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는 왜 다 여자일까



방바닥에 엎드려 내 그림자에 입을 맞추네

그림자의 귓바퀴를 물어 뜯네


내 그림자의 눈이 반짝 켜지네


내 상반신엔 평생 한 번도 씻지 않은

낙타 같은 사람

내 하반신엔 깊은 바다 속으로 내 몸을 끌고 헤매는

검은 상어 같은 사람

숨어 있네


나는 그런 시큼한 채찍을 든

오래된 사람들에게 반씩 먹힌 여자


그리하여 고단한 내 얼굴엔

내 후생의 몸뚱어리, 모래 언덕의 요염한 곡선

멀거니 바라보는

퉁방울 같은 낙타 눈동자 열려 있고

내 발목엔 낳지 않은 아가들의

수백 개 손톱 같은 비늘들이 따갑게 박혀 있네

평생 떨어지지 않네


한 사람이 저 멀리 사막으로 가자고 내 팔을 흔드네


한 사람이 저 멀리 바다로 가자고 내 다리를 묶네


따끈한 혀가 내 손가락보다 먼저 얼어붙네

춥다 춥다고 말을 더듬네

생리통이 모질게 하반신을 휩쓰네

아프다 아프다고

반쯤은 사막에

반쯤은 심해에

붙들린 몸을 뒤트네


내가 내 그림자의 귓바퀴를 물어뜯네

하루 종일 나는 나를 헤엄치네


인어는 왜 다 여자일까?

인어는 자가 생식하는 걸까?





<김혜순 "당신의 첫" '인어는 왜 다 여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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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9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9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1-2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과 외롬과 아픔과 상처를 갖는 모든 대상들은 이미 <인어의 숙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진님도 인어, 덧글 다는 저도 인어...

지켜 보며 연민만 하고 싶은 인어지만 결국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막과 바다를 헤매는 어쩌지 못하는...

이진 2013-01-21 19:24   좋아요 0 | URL
우리는 모두 인어군요.
다리를 잃은, 몸과 다리가 분리된,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읽으면 읽을수록 아픈 시라는게 체감되어요.

jo 2013-01-2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인어는 왜 다 여자일까요? 남자인어도 있지 않나요? 농담입니다. 조크조크 ㅋㅋㅋ
인어.. 불쌍하네요. 이리저리 갈팡질팡.
인어의 숙명인가요? 어디도 못가는 인어네요...

이진 2013-01-21 19:24   좋아요 0 | URL
남자인어도 있다네요!!
완전 신기하죠? 희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들 1917>



열일곱 살이 되는 겨울, 내가 처음 먹으로 그려보았던 나무 기억하나요.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 라고 당신이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하고 당신은 덧붙여 말했지요. 그날 오후 내내 당신의 서가를 뒤져 나무 그림들을 봤습니다. 실레가 그린 어리고 섬약한 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 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 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192-3









 

한강의 소설은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으로 설명 가능하다. 아니,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이 오롯이 한강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레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암울하다, 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이울고 있는 붉은 태양과 제자리를 잡고 서 있는 나무들, 그 중에 헐벗은 나무 하나, 생기 없는 땅과 하늘, 핏빛 같은 붉은 계열의 색이 한데 모여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의 폐허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부정적인 시각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부정적인 고요와 부정적인 격렬함이다.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은 두 가지 모두로 볼 수 있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함 기운이 그림 안에서 맴도는 것이 느껴진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옆에, 곧 옷이 없는 몸을 함께 할 것만 같은 나무 세 개가 힙겹게 서 있다. 초롯빛 풀 한 포기 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에서 오로지 해만 붉은 빛을 내뿜는다. 그러나 그 빛조차 쓸쓸하고 고요해서 전체적으로 그림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한동안 쓸쓸함을 맞이하고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어보자. 쓸쓸함 이면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것이 보이는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던 붉은 태양이 투쟁을 위한 기(旗)의 형상을 취하고, 공연히 눈물만 흘리고 벌벌 떨고 있을 나무들이 투쟁을 위해 꼿꼿히 제 몸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허무하고 허탈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암울하고 쓸쓸하고 음산하였던 그림이 서서히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소설은 여리고 섬약한 인물 그림이다. 실레의 하늘과 들처럼이나 생기 없고 쓸쓸한 배경을 살아간다. 그들에겐 실레의 나무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病이다. 한강의 사람들은 모두 병들었다. 그것이 육체적인 病이든 정신적인 病이든 病은 한강의 사람들을 힘겹게 만든다. 지친 사람들은 조용해진다. 빠르고 격정적으로 파도치는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듯 느려진다. 그들은, 한 인터뷰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데나 나서지 않으며 나부대지도 않는다. 오지랖이 넓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무관심하지도 않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고 이겨내려는 사람들이다. 착하기보다 그들은 힘든 사람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들 같은 사람들이다. 한강은 이런 사람들만을 채용한다. 그래서 한강의 소설은 우울하고 축 처져 있다. 커다란 바위가 소설이라는 자그마한 포대기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또 그렇다고 그 돌이 집채만하지는 않다. 적당히 무거우며 적당히 가볍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처럼 인간의 가장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황정은처럼 통통 튀지도 않다.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싸여 있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이제 실레의 그림을 구도적으로 보자면, 수평과 수직이 바둑판처럼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들은 수평으로 나무들은 수직으로 뻗어 둘이 교차된다. 수평적 구도는 안정감과 평화로움, 그리고 넓이감을 주며 수직적 구도는 엄숙함과 성스러움, 상승감을 준다. 실레의 나무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이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통해 나무가 곧 실레라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는 어떤 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다. 이육사의 [교목]에 드러나는 의지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喬木), 이육사





