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체호프는 <귀여운 여인>이라는 단편을 통해 중학교 때 알게
되었지만(<검은 고양이>, <목걸이> 등에 밀려 재미 없게 읽은 기억이 있다!) 극작가 체호프를 알게 된 건 훨씬
이후이다. 대학 시절, 심지어 그 이후, 대학원 시절이라고 해야겠다. 그의 희곡만 다루는 수업(세미나)을 들었는데 그 여운이 참 컸다. 그때
수업을 했던 섬배 겸 은사는 이거 번역하신 양반...^^;;
새로운 번역으로 읽는 [벚나무 동산](아직도 입에는 '벚꽃 동산'이 더 익숙하지만)은
여전히, 더더욱 좋다! 그의 희곡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작품은 누구나 좀 다르지만, 나는 언제나 이 작품을 제일 좋아했다. 수업 하기는
<갈매기>가 편한데도(공연도 많이 하고) 마땅한 이유 없이, 마치 샤를로타가 오이를 씹어먹듯, 가예프가 입안에서 알사탕을 굴리고 당구
관련 얘기를 늘어놓듯, 그렇게 이 작품이 좋다. 그리고 여기서 제일 좋은 인물 역시 예나 지금이나, 87세의 늙은 농노 피르스이다. 1막, 주요
인물들이 (벚나무 동산, 즉 영지가 팔릴 참인데도) 여유 만만하게 떠드는 와중에 간간히 헛소리를 하는 이 영감이다.
가예프:
암... 이건 물건이야... (책상을 만져 보고) 경애하는 책장이여! 어인 백 년이 넘도록 선과 정의의 빛나는 이상을 추구해 온 너의 존재를
축복하노라.(...)
사이.
로파힌:
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오빤 여전하시네요.
가예프:
(약간 당황해하며) 공 오른편 구석으로! 잘러 쳐서 가운데로!
로파힌:
(시계를 보고) 자, 저는 가야겠습니다.
야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에게 약을 준다) 지금 약을 드시는 게 좋겠어요....
피시크:
약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친애하는 부인...(...) (알약을 받아 자기 손바닥 위에 놓고 입김을 불어넣는다. 그러고 나서 입에 집어넣고
크바스와 함께 꿀꺽 삼킨다.) 이렇게!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깜짝 놀라며) 아니, 정신 나갔군요!
피시크:
알약을 몽땅 삼켜버렸습니다.
로파힌:
대단한 목구멍이군.
모두
웃는다.
피르스: 이분이 부활절에 우리 집에 오셔선 오이 절임을 반 통이나
드셨어요....(중얼거린다.)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지?
바랴:
벌써 3년째 저렇게 중얼거려요. 우린 익숙해졌어요.
야샤:
연로하셨으니까. (1막, 346-347)
피르스는 대사가 많지 않지만(저렇게 중얼거리기만 하니 많을 수가 있나!) 많은 장면에
등장한다, 저렇게, 뭐랄까, 기괴한 장식물처럼,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흔적처럼. 그는 벌써 3년째 귀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속절없이 늙어버린 처지이지만 여전히 자신을 “부엉이가 크게 울어대고, 사모바르도
쉴 새 없이 달그락거”릴 만큼 비극적인 “변고”(2막, 376쪽)가 있긴 전 그 좋았던 시절, 귀족 저택의 살림을 관장하던 집사로 여긴다.
“집에서 저를 장가보낼 무렵, 주인마님의 선친께서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어요...”(2막, 370) 농노해방령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이곳에 남은 그였던 만큼 “벚꽃 동산이 팔리면(?) 어디로 갈 거야?”(??)라는 마님의 물음에 “명령하시는 대로...”(??)와
같은 예의 그 시대착오적인 충성을 다짐한다. 항상 단정한 차림(양복 재킷과 흰 조끼, 구두)을 하고 있고 쉰 줄을 넘긴 도련님의 취침 시간과
복장 때문에 애를 태우고 집안의 무도회에 예전과 달리 “장군님들이며 남작님들이며 제독님들”은커녕 “우체국 관리나 역장 나부랭이들”(3막,
395)조차 마지못해 참석한 것에 속상해한다.
