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녀원의 언덕방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6년이 된다. 내 생애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1988년 가을이었으니까. 나는 그때 나만 당하는 고통이 억울해서도 미칠 것 같았지만 남들이 나를 동정하고 잘해주려고 애쓰는 것도 견딜 수가 없었다. 남들은 물론 자식들까지 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위해만 주는 게 내가 마치 고약한 부스럼딱지라도 된 것처럼 비참했다. 그렇다고 안 위해주고 평상시처럼 대해주었더라도 야속했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내 불행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언덕방은 내 방>, 72) 

 

저 수필집에 곧잘 나오는 말대로,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니, 나는 한 번도 못 봤다. 박완서가 저기서 말하는 수녀원은 부산 수영에 있(다)는 베네딕도 수녀원이다. 이해인 수녀이자 시인과의 인연으로 묵게 된 모양이다.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을 것을, 문제의 1988년. 그해 가을-겨울(아마 11월쯤??) 중학교 2학년이던 나는 독후감대회에서 상을 받았고 시상식에 맞추어 서울에 올라갔다. 내 평생 첫 서울 구경. 그때 심사위원이 박완서였고 그날 그녀는 후레아(플레어) 스커트를 입고 단상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랬던 것으로 기억된다. 행사 진행하시는 분(아마 삼성생명 직원)이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당시 서양문학 고전이나 읽던 나로서는, 또 책은 읽어도 작가 얼굴은 잘 모르던 시절이었던지라, 박완서라는 존재를 영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무튼 그때 박완서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이겨내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미 이름 있는 소설가였는데 그 바쁜 와중에 코흘리개(!) 중학생들이 쓴 독후감 심사까지 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아무 이유도 없을 수도 있다! 그것까지 포함) 그런 일은 거의 전적으로, 재능기부^^; 내지는... '엄마'로서의 책임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본다.    

 

 

 

 

 

 

 

 

 

 

 

 

 

 

지난 주인가, 더 지난 주던가 <알라딘> 메인 화면에 반가운 책(들)이 뜨기에 별 생각 없이 주문하고야 타계 10주기임을 알았다. <모래알만한...>은 (아이에게 독서를 강요한 다음^^;) 쉬엄쉬엄 뒤적이고 있고, 얼마 전 아이의 '기저질환'을 생각하며 주문한 <한 말씀만 하소서>는 일단은 쟁여만 놓았다. <엄마의 말뚝>은 제대로 읽지 않은 것 같은데도 줄거리만 봐도, (<알릴레오>) 방송을 조금만 들어도 어째 읽은 것 같은 생각이, 착각이 든다. 요컨대, 박완서 소설은 이미 문학사(=고전)다. 덧붙여, (톨스토이의 경우처럼) 대부분 자전 문학이기 때문에 '베이스'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수필집(에세이)을 읽으며 반복적으로 든 생각. 박완서는 소설가-작가이기에 앞서 그 시대의 여자-사람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던, 아이 다섯을 둔 '아줌마'(아마 당시 용어로는 선생도 자주 사용하는 '주부')였다. 그렇기에 생활밀착형 소설이 가능했을 것이다. 생활(=살림)의 주체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게 항상 신기한데, 판사 주부도 교수 주부도 집에 들어오면 일단 부엌부터 가거나 방부터 닦는다. (혹은 가사도우미가 일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한다^^;)  성장기에도, 또 그 이후에도 그녀의 삶이 마냥 순탄했다곤 할 수 없을 텐데, 그렇기에 더더욱 그녀가 이른바 '역경'에 대응하는 방식과 그것을 기록한 언어 구조물이 더 감격스럽게 읽히는 것 같다. 모든 점에서 은근히 '보통(사람/아줌마)'인 척하지만, 실은 천재였던 것이다, 흑 ㅠㅠ  

 

 

아마 이게 시작. 그리고 넷을 더 낳고 키우며 저만큼의 글을, 소설을 쓰려면 시간을 어떻게 쪼개고 또 몸과 마음의 건강 관리를 어떻게 했을까. 사소한 것이지만, 수필을 보니, '파출부'는 쓰셨더라.(사실 요즘 식으로 가사도우미 - 청소연구소^^; - 를 쓰더라도 그 인력을 관리하고 시간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다.) 아이들이 자란다고 살림의 규모가 딱히 줄지도 않는데(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는 일이 붙기 때문에) 필력은 더 왕성해지셨던 것 같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얼핏 보면 신선놀음 같지만 사실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 집중도를 요하는 것이다. 그것을 생활 속에서, 생활과 더불어 해야 하니, 여성-아줌마- 작가가 감당했을 노동량은 실로 엄청났을 법하다. 어지간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고서야. 아줌마임과 동시에 상당히 매니쉬^^;한, 심지어 중성적인 느낌, 참 좋다. 

