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은 아이가 태어난 지 정확히 3년째 되는 날이다. 그 전날에 지난 7월 25일 걷다가 넘어져 팔꿈치 골절상을 입은 아이가 정확히 6주간 하고 있던 깁스를 풀었다. 딸을 원했던 내가 아들을 낳고 몇 위안으로 삼은 것 중 하나는, 아들-남자는 막 키워도 된다, 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런가. 아직도 걸음걸이에 균형감각이 좀 없는 아이를 지켜보며 늘 마음을 졸인다.
옆집의 큰 아들이 지난 봄인가에 입대했고 얼마 전 첫 휴가를 나왔더라. 뽀얗던 얼굴이 거뭇거뭇해지고 살집도 좀 탄탄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남자면 누구나 군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인데, 시력이 나빠 병역을 면제 받은 불어 선생님은 엄청난 열등감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인생의 모든 불운을 소위 남자 구실 못한 것(군 면제!)에서 찾곤 했다.
그러나 나는 주변의 선후배, 친구들(이제는 대개 다 사오십대인데) 중 군역 면제자에게서 이런 열등감은 거의 못 봤다. 대부분이 우스갯소리대로 (사람이 아들이 아니라) 신의 아들에 가까운 출생에, 더불어 사회 생활에서도 아무런 불이익 없이 승승장구한다. 어지간한 중산층만 해도 군대를 보내긴 보내더라도 어떻게든 다 수를 쓴다. 그럼 누가 군대에 가는가. 답은 뻔하다.
'악의 평범성(진부함)'. 아렌트는 나치 전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평범'한 우리가 범하는 '평범'한 악이 놀라울 따름이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들리는 것을 또한 듣지 않은 것. 이것이 8, 90년대도 아니고 2014년의 일이라는 것이 또한 놀랍다. 가해자(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런 끔찍한 폭력을 연일 목격하면서도 침묵한 다수이다. 이런 식의 말에 대다수는 군대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 이라고 말한다. 그럴 거다. 그것이 더 무섭다. 군대는 원래 다 그래, 라는 것.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크나큰 악의 주체가 된다는 무서운 역설이 또 한 번 상기된다. 이 점에서는, 역사적 틀거리가 다를 뿐, 아이히만의 얘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한 시절 우리를 경악케 한 '고문기술자'가 자신을 극도로 성실하고 유능하고 충직한 공무원으로 생각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 정말 '악마'가 있는 것일까. 사회적으론 '범죄와 환경'이라는 물음. 즉, 환경이 백지 상태의 인간을 범죄자로 만드는가, 아니면 정녕 범죄자의 영혼을 타고 난 자(=악마)가 따로 있는가. 이 물음은 물론 쉽게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소설은 이 문제를 세계문학의 어떤 소설보다 더 정면에서, 깊이 다루고 있다.
표도르를 죽인 것은 나중에 밝혀지는바, 그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이다. 이 어두운 영혼은 애초부터 악마의 자식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굴욕적인 성장환경에 의해 그런 존재로 키워진 것일까. 전자의 가능성도 크지만 스메르쟈코프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도 비우호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소위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 소설의 초반부, 화자는 그를 크람스코이의 <관조자>에 비유하며 여러 가능성을 제시한다. 간단히, 그는 성자(순례자)가 될 수도, 방화범(살인자)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것. 소설은, 전반적인 플롯의 흐름인바, 결국 이반을 살리기 위해 그를 죽이는 쪽으로 간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우리는 마땅히 영웅도, 마땅히 악인도 아니다. 평범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 어릴 때 같으면, 가령 연애-사랑도 그렇고, 혹독한 시험을 거쳐야만 그 진정성이 증명된다고 생각했을 법하지만, 어림 없는 소리. 그로써 증명되는 건 차라리 우리의 나약함(그러니까 평범함)일 뿐이다.
군대는 원래 그런 곳이다, 라는 우리의 편견이 제발 불식되어야 마땅하다. 사람을 때리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계 속에서는 누구나 때리고 누구나 맞게 된다. 그 '누구'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만 문제일 뿐. 즉, 언젠가 무슨 심리학 교수가 시행했던 시험이 보여주듯, 누가 '간수'냐, 누가 '죄수'냐, 그 역할이 중요할 뿐이다. 어제 맞았던 자가 내일은 때리는 자가 될 것임은 자명하다.
정반대로, 동일한 상황에서 영웅이 태어나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아주 사소한 일에 의해 발생하는데(내가 본 것, 들은 것을 그대로 말한다, 라는 것), 이 대목이 또한 악의 탄생과 함께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소설. 평범한 의사 리유, 재수없이(!) 오랑시에 감금돼 버린 파리의 신문기자 랑베르, 페스트 때문에 체포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 연금생활자 코타르, 당최 뭘 하는 놈인지 알 수 없으나 묘하게 매력적인 타루, 고리타분한 하급 공무원의 전형이되 돈키호테적인 조용한 광기(?)를 보여주는 그랑 등.
카뮈의 <이방인>을 사랑하는 나에게 <페스트>는 항상 다분히 작위적, 혹은 추상적으로 여겨졌다.(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체육시간, 선생님이 없는 틈에, 운동장 구석에서였다.) '공분', 더 정확히 '연대'를 촉구하는 이 소설이 완연한 삼십대로 접어든 카뮈의 사유와 고뇌는 충분히 느껴진다. 냉소적인 청년 뫼르소가 한결 성숙하고 차분한 리유-타루로 돌아온 것이다. 이 소설은 분명히 카뮈의 최고작임에도, 거참, '소설'로서는 2프로 부족한 느낌이 든다.(무엇보다도, 재미가 없다..ㅠ.ㅠ) 특히, 그가 아끼고 각색하여 연극으로 올린 이 소설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렇다.
<악령>은 알다시피 그 출발에 있어서는 정치소설이다.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의 범죄(인쇄기를 빌미로, 오인조를 탈퇴하려는 샤토프를 살해, 시신 유기 등)가 발각되는 것은, 자신의 죄를 견디지 못한 '나약한' 인간(들) 때문이다. 럄쉰, 비르긴스키 등. 살해에 가담은 했으나(직접 죽였다고 말하긴 힘들다 - 총을 쏜 것도, 시신을 유기한 것도 모두 표트르), 또한 표트르의 권위(나아가 폭력)에 압도되긴 했으나, 결국 그들은 '이겨내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라면 바로 이 무너짐을 통해 신의 뜻이 현현한다, 라고 했을 것이다. 이른바 양심, 윤리, 도덕감 등. 극한 상황에서 우리를 인간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이것, 최소치의 윤리이다. 혹자(이 경우엔 표트르)의 눈에는 그것이 나약함의 표식처럼 보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