잔인한 얘기지만, 늙은 인간만큼 희화하기 좋은 대상이 있을까. 여기서 피르스는 그 최고봉이다. 아마 그래서 작가는 그를, 그
혼자만을 텅 빈 무대에, 마지막 무대에 남겨두는 듯하다. 실상 그는 있으나 마나, '있음'과 '없음'의 찰나적인 교차로에 있는 인물이다. (우리
엄마 말로, 자기는 옛날 같으면 뒷산에 누워 있으나 안방에 누워 있으나 차이가 없는 나이, 라고..-_-;;) “노령인 피르스는 수리가 불가능한 관계로 조상님들께 가는 수밖에 없다”(4막, 412)는 예프호도프의 ‘최종적인 견해’는
물론 적확한 것이다. 흠.
무대가
텅 빈다. 문마다 자물쇠를 채우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마차들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해진다. 정적 속에서, 저 멀리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가 쓸쓸하고 애잔하게 울린다. 발소리가 들린다. 오른쪽 문에서 피르스가 나타난다. 그는 여느 때처럼 양복에 흰 조끼를 받쳐 입고,
구두를 신고 있다. 그는 환자다.
(한 줄 띄고.)
피르스:
(문에 다가가서 손잡이를 만져 본다.) 잠겨 있네. 가버렸어... (소파에 앉는다.) 나를 잊어버리고 갔네... 괜찮아... 여기 앉아 있지
뭐...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는 분명히 털외투가 아니라 보통 외투를 입고 가셨을 텐데... (걱정스럽게 한숨을 쉰다.) 내가 보살펴 드리지
못했으니... 젊은 사람들이란! (뭔가 중얼중얼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인생이 흘러가버렸어,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눕는다.)
눕자... 이젠 기운도 없고,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에이, 이놈아... 등신아!(누운 채 꼼짝하지 않는다.) //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한 줄 띄고.)
(-426) 마치 하늘에서 그러는 것처럼 저 멀리서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렸다가 슬프게 잦아든다. 다시 정적이 찾아온다.
그리고 멀리 동산에서 도끼로 나무를 찍는 소리만 들린다.
/ 막. (4막, 425-6)
언제나 깊은, 기나긴 여운을 남긴 마지막 장면.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가 않아." 이 문장, 많이 좋아했다. 아무튼. 마지막 장면에 대해 번역자-연구자는 (다른 논문에서) 이런 글을 썼는데, 마음에 들어서
옮겨와 본다. 여기서 언급하는 체호프의 첫 희곡은 <플라노토프>이다. 오래 전 대학원 수업을 들을 때 원문으로(!) 고생스레 다 읽은 뼈아픈 기억이 있다.
“빈 무대는 체호프 드라마투르기의 시작이자 끝이다. 체호프는 약관 20세에 남들이 사용한 낡은 드라마투르기의 잔해들을 잔뜩
주워 모아 대작가로 입신하려는 망상을 꿈꾸었고 당연히 실패했다. 6년 동안 반성한 끝에 그는 텅 빈 / 무대 위에서 일인극으로 자신의
드라마투르기를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초인적인 재능과 성실성으로 자신의 드라마투르기를 완성한 체호프는 20여년 동안 빌렸던 무대를
깨끗이 비우고(피르스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작가가 남긴 조형적 농담이다) 자신의 등장인물들과 함께 홀연히 극장을 떠나갔다.”( 박현섭.
체호프 드라마투르기의 현재적 의의. 러시아연구 제14권, 제2호. 115-116)
“모두가 떠나간 뒤의 텅 빈 집은(「벚꽃 동산」) 나비가 날개를 달고 공중으로 날아가면서 남긴 빈 고치를 연상시킨다.
애벌레는 나비로서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아마도 짧은 탈각의 순간에 자신의 빈 고치를 얼핏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보여줄 수 없는 낙원에 대한 음화상(negative image), 찰나에 열렸다 사라진 낙원의 그늘에 다름 아니다.”( 박현섭. 「유토피아 없이
살아가기」. 문예미학. 제7호.
정말 좋은 일이 하나도 없음에도, 오히려 잃어버린 것에 대해 야릇할 만큼 태평스럽고 여유만만한 주인공들의 한심함(?) 속에는 부정하기 힘든 어떤 긍정의 힘이 있다. '아이스러움'. 이 희곡의 모든 인물을 지배하는 어떤 묘한 힘이기도 하다.
최근에 체호프가 좋아 많이 읽는다.(그럴 기회를 많이 만든다.) 옛 번역부터 최신 번역까지 번역도 많다. <펭귄클래식...> 판본은 표지가 너무 좋다. 놀랍게도(!), 추상화가로 유명한 칸딘스키의 것.
그러고 보니 나도 하나 하고(그러니까 안 하고 ㅠ.ㅠ) 있구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