우리의 저항시인 이육사는 자신의 투쟁 의지를 교목-줄기가 곧고 굵고 긴 나무로 표현했다. 말아라, 아니라, 못해라 하는 부정 어미들이 나타내는 부정적 의지는 결국 '교목'이라는 것에 흡수된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나무는 투쟁이자 살아감인 것이다. 실레의 나무들도 그렇다. 이육사의 투쟁 의지가 실레의 나무에게서도 보인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선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가 어떤 것에 저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어떤 것에 투쟁한다. 그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생의 벽이고, 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목소리를 나누는 가족이고, 시나브로 흘러 바야흐로 다가오는 시간이고, 그것들이 뭉쳐 만드는 세상이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살아내야지...' 중얼거린다. 그들에겐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시련이 닥친다. 아까도 말했던 病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아이를 갖기 못한 스트레스로 인한 거식증, 트라우마와 아프고 암울했던 기억들, 성정체성의 혼란, 한강의 病 중 가장 생소하고 흥미로운 외계인손 증후군, 혈우병, 그리고 자동차 사고. 모든 인물들이 아프고 조용하다보니 그녀의 소설은 모두가 비슷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소복히 쌓인 재 같은 글도 비슷하고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이나 가치관도 비슷하고 결말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미묘하게 다르다. 한강의 글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한강의 소설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것 같다. 한강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이나 감각에는 변화가 없지만 때론 [채식주의자] 같은 파격적(한강은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싫다고 하였지만)이고 진지한 소설을 쓰는 한편, [희랍어 시간] 같은 아주 얇은 유리잔 같은 소설을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을 독촉한다면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아." 그 말고도, "한강의 소설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글로 옮긴 것 같아." 나는 전자가 마음에 든다. 어린 새의 뛰는 심장은 여리게 느껴진다. 조금만 건드려도 봉숭아 꽃 터지는 톡 터질 것 같다. 그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는 모습은 전혀 여리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심장이 뛰는 횟수만큼이나 가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다. 즉 이중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처럼 이원적인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중적이다. 실레의 그림처럼 여리고 섬약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면에는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열심히 뛰는 심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지치고 힘든 한강의 인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리막, 이라는 표현은 사실 한강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인간이 가진 아주 연하고 투명한 부분을 생각하며 썼다고 밝혔다. 나는 [희랍어 시간]을 읽었으나 글이 계속 겉돌아 깊은 것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소설의 분위기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조용했으며 고요했다. 소설이 이렇게나 고요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깊은 고요였다. 


적요


, 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 고요와 적요 속에 한 여자와 남자가 격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괴리적이고 부조리적이어서 놀랐었다. 그것은 [노랑무늬영원] 전체를 휘감고 있다. [노랑무늬영원]은 괴리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나 현실적인 것을 감싼 기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중략)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다. 저녁에 붙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 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한강, 밝아지기 전에 '노랑무늬영원' 109-110





[노랑무늬영원]은 한강다운 글이다. 7개의 옹기종기 모인 소설이 어쩜 그렇게도 한강 같은지 보면서도 신기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긴 텀이 있는 소설들. 그중에는 내가 처음 한강을 만났던 '왼손'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노랑무늬영원]에서 가장 한강답지 않은 소설인데, 책장을 덮은, 지금보다 한 살 어린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다. 문장과 구성의 탄탄함과 어떠한 경지는 둘째 치고라도 놀라울 것이 많았다. 알라딘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대체 왼손이 움직이는 것을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한강은 무얼 말하려고 왼손을 통제불능으로 만든 것일까? 그 해답을 나는 후일에야 알게 되었는데,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도 셋째 치고나서 나는 '왼손'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한다. 일 년 전의 나는 돈이든 이성이든 권력이든 욕정이든 자신에 의해서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라고 읽었다. 불현듯 제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 왼손과 그로 인해 수 년 만에 만나게 된 하나의 인연이 평범하고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마침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서사적이고 기이하고 비실존적인 흐름... 어쩌면 현실적이기도 하나 비현실적으로 읽히는 이야기... 바로 그것이다. 여운조차 찝찝하다.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끈적하고 꾸덕한 여운이 남는다. [노랑무늬영원]에 자리 잡은 7권 중에서는 가장 동떨어져 있지만 이 소설이 가장 한강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한강답지 않지만 가장 한강다운 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훈자'와 '밝아지기 전에'와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구조가 비슷하다.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교차편집의 개념이 여기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처럼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고 그로서 시의 모습과 영상의 형상도 공존하는 듯 보인다. 한 단락, 한 문장, 한 단어 모두가 한강이 창조한 하나의 상징체이다. 한강은 말을 적당히 아끼는 법을 안다. 특히 '훈자'에서 한강은 한강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잔잔한, 그러면서도 충분히 짧은 단락들이, 역시 뒤죽박죽 이어지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여러개의 시각이 스치듯  빠르게 지나가며 각자의 말을 내뱉는다. 그 수많은 발화와 언어의 가닥이  꼬이고 꼬여 만들어 낸 질문. 곰비임비 흐르는 사건이 쌓이고 쌓여 건축된 탑. 그것이 '훈자'이며 나머지 한강의 소설이다. 한강은 평범하게 순행적으로 흐르는 구성보다는 역순행적인 구성을 좋아한다. 그것이 한강을 잘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구성이기도 할테고.



