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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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로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뭐든 다 잘 될 거야?’라는 낙관주의, 그것도 아니라면 ‘참고 고생했으니까 이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보상주의. 물론 일 년간 교사가 되기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지금의 이 회한도 그런 노력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아서 이지 않은가? 그래서 교사가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 생각하는 걸테고. 하지만 과연 지금의 이런 회한이 그렇게 꿈꾸던 교사가 되었다고 사라지긴 할지 의심스럽다. 꿈을 이루는 순간 성취감에 들뜰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런 마음이 누그러지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경쟁 중심의 교육 체제(일제고사), 획일화된 교육방식, 교사와 학생의 자율을 침해하는 관료 중심의 자율화 등의 현실은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교사가 되는 순간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유아적인 발상일 뿐이겠지.
 

결국 꿈을 이루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이 회한을 풀 순 없다는 사실. 그게 솔직히 더 절망스럽다. 내 안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관념들이 날 꽁꽁 얽어매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그런 것이란 말인가? 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아등바등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행복과는 멀어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걸 이 책에선 ‘두려움’이라는 말로 풀어낸다.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를 몸으로 체화하여 승자독식주의를 당연한 듯 여기고 타인을 적으로 여기며 살아온 자가 느끼는 감정, 그게 바로 '두려움'이란다. 합격 또한 누군가를 이겨낸 승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기에 또 누군가에게 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이기지 않으면 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정글 서바이벌. '배틀로얄'의 장에 들어선 자의 운명인 셈이다. 피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에 저당 잡힌 인생살이, 그게 바로 대한민국 20대의 피할 수없는 삶의 모습이다. 
 

이런 삶의 모습은 임용고시반에서 잘 드러난다. 모두 한 마디 이야기도 없이 각 자의 공부에 빠져 있다. 훗날의 성공을 그리며 지금 이 순간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자학하고 있는 것이다. ‘저격수’(책에 이 개념이 소개되어 있음)가 되기 위해 고독을 감수하는 처절함. 간혹 나누는 이야기는 음울하기 그지없다. 막상 공부는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교사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선발 인원도 줄어들다보니 한껏 울분을 토로한다. 우리의 대화에선 공부를 통해 삶을 변화시켜나갈 비전이라든지, 어떤 교사가 되고자 하는 지에 대한 문제의식 따위는 전혀 없다. 단지 지금껏 맹목적으로 걸어왔던 유일한 길에 붙들려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서로의 눈치만을 살필 뿐이다. 이런 ‘두려움’이 주된 정서이다 보니, 사회에 대해 관심 갖을 수도, 자신에 대해 관심 갖을 수도 없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일절 없는 거다. 또한 스터디를 구성한다해도 임용이란 틀에 맞춘 공부만을 계획할 뿐이지 삶의 지평을 넓히기 위한 진지한 모색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린 같이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무척이나 외롭고 같이 이야기하고 있지만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 답답하기만 하다. 과연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동료 간에 연대도 하지 못하고 소통도 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선생님이 된다해서 ‘참교육’을 할 수 있긴 할까? 누군가를 이겨 그 자리를 얻은 만큼 더욱 철저하게 '승자독식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나 않을까?
 

이런 음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내면에 갇혀 있는 20대가 너무도 많다. 물론 나 또한 그런 20대 중의 한 명이긴 하지만. 이런 우리들에게 우석훈 씨는 말한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할 수 있지만, 잃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가진 것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 ‘사회적 지탄’ 세력이 되는 것, 그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142p)’
 

내 친구는 우리처럼 사회에 발붙이지 못한 존재를 ‘먼지 같은 존재’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의 끝에 붙어 있는 학생들의 기록문에선 ‘잉여존재’라고 표현했다. 이건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다양한 변주이리라. 그런 잃을 것이 전혀 없는 우리들이 뭐가 아쉬워서 기존에 만들어진 치열한 약육강식의 길만을 좇아가려 애쓰고 있었던 걸까? 그건 결국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없던 ‘상상력의 빈곤’, 그 자체가 문제이지 않았을까. 그저 지금의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야만 한다는 경쟁주의를 당연한 듯 느껴온 우리가 문제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무언가를 새롭게 창안해 낸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새롭게 구상해본 적이 없다보니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도 어떻게 우리가 걸어갈 길을 만들며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는 건 내 자신이 갈 길을 만들며 가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순종의 고통은 창조의 고통보단 덜한 게 사실이니까. 이런 상황이다보니  다시 무언가에 저당잡힌 삶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한다. 매트릭스 1편의 스테이크 한 조각의 황홀에 빠져 노예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던 '싸이퍼'(Cypher)'처럼 말이다.


