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원형, 인간의 근원을 찾아서: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 <소네치카>(2012, 비채)
199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의 러시아와 마주한 ‘P세대’(펩시 세대)의 딜레마를 가장 잘 대변해준 이는 모스크바 출신의 삼십대 작가 빅토르 펠레빈이었다. 도시적인 감수성과 비의적인 분위기, 도발적이고도 지적인 문체, 현란한 문화 코드와 다양한 장르의 혼합 등 그는 새로움과 젊음의 대명사였다. 그 무렵, 우랄 지역 출신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쉰 살을 목전에 둔 ‘아줌마’가 「소네치카」(1992)라는 ‘촌스러운’ 제목의 중편소설을 들고 문단에 나타난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1943-)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소네치카」는 한마디로 ‘여자의 일생’이다. 소냐(소네치카)는 네프 시대에서 스탈린 독재로 이어지는 격동기에도 “도스토옙스키의 불안한 심연”과 “투르게네프의 그림자 드리운 가로수”(10)에 빠져 사는 독서광이지만 어느 중년 화가(로베르트)와 결혼하면서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책 속의 삶을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은 사라진 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변변치 않았던 것들, 예를 들어 직접 만든 쥐덫으로 쥐를 잡은 일”(22)이 중요해진다. “고상한 소녀”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안주인”이 된 그녀의 꿈은 “수도관이 설비된 부엌, 딸이 혼자 쓰는 방, 남편의 공방”이 딸린 “사람이 살만한 평범한 집”(34-35)을 갖는 것이다. 노화의 폭탄을 맞은 그녀를 슬프게 하는 것도 “아이를 더 많이 낳지 않으면 남편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35)는 생각이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일부러 젊었을 적 사진을 올려봅니다 ^^; 예쁘지요? 최근 사진 보면 너무 튼실(?)해보이는데, 인터뷰 동영상 보면 은근히 조심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1950년대 초, 중년의 소냐는 아이의 양말을 기우며 남편과 예술가 친구들의 ‘고상한’ 대화를 듣는 가정주부이다. 그런데 남자애들과 어울리는 데 싫증이 난 딸(타냐)이 작고도 요염한 고아 소녀(야샤)를 데려오면서 가족 구조가 재편된다. 집이 철거당할 절박한 순간에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소냐는 “예외적이고 비범한 그이”에게 “젊고, 예쁘고, 부드럽고, 날씬한 아가씨”가 생긴 것은 “공평한” 일(66)이라고 생각하고는 푸시킨의 소설을 꺼내 읽는다. 딸마저 페테르부르크로 떠나자 다시 “문학이라는 마약”(71)에 손을 댄다. 반쪽짜리 남편이 죽은 다음 야샤를 챙기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그녀[야샤]는 고아였고, 소냐는 엄마였다.”(78) 그렇기에 남편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이 떠난 이후 그녀의 삶은 오직 문학만이 희망이다.
「소네치카」는 짧은 분량임에도 고전적인 가족 서사의 충실한 복원으로 읽힌다. 물론 대러시아제국이 소비에트연방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로 바뀐 것이 도드라지긴 한다. 소위 ‘웰 메이드’ 가족 서사의 대가인 톨스토이, 특히 소냐가 탐독한 <전쟁과 평화>의 경우 구성적 주인공은 여성(나타샤 로스토바)이지만 사상적 차원은 제각기 톨스토이의 분신인 남성들이 담당한다. 울리츠카야의 가족 서사는 모든 점에서 명실상부한 ‘여인천하’이다. 한 남자가 여자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자들이 다양한 역할(어머니, 아내, 애인, 딸)을 맡아가며 한 남자를 공유한다. 자유와 욕망의 발칙한 화신인 ‘마녀-딸’ 타냐와 야샤, ‘자기낮춤’을 통해 성성(聖性)을 획득하는 ‘성녀-어머니’ 소냐, 이들 모두 제각기 자기 삶의 주인공이다.
(발레리 부토노프는 왠지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아요, 스포츠맨이라 몸은 탄탄한데 은근히 수도사 같은 이미지, 그리고 방탕 자체가 아니라 방탕의 관념에 탐닉하는 지하인의 이미지.)
