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박상순의 시가 무척 새롭다. 그때는 안 읽고 (웬 뒷북?!) 지금 읽는데, 중년의 독자가 보는 청년의 시, 라고 봐도 되겠다. (그때부터 시에다 그림을 그리고 계셨구나 ㅎㅎ) 한편으론, 이상에 대한 그의 오마주, 랄까 그런 것이 보여서 중년-초로의 박상순이 이상에 관한 책을 쓸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일종의 '시그너처 아이템'인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보다도, 혹은 그만큼 그의 본색^^을 잘 드러내주는 시가 <나는 더럽게 존재한다>가 아닌가 싶다. 온 가족이 총 출동하는데, 가령 기형도의 <... 위험한 가계> 이런 것과는 얼마나 다른 느낌인가. 정조로는 차라리 이성복의 가족시(?)에 가깝겠지만, 그보다 더 뭐랄까, 전위적이다.

 

<나는 더럽게 존재한다>

 

나는 내 몸 속에 갇혀 있다. 내 몸속에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우상과 만난다. 나의 은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왔다. 때로는 철길 위에 뒤집혀 바둥거리는 두꺼운 각질의 벌레로, 자신의 눈물방울을 두 손에 받쳐 든 소년으로, 잠든 아버지의 허리를 도끼로 잘라내 개들에게 먹이기 위한 비밀의 음모를 꿈꾸는 눈 뒤집힌 청년으로, 또 어느 날은 담요로 만든 거대한 모자로 자신의 얼굴을 감춘 채, 어두운 골목을 향해 휘청거리며 사라지는 늙은 원숭이의 뒷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

나는 여전히 내 몸속에 있다. 불타는 내 심장을 뚫고 오늘 나의 우상이었던 큰 쥐는 빠져나갔다. 요동치는 내 몸속에서 뒷발을 떼며 큰 쥐는 내게 말했다.

-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내가 없는 나의 꿈>은 명백히, 이상을 염두에 둔 듯하다. "어디에도 내가 없는 / 내 꿈속에도 내가 없는 / 나의 꿈". 표제작은 지루하고 ㅠㅠ <별이 빛나는 밤> 같은 시도 좋다. <이발소의 봄>은 짧지만, 싱겁지 않다.  

 

<별이 빛나는 밤>

 

나에게는 두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날마다 공동묘지에 갔다. 한 사람은 무덤을 파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은 자의 이름을 돌조각에 새기며 함께 지냈다.

(이하, 무덤과 묘비의 이야기^^;)

 

<이발소의 봄>

 

나는 뒤통수를 맡긴 채

거울 속에 허옇게 앉아 있었다

 

첫 시집에 비해 <러브 아다지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슬픈 감자 200그램>은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 강원도는 싫어요. 말도 하기 싫어요. 무조건 다 싫어요."(<강원도는 싫어요>) 최근 시집은 상받은 시들도 있지만, 나는 요괴 얘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삭았다 ㅋㅋ

 

 

<요괴들의 점심 식사>

 

불룩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가마솥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주문한다. 따로따로 해장국을 먹던 시커먼 요괴 둘이 뒤를 돌아본다. 불룩한 요괴도 못 본 척. 넓적한 요괴도 못 본 척한다. 오후 3시, 늦은 점심 식사. 나는 해장국을 먹는다.

 

불룩한 요괴와 넓적한 요괴. 시커먼 요괴, 더 시커먼 요괴, 요괴들은 삭았다. 주방에 있는 조금 튼튼해 보이는 요괴와, 해장국을 나르는 아직 새것처럼 보이는 요괴도 이미 다 낡았다. 내 얼굴도 삭았다.

 

서로 모른 척하려는 요괴, 그래도 마주치는 요괴, 여전히 모른 척하는 요괴, 플라스틱 폐품 같은 요괴, 엉덩이도, 얼굴도 폐품이 되어버린 요괴, 가슴에 큰 구멍이 난, 너덜너덜한 요괴. 오후 3시의 늦은 점심 식사. 너덜너덜, 해장국을 먹는다.

 

그런데 이 시집에서도 시보다는 시인의 말, 즉 산문이 더 잘 읽힌다. 달리 말해, 얼마든지 알아먹기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시를 쓸 때는 그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시의 인위성, 작위성, 이런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시인의 말을 곱씹는다.

 

슬픈 도구가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봄날을 그리고 싶다. 나의 도구는 구체적이거나 실재적인 것을 통해 더 구체적이거나 더욱 실재적인 것으로 향할 것이다.

(...)

주어진 기회라고는 단지 예술밖에 모르는 미미한 크기의 나는, 그래도 이 세상에 한 점으로서나마 잠깐의 숨을 쉬며, 그 숨으로 오늘은 겨우 200그램짜리 감자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유동이나 불확정성에 관한 포착, 연결구조를 열면서도 위에서 닫아버리는 구축이라면 좋겠다. 그래서 내일 오후쯤에는, 나의 언어가 예술적 기술과 비장함을 딛고, 맑고 투명한, 또는 어둡고 칙칙한, 그런 등등의 물체를 가진, 햇빛 속의 하루로 바뀐다면 좋겠다. 더 어려운 일이지만 그 반대로도 늘 가능하면 좋겠다. 

당나귀, 기린, 대장, 좀 이쁜 누나, 고독, 고래, 시금치에게 미안하다. 아직은 밤이니 내일 정오까지는 우리 모두, 무사할 것이다.

 

'나'의 소망이 이루어질 시점으로 '내일 오후쯤'을 잡고 있는데, 마지막 문장을 보면 데드라인은 '내일 정오까지'다. 굉장히 슬프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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