 싸이퍼, 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논쟁은 많다. 성경에서 은 30냥에 예수를 판 유다와 같은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할 수록 더욱 큰 고통과 회한만이 우리를 감싸고 돌 뿐이라는 거다. 다음의 고병권 씨의 말은 그런 우리의 회귀하려는 마음에 일침을 놓는다.
‘행동은 결코 늦지 않는다. 언제나 후회만이 늦을 뿐 (고병권)’
 

나도 여기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임용 천당, 실패 지옥'을 전복시켜 '임용 지옥, 실패 천당'이란 상상력을 지니는 것이다. (단순한 이분법으로 봤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는데, 임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이다) 조직에 들어가 조직의 부속품적인 존재로 아이들을 옥죄지 않게 되었다는 것, 밖에서 여러 활동들을 통해 '참교육'을 펼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런 상상력을 뒷받침 해준다. 물론 더 많은 고뇌와 노력이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통해 임용을 준비하는 이들과 다른 삶을 기획해보려 하는 거다. 공부란 것이 삶과 괴리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에 대한 깨달음이며 존재의 증명이라는 걸 같이 토론하며 알아가는 것. "행복해지기 위해 어린 아이에게 더 기다리라고, 노인에게 이미 지나갔다고, 노예나 매춘부에게 포기하라고 말해선 안 된다.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 (에피쿠로스)" 지금이 순간을 위한 공부를 하자는 것. 생이 '활발발'하게 약동하는 공부를 하자는 것.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그 순간,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지 미래에 뭔가를 얻게 될 거라 말해선 안 된다. 독서와 공부를 통해 나의 생각들이 조금씩 변해갔듯이 모두 다 느끼는 문제점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이 ‘두려운’ 현실도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교사가 된다면, 두 말할 나위 없이 학생들에게도 그런 ‘공부다운 공부’를 전해줄 수 있는 교사가 될 수 있겠지. 그렇게 공부를 통해 소규모 연대가 이루어지고 그게 다시 뭉쳐서 더 큰 규모의 연대체로 발전한다면 우리의 열정이 이 세상을 조금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꿔나갈 지도 모른다. 너무 이상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안의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현실과 이상 사이를 조율하며 짜임새를 갖추어 나가고 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마지막 장면이다. 마우스필의 마지막 공연에 공항으로 떠난 줄 알았던 강마에와 강건우가 마주친다. >



강마에 : 멍청한 짓들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실패했으면서도 몰라. 이건 끝이야. 시향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끝난 거라고.
건우  : 끝이라뇨? 이제 시작인데. 여기서 관두면 맞는데요. 또 덤비면 또 다른 길이 열리는 거잖아요. 그렇게 될 때까지 계속 가면 그게 바로 성공이고요
 

지금 당장 실패한다 해서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좌충우돌하며 또 덤비고 덤벼야 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 가보는 거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그 열정 하나로만 믿고 달려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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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2.0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7
이권우 외 지음 / 그린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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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풍경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런데 좋은 풍경이란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늘 주위에서 보아오던 그 풍경이 그 좋은 풍경일 수 있으니까. 단지 내가 무심코 지나치니 풍경은 저멀리에 있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것일 뿐이다.  

구름을 보며 '저건 수증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운치가 없나? 구름을 보면서 솔개를 떠올리고 거북이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만이 내 주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이리라.  

책에도 풍경이 있다. 그건 어떤 책이건 마찬가지인데, 이 책은 저자들이 읽은 책에 대한 풍경에 대한 서술이다. 책을 왜 읽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 요소요소 나누어 수록해 놓은 공동 저작물이다.  과연 이 책을 쓴 저자들은 책에서 어떤 풍경을 본 것일까?

이런 책의 장점은 짧은 글들이 여러 편 실려 있으니, 시간 될 때마다 하나씩 나누어 볼 수 있다는 거다. 하지만 그 점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책 전체의 일관성도 없고 글의 깊이 또한 제각각이니까.  

책을 읽긴 해야 겠는데, 왜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나,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책을 통해 책을 소개하는 아이러니가 가득 담겨 있는 책이니까^^ 

<여담 : 이 책은 내가 쓴 첫 책이다. 공동 저작물이니 나의 책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정말 나의 책을 낼 때도 오겠지. 그 첫걸음을 자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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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술의 사상 - 시라카와 시즈카, 고대 중국 문명을 이야기하다
시라카와 시즈카.우메하라 다케시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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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자는 옛 사람들이 서로간의 소통을 위해 만든 문자이다. 확실히 지금 한자의 지위는 그런 소통의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글과 한자의 논쟁이 불거지는 이유는 바로 그런 관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예전의 한자의 지위가 그런 정도였을까? 

  이 책은 시라카와 시즈카 선생의 한자학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이미 '한자 백가지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책 또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다. 한자의 발생 기원을 밝히고 있으며 한자의 비밀을 알려 주는 책이니까.  

