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해서 쭉 읽지는 못하지만, 그때그때 읽는 부분마다 감동적이다.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간결하고 힘있는, 접속사가 거의 없이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만으로 이어지며 훌륭한 맥락을 만들어는 그의 놀라운 문체이다. 그런데 그는 의사이고 그것도 내과나 정신과가 아닌 외과의, 심지어 중증외상센터에서 일하는 외과의다. 아, 솔직히, 근래에 읽은 어지간한 소설(들) 보다 낫다. 몇 군데 옮겨온다.

 

"필사적으로 피를 막아내는 속도와 피를 부어 넣는 속도의 합이 파열된 장기로부터 터져 나와 쏟아지는 피의 속도에 미치지 못할 때, 핏물 속에서 환자의 장기를 더듬던 내 손은 서늘해졌다. 차갑게 식은 피와 굳어가는 장기가 손끝에 느껴지면 사신이 환자를 데려갔음을 알았다."(2, 11)

 

*

 

"내과와 외과를 구분 짓는 이유가 무엇이든, 외과를 업으로 삼는 우리의 일상은 갈라지고 짓이겨진 살과 부서진 뼈와 장기들, 끊어진 신경과 어긋난 조직, 솟구치는 핏물 속에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삶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나는 수술이 좋았고 수술방에 감도는 서늘한 감촉을 사랑했다."(1, 33)

 

*

 

"남자의 몸 안에는 이전에 받았던 큰 수술의 여파로 심한 유착이 남아 있었다. 복강 내 수많은 조직과 장기들은 다 엉겨 붙어 한 덩어리와도 같아 보였다. 복강 제일 얕은 곳에서 간 파열로 인한 피가, 쪼개진 간 조직 사이로 울컥거리며 뿜어져 올랐다. 환자의 피는 따뜻했다. 그것 하나가 그의 숨이 아직은 이상에 머물고 있음을 짐작케 했다. (...) 지루한 박리 수술이 끝나고 마침내 후복강까지 시야가 닿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했다. 환자의 비장과 좌측 신장이 이미 적출되어 있었다." (1, 65)

 

수술 뒤 환자를 중환자실로 보낸 다음, 식사하는 장면, 이 챕터의 마지막인데, 이 정도면 소설작법 교본으로 써도 되겠다. 해맑은 어린아아와 사목하는(이런 표현 쓰나?) 목사의 대조. '나'(이국종)의 마지막 행위.   

 

그날 저녁 교직원 식당이 문을 당아 외래객 식당으로 갔다. 밥맛을 느낄 수 없었으나 그냥 먹었다. 지나가던 아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 밥 먹어요? 혼자?

아이의 눈은 맑았다. 나는 그냥 짧게 고개만 끄덕했다. 다시 숟가락을 들려 할 때 원목인 손덕식 목사가 다가와 프린트한 기도문을 주며 말하고 갔다.

- 제가 기도 많이 합니다.

나는 말없이 종이를 받아 식판 옆에 엎어두고 보지 않았다. (1, 68)

 

이런 부분 많지만, 읽으면서 울컥, 하는 대목.

 

"그는 예비역 해병이자 취업 준비생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오토바이 배달을 하던 중에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한쪽 다리를 잃었고 인공항문까지 달았다. 20대 청년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 괴로워하지 ㅇ낳았다. 좌절하는 대신 살아있음으로 가질 수 있는 나머지 가능성이 집중했다. 그 긍정이 놀라웠다. 그런 삶의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를 보며 나는 부끄러웠다."(1, 76) "얼마 뒤 그 환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1, 77)

 

 조직폭력배, "밤거리의 주먹들"을 수술하는 부분.

