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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세트 (무선) - 전10권 ㅣ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4. 벌교, 그 역사의 현장에
순천에서 벌교까지는 기차로 22분 거리였다. 바로 옆동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지도상으로 봤을 땐 큰 도시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진트재를 지나 중도방죽의 철다리를 지나면서 벌교를 둘러보니 아주 작고 아담한 곳이더라. 왜 큰 도시로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그건 아마도 소설에선 보성에 소속된 읍이면서도 오히려 보성보다 더 번화한 곳이라 이야기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벌교역은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발되지 않아 그나마 예전의 모습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계엄사령관이 처음 그곳에 당도하면 부대원들이 열렬한 환영식을 치르기도 했단다. 내가 바로 계엄사령관이 된 듯 근엄한 자세로 기차에서 내렸다. 늘 소설에선 역이 엄청 분주했었다. 그곳에서 여러 계엄사령관이 오고 갔고, 김범우의 활약담이 펼쳐졌다. 소설에서와 달리 현실에선 그렇게 한적할 수가 없었다. 역에서 바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벌교시장이 있다. 역 근처에 시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곳에서 염상구는 활개 치며 다녔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귓속말로 욕을 했을 것이다.
시장을 둘러보고 방향을 꺾어 난 왼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거기가 바로 일제 때의 중심 거리이기 때문이다. 거긴 한참 공사 중이더라. 바닥을 다 헤집어 놨다. 태백산맥 문학로 조성 사업 때문이란다. 바닥을 잘 단장한다고 문화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더라. 조금 걸어가니 옛술도가터가 있었다. 거기서 정현동 사장이 호령하며 벌교 지주로서 떵떵거리며 살았겠지. 근데 구체적인 건물이나 그런 건 없어서 못내 아쉬웠다. 조금 더 올라가니 벌교 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입구에 보성여관이 있다.

지금은 해체 공사를 하는 중이라 전체적인 외관을 한 눈에 볼 수 없다. 이 여관엔 토벌대들이 묵던 곳이다. 빨갱이들을 잡으러 온 토벌대들이 여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일본풍의 건물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느낌이 새롭더라. 벌교초등학교도 소설에선 여러 번 등장한다. 여긴 학교이면서 사상을 검증하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염상진이 점령했을 때도, 그들이 밀려 다시 경찰이 차지했을 때도 그 곳은 사람들의 사상을 검증하고 직결처분을 하던 장소였다.

그 길에서 조금 올라가면 옛 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건물이 나온다.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이다. 이 땅에 처음으로 뿌리 뻗은 자본이 어떻게 돈을 불렸는지 소설에선 여과 없이 보여준다. 돈이 돈을 불러들인다. 그런 돈 놓고 돈 먹기가 결국 엄청난 착취의 다름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초대 금융조합장은 좌익에 사살되었다.
건물 사진 찍는 걸 멀찍이서 한 할아버지가 보고 계셨다. 그 쪽으로 가니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오신다. 뭐 하러 왔냐고 물으셔서 문학로 탐방을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앞에 있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을 가리키면서 그 곳이 청년단 사무실이란다.

그 순간 왠지 모를 의심이 들었다.(내가 속고만 살았냐 --;;) 아무리 봐도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생생하게 증언해 주시더라. “바로 저기 보이는 이층 보이쟈. 저기가 청년단장 방이여. 여그서 얼매나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와서 고초를 당했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여긴 염상구가 활개 치며 다닌 곳이란 말이고 앞에선 보이지 않는 이층에 염상구의 자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없는 죄’를 고문에 못 이겨 ‘자백’했을까?
쭉 올라가면 아치형 모양의 돌다리가 나온다.

여기가 바로 벌교 홍교다. 반절 정도만 남아서 나머지 반절은 새로 만들어 이어 붙였다. 좀 어색한 모양이더라. 저기 위에 서서 벌교천을 내려다보니 왠지 모를 회한 같은 게 느껴지더라. 바로 그 위쪽에는 자애병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말이다. 안창민은 총상을 입고 거기까지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왔단다. 청년단, 경찰서가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가능했을 테지만 정말 죽기 살기로 왔을 것이다.
봉림교를 건너 다시 밑으로 내려오면 김범우의 집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온다.

그 안내판을 따라 올라가면 임봉열 가옥(김범우의 집)이 나온다. 예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집이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지 연신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그 집은 높은 곳에 있어 예전엔 벌교 읍내가 내려다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다. 그 집엔 김사용 영감이 살았을 것이다. 지주이면서도 인간미가 있었던 지주였다. 그의 자식 두 명이 공산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호의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범준이 한국전쟁 때 ‘인민군 대장’이란 직책으로 몇 십년 만에 아버지를 찾아와 만나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그 장면이 왜 그리 감동적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도 그가 독립운동을 하러 가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참을 내려가니 꽤 번화한 곳이 나온다. 시대가 변하면서 중심지가 변화한 것이다. 그 곳에 ‘소화다리’가 있다.

