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죄와 벌>: 라스콜니코프의 몽상과 환멸 -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1860년대 후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초의 페테르부르크. 저녁 7시가 지난 시각, 한 청년이 도끼로 전당포 노파를 죽인다. 거의 그 직후에 귀가한 노파의 이복여동생 리자베타마저 죽인다. 그제야 청년은 자신이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문을 잠가 놓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가 걸쇠를 걸기가 무섭게 노파의 지인 두 명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들은 집안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나름의 대책을 강구한다. 그러다 그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아주 짧은 틈에 청년은 노파의 아파트를 빠져나간다. 도중에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칠 뻔하지만, 마침 열려 있던 텅 빈 아파트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가(그때 훔친 금품 하나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나중에 칠장이 니콜라이가 줍게 된다) 적시에 밖으로 나온다. 그러고는 하숙방으로 돌아가 거의 기절하다시피 쓰러진다.
이것이 <죄와 벌>의 1부의 줄거리이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독자는 문제의 청년, 즉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니코프가 대학에 다녔으나 경제적인 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을 뿐더러 하숙비가 밀려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3년간 떨어져 있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조만간 페테르부르크에 올 것이며 그에 앞서 여동생의 약혼자인 루쥔이 그를 방문하리라는 것 등을 알게 된다. 노파의 전당포를 방문한 직후 우연히 허름한 술집에 들렀다가 만난 마르멜라도프와 그의 가족(특히 ‘황색 감찰’을 갖고 사는 소냐)도 흥미를 자극한다. 어떻든 소설이 막 시작된 시점에서 핵심적인 사건, 즉 누가 누구를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가 모조리 알려졌다. 따라서 소설적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여느 범죄소설과는 다소 다르게 범행의 동기(‘왜’)와 그 귀추이다. 실제로 총 6부와 에필로그로 구성된 이 소설의 나머지 부분은 관처럼 비좁고 갑갑한 하숙방(지하!)에 스스로를 감금하고 자기만의 ‘몽상’에 탐닉하다가 기어코 거리(지상!)로 나와 ‘그 일’을 감행하고 그로써 선악의 피안을 넘어선(러시아어에서 ‘넘어서다’라는 동사는 ‘범죄’라는 명사와 어근이 같다.) 한 청춘이 겪는 ‘환멸과 좌절’의 기록이다. 도무지 왜 죽였는가? 물론 어떤 근거나 목적이 있으면 사람을 죽일 수 있거나 죽여도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작가가 가장 경계한, 정녕 죄스러운 것이라는 전제 하에 라스콜니코프의 ‘죄와 벌’을 둘러싼 일련의 정황을 짚어보자.
우선 라스콜니코프의 사회적 입지가 주목을 요한다. 그는 단기적으론 학업을 위해, 장기적으론 입신출세를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온 지방 출신의 명문대 학생, 더군다나 법학도이다. 그의 동선은 중심(대도시의 번화가, 상류층-귀족)과 주변(대도시의 빈민굴, 하류층-민중)을 아우를 법하지만 대체로 후자에 더 집중된다. 어떤 수사를 갖다 붙이든, 또 아무리 호기를 부려 봐도 가난에 짓눌려 ‘주눅’이 든 것도 사실이다. 덧붙여 그가 가장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가족의 희망임을 상기하자. 즉, 그의 ‘몽상’에는 앞으로의 성공을 위한 토대를 마련함과 동시에 가족의 희생에 보답하고 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장자 콤플렉스가 깔려 있다. 계급의식(라스콜니코프는 ‘잡계급’에 속한다)도 제법 엿보인다. 그렇다면 라스콜니코프의 범행은 생계형 범죄인가.
(러시아 티브이 시리즈 <죄와 벌>.)
스물세 살의 청년이(더군다나 그는 대학생씩이나 된다!) 육십 대의 전당포 노파와 삼십대 중반의 지적 장애 여성을 살해하고 금품을 빼앗은 흉악 범죄에 이른바 메시아 콤플렉스가 개입돼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그의 첫 번째 꿈이 여러 모로 상징적이다. 어린 로쟈는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의 추도 미사에 다녀오는 길에 술 취한 남자들이 허약한 암말을 채찍으로 휘갈기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연민에 사로잡힌다. 암말(약자)을 구원하려는 소년 로쟈와 ‘그 일’을 감행하려는 청년 로지온 사이에 묘한 유비 관계가 형성된다. 한데 전자는 간절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말을 죽음에서 구하지 못하고(결과만 놓고 보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로쟈의 아버지와 비슷해진다) 후자는 구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살인을 정당화하려 한다(결국 폭력을 즐기는 술 취한 남자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이런 모순을 명민한 라스콜니코프가 몰랐을까. 말[馬] 꿈을 꾼 직후, 즉 범행 전날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를 연상시키는 기도를 읊조린다. ‘주여! (…) 저에게 저의 길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저 빌어먹을… 저의 몽상을 단념하겠습니다!’(1부, ?쪽) 그러나 단념은커녕 이튿날 일종의 환시(사막의 오아시스)를 보자마자 곧장 방을 뛰쳐나가 ‘몽상’을 실행에 옮긴다.