 

"나는 그들이 가진 적의의 근원을 알 수 없었고, 폭력과 살인의 명분도 이해하지 못했다."(79-80)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피의 박동을 느끼면서 나는 젊은 생명의 강한 힘을 확인했다. 죽어가는 환자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내 손끝에서 사람의 생사가 갈린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그 무게감에 짓눌렸다."(84-85) 

 

*

 

 

 

 

 

 

 

 

 

 

 

 

 

 

 

외과의사의 이런 체험을 생생하게 담은 소설로 불가코프의 초기 소설을 소개한 적이 있다. 모의대 특강에서도 읽었는데, 이국종의 책을 보니 참 무의미하다 싶다. 그때 나왔더라면 같이 읽었을 텐데.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 속의 외과의사 닥터 덴마.(일본 만화라, 일본인으로 설정^^;)

- 선생의 손은 사람을 죽이는 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요한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덴마에게 하는 말이다. 덴마는 결국 요한을 못 죽인다, 오히려 다시 살려낸다. 외과의, 이 surgeon의  손은 참 신비로운 것이다. 그래서 더 매혹적인지도 모르겠다. 손에 든 메스만큼이나 붓-펜을 잘 휘두르다니, 거참.

 

 

 

*

 

 

 

 

 

 

 

 

 

 

 

 

 

 

 

 

루쉰 역시 원래 일본 유학을 갈 때는 의학도였는데 돌아올 때는 작가-사상가가 되어 있었다. 사람 몸을 고치는 것보다 머리를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고, 그 스스로 밝힌 바 있다. 이른바 환등기 사건. 음, 그 머리 역시 실은 몸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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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책이 새로 나온 김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논문을 쓰려 했다. 책도 다 구입했다. 이 참에 연구비 받던 '벨 에포크'에 주문해둔 톨-이 연구서도 처리할 겸.  그런데 <닥터 지바고> 일정에 맞추다 보니 그 논문을 먼저 쓰고 <전.평.>은 내년으로 미룬다. 여사여사 자료를 뒤지던 중 이광수가 이른바 '조선의 톨-이'를 자처했음을, 그 정도로까지 그를 좋아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이 부분을 좀 더 다루어 봐도 좋겠다. 비단 이광수뿐만 아니라 이 무렵 우리 지식인들이 사랑한 톨-이는 무엇보다도 <부활>의 작가였다. 정확히 <부활>도 아닌, <해당화: 가주사 애화>(중국어에서 번역했다고 한다)의 작가. 당시 각종 '애화'(대략 창부화된 여자들의 슬픈 이야기, 신파)가 무척 유행했는데 그 원조라고.  그리고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부활>의 한국어 완역(일본어에서) 역시 이광수(혹은 허영숙)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을 정도라고.  아, 이광수는 러시아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사족.  박형규 선생님 덕분에 <부활>을, 또 그밖의 많은 러시아 작품들을 훌륭한 우리말 버전으로 읽어왔지만(특히, 볼쇼이판 <전.평.>) 아, 이제는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번역 및 번역가의 숙명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번역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다. 언제가 모 번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어 썼지만 번역가는 '그림자', 작가와 작품 뒤에 붙은 쓸쓸한 그림자이다. 모든 일, 모든 직업에는 '연령 제한' 있다. 학문이나 번역, 창작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당장 눈이 어두워 내가 번역하는(혹은 쓰는) 텍스트도 제대로 못 보는 마당에..ㅠ.ㅠ 물론 그걸 뛰어 넘는 드문 천재들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그럼에도'이다. 내 번역의 유효기간도 길지 않음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그럼 뭐 먹고 살지?) 아무튼.

 

톨-이를 무척 사랑한 이광수의 소설 중 그의 흔적, 특히 <부활>의 영향이 아주 큰 작품이 <유정>이라고 한다. 헐, 기억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안 읽은 것이다, 님아 ㅠ.ㅠ 안빈, 석순옥(맞나?) 어쩌고 하는 무슨 사랑 얘기는 <유정>이 아니고 <사랑>이었나 보다. 그리하여, 이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고 밑바닥으로 다 파야하게 생겼다.

