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 새롭다. 어릴 때는 성공과 출세를 꿈꾸던(이 소설 속 개념으론 소위 "신사" 되기) 어린 핍의 관점에서 읽었고, 크게 감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작해야 신사, 라니. 이런 유치한 속물. 야망을 갖는다면, 적어도 라스콜(리)니코프 정도는 되어야. 혹은, 그 야망의 속됨을 보상할 만한 만큼 강렬한 열정을 갖고 있어야. 즉, 쥘리앙 소렐 정도는 되어야. 뭐, 이렇게 생각했을 법하다.

 

 

 

 

 

 

 

 

 

 

 

 

 

 

 

 

핏줄-신분에서 돈-계급으로 넘어가는 19세기, 야망을 가진 청년들이 만들어내는 문학 장르가 곧 소설이다. 자본주의가 빨리 발달한 영국-런던에서 소설-책은 이런 사회적 환경을 십분 활용했을 법하다. 아니, 반대로, 이런 환경이(인쇄술의 발전 포함, 출판-신문 시장의 활성화) 소설 장르를 키웠을 법하다. 디킨스는 그 인생 자체도 그러하거니와 그 문학도 이런 정황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 <위대한 유산>에는 입지전적 인물(+ 출세한 촌놈)의 전형인 그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

 

 

 

 

 

 

 

 

 

 

 

 

 

 

 

참으로 소설의 교과서답게, 이야기는 역시나 교과서답게 흘러간다. 뜻밖의 유산으로 신사-되기의 대열에 합류한 핍이 결국엔 그것의 무상함을 깨닫는다는 식.(지금 1권까지 읽었다, 왜 이리 긴 것이냐, 헉헉.) 어쩌면 역시나 교과서다운 이야기이지만, 핍의 매부 조의 인생이 흥미롭다. 

 

습지의 대장간, 괄괄한 여자의 남편(자기 아이는 없이 아내의 조카를 자식처럼 돌봐준다),  나중에는 반신불구가 된 아내를 돌봐주던, 조카 나이쯤 되는 여자(비디)와 결혼한다. 소설의 초반에 그와 핍의 훈훈한, 아름다운(!) 공생, 연대가 묘사된다. 기골이 장대하고 괄괄한(다른 말을 못 찾겠다) 여자 밑에서 기 죽어 지내는 운명이 그들을 엮어준다. 조실부모한 핍에게, 조는 실상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부모나 다름 없다. 느닷없이 부자가 되어 신사 수업을 받으러 떠나게 된(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방랑 시대의 영국판이다!) 핍은 조의 모습이 슬슬 못마땅하다. 그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 그에 대해 비디가 말한다.  “넌 그가 자존심이 강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니?” / “그는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의 능력에 합당하고 또 실제로 성실하고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자리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데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지도 몰라.”(276) 이런 말을 핍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시간이 흐른 뒤, 이미 런던 생활자가 된 그를 조가 방문한다. 이 장면은 꽤 긴데, 이 소설에서 가장 잘 쓰인 부분이라고 해야할 법하다.(첫 장면, 늪지와 더불어.) 충분히 예상 가능한 장면. 어색한 옷차림에 덧붙여 곤혹스러운 그놈의 모자(!!)가 상징하는바, 어색한 만남이 지속된다. 마지막. “오찬 들러 오실 거죠?”라는 핍의 (사실상 진정성이 없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조는 이렇게 말한다.

 

“핍, 이보게 친구, 인생이란 서로 나뉜 수없이 많은 부분들의 접합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고 어떤 사람은 양철공이고 어떤 사람은 금 세공업자고, 또 어떤 사람은 구리 세공업자이게끔 되어 있지. 사람들 사이에 그런 구분이 생길 수밖에 없고 또 생기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지. 오늘 잘못된 뭔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다 내탓이다. 너와 난 런던에서는 함께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야. (...) 그건 내가 자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저 올바른 자리에 있고 싶어서라고 해야 할 거야. 난 이런 옷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대장간과 우리 집 부엌과 늪지를 벗어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아. (...) 혹시라도 네가 날 다시 만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그땐 대장간에 와서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대장장이인 이 조가 거기서 낡은 모루를 앞에 두고 불에 그슬린 낡은 앞치마를 두른 채 예전부터 해오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도록 하거라. 그러면 넌 나한테서 지금 이런 차림의 반만큼도 흠을 발견하지 못할 거다. 난 끔찍이도/ 우둔한 사람이지만, 오늘 이 일에서는 마침내 어느 정도 올바른 결론을 뽑아 냈다고 생각한다. (...)”(411-12)

 

이런 말을 하는 조에게서 핍은 소박하고도 진실된 어떤 위엄을 본다.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차림도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한데, 갈등의 뭐랄까, 이렇게 온건한 해결은(둘은 나중에 화해하는 셈이다) 이것이 디킨스의 소설(=영국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이 통째로 너무들 점잖다. 과연 gentle, gentleman!

