로 또 하나의 시리즈가 나올 거란다. 뭔 놈의 심리학자 시리즈를 두 개나 만들지? 신선도가 확 떨어지는데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싶지만 이미 나왔더라고. 자 이제 로보텀하고는 진짜 안녕이다. 재미난 작품은 계속 나올 테지만 매번 같은 수사 패턴에 또 실망하고 싶지가 않아요. Long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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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도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댄 윌리엄스 그림, 명혜권 옮김 / 스푼북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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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그림책이라 후딱 읽고 쓴다. 본래 이런 취향은 아니나 할레드 호세이니를 좋아해서 읽은 거다. <그리고 산이 울렸다> 이후로 몇 년째 활동 소식이 없어 아쉽네 그래. 여튼 동화책인 줄 알았던 <바다의 기도>는 아이에게 쓴 아버지의 편지였다. 아름다웠던 자신의 고향을 아이가 기억해 주길, 피난 중에도 아이만을 생각하는 아비를 이해해 주길 바랐다. 그리고 살 곳을 찾아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아무 사고가 없기를 바다에게 기도했다.


짧은 내용에서 오는 허전함을 그림으로 채워 넣어 가슴 먹먹한 감성작이 되었다. 저자는 아프가니스탄의 비애를 절제된 감성으로 시사하는 기교가 일품이다. 이 얇은 책에서도 호세이니의 애도하는 마음이 느껴져 좋았지만, 타국의 어린이들이 저자의 깊은 감성을 알기나 할까. 잠깐 그림 얘기를 하자면, 고향이 습격을 받고 사람들이 어딘가로 계속 피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바다라는 막다른 길 앞에 모두가 멈춰 선다. 붙잡을 지푸라기조차 없는 상황을 아버지는 덤덤하게 지켜보며 속삭인다. 아이가 겁먹지 않을 수 있게.


이 편지가 살아남아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면, 그들이 끝내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아이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부모의 심정을 간직하지도 못한 채 생을 다했으리라. 이와 같이 <바다의 기도>는 난민을 태운 배가 전복했다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과거 난민이었던 호세이니 마음 또한 복잡했을 터. 각국의 피해민들을 알리기 위해 저자는 펜을 들고 세상과 맞서 싸운다. 호세이니의 인류애를 계속해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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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 헨리 제임스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2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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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소설의 원조 격인 <나사의 회전>을 읽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길래 궁금했었는데, 요즘 열대야에 딱이겠다 싶어서 골랐드만 따분해갖고 혼났다. 재밌다는 평도 많으므로 이 글은 적당히 무시해도 되겠다. 내용은 생각보다 별거 없다. 두 어린이의 가정교사를 맡은 주인공의 눈에만 유령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령의 인상착의를 보모한테 말했더니, 과거에 죽은 이 저택의 관계자라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두려운데 아이들이 유령과 소통하는 기분도 들고, 자신에게는 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고 있다. 이렇듯 단순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이야기지만, TMI에 가까운 주인공의 방대한 내레이션이 오히려 역효과로 느껴졌다. 서양권 작가들의 장황한 묘사와 지나친 미사여구를 남발하는 습관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몰입의 선을 넘지 않았을 때라야 이야기다워지고 전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생각이 너무나도 많은 탓에 한 장면을 길게 붙잡는 패턴이 반복된다. 그나마 단순한 내용이라 망정이지, 복잡했다면 엄청 늘어졌을 게 눈에 훤하다. 이 작품의 최대 단점이다.


디테일에 대해 할 말이 무궁무진한 작품이긴 했다. 작중 유령은 둘이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이들은 사실 주인공이나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는 게 다일뿐. 아무런 활약도 없어 맥거핀에 가깝다고나 할까. 아이들 얘기로 넘어가자. 이제 갓 입학한 학교에서 쫓겨난 소년은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런데 소년은 절대 학교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게다가 슬픈 기색 하나 없이 주인공의 교육을 잘만 받고 지낸다. 아직 학교는 못 갔지만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두 아이는 지난 일들에 대해, 즉 자신들이 겪었던 것들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질 않는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전혀 맞지 않는 조숙함과 차분함이,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끔 하면서도 경계하게 만들었다. 딱히 뭐가 없는데도 설정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게 다가 아니다. 아이들이 자꾸 어딘가를 홀린 듯이 보게 하여 화자의 불안함을 연출한다. 또한 멀쩡한 척하는 아이들의 보호와, 유령을 알아내려는 주인공의 괜한 심리에 젖게 한다. 이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 요소는 충분히 활용한 셈이다. 사실 칭찬보다는 태클을 걸어야 할 게 산더미인데, 문제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곳곳에 함정을 파 놨다는 거. 아무 생각 없이 읽어나가서 잘 몰랐지만 이렇게 독자와 밀당하는 작품을 꽤나 좋아한다. 역시 소설은 분석하는 맛이제.