메데야와 그 피붙이들의 이야기인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에 이르면 그림이 더 또렷해진다. 이 시노플리 집안에서 제일 부각되는 것은 메데야(불모의 성녀)와 알렉산드라(다산의 마녀) 자매의 성화같은 대조이다. 메데야는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온 남편 사무일이 죽은 직후 그와 알렉산드라가 연인관계였으며 여동생의 딸(니카)이 자기 남편의 아이였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 예정되었던 남편의 저 아이를 여동생의 유쾌하고 가벼운 몸에 넣어주었던 운명”(308)에 대한 원망을 뒤로 하고 ‘멋진 과부’로, 모두의 어머니로 거듭난다. 얽히고설키는 ‘아이들’의 이야기 중 니카와 그녀의 조카 마샤 사이를 오가며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음탕의 권태에 탐닉하는 “강철 같은 몸에다 꽁지머리를 길러서 사제 같은”(274) 발레리 부토노프가 소설적 흥미를 더한다. 그의 연인이자 저명한 학자(알리크)의 아내인 마샤는 심각한 조울증 끝에 몇 편의 시를 남기고 자살한다.
(이참에 <메데이아>를 다시 읽었는데, 의외로(??) 가정드라마 - 미국 현대 희곡에서 자주 보는 - 같은 데가 있어서 놀랐어요.)
메데야-알렉산드라가 이 파란만장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말하자면 그들이 “아이를 잘 낳는 암컷”(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이기 때문이다. 이 순혈 그리스인 자매는 공히 성녀-마녀로서 인간의 근원이자 서사의 근원으로 거듭난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가 절묘하게 포착한 바, 고뇌와 번민 끝에 두 아들을 죽이고 그로써 (그들이 크레온 집안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철저히 욕망에 충실했던 자신을 단죄함과 동시에 아버지-수컷에게 최고의 복수를 선사한 신화 속 메데이아가 묘한 음화로 되살아난다.
여성 중심의 가족 서사는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더 극적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보다 더 질기게 살아남은 아흔 살의 무르, 어머니의 추한 음욕을 견뎌내는 예순 살의 안나(‘성녀’), 마흔 줄에 이른 안나의 딸 카챠, 끝으로 카챠의 아이들 등 총 4대가 만들어내는 풍속도는 「스페이드 여왕」보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현대판 미니어처에 가깝다.
울리츠카야는 붕괴와 해체의 시대에 통합에 대해 쓴 작가이다. 핏줄의 그물망을 축조함으로써 서사의 원형을 복원하고 ‘하늘-우라노스’(아버지/아들)보다 앞서는 ‘대지-가이아’(어머니)를 소설화하려는 시도는 우리말 번역에서도 잘 표현된 문체적 독특성과 은근한 지성주의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그녀는 <김약국의 딸들>을 언급했는데, <토지>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마땅히 이 경이로운 대작 앞에 경의를 표했으리라 생각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소설의 다음 장(章), 다음 부(部)는 쓰일 수 없음을, 사람은 사람과 엮일 때 비로소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이 <토지>이다. 새로운 문학은 일견 그것이 아무리 새로워보일지라도 어쨌거나 핏줄의 산물이고, 가족 서사는 여전히 모든 소설가의 로망이다. 러시아문학을 흠모하는 우리 독자에게 울리츠카야의 소설이 많은 호응을 얻기를, 무엇보다도, 다양한 문화 체험을 통해 우리 문학의 가계도에 더 많은 <토지>가 생겨나길 바란다.
-- <창비> 2013년 봄호.(편집 전 파일.)
-- 분량 때문에 많이 못 썼는데, <토지> 얘기를 좀 더 하고 싶었답니다. 팔은 당연히 안으로 굽죠! ^^ 남의 나라 작가가 아무리 잘 쓴들, 우리 것이 좋죠 ㅎㅎ
대학 때 읽은 굵직한 대하소설(뭐, 못 읽은 것도 많지만 -_-;;) 중 제일 좋아했던 작품이 <토지>인데요,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합니다! 서희와 길상이, 상현이와 봉순이의 아들딸들 얘기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은데... 대학원 시절 학회 때문에 원주 갔다가 먼 발치에서 본 기억도 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