 

러시아 작가치곤 제일 온건한 편인(유럽 물도 많이 먹었고) 투르게네프조차도 이런 식의 세대 갈등, 신분(계급) 갈등을 훨씬 더 복잡한 차원에서 다룬다. 주인공 바자로프(잡계급)와 부모의 관계를 보라. 지난 봄에 쓴 논문에서 몇 자 긁어와 본다.  

 

 

 

 

 

 

 

 

 

 

 

 

 

 

 

부모의 영지에 도착한 순간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도 의학도도 아닌, 적어도 그것이기에 앞서 아버지(어머니)의 아들이다. 이 바자로프는 부모자식간의 애정이라는 생래적 낭만주의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상주의자 귀족을 대하는 니힐리스트 잡계급 청년보다 훨씬 더 야멸차고 위악적이다. ‘밭 갈던 할아버지’ С7: 50), 이어 ‘퇴역 의사’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С7: 110) 대도시로 유학을 갈 만큼 명민했던 바자로프에게 부모의 집은 그가 배반하고 부정한 다음 떠난 세계의 상징이다. 그것은  야심찬 “거인”의 초라한 과거를 적나라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실상 과거로부터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심지어 제자리인) 현재의 옹색함과 비루함을 상기시킨다. 때문에 오랜 이별 끝에 만난 부모의 환대와 애정이야말로 굴레고 자기 집보다 차라리 친구 집이 더 편하다.

 

 

― 안 되겠어! ― 그가 다음날 아르카지에게 말했다, ― 내일 여길 떠나겠어. 지루해. 일을 하고 싶은데 여기서는 안 되거든. 다시 너희 집, 시골로 가겠어. 실험도구들도 전부 거기에 남겨뒀잖아. 너희 집에서는 적어도 틀어박힐(запереться) 수는 있거든. 아니, 여기서는 아버지가 <내 연구실을 네 마음대로 쓰렴 ―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테니>라고 되뇌지만 실은 한 발짝도 떨어지지를 않아. 게다가 아버지를 피해 틀어박히는 것도(от него запираться) 어째 좀 창피하고. 뭐, 어머니도 그렇고. 벽 뒤에서 어머니 한숨 소리가 들리는데 막상 나가면 할 말이 전혀 없어.(С7: 126)  

 

 

실제로 바자로프는 아버지의 서글픈 절규(“Три дня... Это, это, после трех лет, маловато; маловато, Евгений!”(С7: 127)에도 아랑곳 않고 이튿날 곧장 짐을 챙겨 떠난다. 의사임에도 (아들과는 달리!) 신심이 깊은 바실리와 그의 헌신적인 아내 아리나, 이들이 아들 앞에서 취하는 태도는 부정과 배반의 숙명을 타고난 자식을 둔 부모의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버렸어, 우릴 버렸어, ― 그가 웅얼댔다, ― 버렸다고. 우리와 있는 게 지루했던 거야. 이제는 이 손가락처럼 혼자, 혼자야!> 그는 몇 번이나 이렇게 되뇌었고 그때마다 집게손가락 하나만 세운 한쪽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 아리나 블라시예브나가 다가와 희끗희끗한 머리를 남편의 희끗희끗한 머리에 기대며 말했다. <어쩌겠어요, 바샤! 아들이란 원래 출가외인(отрезанный ломоть)인 걸. 그 애는 무슨 매처럼 내키면 날아왔다가 또 내키면 날아가네요. 하지만 나와 당신은 한 구멍에 난 버섯(опенки на дупле)처럼 나란히 앉아서 꼼짝도 못해요. 나만은 영원토록 변함없이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럴 테고.>(С7: 128)

 

 

잠깐 부모의 품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영원히 안착하는 아르카지가 아버지와 함께 전원시의 세계를 이어간다면, 바자로프는 태어난 곳을 영원토록 부정하고 배반하도록, 그리하여 죽을 때, 심지어 죽기 위해 마지막으로 고향집에 돌아가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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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러나 이미 반생이 끝난 시점에서 "나는 신사가 되고 싶어!"라고 외치는 핍보다 "영원히 습지 대장간에 살어리랏다~"라고 말하는 조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건, 뭐, 인지상정 아니겠나.(이 진부함이여!) 그러나, 이 아이는 어떡하나.  

 

 

  지난 금요일 부산 해운대 근처 모백화점 문화센터 강의 끝난 직후, 아이 데리고 바다로 나갔다. 부산에서 아주 오래 살았지만, 해수욕장 다니는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까닭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렇게 드문드문 찾는다. 그것도 그냥 이렇게 보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바다 너머의 세상을 본 셈이지만(과연 그런가...?) 아이는 어쩌나, 바다로 나갈 건가... 살짝 들어올린 발을 내려 놓고 그냥 엄마 옆에 그냥 있어라, 나가 봐야 별 수 없단다(아들의 삼십여년 뒤 미래는 바로 그 아빠의 현재)...-_-;; 이렇게 말하는 나는 너무 비관적인 엄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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