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성>을 다시 읽는다. 대학 시절부터 읽어온 손 때 묻은 범우사판(박환덕 역 -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더 옛날 것, 빨간 색 표지이다)을 잠시 옆으로 밀쳐두고 편 것은 펭귄판 <성>(홍성광 역)이다. 너무 술술 읽히는 것은 내가 많이 큰 탓이냐, 카프카가 모던/트렌디해진 탓이냐. 아무래도 번역의 공이 적잖은 것 같다. 그러나 이 공이 다소 유감스럽다. 카프카는 결코 술술, 읽히는 작가가 아닌데, 그의 꼬여 있으되 엄정한 문체를 너무 풀어놓았다는 느낌,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이 판본으로 계속 읽는다. 술술 읽히니까, <성>을 처음 읽었던 대학 시절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로 완독한 듯하다. 그러나, 강조하건대, 이 술술이 마뜩치 않아 다른 판본을 펴본다. 

 

 

 

 

 

 

 

 

 

 

 

 

 

카프카 전집을 낸 솔출판사의 <성>(오용록 역). 이 판본 역시 유감이다. 카프카가 아무리 난해한 작가라곤 하지만 그의 문장이 이렇게 뻑뻑(?)하지는 않을 터. 딱딱함과 건조함의 유려함, 이랄까, 그런 맛이 전혀 없다..ㅠ.ㅠ 소설의 전반적인 흐름을 잘 못 읽어낸 것 같은, 또한 문장과 문장 사이, 즉 문맥을 거의 살려놓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 지울 수 없다.(원문과 꼼꼼히 대조해 보면 오역이 무척 많을 것 같다..ㅠ.ㅠ) 솔직히 이 경우 아쉬움은 거의 절망에 가깝다. 이 판본이 전집의 일부이고 또 엄선된 전공자의 번역기 때문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K의 눈에 들어온 성의 모습을 적은 부분. 괄호는 쪽수이다. 판본이 더 있으나 구하기도 힘들고 원고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아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한다.

 

-범우사판

 

성은 여기 먼 곳에서 보아도 K의 기대와 대체로 일치하는 것이었다. 옛날 기사의 성도 아니고 화려한 현대식 저택도 아니었다. 그것은 옆으로 퍼진 건축물로, 몇 개의 3층 건물과 빽빽이 들어 찬 많은 낮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이 성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작은 도시쯤으로 오인했을지도 모른다. 탑이라곤 단 하나밖에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게 주택 건물에 붙은 건지 아니면 교회에 붙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으나, 탑 주위엔 까마귀 떼들이 빙빙 돌고 있었다. // K는 계속해서 걸어갔으나, 눈은 역시 성을 향하고 있었고 그 밖에는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까이 감에 따라 성은 그를 실망시켰다. 시골집들이 밀집해서 이루어진 아주 초라한 소읍(小邑)에 불과하여서, 겨우 사람들의 눈을 끄는 집이라면 아무도 이 시골집이 모두 돌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칠은 이미 벗겨졌고, 돌도 허물어질 것처럼 보였다. K는 문득 고향 마을을 생각해 보았다. 그 고향 마을도 이런 성에 비해서는 손색이 없었다. 성을 시찰하기 위한 것뿐이라면, K는 일부러 먼 길을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이미 오랫동안 못 가 본 고향을 다시 한 번 찾아보는 편이 훨씬 현명한 행동이었을 것이다.(24) 

 

-펭귄판.

 

대체로 성은 멀리 이곳에서 보아도 K의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유서 깊은 기사의 성이나 새로 으리으리하게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옆으로 넓게 퍼진 시설물로, 서너 개의 3층 건물과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수많은 나지막한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이 성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조그만 도시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거용 건물에 딸려 있는지, 아니면 교회에 딸려 있는지 알 수 없는 탑 하나가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이 탑 주위를 까마귀 떼가 빙빙 맴돌고 있었다. // K는 성을 쳐다보며 계속 걸어갔다. 그 밖에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고서 그는 성에 적이 실망하고 말았다. 그것은 시골집으로 이루어진 아주 형편없는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돌로 지어졌다는 것만 돋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색을 칠한 게 진작부터 벗겨져 있었고, 돌이 부서져 떨어질 지경이었다. K는 얼핏 자신의 고향 작은 도시를 떠올려보았다. 그곳도 소위 성이라는 이것에 비하면 그다지 못하지 않았다. 단지 성을 시찰하는 게 중요한 문제였다면 굳이 긴 여행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벌써 가본 지 오래된 옛 고향에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게 더 현명한 처사였을지도 모른다.(17)

 

- 솔출판사판

 