 

 

 

 

 

 

 

 

 

 

 

 

 

 

 

 

<유정>이야 노골적이고, 이 주제와 비교적 무관하다는 <무정> 역시 이형식의 박영채를 계몽하려는(나아가, 네흘류도프가 카츄사에게 그랬듯, '구원'하려는) 그 심리적, 정신적, 도덕적 흐름에 있어 기본적으로 <부활>을 밑에 깔고 있다. - 고 하는데, 아주 공감된다. 덧붙여, 이 경우에도 우리가 꼭 넘고 가야 할 산은 이 분의 이 책.

 

 

 

 

 

 

 

 

 

 

 

 

 

 

 

이광수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러나 웃긴 신파나 그 못지 않게 웃긴 도덕소설(계몽~)이나 썼다고 여겨진 그가 왠지, 소설을 참 잘 쓴 염상섭보다 더 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보다 더 정감이 간다고 할지. 언젠가 강의실에서 김윤식 선생님이 열심히 이광수를 '씹던' 기억이 난다. 그의 고아콤플렉스, 또한 '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열등감, '잘난 것', '높은 것'을 향한 열망, 그가 결국 친일로 간 것은 내적 필연이었던 것, 그의 지적 흐름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평론가 최재서던가, 그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듯하다.) 허영숙과의 로맨스, 결혼 생활 역시 그러하다. 아이들을 많이 낳았던데, 참, 천생 연분이었던 듯하다. 그러게 '사랑의 문법'이 곧 '소설의 문법'으로 이어진다.(이상, 염상섭, 이광수).  

 

 

 

 

 

 

 

 

 

 

 

 

 

 

*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보아온 이광수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지나치게 둥근(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기껏해야 늙은 아저씨) 이광수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우리의 얼굴과 몸이 양질전화한다는 것을 알겠다. 정확히 그 결절점을 찾기는 힘들겠으나, 아무튼 우리는 나비나 다른 곤충의 변태 못지않은 과격한 변화를 겪는다. 어쩌다 젊은 날의 이광수 사진을 봤는데, 헐, 윤동주 뺨치는 얼굴이었구나. 과연 청년 이광수는 지식인에 작가에 혁명가에(그리고 열정적인 연인에), 그 무렵에는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말년(중년)에 이런 얼굴이 된 것이다. 음, 호위호식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역시, 출세지향적이던, 야망 많던 그가 원하던 대로.

 

 

겸사겸사, 톨-이의 역설은 늙어서 더 볼 만하다는 것. 그는 외모 콤플렉스가 무척 강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톨-이 원하는 톨-이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못 생겼다기보다는 못 됐게(!) 생긴 얼굴인데, 바로 이 대목 '악'을 누르고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 톨-이의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그리고 말년엔 보다시피, 우리가 익히는, 또 많은 화가들이 사랑한 얼굴.(그리고 그런, 정정한 할아버지의 몸.) 저 수북한 털. 사실 머리카락도 꽤 오랫동안 무성했다. 그러니 그 '육'(=악)을 감당하기가 그렇게 힘들었겠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창작(=삶)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니, 부러울 수밖에. 그게 없었다면 톨-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터이다. 마음 착한 지주 귀족 할아버지가 돼서 여러 사회 사업, 자선 사업 하시고 아이들한테 민화 읽어주시고 그러셨을 터. 가끔씩 동네 처녀 총각 주례 서주시고 (믿거나 말거나 많은 사생아를 만드는 대신) 늙은 마누라랑 알콩달콩, 티격태격  잘 살고.   

 

결국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그래서 걸어가던 그 길의 끝에 이르게 된다.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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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소리 2020-04-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타겠지만, 전문가 분의 글에 호위호식...이란 단어가 찜찜하네요.^^
 

 

 

 

 

 

 

 

 

 

 

 

 

 

 

 

어떤 '필요'에 의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맞는지?) '반디'의 책을 펼쳤다. 더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만 더 읽을 책이 없다. 이런 '양'의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북한의 솔제니친'이라는 수식어는 정녕 놀라울 따름이다. 강조하건대, 나는 솔제니친을 정말 좋아하지 않고, 그의 소설이 수작, 명작 정도는 되지만 소위 도스토-키 수준의 걸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데, '반디'의 소설을 보니, 아, 내가 지금껏 무척 호강(!)하고 살았음을 알겠다. 19세기 황금기 문학 보다 못할 뿐, 여전히 빛나는 20세기 러시아(소련) 문학! 새삼스럽다.