앞의 소설들은 '인간'을 그린 것이라면 뒤의 소설 두 개,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여성을 그린 소설 같다. 여성이라기보다 연인, 사랑을 그렸달까. 나는 이 소설 두 개를 근 한 달 동안 읽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읽고 난 지금 왜 그랬을까 의문스럽다. 이 소설 두 개는 [노랑무늬영원]의 소설들 중 어떤 것보다도 재밌다. 재밌으면서도 잔잔하고, 잔잔하면서도 애달프다. 그래서 재밌다. '파란 돌'은 읽으면 설레게 되는 소설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게 되는 소설이다. '파란 돌'은 막 피어나는, 조심스럽고 애틋한 사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지칠대로 지치고 힘들대로 힘들어 서로가 지겨워진 막바지의 사랑이다. '파란 돌'은 시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끝이다. 그러나 정작 죽음은 '파란 돌'에 있다. '파란 돌'에서 파란 돌은 곧 생명이지만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혈우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혈관이 터지는 통에 조심히 살아가야했다. 그래서 남자는 인생 자체가 조심스러운 남자였다. 여자를 만나고, 좋아하게 된 후로도 조심스러웠다. 여자도 남자를 조심스레 대했다. '파란 돌'은 조심스러운 사랑의 일련의 기록이다. 남자는 뇌에 피가 고여 죽은 채로 발견된다.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한강이 야속했다. 그를 왜 죽였나요. 살려서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주시지. '노랑무늬영원'의 여인은 검정 개를 피하려다 차가 전복했다. 그림을 그렸던 여인은 왼손을 못 쓰게 되었고 덩달아 오른손마저 고장났다. 여인은 몸을 회복하는 이 년 동안 마음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情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다. 남편은 여인이 지겨워졌고, 그만큼 여인도 남편이 지겨워졌다. '노랑무늬영원'도 조심스러운 사랑이다. 다만 언제 깨질지 알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조심스러움이다. 그런까 사랑이 없는 조심스러움이다. 사랑 없는 사랑을 지속해나가려니 여인과 남편은 서로를 경멸하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아니 그것이 미움의 감정일까? 아니지. 미움이 아니지. 



[노랑무늬영원]은 한강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과 같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살아가야하는 소설이다.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막상 당신에게 가지 않자, 깊기만 하던 가슴의 통증이 마치 넓게 도려내어진 듯 슴벅거려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얼마간 체념한 채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습니다. 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 사람인지, 할 수 있다면 나를 단번에 실망시킬 구석을 찾아내 그 이상한 고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팠니?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격렬한 비참함과 환희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 혼란한 순간 내가 희미하게 깨달은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아마도 당신을 통해서만 달래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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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1-0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은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진님 때문에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근데 왜 우리동네 도서관에 한강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없는 걸까요...............?

이진 2013-01-04 00:14   좋아요 0 | URL
한강은 동네 도서관에서 취급할 정도의 인지도는 없다고 봅니다.
이쪽에서야 대단한 문인이지만 아직 세상에 나가면...
친구들에게 한강 아냐고 물어보아 소설가 한강? 알지알지, 하는 답변 들을 수 있을까요...

댈러웨이 2013-01-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고로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이네요. <희랍어시간>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한강 작가 엄두가 안 났었는데 이 단편집은 추천이 많아 기대 만빵. 처음엔 반응이 좀 엇갈리는가 싶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봐요.

소이진님, 멋지게 새해를 시작했네요! 올해 말에는 소이진님이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생각하니 긴장도 되고 그래요. 그리고 숙제. 시제는 '인어'. 안녕 소이진님. (쑝~) 아, 실레의 그림에서 태양은 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

이진 2013-01-04 00:17   좋아요 0 | URL
<노랑무늬영원>의 시즌이죠? 저는 아마 댈러웨이님과는 다른 의미로 <희랍어시간>에서 고생을 했을 겁니다. 글이 겉돌아서 혼났어요. 실망을 좀 했는데 그건 아마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한 번 더 읽으려구요. 어쨌든 아무리 실망을 했어도 좋은 작가는 좋은 작가입니다. 한강 좋죠... 히히 서울예대 희망하는 것도 순전히 한강한테 배우려고... 근데 막상 가면 윤성희 작가님께 이년 내내 배울 것 같습니다. 아... 고민이군요.(순 김칫국.... ㅠㅠㅠㅠㅠㅠ)

꺄, 숙제! '인어'! 토요일까지 합평 소설을 써야하는데, 그걸 완료해내고, 아차 오늘 하나를 쓸 예정이니, 그 두개를 완료해내고 써낼게요. 다음주엔 서울에 가는데 서울가서 써야겠네요. 후후... '인어'라... 아! 제 프로필 보시고 낸 것인가요!!! ㅋㅋㅋ 인어는 왜 다 여자인가. 이거 김혜순 시인 시 제목인데, 이걸로 소설을 써봐도 괜찮을 것 같네요. 굳굳.

사실... 저도 그림 해설 보고 태양이 있구나... 아... 있구나... 태양이 있었구나... 헤헤...

마녀고양이 2013-01-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은 한 살 나이 먹었을 뿐인데,
글은 열 살 정도 나이 먹은 듯이, 어쩜 이리 멋진지요..... 와, 물 흐르듯이 정신없이 페이퍼를 읽었답니다.

푸른 돌은 설레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군요.
짧은 이 한 줄로 저는 충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한강이라는 작가, 섬님의 페이퍼에 이어 계속 유혹하네요.
인용해주신 문구들도 너무 맘에 드네요.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다.........

소이진님, 우리 그렇게 살아요. 힘들어도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도록.... 그렇게요.
즐겁고 평안하고 건강한 새해 되시구요.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많이 부족한 리뷰입니다. ㅎㅎ
달여우님의 탄탄한 글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읽어보신다면 정말 그런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저는 평론가들처럼 치장하지 않고 그대로 단어로 옮겼어요. (이 문장은... 그러니까 평론가들보다 뛰어나다, 하는 식으로 읽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파란돌'은 정말 설레요. 연애소설은 아닌데, 연애소설보다 더 설렌다니까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지만, 여기도 사실 분홍빛이 있어요. 이 소설도 설레는 면이 있다니까요.
한강은... 참 매력적인 작갑니다.