  한자는 결코 사람끼리의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글자가 아니다. 바로 이런 주장으로 풀어쓸 수 있는 책이 이 책이다. 그건 곧 신과의 소통을 위한 창구였을 뿐이다. 우린 지금 발견할 수 있는 태초의 한자가 쓰여진 도구가 거북 앞 껍질(갑골문), 쇠(금문)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건 제사의 예식을 기록한 것이거나 왕의 치적을 하늘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이 책은 한자를 공부하는 전문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좋은 책이다. 난 이 책에서 시경의 육의(풍아송부비흥) 중, 흥의 문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비와 흥의 차이를 놓고 많이 고민했으니까. 비와 흥은 얼핏 보면 똑같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시체를 구성하는 것이니까. 둘다 같다면 굳이 시체를 나눠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경에는 엄연히 두 가지 체제가 나눠져 있지 않은가?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보고서 어느 정도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이런 한자에 대한 전문서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집어 들고 찾아보길 바란다.  

  한문 문장과 씨름하며 한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한자라고 그리 가만히 넘겨볼 수 있는 게 아니더라. 한자 또한 심오한 사상과 역사를 지닌 거니까. 한문을 공부하다보니 한자의 매력에 까지 빠질 수 있어서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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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9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개고 한국한문학사
차용주 지음 / 아세아문화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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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용주씨가 쓰신 책의 개정판이다. 한문학사를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좋은 기본서가 될 것이다.  

   이전에 나온 출판본과 개정판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한문 원문이 많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모두 국역하여 실어놨기에 보고 오히려 한문학사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겐 그게 장점이 될 듯 하다. 하지만 원문을 보며 공부하고 싶은 사람에겐 그게 마이너스이지 않을까. 솔직히 여기에 나온 원문을 직접 찾아보고 원문 전체를 다 국역해가며 공부하는 것이 공부의 기본일 테지만 말이다.  

   시기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 점은 여전한 장점이다. 특히 조선 시대에 일어난 여러 한문학사적인 사건들이 주요하게 실려 있어 한문학사의 흐름을 꿰뚫는 데 이만한 자료집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으로 기본적인 한문학사의 줄기를 잡고 조동일씨의 '한국문학통사'로 뒷받침을 한다면 한문학사의 어려움은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登高自卑'란 말이 중용이 나온다. 아무리 높은 산도 낮은 곳에서부터 한 걸음씩 걸어 올라가다보면 어느새 오르게 된다. 한문학사의 벽이 높긴 하지만, 산을 오르듯 그렇게 하나 하나 섭렵해 간다면 어느새 한문학사란 벽을 훌쩍 뛰어넘은 자신의 모습도 볼 수 있으리라. 이 책은 바로 그 낮은 곳에서 어떻게 오를지를 제시해주는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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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고싶습니다 2015-03-14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책 저에게 팔아주실수있나요?ㅠㅠ 부탁드리겠습니다

leeza 2015-03-14 20:32   좋아요 0 | URL
저번 주에 책이 팔리는 바람에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겠네요. 다른 곳에서 책을 알아보셔요
 



2008년 대한민국엔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촛불 집회가 거대한 불길이 되어 연일 서울을 덮고 있었다.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하던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 때 SBS에서는 '신의 길, 인간의 길'이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SBS가 반촛불 방송국의 대명사로 찍혀서 '씨방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 때, 어느 방송사에서도 기획하지 못했던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고 나선 거다.

'기독교에 대한 문제 제기, 반기업 정서의 표출, 현정권에 대한 비판' 이 세 가지, 권력의 눈치를 봐야하는 방송사의 입장에서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주제다.

그럼에도 SBS는 민감한 주제를 과감하게 다뤘고, 원래 기획된 4부작을 모두 방송에 내보낸 거다. 촛불 집회에 버금가는 방송사의 새로운 유형의 '촛불 집회'가 아니었을지.

나는 일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방송을 보게 되었다.

1부에선 예수의 신화가 고대의 신화들을 짬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2부에선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한 줄기에 뻗어나온 것이며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같다는 것을 드러낸다. 더욱이 마호메트가 추구하고자 했던 종교의 개혁 방향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 들어도 꽤나 진보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코란의 문구만을 맹목적으로 지키려는(악용하려는) 탈레반 등의 정치세력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알려준다.

3부에선 작은 섬에 나타난 종교 현상을 통해, 인류에게 종교란 게 어떤 의미이며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어떤 식으로 교조화되는지 보여준다. 또한 영국에선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현상과 미국에선 오히려 근본주의 기독교가 성행하는 현상을 고발한다.

4부에선 우리나라 기독교계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미국과 종교가 하나가 된 현실과 그로인해 공산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을 사탄처럼 여기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한 사탄이란 개념, 지옥이란 개념도 초기 기독교의 개념이 아니라 짜라투스트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기독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절대 진리이며, 성경에 쓰인 글을 의심 없이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른 종교들을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프로를 보면서 좀 더 현실적으로 종교를 믿었으면 좋겠다. 종교의 긍정적인 점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이지만, 극단으로 치우치면 더 큰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수, 마호메트, 짜라투스트라가 살 당시 기존 종교의 부패상과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보고 그걸 고치려 노력하던 모습을 그대로 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로 그 정신이 종교의 정신이며, 종교의 지향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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