 

 

 

 

 

 

 

 

 

 

 

 

 

 

 

 

번역원고 편집이 진행 중인 <지바고>의 경우, 시종일관 툴툴댔고, 논문 및 해설 작업을 위해 자료를 섭렵(-_-;;)하는 지금도 툴툴대고 있다. 작품이 그지 같다느니, 어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비교를 하느냐 등등. 하지만 이 역시 20세기 소설 중 (열 손가락은 좀 아닐 듯하고) 몇 십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굳이 맥락상 엮어보자면 '반체제문학'의 대표격. 실상 풍자의 정서는 불가코프의 소설이 더 쎄긴 하다.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정녕 본의아니게 그런 느낌을 주는, 도저한 사회주의자-유토피아주의자 플라토노프의 소설도 염두에 둘만은 하다.

 

 

 

 

 

 

 

 

 

 

 

 

 

 

 

다시금 '반디'. 그래도 우리 문학인데(북한 문학도 우리 문학이지 않나!), 지난 여름 우리 소설을 읽을 때처럼, 투덜투덜 욕하고 또 때론 질투하고 하면서, 눈을 좀 크게 뜨고 읽어보려고 한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앗, 12시에 애 데려와야 하는데 -_-;; 아침에 뭐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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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창작 강의를 해보고 있지만, 비교(^^;;) 삼아 시를 읽는 시간을 마련해보곤 했다. 거기에 덧붙여 지난 학기부터인가 시도 한 번 올려보라고 했더니 제법 되었다. 그 무렵을 돌이켜 보면 소위 '나의 장르'가 시인지 소설인지 그도 아닌 제삼의 어떤 것인지 잘 모를 때가 아니던가. 소설을 시처럼 쓰는데 막상 써놓은 시를 보면 시 같지 않은 경우도 있어 흥미로웠다. 이러나저러나 너무 오랫동안 시를 읽지 않아(심지어 러시아어문학 쪽도 단 한 학기도 시 강의를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아주 까막눈이 된 것 같았는데, 자꾸 읽다 보니 슬슬 눈이 뜨이는/열리는 것 같은 느낌(착각?)은 든다.

 

 

 

 

 

 

 

 

 

 

 

 

 

 

 

 

이른바 이런 고전에 덧붙여, 그때그때 신작 시집(혹은 상 받은 시들)을 첨가해본다. 더러 학생들이 소설에 참고한(?), 혹은 그냥 읽고 말해주는 시들을, 시집을 들춰보기도 한다. 뭘 해도 시간은 부족하다. 한데 요즘은 시간의 부족보다는 몸-건강의 부족이 더 아쉽다, 아니꼽다

 

 

 

 

 

 

 

 

 

 

 

 

 

 

 

 

 

 

 

 

 

 

 

 

 

 

 

 

 

 

 

 

 

 

 

 

 

 

 

 

 

 

 

 

 

*  

 

인문학자, 러시아문학자로서(-도) 나는 소설 전공이라 시를 읽지 않은지 참말 오래 되었다. 그렇다는 것을 요 2, 3년간 절감했다. 희곡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체호프 희곡 수업을 들으며 극 장르를 좀 공부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소년이로학난성'을 실감한다. 정말 늙는 건 일도 아니고 공부(배움)는 끝이 없구나, 너무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나이 들 수록 머리통이 지진아, 즉 '슬로우 러너'에 가까워지는 걸 절감한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알던 다른 하나 둘을 까먹는다.(내 아이큐가 정녕 126이냐ㅠ.ㅠ) 