우리 몸은 다 타도... 심장은 꼭 남아서 끓는 한해! 그런 힘찬 새해 보내요.
달여우님 파이팅! 나도 파이팅 ㅎㅎ 새해엔 건강하세요~

비로그인 2013-01-0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모바일로 로그인이 되네요
이런 글을 새벽으로 쓰시다니요
겸손이 끝을 달리십니다아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유다다님 어서 글을 쓰시지요...
소설을 쓰시란 말입니다.
소설 아주 잘 쓰시더니 ㅠㅠㅠㅠㅠ

프레이야 2013-01-0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소이진님의 노랑무늬영원!
실레의 그림 중 왼쪽에서 두번째 나무, 그게 한강 같아요.
채식주의자, 중 거꾸로 박혀있던 불꽃나무의 이미지 같기도 하고. 여린 듯 강한.
아무래도 이 책을 봐야겠다는 강렬한 유혹이 활활~~~

이진 2013-01-04 00:22   좋아요 0 | URL
드디어! 드디어 올렸습니다 ㅎㅎ
젠장, 제가 그걸 생각 못했군요.
프레이야님 말이 맞아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바로 두번째 나무...그러니까 한강이죠.
어서 읽으십시오... 댈러웨님 말처럼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아니겠습니까. ㅎㅎ
 
너 없는 그 자리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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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전에는 수제비 반죽 같은 눈이 육수에 풍덩풍덩 빠지듯 내렸고, 그제에는 단체로 실연을 맞은 구름떼가 하루종일 슬피 눈물을 흘렸고, 어제는 지상으로 마실 나온 안개들이 모든 것을 희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눈이 내리든 비가 내리든 안개가 덮이든 사건사고는 연일 끊이지 않았지만 내(內)에서 은은히 감돌던 서정성은 조용하게 극치를 향해 달려갔다. 한강으로부터 시작하여 신경숙, 윤성희, 김미월, 이혜경에 이르기까지 나는 몇 주 동안을 여성 작가와 함께 지냈다. 그 중 대부분은 한강과 오순도순 시간을 보냈고, 그 다음으로 이혜경에게 관심과 열성을 쏟았다. 세심하고 부드럽고 유연하게, 그러나 날카로우며 남성을 능가하는 힘과 격정을 보여주기도 하는 그러한 글들. 게다가 매력적이며 탄탄하고 잘 쓰기까지한 소설들에 담뿍 빠져 며칠 밤을 샜다. 샤프 펜슬과 형광펜을 손에 쥐고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며 행복하고 즐겁게 읽어나갔으나 힘든 점도 있었다. 단편 소설의 특장이기도 하나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데, 짧다는 것이다. 몰입이 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한 작품을 읽고, 또 다른 작품을 연달아 읽을 때 속에서 솓구치는, 그리고 뒤섞이는 감정들이 문제다. 물론 두 작품 간에 시간을 두고 곱씹으면서 찬찬히 기다리면 되긴 되나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소설집이라 칭해지는 책은 이 짧은 소설이 대부분 예닐곱개 씩은 들어가 있기에 한 권을 하루에 다 떼기 위해선 미분함수니 지수함수니 삼각함수니 하는 수학적 혼란이 아닌 문학적 혼란을 견뎌내야 한다. 나는 이혜경의 신간 소설집을 이틀에 걸쳐 완독하며 몇번이고 한숨과 탄식으로 속에서 응어리진 어떠한 감정을 뱉어내어야 했다. 그것이 아니면 잠깐이라도 눈을 감고 문장들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머리속 한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그래야 다음 작품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혜경은 농익은 소설을 쓴다. 그렇다고 야릇하고 요염하다는 소리는 아니고 분위기나 글이 다른 작가들보다 성숙한 느낌이 빼짓이 배어난다. 나중에 한강에 대한 글을 쓸 때 자세히 말하겠지만 잠깐 언급하자면, 한강은 어린 새의 심장 같은 소설을 쓴다. 여리고 연약하고 투명하고 부드럽고 뜨겁게 뛰는 소설들을 쓴다. 그 때문에 나는 한강을 20대 젊은 작가로 여겨왔고. 한강의 글은 투박하지도 촌스럽지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도시적이지도 않다. 적당히 중립적이면서 충분히 감정적이고 서정적이다. 이혜경의 글은 결혼 10년차 넘는 주부가 사골을 한 양동이 끓여놓고 불현듯 외국 여행을 떠나 양주를 홀짝이며 남기는 일기 같다. 원숙미가 글 전체에, 비록 서술자가 한창 나이의 여성남성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스며있고 삶과 인생에 대한 깊은 고찰과 고심이 발자국처럼 곳곳에 남아 있다. 때로 그녀의 글은 달리도 읽혀지는데, 오래 사랑한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찢어지는 가슴의 여자가 기록하는 일지 같은 느낌도 은근히 드러난다. 그것은 이혜경만의 사랑을 그릴 때의 문체일 것이고, 나는 그것이 좋았다.



방에 들어와 물기를 닦다, 그만 당신 이름을 입밖에 내는 순간, 무릎이 꺾이며 주저앉았어요. 타일 바닥이 서늘했어요. 채 물기를 닦지 못한 머리에서 타일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내 뜨거운 눈물을 버무리면서 오래 울었어요. 평온한 비췻빛이었다가 한순간에 음험하게 짙어진 물, 유유히 헤엄치던 작고 예쁜 열대어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빨려들 것 같은 어둠만 펼쳐질 때의 당황과 공포, 내겐 익숙한 거였어요. 그게 뭐였는지는…… 나중에 기회 되면 말해줄게요. 18p



<너 없는 그 자리>는 초반과 후반의 글 양상이 달라지는데, 갈수록 내 집중도가 떨어진 까닭은 아니고, 분명 작가의 의도가 다분히 드러난 것이다. 앞의 소설들은 무언가 감추는 게 있다. 작가는 드러내지 않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거나 서술자가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아버린다. 독자들은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겨야 한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겨진 진실을 알기 위하여 더욱 꼼꼼히 글을 훑어간다. 그러다가 서서히 정체가 드러나고, 해설을 빌리자면 그것이 '앎' 이다. 이혜경의 소설에서 '앎' 이란 고통을 대변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아니, 고통의 시작. 주인공들은 '앎' 을 통해 둑 터지듯 피가 쏟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슬픔과 고통의 좁은 길에 들어서게 된다. '앎' 이후로 그들은 서늘해지고 처참하게 슬퍼진다.