이곳 멀리서 보기에 성은 K의 예상과 대체로 일치했다. 그건 오래된 기사의 성도 새로 지은 호화 건축도 아닌, 이층은 몇 안 되지만 다닥다닥 나란히 붙은 수많은 저층 건물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건축물이었다. 그게 성이라는 걸 몰랐다면 하나의 읍으로 보았을는지 모른다. K의 눈엔 탑 하나만이 보였는데 그게 주택 건물의 일부인지 교회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 주위로는 까마귀떼가 날고 있었다. // K는 오직 성 쪽을 쳐다보며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점점 가까이 갈수록 성은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그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소읍이었으며,  별다른 점이라곤 모두 돌로 지어진 것 같다는 것인데 그나마 칠은 벗겨진 지 오래고 돌마저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언뜻 K의 조그만 고향 모습이 떠올랐는데, 이따위 성에 뒤질 것이 별로 없었다. K가 오직 구경 삼아 온 거라면 오랜 발품이 아까웠을 것이고 그럴 바엔 매우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옛 고향을 찾아가보는 게 더 영리한 일이었을 것이다.(16-17)

 

*

 

개인적으로 제일 잘된 번역을 꼽으라면, 박환덕 선생의 <성>인 것 같은데(어릴 때 독일어 수업 들은 기억이-_-;;), 이 사실이야말로 유감의 이유이다. 청출어람은커녕...-_-;; 

 

원래 번역비평은 고사하고 남의 번역을 두고 이렇게 '뒷담화'처럼 씹어대는 건 (꼭 나 자신의 열패감을 엉뚱한 데 푸는 것도 같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_-;;) 즐기지 않지만, 원고를 쓰면서 인용문을 옮기던 중 분노(!)하여 몇 자 적는 것이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분노의 권리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카프카가 국내에 번역, 소개된 지 오래된 만큼 이제 그냥 번역은 의미가 없다. 잘 된 번역이 필요하다. 독문학자들이 분발해주었으면 한다. 한데 이 전공자들이야말로 자신의 게으름을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인 양 착각, 엉터리 번역을 내놓는 주범이니 더 유감스럽다.

 

최근에 새로 읽은 카프카의 여러 소설 중 제일 마음에 들었던 번역은, '심판'에서 '소송'으로 바뀐 제목까지 포함하여, 이것. 강렬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문학동네의 표지도 마음에 든다.  (물론 이것도 예전에 읽은 판본은 범우사판이다.)

 

 

 

 

 

 

 

 

 

 

 

 

 

*

 

번역. 처음에는 어린/젊은 학자로서 공부한다는 마음을 갖고서, 또 소설가로서 고전을 필사한다는 마음을 갖고서 시작했던 일이다. 한데  내 이름 달고 출간된 번역서가 점점 쌓여가고 그 중에 베스트/스테디셀러가 적잖이 있다 보니 점점 더 예민해지는 건 당연하다. 외국어 공부를 원래 좋아했지만 그 갈증 역시 점점 더 커져간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건 남의 말이 아니라 우리말. 남의 말도 저들에겐 우리말이다.

 

원문이 소중한 만큼이나 우리말 번역본이 소중하다. 번역은 언어 시스템을 통째로 옮기는 것일 텐데, 쟤가 저렇게 쓰고서 어떻게 세계문학사에 남았겠냐, 라는 물음을 낳는 번역은 결코 좋은 번역이 아니다. 차라리 번역 자체를 잊고 작품 자체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번역이 좋은 번역이 다. 어느 번역가 선생의 말대로 번역가는 정녕 '그림자' 같은 존재, 어쩌면 그래서 슬픈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보통 박사/교수 번역가들이 자신을 옹호하는 말 중에, 자기는 외국어는 잘 아는데(하는데) 우리말이 부족해서(혹은 윤문하는 것이 귀찮아서), 라는 식의 거만한(!) 변명이 많다.(그러곤 원문을 들이민다.) 이는 단연코, 헛소리이다. 훌륭한 우리말 번역본을 낸 사람 중 해당 외국어를 잘 모르는 번역가는 없다.  번역을 학자나 교수가 하기엔 너무 성가신 '허드렛일'쯤으로 생각한다면 하지를 마시고.

 

 

덧붙여, 소설가야 소설 못 쓰면 자기 혼자 망신이지만(그리고 출판사를 찾지 못한 원고를 그냥  모셔두면 되지만), 불성실한 번역을 내놓는 번역가는 죄인이다.  행여 나도 그런 죄를 범해버린 건, 또 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번역가로서, 또 전공자로서 새삼, 발이 저릿, 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염먹는고흐 2014-10-0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송은 문동판이 좋은 번역이었군요. 감사합니다.

유주 2015-02-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포스팅하시니 재밌게 읽었네요. `불성실한 번역을 내놓는 번역가는 죄인이다`라는 말에 크게 동감합니다.

2017-09-08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