 

*

 

오랜 벗 하나가 5월부터인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소설가를 꿈꾸던 후배와 시인을 꿈꾸던(실제로 자비로 시집 몇 권을 - 복사집에서 - 찍어낸 이력이 있는) 선배로  학과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것이 93년이었는지, 94년이었는지, 그때 그가 조교였는지, 아니면 지금은 죽고 없는, 그의 동기인 다른 선배가 조교였는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결기에, 저돌성에 아주 질려버렸는데(^^;;), 그가 거의 연일 써대는 시를 보면서 '시와 시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한다. 분석과 평가를 떠나(이건 내 몫이 아니고), 시로 읽히는 것과 그러지 않는(못하는) 것이 있다. '로쟈'의 시는 대부분(특히 문학이나 영화를 소재로 취한 것) '시 아닌 것' 쪽에 가깝게 읽히는데(아니면, 제삼의 어떤 시로 평가될 것인가?) 가끔씩, 미친 척, '그래, 이런 것이 시지!'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있다. <부화의 꿈>은 요즘 계속 웃으며 상기하는 시. 밑에 두 편은 그가 정녕 러시아문학 전공자임을(-였음을) 보여준다. 특히, 니진스키의 자서전(원제는 '감정')이 생각난다.

 

"이건 아침에 지워야겠다"   

 

 

 

 

 

 

 

 

 

 

 

 

 

 

 

 

북마크하기부화의 꿈                  


세상은 점점 따뜻해져
어제보다 더운 오늘
그리고 더 뜨거운 내일
어미 없이도 계란이 부화한다니
암탉의 품속 같은 세상
숨막히는 사랑이란 이런 거구나
지구가 맘먹고 계란을 품는구나
그래 이젠 부화지
우리 생에 남은 일이라곤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일
그러니 좀더 버티자
우리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체온으로 체온을 버티는 일
북극의 빙하도 녹인다는 사랑이지
아프리카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
마침내 부화할 그날까지
좀더 버티자

그런데
우리가 유정란은 맞아?

 

 

북마크하기지하철에서

 

분명 어제의 구도가 아니다
배치도 다르고 엑스트라도 다르다
오늘의 전철 씬
그러고 보니 나도 엑스트라군
대사가 없다
입 다물고 스마트폰에 열중한다
열심히 문자를 보내는 표정으로
시를 적는다 오늘의
할당량을 채운다
이제 겨우 복역 2개월차
만기 출소는 꿈꾸지 않는다
특별대사면은 혹 모르겠다
다행히 수용소는 아주 넓다
무제한 데이터서비스처럼
이동반경도 무제한
해저터널이 있다면 남미도 갈 수 있다
모스크바에서 안부를 묻는다
뮌헨에서도 문자가 온다
병원도 오갈 수 있다
단지 시를 써야 할 뿐이다
다들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재소자들의 특징이다
그림시도 있고 노래시도 있고
포르노시도 있다
형량은 다르다
장르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
각자 복역중이다
다들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린다
나도 전과를 숨긴다
예전에 써봤다고 진술했다
멍청이!
나는 두 배를 써야 한다
전철에서도 쓴다
안약 넣고도 쓴다
무작정 쓴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컷! 이제 다음 장면이란다

 

 