(60년대(?) 영화 <죄와 벌>의 라스-프. 대학생은 고사하고 지도교수라고 해도 믿을 노안..ㅠ.ㅠ)
라스콜니코프에게 가장 어려운, 더 정확히, 가장 하기 싫은 일은 자기기만을 인정하는 것이었으리라. 핍박받는 민중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능력과 자격을 갖춘 메시아가 되는 것, 혹은 그 가능성을 점쳐보는 것이 문제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일’은 오만한 자기중심주의와 자폐적인 선민의식의 산물이었다는 것. 소냐를 앞에 두고 그는 광적인 어조로 고백한다. “나는 그냥 죽였어. 나 자신을 위해, 나 하나만을 위해 죽인 거야. (…) 나는 그때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이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그것도 어서 빨리 알아야만 했지. 즉, 내가 넘어설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를!”(5부, ?쪽.) 3부에서 얘기되는 라스콜니코프의 논문을 참조한다면 자기와 비슷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재료’)인가, 아니면 ‘새로운 말’을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장애물을 발견하면 과감하게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비범한 사람’인가. 간단히, 나폴레옹인가, 그냥 이[蝨]인가.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과연 “나폴레옹이 ‘노파’의 침대 밑으로 기어”(3부, ?쪽) 들겠는가. 이렇게 ‘미학’에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를 조롱조로 “미학적 이[蝨]”(3부, ?쪽)라고 부르기에 이른다. 하지만 미학만이 문제인가.
(BBC판 <죄와 벌>. 도..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라 희화로 여겨질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음..-_-;;)
라스콜니코프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절대 자신의 범죄를 뉘우치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시종일관 판단 착오로 인해 주제넘게 (자기에게는 있지도 않은!) ‘넘어섬’의 권리를 행사하려 들었다는 사실이다. 범행 이후에 꾸는 꿈에서 조롱당하는 것도 일차적으론 바로 이 오류이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도끼를 내리치지만 노파는 죽지도 않을뿐더러 키득키득 웃고 있으며 심지어 그 모습을 감추려고 몸을 최대한 수그린다. 그 주변으로 구경꾼들까지 몰려들어 수군대며 그를 비웃는다. 범행이 완료된 순간부터 그를 괴롭힌 ‘미학적 수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여기서 미학적 수치는 윤리적 수치와 하나가 된다. 리자베타가 그 절절한 몸짓과 표정을 통해 상처 받을 가능성을 지닌 타자의 얼굴(레비나스)로 나타났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혹은 그럴 수 없었다!). 비웃음으로 무장한 불멸의 노파와 타자들은 그런 자신에 대한 단죄로 읽히기도 한다. 스스로를 나폴레옹으로 내세우며 장애물을 당당히 처리한 자, 그렇게 “사람을 죽이고도 (…) 창백한 천사처럼 거리를 활보”(6부, ?쪽)한 자에게 내려진 가장 참담한 선고는 ‘너는 나쁜 놈이야!’가 아니라 ‘너는 웃긴 놈이야!’가 아니겠는가. 백야의 미망에서 깨어난 라스콜니코프를 기다리는 것은 더 참담한 희화, 즉 타자와의 대면이다. 애초 1인칭 소설로 구상되어 일정 부분 그렇게 쓰였던 작품이 현재와 같은 3인칭 소설로 바뀐 이유 중 하나도 주인공의 바깥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계속...)
- 민음사판 <죄와 벌> 역자 해설.
-- <죄와 벌> 수업을 하다보니 이 소설을 내 맘대로(요즘은 더 그런 것 같은데) 읽으면서 열에 들떠 있던 십대 시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렇게 쓰고 보니, 차라리 이런 떠올림을 위해 이 소설을 또다시 읽는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러나저러나 마흔을 코앞에 둔 내가 한 시절 '구덩이 오막살이' 구석에서 끼고 살았던 <죄와벌>을 다시 펴보는 심사는, 뭐, 제법, 야릇하다. 정확히, 그 때 그 책은 아닌데, 아무튼 그 책은 빨간 불꽃이 이글거리는 촌스럽지만, 그 당시로선 무척 강렬하게 여겨졌던 <글방문고>판, 글자포인트가 작아서 정말이지 깨알 같은 문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던 <죄와 벌>이었다. 한데 그 책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사실을 알고서 무척 쪽팔렸던(-_-;;) 기억이 있다. 아니, 그렇게 소중한(-그렇다고 떠벌린) 책을 잃어버리다니!
아무튼 역자는 이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