일제치하의 아픔을 다리 이름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바꿔도 됐을 텐데, 바꾸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식으로 지우고 싶은 과거일지라도 그걸 남겨두고 다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것도 좋으니까. 무조건 지우고 싶은 과거의 흔적으로 없애는 것만이 상책은 아니다. 그 다리에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념의 대립 때문에 죽어갔다고 한다.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기도 했고 그 피가 갯벌에 떨어져 빨갛게 물들였다고도 한다. 지금은 인도로만 사용되고 있고 그 옆에 새로 지어진 다리에 차들이 다닌다. 다리 옆엔 꼬막 정식 집이 즐비했는데 음식점 이름이 이색적이다. 태백산맥 등장인물의 이름이 그대로 음식점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더라.
5. 태백산맥 문학관 탐방기
이제 마지막 코스가 남았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문학관에 가는 것이다. 언덕을 오르니 휘황찬란한 문학관의 모습이 보인다. 수수한 내용의 소설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화려하다는 느낌을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초가집과 기와집이 함께 있는 거다.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 그곳으로 가봤다.


그곳이 바로 무당인 소화네 집이고 그 옆에 있는 으리으리한 집은 소화와 정하섭의 사랑이 꽃핀 박씨제각이란다. 소화네 집은 최근에 만든 집이어서 별로 볼품없었으나 박씨제각은 예술이었다. 전통 한옥에 일본식을 가미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기와 위에 다시 누각을 세웠다. 그 집의 지대 또한 높은데 거기에 높은 누각까지 섰으니 벌교 읍내를 내려다보며 즐기기에 좋았을 것이다. 집도 제법 큰 규모였고 잘 보존되어 기분이 좋았다. 도대체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만한 규모의 집을 유지하려면 꽤나 뼈대(?) 있는 집안이었을 테지.

문학관 전면 벽에 쓰인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조정래 씨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그에게 있어 문학이 어떤 것인지 이 한 마디 말로 잘 알 수 있다. 누군가에게 문학은 여가이거나 돈벌이 수단일 테다. 하지만 조정래 씨는 거기서 더 한 걸음 나아가 어떤 사명감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 세력의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거겠지. 태백산맥엔 이적성 시비가 잇달았다. 그래서 ≪아리랑≫ㆍ≪한강≫을 쓸 때 집필하는 시간보다 검찰에서 증언하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이적성 시비는 작가 개인에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그의 가족 전체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가고 심지어는 태백산맥을 소장한 일반 사람들까지 ‘이적물 소지자’로 국가보안법에 걸릴 위험이 있었던 거다. 남한에선 ‘빨갱이’란 낙인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한번 낙인이 찍히면 우리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긴 힘드니까. 그런 혼란한 시대상에 작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세 편의 대하소설을 엮어내고 결국 2005년엔 이적성 시비에서마저 벗어나게 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그 때 울컥했던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벽에 쓰여져 있는 작가의 말은 그동안의 그런 회환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자기 확신이 담겨 있는 말이었던 셈이다.

들어가는 입구엔 건물을 설계한 이유가 써져 있다. 그 글을 통해 내가 처음에 했던 ‘휘황찬란하여 소설의 수수함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평이 허황된 비판인 줄을 알 수 있었다. 그 건물에 건축가의 생각이 그대로 담겨 있더라. 확정된 공간이 아닌 늘 변해가는 공간으로 설계한 것이며, 멀리서 봤을 때 비석이 솟은 듯 보여 이념 때문에 죽어간 민중을 늘 깊이 새기는 공간이 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들어가서 1층을 둘러봤다. 거기엔 조정래 씨가 태백산맥을 쓸 때 사용했던 필기구들, 답사할 때 입었던 옷과 신발 등 작가와 관련된 물품과 4년 동안 취재하고 준비해온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들, 집필 과정을 보여주는 기록물, 이적성 시비와 그 판결 내용을 담은 신문 자료들, 태백산맥 원고 뭉치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난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것이지만 작가는 그 한 줄, 한 사건을 위해 발로 뛰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손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다본 경치를 묘사한 부분, 중도 들판의 배경을 묘사한 부분은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생생하게 기록할 수 없다. 그것 외에도 빨치산들의 비트 조성법이랄지 투쟁 사업의 전개 등은 객관적인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바로 그 모든 기록들이 증언과 관찰을 통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우리도 기억하기 힘든데 작가라고 해서 그게 쉽겠는가. 그래서 일일이 관계도를 그려 넣으며 정리한 부분에 이르러선 할 말을 잊었다.

지금껏 이런 소설은 천재성에 의해서 뚝딱 쓰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과 반대되는 현실을 본 것이니까. 치밀하게 준비했고 꺾이지 않는 열정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짜내어 10권의 소설을 완성했을 뿐이었다. 바로 그런 정신과 치밀성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싶었다. 지금껏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렸던 내 자신이 창피하게 느껴졌다.
벌교를 탐방할 땐 비가 내리지 않더니 문학관에 들어와 둘러보고 있는데 밖에서 비가 내리더라. 운이 좋게도 타이밍이 잘 맞았다. 관람을 끝내고 나오는 길엔 다행히 비도 그쳐 있었다.
6. 눈물은 뚝뚝
소설 속의 인물들을 벌교에서 직접 만나볼 수 있었다. 하대치 형님이랑 술 한잔하며 구수한 사투리에서 풍겨오는 인간미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소신을 느낄 수 있었고 염상구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시장통에서 봤으며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서민영 선생님의 부드러운 듯 날카로운 눈매도 볼 수 있었다. 작은 동네였지만 그 곳은 어느 곳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보였고 사람들도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난 시간이 되어 다시 순천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어김없이 나카시마 방죽 위를 달려 지나간다. 수많은 민초들의 애환이 나의 가슴 속에 파고든다. 차창 밖으론 그들의 눈물인양, 나의 눈물인양 빗방울이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