 

 

박경리와 함께. 사진이 옮겨지질 않아  찍어서 올리는데, 블로그가 사라졌다 ㅠ 두 분 다 은은하니 너무 아름답게 나왔다. 중장년은 소설을 쓰기에는 딱 좋은 나이다, 건강하기만 하면.

 

 

마치 도스토-키와 톨스토이처럼 박경리와 박완서를 비교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작품 속 연대 탓에 두 사람의 연배가 멀게 느껴지지만, 실은 별로 그렇지가 않다. 박경리 1926년생, 박완서 1931년생이다. 둘다 걸출한 '여성'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이제는 그냥 '작가'로 자리매매김되는데, 뭣 때문인지(어쩌면 아이 숫자가 적어서?^^;) 박경리 소설에는 여성성(=낭만성)이 꽤 많이 느껴지는 것 같다 등등. 박경리는 단편이 다소 부실하고 걸작인 <토지>는 너무 길어서 유감이다. 그에 반해 박완서는 잘 쓴 단편부터 적절한(!) 분량의 장편까지 재독, 삼독을 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책들이 많다. 아마 이런 분량 감각 역시 그녀가 많은 아이를 키운 아줌마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법하다. 애 다섯 키우면서, 입시 준비 시키면서, 또 친정 엄마와 시부모 돌보면서, 남편 병간호하면서 대하소설을?! 어림도 없었을 법하다. 장르(길이) 역시도 생활에 의해 선택된 측면이 있을 터.

 

*

 

아주 오래 전 읽은 박완서 수필에서 그녀의 아들 얘기가 생각난다. 두 가지다. 하나는 서울대 의대를 다니는 아들이 전공으로 '마취과(학)'를 선택하기로 한 이야기. 내심 서운해하며 그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아들이 던진 답이 유명하다. "쓸쓸해서." 그다음 기억나는 수필은 로버트 알트만 영화의 한 에피스드이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으로 시작되는 얘기.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그러고서 아들 장례식을 언급한다. 저 많은 딸들 중 하나가 죽지 않고 하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다고(?), 라는 식의 솔직한 말. 이런 솔직함이 박완서 소설의 매력 중 하나인 것 같다.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이라고 할 법한 말을 박완서는 꽤 잘 쓰고 그것을 미주알고주알 묘사하고 분석하고, 마지막엔, 우리의 윤리 감각, 도덕 감각을 환기한다. 대개 이런 건 생활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저 수필집에서 앳된 택배기사 고생시키는 예 같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듯하다. 자식에 관한 한, 죽음이야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이지만, 크고 작은 질병 사고는 워낙 많기 때문에, 이 역시 누구나 공감하리라. 나도 아이의 발달상태가 일반적이지 않음을 인지한 대략 그 시점부터 제법 힘들게 사는데,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경련이 재발한 작년에는 아주 더 그렇게 되어버렸다. 문제는 언제부터인가 이런 상황을 무슨 "벼슬"(!!!)처럼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 뜨끔하는 문장, 다시 한 번 옮겨본다.   

 

 "(...) 요컨대 나는 무슨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내 불행으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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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1-01-2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박완서는 다소곳해 보이고, 예쁘네요 ㅎ 엄마를 보는 듯한.

푸른괭이 2021-01-27 10:52   좋아요 0 | URL
‘젊은‘ 정도가 아니라 ‘어린‘ 나이였을걸요?^^; 막내인 아들도 늦둥이라고 해도 삼십대 중반에는 낳았을 겁니다. 요즘과는 다르죠 ㅋ

별족 2021-01-27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님의 글은, 왜 내내 지방으로만 떠돌던 건설회사 다니는 남편이 가까운 곳에 발령받아 작업복입고 출근하는 걸 미워했던 소설이 생각납니다. 뭔가 내가 투덜거릴 때 맞장구만 쳐주지는 않을 것 같은 차가운 친구,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좋아요.