' 너 없는 그 자리' 에서 경원은 케냐에 출장을 갔다고 굳게 믿은 남자를 서울 한복판에서 운전 중에 발견한다. 발견, 즉 '앎' 이다. 경어로 쓰이던 서간문이 어느 순간 낮춤말로 진행되고, 남자를 발견한 경원은 이렇게 쓴다. "오늘 오후 네시 십오분, 뱅뱅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던 재색 비바리, 당신 맞지?" 곁에 없는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자의 심정으로 읽히기 시작하다 읽어갈수록 공허하고 텅빈 듯 이상한 구멍들이 이 문장에서 맞부딪히며 절정을 맞는다. 추궁하고 심문하는 듯 날카롭게 날아오는 질문들은 어쩐지 두렵기까지 하다. 이 소설은 한 여자의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원은 남자를 운명의 상대로 받아들였으나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되레 경원에게 "경원씨가 내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우린 그저 한때 같은 직장 동료였을 뿐이에요." 하며 거부한다. 경원이 수도없이 거는 전화를 받지 않고 천장 위를 기어가는 바퀴벌레 보듯 그녀를 째려보고. 이렇게 본다면 남자를 그리워하며 회상했던 경원과 남자의 아름답던 추억은 여자의 착각이 아닌 회피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진실에서 회피하여 거기에서라도 사랑하고픈 심정. 어쩌면 위의 인용문에서 여자가 무릎을 꿇어가며 눈물을 뚝뚝 흘렸던 까닭은 자신의 애처롭고 비참한 모습을 동정한 것이 아닐까. 혹은 남자를 가지지 못한 슬픔과 분노에 울었던 것일까.



<너 없는 그 자리>는 사랑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초반 몇 개 소설은 사랑에 관한 것들이다. 일방적인 사랑, 일방적이 아니었으나 결국은 일방적으로 판명난 사랑, 상호적인 사랑에서 마지막에는 비참하게 혼자가 되는 사랑, 아픔을 잊기 위해 선택한 사랑…. 이혜경은 '한갓되이 풀잎만'에서 이렇게 말은 해두고 있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그러나 이혜경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하는 것을 택한다. '감히 핀 꽃'의 시아버지는 평생을 집 떠나 살다가 죽기 다 되어 본가로 들어오는데 간병인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 알고보니 사랑을 나누던 사람이었다. 이렇듯 주인공들은 계약보다 사랑을 중시한다. 특히 사랑은 맹목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덮어놓고 사랑한다. 그저 사랑한다. 그러다 당한다. 이혜경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렇게 당한다. 맹목적으로 사랑하다 당한다. 덮어놓고 사랑하다 당한다.



죽음은 후반에 이르러 얼굴을 빼꼼 내밀기 시작한다. 5번째로 실린 소설 '감히 핀 꽃'에서 시작되어 7번째 '꿈길밖에 길이 없어'까지, 총 3작품에 죽음이 등장한다. '감히 핀 꽃'은 늘그막에 죽는 거니 넘어간다치고 '금빛 날개'와 '꿈길밖에 길이 없어'의 죽음은 무언가 의미심장하다. '금빛 날개'는 한 중년의 남성의 글이다. 그는 가족들에게까지 천대받던 무지하고 무식한 집안에서 태어나 유일하게 명문 대학을 나와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그야말로 돼지 같이 꿀꿀대기만 하는 가족들과 연을 끊고 지낸다. 그러면서 어릴 적 친척들에게 들은 비난과 동정, 거짓 긍휼의 발화들로 인해 매사에 부정적이고 무심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것은 결국 애지중지 키우던, 어떻게든 잘 살게 해주겠다고 다짐한, 그에게 전율을 불러 일으키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 큰 아들을 죽게 만든다. 불량배에게 칼을 맞고 아버지의 병원 문을 두드린 아들을 아버지는 외면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외면했고, 궁극적으로 자신을 외면한 것이다. 사랑과 무심의 괴리는 이토록이나 처참한 비극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는 가장 짧다. 그러면서도 울컥한다. 갑선은 축 처진 사람이다. 우울하고 순박하고 숫하다.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돌아다니는 동생들을 보살피느라 힘들다. 아껴쓰기는 자린고비 저리가라인데다 어깨에는 보통 사람의 수십 배 부담과 피로가 얹혀 있다. 그런 갑선이 어느날 불쑥 알로하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다.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무슨 일인지 돈을 펑펑 쓴다. 갑선의 이발소 단골 손님이었던 김씨는 이상하게 여기고 이곳저곳 알아보고 다닌다. 깨달았다. 갑선은 미쳤다. 김씨는 건강검진의 핑계를 대며 정신병원에 갑선을 밀어넣는다. 사람 잘 믿는 갑선은 어수룩한 거짓말에도 감쪽같이 속아 정신병원에 머무른다. 시간이 흐르고 통장 잔고가 바닥나기 시작하며 갑선은 예전과 같이 돌아온다. 그렇게 퇴원하고, "선생님, 저는 왜 미쳐지지도 않는 걸까요?" 하는 말과 함께 목을 맨다. 이 죽음은 매우 갑작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갑선의 한탄은 그동안의 고통을 극한으로 함축해 놓은 듯하다. 얼마나 심하고 처절한 고통이든 부담이든 피로이든 참고 인내해오던 남자의 끊어져버린 정신줄. 얼마나 닳았으면 끊어지기까지 했을까. 어느 정도로 힘들었을까….



이혜경의 소설은 힘들다. 해풍처럼 강하게 밀려오는 바람을 견디기 힘들 듯 읽기 힘들다. '앎' 은 이혜경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고 사랑과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이혜경의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의 단편을 읽는 것이다. 과거와 과거, 과거와 현재가 버무러져 뿜어내는 고통의 아우라를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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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2-17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대단해요.
머잖아 이혜경, 한강을 넘는 젊은 작가 한 명을 우리는 만나게 되겠지요. ^^*
글에 대한 그 열정, 그 탄력 분양받아 갑니다.

