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소송>에 관한 14매짜리 원고를 보낸 다음, 바쁜(혹은 그런 척 하는, 그런데 척, 하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기도 하는) 일상의 와중에 주저리주저리 잡담을 써본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

 

이렇게 시작되는 당혹스러운 소설. 한때는 <심판>이었다. <실종자>(<아메리카>), <성>과 함께 '고독 삼부작'이라 불린다.(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이건 너무나 고독한(!) 소설이다. 뭐랄까. 이걸 쓰는 작가가 얼마나 고독했을지, 그 고독이 거듭, 이 소설을 읽는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독한 원의 고독한 중심"(!) 고독뿐이냐.

 

이런 구토도 있다. 이 사법기관의 내부도 그 외부만큼이나 역겨운 모습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서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추측은 옳은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파고들고 싶지 않았고,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이 답답했다.”(92) 그리하여, 두 번째로 법정을 찾았던 K는 힘겹게 건물을 빠져나가며 배멀미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마어마한 구토(!)이다. 복도가 좌우로 흔들리고, 파도소리가 들리고 물이 덮쳐올 것 같다. 그러다 마침내 벽이 갈라지면서 바람이 들어온다. 드디어 탈출! 흡사 <큐브>의 한 장면 같다.

 

과연 탈출이냐. 힘겨운 탈출 끝에 마주한 바깥 세계(일상!)야말로 더 심한 욕지기를 불러일으킨다면...? 적어도, 이 경이로운 소설의 결말, 마지막 부분은 정녕 '개 같은 실존'을 그야말로 카프카식으로(달리 표현할 수가 없고나!) 보여준다.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판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아직 이르지 못한 상급 법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두 손을 쳐들고 손가락을 쫙 펼쳤다. / 그러나 K의 목에 한 남자의 양손이 놓이더니 동시에 다른 남자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고 두 번 돌렸다. K는 흐려져가는 눈으로 두 남자가 바로 자기 눈앞에서 서로 뺨을 맞대고서 최종 판결을 지켜보는 것을 보았다. ”개 같군!“ 그가 말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치욕은 살아남을 것 같았다.”(287)

 

진정한 희극은, 칼날이 목전에 왔는데도 '희망'이라는 괴물의 꼬리를 붙잡아보려는(그것도 너무 무성의하고 부실하게?!!) K의 태도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존재와 존재함 자체가 '죄'인 것을. 그렇기에 더더욱, 대성당, 법원 소속 신부 앞에서 무죄를 역설하는 K의 절규가 안타깝게 들린다. 안타까우면서도, 다시금, 또 웃긴다!  쿤데라의 표현을 빌자면, "농담의 검은 밑바닥"이 보일 것 같단 말이지.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264)

 

이 지점에서 정녕 웃어야 하는데, 쉽지 않고나.

<소송>의 첫 장을 낭독했을 때 다들 즐거워했단다. 실제로 <체포>는 좀 많이 웃긴다. <첫 심리>, <태형리>도 그렇고, 나는 그놈의 숙부(카를-알베르트, 이름도 왔다가 갔다 한다)가 왜 그리 웃기냐. 그의 호들갑은, 말하자면, 무척 조건화돼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조건화된 웃음을 웃어줘야 할 의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좀 웃기기도 하다. 웃음에도 의무가 있다니, 원. 횡설수설.

 

강조하건대, 이건 잡설이라... 언젠가 다시금 <성> 안으로 깊이 침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흠, 그 역시 새로운 패배(!)로 이어질 터. 이런 정황을 꼬집는 같은 신부의 말. 도무지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성담'인 <법 앞에서>('기만'!)에 붙어 나오는 말이다.

 

글은 불변하는 것이고, 해석들은 종종 글에 대한 절망의 표현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심지어 문지기야말로 기만을 당한 자라는 의견까지 있어요.”(273)

 

 

절망! 절망하기에, 또 쓴다. 하필, 지금 내가 바쁜 건, 아니, 바쁜 척 하는 건, 나보코프의 <절망>에 대해 쓰고 있기 때문이니, 이 역시 운율이 맞는다. 운율은 맞는데, 글의 아귀는 왜 이리 맞냐. 영원히 짜이지 못하는 엉성한 플롯,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음모처럼. 에라잇.  

 

보지 못해 유감인데, 오손 웰스가 만든 <소송>의 한 장면. 앤서니 퍼킨스가 K역을 맡았다. 그럼, 오손 웰스는? 변호사 홀트 박사 역이라 한다. 보아하니, <첫 심리> 장면인 듯. 

 

 

 나보코프의 <처형장으로의 초대>와 비슷. 나보코프의 작품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는 혐의(?)가 제법 설득력 있다, 나보코프는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뭐, 여하튼, 나의 취향은, 아무래도 타고난 천재에 가까운 나보코프 보다야, 소설 쓰느라 죽도록 고생하고 그 핑계 대고서 장가도 못 간(혹은 안 간) 카프카 쪽이다. 실은 <소송>도 펠리체 바우어와 파혼한 사건(아닌 사건-_-;;)이 제법 자극이 됐던 듯하다. 겸사겸사, 펠리체 바우어의 남성스러운(?) 외모란. 카프카의 취향의 독특함을 증명해준다 ㅎㅎ

 

카프카가 도...키를 좋아한 것도 제법 유명하다. 특히 격찬한 건, 당근, <카라마조프.> 이거 번역한 건 (<죄와 벌> 번역과 더불어) 내가 삼십대에 한 일 중 제일 잘 한 일이다, 진짜로.

 

 

 

 

 

 

 

 

 

 

 

 

 

 

 

 

 

둘의 소설 세계가 너무 다르니(혹은 달라 보이니), 처음엔 놀랄 법도 하다. 도..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카프카는 어쨌거나 '학문적인'(!) 작가다. 그럼에도 좋아한 건 좋아한 건데, 작가마다 다 자기만의 조그만 모퉁이(!)가 있는 듯하다. 그 모퉁이가 그토록 수치스러웠던 것이냐. 왜 원고를 불태우라고 했나. 자기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고골은 눈물을 흘리며(!!) 직접 불태웠는데... 흠. 흠. 흠. 레핀의 그림 속 고골은, 그러나, 은근히 희극적으로 보인단 말이지. 내가 꼬롬한건가..? 아니아니, 진정한 고뇌는 왠지 저럴 것 같단 말씀.

 

 

 

 

아무튼. 어느 날 생각했는데, 카프카는 정녕 불멸(!)의 욕구가 강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심드렁(!)의 포즈(포스, 인가?) 밑에 감춰진 어마어마한 야망의 덩어리. '단식'의 형식 속에 포함된 '포식'의 욕구. 웃음-광대의 내부에 도사린 비극의 무게.

 

주저리주저리.  어느 순간 왕창 어긋난 인생(=시간)의 돌쩌귀가 다시 맞춰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 그럼, 어긋남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자, 이 말씀. 자, 그럼, 다시 <절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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