일단 주인공이 어째서 아이들과 유령에 관한 얘기를 금기시하는지가 의문이다. 살아생전 유령들이 아이들과 어떤 사이였는지, 이 집에 어떤 가정사가 있었는지 작중에서 전혀 언급된 게 없다. 두 아이를 오래 지켜본 바, 감정 기복이 심하지도 않고 대화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자리를 만들어 차분하게 대화를 좀 했으면 싶은데, 주인공 혼자만 짊어지려는 태도로 내내 회피하며 빙빙 돌고 있다. 결국 말만 하고 지켜보기만 했을 뿐, 어떤 행동이랄 것도 없으면서 이상한 사명감에 빠져가지고 그냥. 아니, 사명감보다도 아이들한테 휘어잡혔다는 쪽이 더 맞겠다. 점점 묘한 낌새를 느끼고도 계속 눈 가리고 아웅하며 과잉보호하는 주인공. 교사가 아이큐만 케어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자꾸 주제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건지. 지금 말한 것들은 저자의 의도적인 설정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유령한테 쫄지 않는 걸 보면 딱히 새가슴도 아니던데, 유독 아이들 앞에만 서면 깨갱하는 성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태클은 이쯤 하고.


<나사의 회전>은 일부러 설명을 빼놓아 모호한 해석을 낳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소년의 퇴학 사유, 부재중인 집주인, 유령들의 과거, 유령과 아이들의 교감, 보모의 과잉 불안, 그 외 필요한 여러 가지가 누락되어 있다. 그런고로 다양한 해석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많은 해석 중 나는 주인공이 공포로 인해 살짝 맛이 간 거라는 쪽이 그럴싸했다. 다른 이들이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유령이 보이는 건 주인공뿐이다. 그녀 눈에는 아이들이 유령과 교감하는 듯 보였다지만, 두 아이는 유령과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고 아는 척하는 장면조차 없었다. 이게 주인공 시점에서 보면 모두가 의심스럽게 보이나, 제 삼자의 시점으로 보면 주인공의 과대망상 히스테릭처럼 비춰진다. 근데 또 유령의 생김새까지 맞췄으니 헛것을 봤다고도 할 순 없다. 이처럼 어느 관점에서 해석을 하더라도 꼭 찝찝한 데가 있는 묘한 작품이다. 해석이 더 재밌는 작품이라니, 에라이.


아무래도 읽으면서 카프카가 계속 생각났다. 카프카 역시 이야기 속에 구멍을 파두기로 유명하다. 다만 카프카는 작품이 해석 받기를 거부해서였고, 제임스는 그 반대라는 점이 다르다. 닭이냐 알이냐 식의 끝없는 해석을 낳았으니 형태는 달라도 뿌리는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공통점이라면 이야기를 맛깔나게 쓸 줄 모른다는 건데, 주제나 화두가 괜찮대도 베이스가 밋밋하면 의도한 게 눈에 안 들어온단 말씀. 허나 고전이 투머치한 맛으로 보는 거라면 참아야지 뭐 어쩌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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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20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헨리 제임스의 소설 몇 권을
수배해 두긴 했는데...

읽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나사의 회전>은 왠지 시공사
버전으록 구하고 싶은데 잘 안
보이네요.

해석을 환영하는 헨리 제임스
의 소설, 만나 보고 싶습니다.

물감 2023-06-20 10:08   좋아요 1 | URL
저도 사실 다른 번역본을 원했는데 포기하고 도서관에 보이는 거 집었습니다. 그냥 무난했어요 ㅋㅋ

출간 시대를 고려하면 꽤나 참신하더라고요. 그리고 해석을 거부하질 않아서인지 다각도로 접근하는 재미가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뭔가 글 자체가 낡았다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네요😓

coolcat329 2023-06-20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그렇군요. 이 책은 너무 기대하면 재미없을 거 같아요. 시공사로 저도 읽어봐야 겠습니다.

물감 2023-06-20 10:15   좋아요 2 | URL
영화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는데 원작의 신비함을 표현할 수 없어 망했다나봐요. 확실히 초자연적 신비함은 느껴졌어요. 비록 점수는 짜게 주었지만 필독 고전문학은 틀림없어보입니다^^

잠자냥 2023-06-20 11: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 껍데기 벗기고 책등 살펴보시면 재미난 거 발견할 수 있는데... ㅋㅋㅋㅋㅋㅋ

물감 2023-06-20 11:28   좋아요 0 | URL
제가 빌린 건 이름 잘 써져있네요ㅋㅋ

잠자냥 2023-06-20 22:44   좋아요 0 | URL
2쇄를 찍었다니 놀라워요. ㅋㅋㅋㅋ 아님 2판인가…

물감 2023-06-20 22:57   좋아요 0 | URL
‘세계문학판 1쇄‘라고 적힌 걸로 봐선... 잠자냥 님의 뽑기가 실패였는지도...ㅋㅋㅋ

새파랑 2023-06-21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사의 회전> 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냥 어려워 보입니다 ㅋ
내용도 그렇군요. 헨리 제임스 왠지 어려워보여서 시도도 못하고 있습니다 ㅜㅜ

물감 2023-06-21 12:12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이 평소 읽는 책들에 비하면 이 책은 매우 쉬울 걸요 ㅋㅋㅋ
적어도 이 책은 난해하거나 복잡하다는 인상은 없었어요.
제임스도 작품이 많던데, 새파랑 님도 도전해보셔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3-06-21 15:34   좋아요 1 | URL
읽다 보면 나사 빠짐

새파랑 2023-06-21 15:56   좋아요 1 | URL
앗 ㅋ 저 요새 나사 빠져있는데 보면 안되겠군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