이진 2012-12-17 22:28   좋아요 0 | URL
와, 팜므느와르님! 제 서재엔 처음이신 듯해요~ 아닌가요?
한강을 넘기는 지금의 제 능력으론 무린 거 같고, 이혜경이라면 비등비등할 것 같아요. 물론 감정선 같은 것들이요! 감사합니다. 또 좋은 글 올릴테니 들러주셔요~

2012-12-17 0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7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2-12-17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추천 열개 드리고 싶은 리뷰에요.
이렇게 읽어냈군요.
전 오늘 가서 마자 낭독하고 끝내고 올거에요. 너무 읽고 싶어서요.
해풍이 솔바람을 만났을 때, 요거 하다가 멈춘 상태라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앎, 우린 때로 모르면 더 나았을 것들을 알려고 들고 알게 되고 알아버리지요.
두렵고 고통스럽지만 앎 이후의 삶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래야하구요. 불끈!
조금은 흐린 아침, 12월의 중반 한 주를 시작하는 오늘,
단단하고도 무름한 마음으로 시작해볼까요. 응원합니다^^

이진 2012-12-17 22:3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읽으면서 계속 감사하고 감사했어요. 되게 좋은 글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나 사실 저도 후반부에 가서는 꾸역꾸역 읽어냈어요.
후반으로 갈수록 단편들의 힘이 달리는 건 사실이잖아요?
신경숙의 소설집도 그렇고, 이혜경의 이번 소설집도 그래요.
언제나 저도 응원할게요~ 파이팅!

ICE-9 2012-12-17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프레이야님에게 동감이에요.
처음 문장을 읽는데 '와! 이건 리뷰가 아니야. 하나의 작품인 걸'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소이진님처럼 쓰고 싶어요 ㅠ ㅠ (갑자기 제가 쓴 리뷰를 싸그리 다 지우고 싶은 충동이...) 아무튼 정말 잘 읽었어요. 이혜경 '너없는 그 자리' 꼭 읽어볼게요. 그리고 소이진님 문학하길 정말 잘 한 것 같아요.(더하여 평론쪽도 노려봐요^ ^)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

이진 2012-12-17 23:43   좋아요 0 | URL
아이구, 헤르메스님 제가 할 말을 하시면 어뜩합니까... ㅠㅠ
사실 첫 문단은 작품 이야기는 없고 주저리주저리 식이나 마찬가지죠! ㅎㅎ
언제 오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들러주시는 군요! 어때요, 실시간 댓글이죠? ㅎㅎ

착한시경 2013-01-2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앞 부분 읽고...헉~너무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 쓰실 글들도 기대가 됩니다^^

이진 2013-01-23 21:22   좋아요 0 | URL
와, 착한시경님 정말 감사합니다. 첫부분은 교회 갔다가 오늘 길에 가로등에 뿌옇게 낀 안개를 보고 생각났답니다. 들러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밤 되시길 :D
 



4. 짝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가 사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남자.



 

꼬리 없는 도마뱀 같은 의자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빛 없는 소슬한 공간을 꾸물거리면서 타고 오를 듯한 몸체에 올라탄다. 내려앉은 무게만큼의 소리가 한쪽 벽까지 달려가 부딪혀 반대쪽 벽으로 날아간다. 눈 한 번 깜빡일 동안 곰돌이 하더니 크기가 작아지고, 얼마 안 가 사라진다. 나는 두 손 깍지 끼고 눈을 감는다. 성당 유리창을 장식했을 법한 형체 희미한 물체가 일그러진 채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진다. 앞니가 조금 보일 정도로 입술을 열고 아버지, 하고 낮게 중얼거린다. 그러자 심장 박동이 편해지면서 덮인 눈꺼풀 안으로 광원이 불분명한 빛이 황황히 비친다. 구원의 핏방울처럼 성스럽게.

밤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보이지 않는 실존적인 존재에게 밤을 패가며 속에서 펄펄 끓여야 했던 것을 토로한다. 기도는 일종의 외침 같은 것이어서 오랜 시간을 하다 보면 몸도 목도 피로해지기는 하지만 고되게 땀 흘려 태산의 정상에 오른 등산가가 느낄, 사위가 뻥 뚫린 듯 시원한 기분이 몸을 장악한다. 그러나 가끔은 눈물을 흘리며 몇 시간이고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나는 어제의 일을 반추하면 할수록 곰비임비 쌓여가는 혼란 때문에 목소리를 달달 떤다. 떨림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


얼굴을 쭉 내민 달덩이가 앞을 환하게 밝힌다. 올려다본 달의 형상이 웃는 하회탈 같다. 흘리는 빛이 인자하고 포근하다.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듯 지상에 펼쳐진 달빛으로 걸어 들어간다.


*


별똥이다!

류빈은 저 혼자 고개를 쳐들고 걷더니 내 팔을 붙잡고 발놀림을 멈추었다.

어디?

벌써 산 너머 내려갔지.

조금 달뜨는지 미소가 활짝 피었다. 나는 시삐 발길을 돌렸다. 거짓말이네, 라고 비꼬아 말하자 류빈은 발끈하며 재빨리 나의 뒤를 따라잡는다.

거짓말 아니라, 진짜 있었어.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었다. 류빈도 잠자코 따랐다. 간간이 그의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교과서며 필통이며 갖가지 문구들 가득 든 가방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차가운 바람이 앞을 막아서서 한 발짝 떼기도 어려웠다. 그와 대조적으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달은 입을 달싹이며 따듯하고 부드럽게 빛살을 노래했다. 류빈은 자꾸 고개를 들어 달을 보며 해갈을 갓 한 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


마침내 공원 산책로에 접어들었고, 마녀의 입김 같은 바람에 지친 나는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다. 눈에 뜨이는 벤치를 잡고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류빈은 털실로 짠 두터운 목도리를 감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과 검정 실이 뒤엉키어 하나의 긴 형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꽤 멋졌다. 류빈은 그 목도리를 자신이 직접 짰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평소 손재주로 보아 필시 다른 사람의 손길이 거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소원 빌어야겠다.

류빈은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웬 소원?

별똥 봤으면 소원을 빌어야지.

류빈은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히죽 웃는다.

무슨 소원 빌게.

나는 그의 머리 너머로 솟은 나무의 우듬지를 공연히 지켜보며 말했다. 류빈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 생각났다며 주먹을 꽉 쥔다. 무엇이냐고 묻자 말이 없어 그러려니 했다.


