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탄생 -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 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걸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턱쿠 아기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11)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소년이 예술가로서의 소임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 성장 소설이자 교양 소설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용서를 빌지 않으면 독수리들이 와서 눈알을 빼버릴 거라는 단티(아줌마)의 말이 오랫동안 아이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친다. 학창 시절 스티븐이 겪는 일도 비교적 전형적이다. 가령 아놀 신부의 라틴어 시간, 학감인 돌란 신부가 나타나 게으른 학생플래밍을 체벌한 다음 스티븐을 주목한다. 왜 쓰기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안경을 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지만 게으름뱅이에 속임수나 쓰는 아이로 매도당한다. 자초지종을 설명할 기회도 없이 그의 손바닥에 수치와 고통과 공포의 회초리가 갈겨진다. 정말로 안경을 깼고 새 안경을 보내달라고 집에 편지를 썼고 그것이 도착할 때까지 쓰기를 면제 받았는데 회초리질이라니, 얼마나 부당하고도 잔인한가! 스티븐은 교장실을 찾아가 목이 막히고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가운데 조곤조곤, 또박또박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이 대범하고 영웅적인 행위로 스티븐의 성장의 한 고리가 마무리된다.

 

 

 

 

 

 

 

 

 

 

 

 

 

 

전학한 스티븐은 한 친구의 말마따나 전형적인 모범 청년”, “담배도 안 피우고, 바자에도 안 가고, 계집애들과 시시덕거리지도 않고, 제기랄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119)는 학생이다. 다른 학우들과는 달리 테니슨보다는 반항과 환멸의 상징인 바이런을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영어 선생은 그의 에세이에서 이단적인 생각”(123)을 엿본다. 열여섯의 반항은 사창가로 이어지고 사악한 자기방기(自己放棄)의 부르짖음”(156)과 함께 순수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다. 통렬한 죄책감과 진정어린 참회로 성장의 새로운 고리가 열린다. 이런 그에게 교장은 성직자가 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스티븐도 예수회 소속 신부 스티븐 디덜러스”(249)의 모습을 그려보지만 더블린 만(),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진짜 소임은 종교가 아니라 예술, 즉 문학임을 깨닫는다. “그의 영혼은 소년 시절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 시절의 수의를 떨쳐버렸다. () 이제는 영혼의 자유와 힘을 밑천으로 하나의 살아 있는 것, 아름답고 신비한 불멸의 새 비상체(飛翔體)를 오만하게 창조해 보리라.”(262)

 

 

 

 

 

 

 

 

 

 

 

 

 

 

 

 

더쿠 아기가 예술가로 태어나는 이 순간은 신의 존재와 그 뜻이 구체화되는 종교적 황홀경을, 거룩한 현현(epiphany)을 방불케 한다. 대학생이 된 스티븐이 한 친구 앞에서 하는 말은 젊은 예술가의 테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해 주마.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어떤 삶이나 예술 양식을 빌려 내 자신을 가능한 한 자유로이,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무기인 침묵, 유배(流配) 및 간계를 이용하도록 하겠어.”(379)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스티븐의 일기 역시 그 옛날의 아버지여, 그 옛날의 장인(匠人)이여,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소서.”라는 기도로 끝난다. 물론 그가 부르는 저 신은 디덜러스라는 이름 속에 포함된 다이달로스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고독이나 소외도, 추방이나 망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한 주인공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성장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기보다는 가파른 계단처럼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성장의 각 단계를 반영하는 문체는 후반부로 갈수록 현란한 기교를 뽐내며 지적이고 난해한 담론을 선보인다. 여러 모로 모더니즘과 의식의 흐름의 시작을 알리는 소설답다. 조이스가 그 무렵 비교적 전통적인세태 소설(<더블린 사람들>)을 같이 쓰고 있었음을 상기한다면, 이 자전 소설의 혁신성이 더 도드라진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정확히, 그 전신인 <스티븐 히어로>)과 유사한 유일한작품으로 조이스는 러시아의 낭만주의 시인 레르몬토프가 쓴 자전소설(<우리 시대의 영웅>)을 꼽았다. 작품의 길이와 주인공의 성향에는 차이가 있으나 목적과 제목”, “신랄한 논술은 비슷하다는(리처드 엘먼, <제임스 조이스>) 것이다. 과연 개별적 시공간을 떠나 영웅-주인공을 꿈꾸는 젊은 예술가의 오만한 반항에는 보편적인 유사성이 있다.

 

 

(조이스 관련 책이면 어디나 나오는 사진. 노라와 함께 혼인신고 하러 가는 길...^^;;)

 

 

조이스는 이십대 때 조국 아일랜드를 떠났고 이후 두 번의 방문을 빼면 평생 유럽을 떠돌며 살았다. “더블린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면 세계 모든 도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리처드 엘먼) 조국을 향한 그의 감정은 복잡다단했지 싶다. 유럽의 변방, 척박한 섬나라 출신의 작가가 비단 영국문학사가 아니라 세계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기까지 부당하고 잔인한 회초리질이 얼마나 많았을까. 어린 스티븐이 지리책의 여백에 써놓았듯, 아일랜드는 그의 삶과 문학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으리라. “스티븐 디덜러스 / 기초반 / () / 아일랜드 / 유럽 / 세계 / 우주”(25)

 

-- 책앤

 

-- 머릿속에 재미없는 악몽(ㅠ.ㅠ)처럼 남아 있는 조이스! <율리시스>는 여전히 엄두를 못 내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다시 읽어봤는데, 그대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율리시스>에 대한 미련은 깔끔히 접는 걸로... ㅋ 어릴 때 영산문 강독(?) 시간에 원문 강독한 <더블린 사람들>은 그나마 읽을 만하다고 쳐도, 조이스의 이른바 '에피파니'가 나에게는 별다른 에피파니를 주지 않더라고요...-_-;; 흠, 그럼에도 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건 어째 뇌리에 남는군요.(그리고 안질환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실도.) 

 

역시나 아일랜드 출신인 이 양반이 조이스 밑에서 비서 노릇을 했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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