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낭만주의자가 쓴 성장소설의 경전:
헤르만 헤세(1877-1962), <데미안>(1919)
헤르만 헤세의 소설들, 특히 <데미안>은 많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청춘의 책’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토록 ‘젊은’ 소설을 쓸 때 작가가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겼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삼스럽다. 실제로 이 얄따란 소설의 기저에는 독일 문학 특유의 교양소설(성장소설)과 관념소설의 전통, 아직 환멸과 분열을 모르는 몽상적이고 이상적인 낭만주의, 그리고 관록이 쌓인 작가의 문학적 성찰이 깔려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싱클레어는 일종의 서문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9)이라고 말한다. 과연 시적인 소제목이 붙은 여덟 개의 장(章)은 ‘나’의 자아 찾기와 자아 완성의 과정을 다루는데, 그 출발점은 ‘두 세계’, 정확히 그것에 대한 인식이다. 사랑과 행복이 가득 한 가족, 모범과 규율에 지배되는 학교로 대변되는 밝은 세계와 나란히, 혹은 바로 그 세계 안에 어두운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난 (중략) 너처럼 부자 아버지가 없단 말이야.”(20)라는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싱클레어를 괴롭히는 프란츠 크로머는 후자의 상징이다.
한편,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유복한 미망인의 아들 막스 데미안은 지덕체의 구현 같다. 또래들보다 지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우월한 그의 ‘가르침’을 통해 싱클레어는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된다. 지금껏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아온 ‘일종의 아벨’이었던 그가 ‘카인의 표적(표식)’, 말하자면 ‘카인의 후예’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처형당한 두 도둑 중 무덤을 코앞에 두고서 회개한 “징징거리는 개종자”(82)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도둑이야말로 진짜 사나이라는 데미안의 얘기에도 감화된다. 말뿐만이 아니다. “그의 주위를 둘러싼 이 고요한 공허, 이 정기(精氣)와 별들의 공간, 이 고독한 죽음!”(89) 싱클레어가 포착한 데미안은 ‘두 세계’의 모순을 초월한 아파테이아의 화신이자 동양적 해탈의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이다.
몇몇 친구와의 만남, ‘베아트리체’를 향한 관념적인 사랑, 오르간 연주자(피스토리우스)와의 영적인 교류 등 싱클레어의 성장과 구도(求道)는 계속된다. 그가 그린 거대한 노란색 매의 그림, 그에 대한 데미안의 답장이 유명하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123)
압락사스(Abraxas: 아프락사스, 아브락사스)는 기독교의 한 분파 혹은 한 원류인 영지주의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스티븐 횔러, <이것이 영지주의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전통이 강한 서구 지성사에 이토록 신비적이고 비의적인 전통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이교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독특한 신은 빛과 어둠, 신과 악마, 선과 악은 물론 남과 여, 인간과 동물 등 서로 모순되는 ‘두 세계’를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구현해낸다. 다시 싱클레어 앞에 나타난 데미안, 그리고 장신에 거의 남자 같은 여자의 모습을 한 그의 어머니(에바 부인)는 압락사스의 현현이기도 하다. 그들이 다양한 구도자들과 함께 하는 모임은 밀교적인 카발라를 연상시킨다.
(젊은 헤세.)
이런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데미안과 싱클레어 모두 참전한다.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은 조국과 명예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운명이었다.”(217) 이 전쟁에서 싱클레어가 비로소 진정한 자아를 찾는다는 식의 결말에 불편함을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백년 가까이 성장소설과 구도소설의 경전으로 숭상되어온 이유는 무엇인가.
토마스 만은 <데미안>을 독일 민족과 독일 문학의 운명 속에서 이해하면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연장선상에 놓았는데, 그 와중에 이 동년배 작가의 초상화도 그려주었다. “나는 (중략) 그의 명랑하고 사려 깊은, 선량하면서도 악동 같은 특성을, 유감스럽게도 병든 눈의 깊고도 아름다운 눈길을 사랑한다.”(토마스 만, <데미안> 영문판 서문.) 이런 이미지는 1964년 이 소설을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한 전혜린의 글에서도 엿보인다. 헤세가 직접 그린 수채화를 두고서 그녀는 ‘흰 구름’은 “헤세의 생활이나 사랑의 방랑의 상징”이고 ‘나무’는 “구도자 헤세”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썼다.(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체의 아포리즘(싱클레어는 니체를 탐독한다)과 은은한 수채화 위에 쓰인 서정시의 종합에 동양적 종교철학까지 가미한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는 어쨌거나, ‘질풍노도’의 한가운데서 제각기 ‘불안과 떨림’의 병을 앓으며 ‘데미안-압락사스’를 갈구하던 우리 청춘의 기록이기도 하다.
-- <책&>
(헤세가 그린 수채화.)
-- 헤세 없이 우리의 성장이 가능했을까, 라는 물음. 결코 과장이 아닐 법한데요, 오랜만에 <데미안>을 읽으면서 그 관념성과 구도성에 깜.놀.하고 '아프락사스'의 낯섦이 이제는 덜해진 것 같아 흐뭇(?)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늙었다는 소리겠군요. 헤세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한 것은 <지와 사랑>, 즉 <골드문트와 나르치스>였습니다. 확실히, 비교-대조(대구)를 좋아하나 봅니다 ㅎ ㅎ 한편, 그의 최고작이라 불리는 <유리알 유희>는 대학 기숙사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요..-_-;; <황야의 이리>는 여전히 못 읽고 있네요..ㅠ.ㅠ
-- 카인이니 아벨이니, 예수니 그 옆의 도둑이니 하는 얘기를 읽으며 떠올린 건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마땅한 이미지가 없네요 ㅠ.ㅠ -- 내가 읽은 판본의 표지는 샤갈의 그림이었는데요),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