*


까만 도화지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던 점 하나가 스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간다. 하도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것을 놓칠 뻔했지만 용케 포착해냈다. 크기도 규모도 작은 별똥이나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일 듯한 별똥의 자국을 눈으로 훑어간다. 류빈을 알지 못하던 때에, 유성우가 내린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고 설렌 마음으로 기다린 적이 있다. 나의 상기된 모습은 마치 첫 소풍을 앞둔 아동의 뒤척임 같았다. 창가에 의자를 두고 앉아 머그잔에 녹차를 탔다.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지켜보았다. 마음까지 흠뻑 적셔줄 것을 기대하며 한참을 꼿꼿이 앉아 있었는데 유성우는커녕 별조차 깜빡이지 않아 나는 화를 내며 의자를 치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뉴스를 보니 새벽 4시경에 별의 눈물이 떼로 내렸다고 했다.

나무들에게서 옷을 빼앗아 입은 땅을 때리며 걸어간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고, 그저 배회한다. 아직 한구석이 먹먹하다. 그러나 절대자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제는 내가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 영 자신이 없다. 류빈이 뜬금없이 내뱉은-장난이라고 믿고 싶은 말이 머리카락 되어 한 올 한 올 몸 안으로 흡수되는 양 찝찝하다. 그 말이란, 내가 류빈의 팔을 감싸 쥐자마자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기계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


우리는 변두리에 있는 후미진 요양원에서 팔다리를 사용하지 못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의 식사를 도왔다. 잘게 다져진 장조림을 밥과 비벼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힌 한 노부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남의나이는 족히 드셨을 고목 같은 노부인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겨우 세 숟가락을 떠먹였을 즈음에 류빈은 어느새 식사 보조를 끝내고 뒤에 서 있었다. 힘들지, 라고 물으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류빈을 보며 소박하게 웃었다.

밥이 반 정도 줄어들자 노부인은 수저를 아무리 갖다 대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노부인의 목을 조르던 음식받이를 떼고 휠체어를 밀어 밖으로 모셨다. 수저를 쥐던 비닐장갑을 낀 채로 류빈에게 다가갔다. 작은 바퀴가 구르는 사이 불쑥 떠오른 우스운 이야기를 그에게 해줄 요량이었다. 요양원 내(內)가 보일러와 히터 등으로 상당히 더워서 이마에는 땀이 송글 흐르고 있었다. 아직 노인 몇이 식사를 마치지 않았기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확히 말이 전달되지 않을 듯싶어 나는 류빈을 안다시피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흠칫 몸을 떨었다.


*


류빈은 나의 손을 밀쳤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미안, 호성아.

짧은 두 단어를 먼저 뱉은 다음, 몇 마디를 더하더니 초조하게 서 있었다. 류빈의 말이 끝나고 사실 그보다 더 식은땀을 흘린 사람은 나였다. 나는 이곳에서 일어난 발화에 꿈만하여 일단 궁따고 보았다. 그러나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휘저으며, 숟가락을 바르르 떨고 있는 백발의 노인에게 달리듯 걸어갔다.


*


호성아, 너는 아니?

너의 웃음에 나는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는 걸.

너의 행동에 나는 망령되이 떨린다는 걸.

매일 나를 억누르고 가두느라 마음의 사슬이 닳아 끊어질 지경이라는 걸.

헤진 심장 조각 사이로 농축된 눈물이 빼짓이 흐른다는 걸.


낮이고 밤이고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몰라.

그저 친한 친구 사이의 우정이나 동경인 줄 알았어.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어.

그런데 너의 웃음과 손길에 아파하는 나를 보며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어.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어.


*


류빈은 한쪽 눈을 가릴 정도로 앞머리를 길렀다. 직모요 갈색이 은근히 묻어나는 머리칼은 그와 퍽 잘 어울렸다. 눈이 가려짐으로써 류빈에게는 달무리 같은 기품 퍼져 나왔다. 대부분의 반 친구들은 그 기품 때문에 류빈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류빈이 사교적이거나 활발한 중세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들의 입에는 자주 오르락거렸다. 매초롬한 이목구비 덕도 있겠고, 류빈 특유의 멋도 한몫했겠다.

류빈은 원색의 포장지로 싸인 선물상자를 자주 받았다. 그것은 간접적인 고백―아니, 구애의 행동이었다. 여자들은 제 어미의 화장품들까지 총동원하여 가장 예쁘게 분칠을 한 상태로 류빈의 앞에 나타났다. 한 번 흘낏 본 그 상판들은 허옇게 뜬 것이 척 보아도 부담스러웠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과 같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류빈 역시 모든 선물과 고백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자들은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애했다. 그중에는 K도 있었다. 윤기가 나는 머리카락을 날개뼈 밑으로 늘어뜨린 여자였다. 박속같은 피부 위로 곧게 솟은 콧날에 반해 한동안 K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던 속담은 나와 K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K는 뭇 여학생들처럼 류빈에게 쫓아가서는 꼬리를 홰홰 쳤다.

K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류빈은 커다랗게 접힌 종이를 흔들며 나에게 왔다.

선물은 거절해도, 편지는 거절 못 하겠어.

혀를 내밀며 류빈은 웃어 보였다. 하트가 조그맣게 붙은 걸 보아 러브테러 비스름한 것이리라. 류빈에게서 편지를 건네어 받아 찬찬히 살펴보니 K가 쓴 것이었다. 나는 앞에 서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류빈을 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곧 사그라지긴 했지만, 꽤 강렬한 감정이어서 오래 잔상에 남아 있었다.

매번 거절만 하지 말고 아무라도 잡고 한 번 사귀어 봐.

애써 웃으며 K의 편지를 돌려주었다. 류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어. 마음에 드는 애가 없네.

나는 그 순간만큼은 류빈이 정말 미웠다.