푸른괭이 2021-01-27 10:54   좋아요 1 | URL
맞장구 쳐주는 척하다가 뼈 때리는 한마디 투척하는 오랜 친구^^; - 저 수필집에 나오는 표현대로 ‘보통‘ 얘기를 ‘보통‘ 화법으로 쓰는데, 그게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거든요.

blanca 2021-01-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들이 너무 좋아요. 특히 저 박경리와 박완서의 사진 정말... 박완서는 누구나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을 정말 적나라하게 너무 잘 그리는 것 같아요. 지금 오디오북으로 <저문날의 풍경> 듣고 있는데 여전히 참 좋네요.

푸른괭이 2021-01-27 15:30   좋아요 0 | URL
오히려 지금 더 잘, 많이 읽히는 것 같습니다. 생활 냄새도 생생하거니와(나중에 역사학자나 문화사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인용할 듯요) 기본적으로, 작가들이 흔히 갖는 허영이 없어서인지, 정신 세계가 너무 멀쩡(!)하신 분이셨던 것 같아요. 그냥도 배울 점이 많습니다. 반면, 박경리 소설은, 너무 청승^^;맞아서인지, 오히려 덜 읽히는 것 같고요.
 

 

몇 년 전 만날 뻔한 인연이 있었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하지만 '-뻔한' 것도 인연이라 시집을 구입해서 읽어보았다. 지난 학기에는 한 학생이 이수명 시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여 다시 한 번 시도 했으나 나에게는 너무 우아한 당신(?), 이런 느낌이었다.

 

 

 

 

 

 

 

 

 

 

 

 

 

 

 

 

이번에 문동의 복간본(재간본) 시집을 째려^^; 보던 차에 제목이 아주 마음에 들어 주문해 보았다. 시집의 형식(모양새)도 썩 나쁘지 않다. 겸사겸사 시론도 낸, 아주 부지런하고 성실한 시인이다. 흑, 역시 서울대, 라고 하면 욕 먹으려나^^;

 

 

 

 

 

 

 

 

 

 

 

 

 

 

 

 

 

그런데 저 제목의 시는 없고, <화물차>라는 시 안에 저 대목이 나온다.

 

 

화물차

 

빈 화물차가 지나간다. 나는 가방 속을 뒤지고 있었다. 쏟아지는 책갈피 사이를 정신없이 뒤지고 있었다. 인쇄되어 있는 나의 이단은 나의 오독에 불가했다. (....) 나는 벌써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나에겐 새로운 이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빈 화물차가 지나갔다. 내 앞을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한 예각 속으로

 

돌아올 때면

이만큼 물러서버린 내 집을 발견한다.

보이지 않는 한 예각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한사코 방향 틀어버린

아름답게 뒤집힌 은사시나무 잎들 속에서

(....)

 

 <토요일 오후> 이런 것도 반복해서 읽고 싶다. 예전에 읽은 이수명 시들과 달리, <새로운 오독이...>는 아마 시인이 젊었던(어렸던?) 까닭이었을까, 상당히 도발적인 데가 있다. 마음에 든다! 대단히 산문적인 느낌이 들고 말이 굉장히 많은 것도 마음에 든다. 다른 시들도 눈에 들어오는데 더 옮길 여유가 없는 것이 유감이다. 

 

곁들어 문동의 이 시리즈 중 사서 읽고 싶은 시집이 꽤 되는데, 아마 다음 학기에는 (강의를 받지 못해 ㅠㅠ) 한국 시와 소설을 읽을 시간을 내기는 힘들겠다. 이문재의 <...젖은 구두...>도 예쁘게 단장해서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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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니체 공부하는 철학자.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친 2, 30대의 그녀는 키가 많이 크고 비썩 마른 체형의, 어릴 적 내가 무척 동경하던 몸 형상(?)의 소유자였다. 문지판 시집 두 권은 샀었고 읽었었는데, 명백히 그런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팔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_-;;

 

 

 

 

 

 

 

 

 

 

 

 

 

 

 

'진은영'을 검색하다가 따끈따끈, 막 쓴 시를 발견했다. 사람들 취향은 비슷한 모양이다. 나도 마음에 든다. 시가 무겁다...