북마크하기머리가 아파서 적는다

머리가 아파서 적는다
아프다고 적으니 아픈 건 아니다
날아다닐 기분이 아니다
말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다
문은 열어놓는다
자동차단기가 달려 있다
마음은 자주 단속해야지
복잡한 마음은 자주 고장이 난다
컴프레서에 문제가 있다
에이에스를 부르는 것도 일이다
세탁소에 들르지 않았군
지난 옷들의 원망을 듣고 싶지 않다
발가락 장난이나 할 때인가
목구멍에도 반창고를 붙여야겠다
이건 썼던 말이다
한번 쓴 반창고를 다시 붙이다니
이건 누가 하는 말인가
말할 기분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꿀꺽 삼켰다
치사량에 못미쳤나 보다
아침이면 또 깨겠군
그럴까봐 새벽에 일어난다
내일은 눈이 아플 예정이다
아니 다시 머리가 아플 것이다
아프다고 적은 걸 어디에 두었나
잘 때는 배에다 붙여놓아야겠다
배가 아프다니 너무 유치하다
차라리 날아다니는 게 낫겠다
요즘은 신경들을 쓰지 않는다
날아다닐 맛이 나지 않는다
추락할 기분이 아니다
무조건 입을 다물어야 한다
나는 단호하게 블라인드를 내린다
양들을 불러모으자
러시아에 가보자
아직 눈이 내릴까 눈 맞을
기분이 아니다 눈꺼풀이 감긴다
이건 아침에 지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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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리얼리티와 소설의 리얼리티.

소설 쓰기 힘들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라고 지적할 때 흔히 나오는 답. "이거 진짜 제 얘기인데요" "이거 실제 사건에서 가져온 건데요" "이거 자료 보고 쓴 건데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덧붙여, "이게 실제 사실인데, 막상 쓰고 보니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작위적인 거예요." 즉, 현실-사실인데 어딘가 심하게 조건화된 것, '소설' 같은 것이다. 무척 당혹스러운 모순이다.

 

소설 속 리얼리티가 있다. 이창동의 <버닝>을 보고 싶어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이창동의 영화는 최서해의 <홍염>의 현대판 영화버전처럼 읽혔고(보였고^^;; - 카프, 신경향파!^^;;), 하루키의 소설은, 정녕 그의 도저한 부르주아 감성이란, 과연 저패니메이션의 서정성과 낭만성의 언어적-소설적 버전이랄까. 그런데 이게 묘하게 읽힌다, 라는 것. 즉, 소설이라는 세계 속에서는 세 인물의 관계며 그들의 행각이며 대화 등등이 우리의 실제 현실과 유리되면 될수록 더 큰 미학성을, 미학적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놀라울 따름이다. 하루키의 인기는, 우리가 소설이든 영화든 조건화된 장르에서 요구하는, 희망하는 리얼리티는, 어쨌거나 좀 다른 리얼리티임을 보여준다. 

 

 

 

 

 

 

 

 

 

 

 

 

 

 

"이거 실화냐?" 하는 유행어가 있지 않나. 내 인생을 얼핏, 잠깐 훑어봐도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거 진짜 실화냐. 2004년 3월부터 시간강사, 2018년 현재도 시간강사, 이거 실화냐. 그 사이 자리 못 잡은 것도 '실화냐' 싶지만 안 짤린 것도 '실화냐' 싶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 아마 복지관과 센터에 다니는 분들, 이미 적응됐을 법도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씩 이 질문을 던질 거다. 이거 실화냐. 내 아이가 장애라니. 내 아이가 뇌성마비라니. 내가 장애인이라니. 등등. 이런 현실 속에서 문학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때야 하는지 다시금 묻게 된다.

 

 

 

 

 

 

 

 

 

 

 

 

 

 

 

 

 

 

 

 

 

 

 

 

 

 

 

 

 

 

 

 

 

 

 

 

 

 

 

 

 

 

 

 

여름에 최대한 부지런히 소설을 읽었다. 아무리 비평적 수사를 갖다 붙여도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따뜻한 소설, '착한' 소설이 아닐지. 그렇다고 차가운 소설, '못된' 소설은 다 불필요한 것인가.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소설은 어떤 부류에 들어갈지. 고등학교 때 학교 앞 서점에서 빨간(와인) 색(아닐 수도 있다!) 표지의 <광장>을 사들고 나오며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90년대 초반,<광장>이 아직 문학사-교과서는 아니었던 시절이다. 대학 때는 문지판 전집을 사 놓고 한 권, 한 권 읽어나갔던 것 같다. 작가가 죽는 순간, 비로소 문학사가 시작된다.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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