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조지 오웰(1903-1950), <1984>(1949)
1984년 4월 4일 현재,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등 세 개의 거대 국가로 재편돼 있다. 소설의 배경인 오세아니아의 런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처럼 모든 것이 B.B., 즉 빅 브라더의 통제 하에 있다. 텔레스크린, 증오 주간, 영사(영국 사회주의), 승리맨션, 승리담배, 신어…. 극히 단순화된 미래 사회를 움직이는 원칙은 당의 슬로건(“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 암시하듯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의 부정, 이른바 ‘이중사고’(‘현실 제어’를 의미하기도 한다)이다. 진리부의 일원으로서 역사의 재편-날조에 종사하고 있는 윈스턴 스미스는 대략 7년쯤 전부터 당과 빅 브라더에 반감을 품어왔는데, 그 표현이 일기 쓰기이다. 2부에서는 연애를 통해 저항한다. 줄리아는 당의 부패와 타락의 상징처럼 제시되고 그녀와의 육체적 관계는 “일종의 전투”, “사랑의 행위이기 전에 당에 일격을 가하는 정치적 행동”(179)이다. 그들은 함께 ‘형제단’에 가입함으로써 체제 전복을 꾀하지만 그들에게 밀회 장소를 제공해 주었던 늙은 상점주인 채링턴, 정확히, 그렇게 위장해 있던 ‘사상경찰’에게 체포된다. 3부는 “어둠이 없는 곳”(321), 즉 애정부에 갇힌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의 고문과 세뇌 끝에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의 <1984>는 여러 모로 정치풍자적인 우화에 가깝다. 검은 콧수염을 기른 마흔 댓 살쯤의 잘 생긴 남자(빅 브라더)는 스탈린을, “인민의 적” 골드스타인은 외모(가느다란 염소수염과 어딘가 지적이면서도 비열해 보이는 얼굴), 유대인이라는 점과 일련의 전기적 사실에 있어 트로츠키를 연상시킨다.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두 번에 걸친 긴 대화(심문), 골드스타인의 책(<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에서 인용되는 문장은 소설이 아니라 선동적이고 교시적인 팸플릿에서 가져온 듯하다. 실제로 문학과 정치의 상관성은 <1984>, 나아가 조지 오웰의 문학을 받치고 있는 축이기도 하다.
인도 주재 영국 공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버마(미얀마)의 경찰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형태”에 대해 분노하면서 제국의 식민지 경찰 ‘에릭 아서 블레어’는 작가 ‘조지 오웰’로 다시 태어난다. 그가 1930년대에 쓴 책들(<런던과 파리의 따라지 인생>, <위건 부두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등)은 대도시의 슬럼가, 탄광 지대, 전쟁터 등 ‘민중’ 속으로, 또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충실히 기록하고 보도하려는 소명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전히 모더니즘의 영향력이 막강한 때였음에도 그는 전통적 리얼리즘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고수하며 르포르타주(다큐멘터리)와 순수 문학의 경계를 오가는 소설을 썼다. 기록문학의 대가가 <동물농장>, <1984>와 같은 알레고리로 옮아간 것은 당연해 보인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나이 다섯 아니면 여섯 살 때부터, 나는 내가 나중 커서 작가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나는 왜 쓰는가」)로 시작하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그가 작가가 되려는 네 가지 동기 중 가장 강조하는 것도 “정치적 목적”이다. 여기서 ‘정치적’이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을 말한다. 고로 “어떤 책도 정치적 편견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지 않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견해 자체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이다.”
<1984>를 쓰기 전 조지 오웰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꼽히는 자먀친의 <우리들>(1923)에 대한 짧은 평(「자유와 행복」)을 남겼다. 그가 지적하듯 이 소설은 스탈린 체제가 시작되기 전에 쓰인 소설이다. 형식주의 이론의 대두와 맞물려 다양한 문체와 형식 실험이 행해지는 가운데 자먀친은 SF소설에서 나올 법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도스토예프스키(특히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던진 화두를 소설화한다. 건물은 유리벽으로 돼 있고 인간은 알파벳과 숫자로 환원되고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는 “2x2=4”, 즉 수학과 이성의 논리에 따라 엄밀하게 측정, 계산된다. 단일제국의 우주선 축조에 참여하는 엔지니어 D-503의 일기(수기)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반역을 시도했던 주인공이 일종의 로보토미 수술을 받고서 제국의 충실한 종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주의의 악몽 속에서 철저히 마모돼 가는 개인의 실존을 포착한 걸작의 닫힌 구조를 <1984>도 반복한다.
1부, 윈스턴 스미스의 일기에는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31),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이것이 자유이다.”(114)와 같은 문장이 들어 있다. 3부, 철저한 재교육이 끝난 뒤 그는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쓴다. 소위 쥐 고문을 받은 뒤에는 빅 브라더를 향한 증오도 사라진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중략) 투쟁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417) 묵시록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결말이다. 여기에 덧붙인 “부록: 신어의 원리”는 인간의 의식 구조의 형성과 변화에 언어-문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새삼스레 환기시킨다.
-- <책앤>
-- 바깥의 기운과는 별개로, 아니면, 그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여하튼 무척 우울하다, 라고 쓰고 보니, 딱히 그렇게 우울할 것도 없네요, 쩝. '우울'에 관한 문장을 쓰는 순간, 우울이 졸지에 희화되는 느낌..-_-;; 뭐, 여하튼. 오랜만에 다시 읽은 <1984>, 정치 알레고리의 느낌이 너무 강해서 놀랐습니다. 국내 독자에게 인지도는 낮지만 자먀틴(-찐)의 <우리(들)>가 문학적 관점에서는 훨씬 더 뛰어난 소설인 것 같은데, 취향의 문제일까요....? ^^;; 남들 다 재미있어 하는 (<1984>에서 시작된) 하루키의 소설은 또 왜 그리 지루할까요...ㅠ.ㅠ 아무래도 <상실의 시대>가 제일 재미있었던 듯...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