 

 

스타바트 마테르 / 진은영

십자가 아래 나의 암소가 울고 있다

오 사랑하는 어머니 울지 마세요

나는 꿈에 못 박혀

아직 살아 있답니다

밤을 향해 돌아서는 내 입술을

당신의 젖은 손가락을 읽어 보세요

세계는 거대한 푸른 종소리처럼

내 머리 위에서 울리고 있어요

나는 밤의 부속품처럼

어둠 속으로 깊숙이 떨어져 나왔어요

별처럼 순한 당신 눈빛과

네 개의 길고 따듯한 뱃속을 지나가는 계절들 사이에서도

소화되지 않은 채 나는 남아 있어요

당신은 오래된 술 같아요

내가 마시는 술에 슬픈 찌꺼기가 떠도는 건

내 탓이 아니에요, 어머니

무엇을 마시든 나는 두껍게 취기를 껴입지만 늘 추워요

나를 향해 당신이 동굴처럼 뚫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팔을 뻗어 서로를 안아요

오 사랑해

서로를 자꾸 끌어당겨요

물에 빠진 사람들처럼

두려움보다

슬픔보다

흰 재가 더 높이 쌓이고 있어요

어머니, 결국 나는 내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뚜껑 열린 석관이

세월 속에서 제 주인을 유실하듯

당신이 당신 아이를 잃어버렸듯

바람이 날아가는 투명비닐 봉지를 분실하듯

당신은 찾을 수 없어요

정말이지 우린 다르게 생겼어요

당신을 닮았던 얼굴 위에 낯선 고통의 진흙을 덧칠하며

내 얼굴은 점점 두껍게 말라갈 테니

목이 말라요 어머니

마른 풀밭 위에 빈병처럼

나는 또 흘러들어요

당신이 몇 방울 남지 않은 곳으로

(월간 시인동네 202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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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박상순의 시가 무척 새롭다. 그때는 안 읽고 (웬 뒷북?!) 지금 읽는데, 중년의 독자가 보는 청년의 시, 라고 봐도 되겠다. (그때부터 시에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구나 ㅎㅎ) 한편으론, 이상에 대한 그의 오마주, 랄까 그런 것이 보여서 중년-초로의 박상순이 이상에 관한 책을 쓸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일종의 '시그너처 아이템'인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보다도, 혹은 그만큼 그의 본색^^을 잘 드러내주는 시가 <나는 더럽게 존재한다>가 아닌가 싶다. 온 가족이 총 출동하는데, 가령 기형도의 <... 위험한 가계> 이런 것과는 얼마나 다른 느낌인가. 정조로는 차라리 이성복의 가족시(?)에 가깝겠지만, 그보다 더 뭐랄까, 전위적이다.

 

<나는 더럽게 존재한다>

 

나는 내 몸 속에 갇혀 있다. 내 몸속에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우상과 만난다. 나의 은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왔다. 때로는 철길 위에 뒤집혀 바둥거리는 두꺼운 각질의 벌레로, 자신의 눈물방울을 두 손에 받쳐 든 소년으로, 잠든 아버지의 허리를 도끼로 잘라내 개들에게 먹이기 위한 비밀의 음모를 꿈꾸는 눈 뒤집힌 청년으로, 또 어느 날은 담요로 만든 거대한 모자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어두운 골목을 향해 휘청거리며 사라지는 늙은 원숭이의 뒷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

나는 여전히 내 몸속에 있다. 불타는 내 심장을 뚫고 오늘 나의 우상이었던 큰 쥐는 빠져나갔다. 요동치는 내 몸속에서 뒷발을 떼며 큰 쥐는 내게 말했다.

-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내가 없는 나의 꿈>은 명백히, 이상을 염두에 둔 듯하다. "어디에도 내가 없는 / 내 꿈속에도 내가 없는 / 나의 꿈". 표제작은 지루하고 ㅠㅠ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시도 좋다. <이발소의 봄>은 짧지만, 싱겁지 않다.  

 

<별이 빛나는 밤>

 

나에게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날마다 공동묘지에 갔다. 한 사람은 무덤을 파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은 자의 이름을 돌조각에 새기며 함께 지냈다.

(이하, 무덤과 묘비의 이야기^^;)

 

<이발소의 봄>

 

나는 뒤통수를 맡긴 채

거울 속에 허옇게 앉아 있었다

 

첫 시집에 비해 <러브 아다지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슬픈 감자 200그램>은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 강원도는 싫어요. 말도 하기 싫어요. 무조건 다 싫어요."(<강원도는 싫어요>) 최근 시집은 상받은 시들도 있지만, 나는 요괴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삭았다 ㅋㅋ

 

 

<요괴들의 점심 식사>

 

불룩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가마솥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주문한다. 따로따로 해장국을 먹던 시커먼 요괴 둘이 뒤를 돌아본다. 불룩한 요괴도 못 본 척. 넓적한 요괴도 못 본 척한다. 오후 3시, 늦은 점심 식사. 나는 해장국을 먹는다.