*


류빈은 어머니와 갓 교복을 사 입은 여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이태 전에 저혈압으로 죽었다. 류빈은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아버지가 죽자 마음이 편해졌다고 좋아했다. 아버지는 류빈과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의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벌어오는 돈마다 술과 담배, 도박에 탕진하는 몰상식한 인간이었기에 류빈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되레 대접붙이의 욕설과 폭행 하에서 늘 억압받고 살아왔다. 친구 하나 집에 데리고 와 본 적 없었고, 집에서 저녁 한 끼를 맛있게 먹지 못했다. 류빈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날, 상당히 거리가 있는 우리 집에 왔다. 현관에 서서 피곤한지 눈그늘이 내린 눈을 둥글게 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괜찮아. 오히려 좋은걸.

고맙게 가족들이 자리를 피해주어서 나는 류빈과 둘이서만 밥을 먹었다. 류빈은 밥알 하나하나를 깨작거리며 젓가락을 놀렸다. 연신 괜찮다고 말했지만 끝마나 흐려지는 목소리에서 슬픔이 확연히 묻어났다. 그 슬픔은 밤이 되자 결국 눈물로서 흘러내렸고, 나는 류빈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청소를 끝내고 서둘러서 요양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류빈은 입을 꼭 다물고 뒤를 따랐다―말을 하거나 붙잡으려 뛰지 않았다. 짧아진 해는 벌써 얼굴을 숨겼다. 주차장에 차가 넘쳐 시간을 못 맞춘 운전자들은 길거리에 주차해야 했다. 죽은 사람이 인맥이 넓은 사람인 듯 수많은 차는 일제히 장례식장을 향해 있었다. 저녁 공기는 차가웠고, 그래서 나는 빠르게 달렸다.


*


별똥 하나가 또 떨어진다. 나는 소원을 빈다. 소원이라기보다 다시 기도한다.




제 주제에 한강을 한 번 흉내 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강의 감정이라던가 문장을 따라해보았다기보다 철저히 형식만을 흉내 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이 나온 것 같아서 기분 좋네요. 지금껏 써온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고, 또 오래 붙들고 있던 작품이에요. 류빈에게 한동안 빠져서 지금도 눈물이 빼짓이 새어나오네요. 마무리를 급하게 하느라 생각한대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실 더 적을 만한 글도 떠오르질 않네요. 한 이주 뒤나 떠오를 때 이어보려구요. 원래 이 글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방문자 수가 3만 명을 넘었더라구요. 3만 명 넘으면 하나의 리뷰를 올리려고 했는데, 책을 다 읽지 못했기에 소설로 대신합니다. 곧 한강이나 황정은의 리뷰도 올릴 게요. 폭풍 리뷰가 예상된답니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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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2-03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한강 폭풍리뷰 기대하고 있어요. ^^ 노랑무늬영원도 읽은거에요? 어때요?

이진 2012-12-04 00:0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반가워요. 노랑무늬영원 읽었어요. 여수의 사랑도 몇 편 휘넘기곤 있는데 노랑무늬영원을 거진 다 읽어가서 이걸로 쓰려구요. 정말 좋죠. 역시, 한강, 이죠.
 



                             걱대는 새벽




 

          새벽

       어둠은 가볍게 퍼덕인다

          어긋난 관절은 내

                              

                                

                                 

          암흑은 사이로 스민다

 

          시리다

          암흑

 

          누군가의 따뜻한 언어를 기다린다

          무심한 듯 비상

          주체를 떠난 나비는 훨훨

          날아 암흑 위에 착지한다

          노란 액체로 흘러내리고

 

          해가 솟고

          뼈는 붙고 몸은 서고

          팽창한 기압을 이며 어스름을 걷는다

          나비로, 무릎은 단단하다

 

          아이스크림 같은 공기가 뭉텅

          뭉텅 달콤하게 입으로 던

                                                                 져진다

          언어의 편린이 피를 타고 전신을 순환

          누군가의 언어, 누군가의 편린

          너의 말, 너의 조각

          나의 마음, 나의 비늘

 

          서서히 장막이 걷힌다

          암흑도 나비도 편린도……

          관절이 다시 녹아내리려 한다

          나비의 형체가 잡히고

 

          나비는 빛으로부터 은닉

          몸이 비걱거린다

          암흑을 향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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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10-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시를 쓸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신 거에요? supportEmptyParas 라는 단어묶음도 범상치 않고 endif라는 것도 흥미롭네요. 다소 을씨년스러운 오늘에 잘 어울리는 시인 것 같아요. 계속 창작은 이어가고 있으시군요!

소이진 2012-10-10 16:1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앗! 그건 한글문서를 복사해서 크롬으로 글쓰면 나오는 괴문자에요. 크롬은 인터넷 익스플로러 같은 건데 깜빡했군요. 집에 가서 깔끔하게 지울게요. 이건 예전에 써둔 시에요. 요새 창작이 영 안되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요... 시험 끝나면 억지로라도 책을 읽어서 문학청년의 포부를 되살려야겠네요.

댈러웨이 2012-10-1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안녕! 오랜만이에요. 요즘 딴 동네에다 아주 살림을 차렸군요. 흥~ 소이진님 시 써요. 이런 시어 저도 좀 한번 써 봤으면. 그런데 '비걱거리다/비걱대다'라는 표현을 쓰는군요. 제목도 참 좋다요. 시험 잘 보고 있냐고 아는 척 하려다가 스트레스 받을까봐 안 물어보겠어욤. 또 봐요.

소이진 2012-10-10 16:2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오랜만이어요, 댈러웨이님. 딴동네 살림도 지금 소홀해요. 댈러웨이님 동네도 새 글 표시가 안 뜨던걸요? 이 시는 거의 처음 써보는 시라고 해도 무방한데 생각보다 잘 나와서 저조차 놀랐어요. 글틴에서는 차상급 대우를 받았고 시 좀 쓴다는 친구도 인정해 주었으니까요. 이로 인해서 허세 같은게 생긴 것은 문제지만 말이어요. 거리다와 대다가 둘 다 사용되었군요.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상상도 못하실걸요! D-1입니다!ㅠㅠㅠ

2012-10-18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9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8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9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