 

불룩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시커먼 요괴, 더 시커먼 요괴, 요괴들은 삭았다. 주방에 있는 조금 튼튼해 보이는 요괴와, 해장국을 나르는 아직 새것처럼 보이는 요괴도 이미 다 낡았다. 내 얼굴도 삭았다.

 

서로 모른 척하려는 요괴, 그래도 마주치는 요괴, 여전히 모른 척하는 요괴, 플라스틱 폐품 같은 요괴, 엉덩이도, 얼굴도 폐품이 되어버린 요괴, 가슴에 큰 구멍이 난, 너덜너덜한 요괴. 오후 3시의 늦은 점심 식사. 너덜너덜, 해장국을 먹는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도 시보다는 시인의 말, 즉 산문이 더 잘 읽힌다. 달리 말해, 얼마든지 알아먹기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시를 쓸 때는 그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시의 인위성, 작위성, 이런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시인의 말을 곱씹는다.

 

슬픈 도구가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을 그리고 싶다. 나의 도구는 구체적이거나 실재적인 것을 통해 더 구체적이거나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향할 것이다.

(...)

주어진 기회라고는 단지 예술밖에 모르는 미미한 크기의 나는, 그래도 이 세상에 한 점으로서나마 잠깐의 숨을 쉬며, 그 숨으로 오늘은 겨우 200그램짜리 감자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유동이나 불확정성에 관한 포착, 연결구조를 열면서도 위에서 닫아버리는 구축이라면 좋겠다. 그래서 내일 오후쯤에는, 나의 언어가 예술적 기술과 비장함을 딛고, 맑고 투명한, 또는 어둡고 칙칙한, 그런 등등의 물체를 가진, 햇빛 속의 하루로 바뀐다면 좋겠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 반대로도 늘 가능하면 좋겠다. 

당나귀, 기린, 대장, 좀 이쁜 누나, 고독, 고래, 시금치에게 미안하다. 아직은 밤이니 내일 정오까지는 우리 모두, 무사할 것이다.

 

'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시점으로 '내일 오후쯤'을 잡고 있는데, 마지막 문장을 보면 데드라인은 '내일 정오까지'다. 굉장히 슬프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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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형식은 성실하고 친구가 없었다. 소진되지 않는 목적을 생각하며 기원에 갔다. 바둑은 졌지만 석양을 좋아했다. 병원에 가서 무표정하게 앉아 있다가 죽은 사람과 대화를 했는데 그것이 형식에게 어울렸다. 대기실에서 누가 허공에 대고 욕을 하다가 형식에게 말을 걸었다. 그 사람이 자꾸 너 창식이냐고 창식이 맞네라고 창식아 이 새끼야라고 오랜만이다라고... 형식은 사실 창식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디 사는지 뭐 하는 새낀지도

 

창식은 사실 살고 싶지 않았고 자주 잠이 들었다. 창식은 오늘따라 머리가 아팠는데 열심히 일을 했다. 퇴근 후에 창식은 취해서 떠들고 울다가 웃다가 이건 뭔가 이상한 삶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귀갓길에 창식은 전화를 걸어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소리치며 승차를 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창식은 입이 닫히고 눈이 감기고 코와 귀가 막히고 웃음도 울음도 터뜨리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경복궁을 지날 때

 

형식은 창식의 전화를 받았다.

경복궁은 멋진 곳이라고 했다.

 

 

 

 

 

 

 

 

 

 

 

 

 

 

 

 

 

 

저녁에 특강이 있어서(그나마 ZOOM이라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일상의 시간표가 조금 흐트러진 가운데, 자꾸만 맴돌던 이야기. 이게 시인데 나에게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찾아보니, 형식이 보다 창식이가 더, 재미가 없다. 마지막에 경복궁 얘기, 종잡을 수 없다. 제목은 어떻게 바꿀 수 없을까^^; 형식과 창식?? 흡, 더 이상하군.  

 

 

+

어젯밤에 뒤척이며 해본 생각. 1연. 형식은 죽은 사람과 대화하니까, 그를 창식과 착각한 사람도 분명 죽은 사람이었을 터. / 2연. 창식은 누구에게 전화하려고 했을까? 형식? 혹은 형식을 창식으로 착각한 사람? 아무튼, 여러 정황상 창식은 경복궁을 지나는 버스 안에서 죽었다. 형식과 창식의 통화는 창식이 죽은 다음 이루어진 것이다. <식스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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