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무늬영원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곤 실레  네 그루의 나무들 1917>



열일곱 살이 되는 겨울, 내가 처음 먹으로 그려보았던 나무 기억하나요.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 라고 당신이 말하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하고 당신은 덧붙여 말했지요. 그날 오후 내내 당신의 서가를 뒤져 나무 그림들을 봤습니다. 실레가 그린 어리고 섬약한 나무들을 발견했을 때 당신의 말을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면, 나무 그림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고요한 자화상일 거란 생각도 얼핏 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192-3









 

한강의 소설은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으로 설명 가능하다. 아니,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이 오롯이 한강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실레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암울하다, 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이울고 있는 붉은 태양과 제자리를 잡고 서 있는 나무들, 그 중에 헐벗은 나무 하나, 생기 없는 땅과 하늘, 핏빛 같은 붉은 계열의 색이 한데 모여 그로테스크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쟁의 폐허를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부정적인 시각에도 두 종류가 있는데 부정적인 고요와 부정적인 격렬함이다. 실레의 어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은 두 가지 모두로 볼 수 있다. 고요하다 못해 쓸쓸함 기운이 그림 안에서 맴도는 것이 느껴진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옆에, 곧 옷이 없는 몸을 함께 할 것만 같은 나무 세 개가 힙겹게 서 있다. 초롯빛 풀 한 포기 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그림에서 오로지 해만 붉은 빛을 내뿜는다. 그러나 그 빛조차 쓸쓸하고 고요해서 전체적으로 그림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한동안 쓸쓸함을 맞이하고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어보자. 쓸쓸함 이면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것이 보이는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넘어가려던 붉은 태양이 투쟁을 위한 기(旗)의 형상을 취하고, 공연히 눈물만 흘리고 벌벌 떨고 있을 나무들이 투쟁을 위해 꼿꼿히 제 몸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허무하고 허탈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암울하고 쓸쓸하고 음산하였던 그림이 서서히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소설은 여리고 섬약한 인물 그림이다. 실레의 하늘과 들처럼이나 생기 없고 쓸쓸한 배경을 살아간다. 그들에겐 실레의 나무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病이다. 한강의 사람들은 모두 병들었다. 그것이 육체적인 病이든 정신적인 病이든 病은 한강의 사람들을 힘겹게 만든다. 지친 사람들은 조용해진다. 빠르고 격정적으로 파도치는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듯 느려진다. 그들은, 한 인터뷰의 내용을 조금 빌리자면,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데나 나서지 않으며 나부대지도 않는다. 오지랖이 넓지도, 그렇다고 남에게 무관심하지도 않다. 주어진 삶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고 이겨내려는 사람들이다. 착하기보다 그들은 힘든 사람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들 같은 사람들이다. 한강은 이런 사람들만을 채용한다. 그래서 한강의 소설은 우울하고 축 처져 있다. 커다란 바위가 소설이라는 자그마한 포대기를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또 그렇다고 그 돌이 집채만하지는 않다. 적당히 무거우며 적당히 가볍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처럼 인간의 가장 처연한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황정은처럼 통통 튀지도 않다.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싸여 있다. 그것이 한강의 매력이다.



이제 실레의 그림을 구도적으로 보자면, 수평과 수직이 바둑판처럼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과 들은 수평으로 나무들은 수직으로 뻗어 둘이 교차된다. 수평적 구도는 안정감과 평화로움, 그리고 넓이감을 주며 수직적 구도는 엄숙함과 성스러움, 상승감을 준다. 실레의 나무는 엄숙하고 성스러운 사람들이다. 모든 그림이 자화상이라는 말을 통해 나무가 곧 실레라는 것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는 어떤 것을 이겨내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다. 이육사의 [교목]에 드러나는 의지다.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교목(喬木), 이육사





우리의 저항시인 이육사는 자신의 투쟁 의지를 교목-줄기가 곧고 굵고 긴 나무로 표현했다. 말아라, 아니라, 못해라 하는 부정 어미들이 나타내는 부정적 의지는 결국 '교목'이라는 것에 흡수된다. 하늘을 향해 곧게 선 나무는 투쟁이자 살아감인 것이다. 실레의 나무들도 그렇다. 이육사의 투쟁 의지가 실레의 나무에게서도 보인다.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선 실레의 나무, 그러니까 실레가 어떤 것에 저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한강의 소설이 이러하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어떤 것에 투쟁한다. 그것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인생의 벽이고, 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이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목소리를 나누는 가족이고, 시나브로 흘러 바야흐로 다가오는 시간이고, 그것들이 뭉쳐 만드는 세상이다. 한강의 사람들, 그러니까 한강은 '살아내야지...' 중얼거린다. 그들에겐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시련이 닥친다. 아까도 말했던 病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아이를 갖기 못한 스트레스로 인한 거식증, 트라우마와 아프고 암울했던 기억들, 성정체성의 혼란, 한강의 病 중 가장 생소하고 흥미로운 외계인손 증후군, 혈우병, 그리고 자동차 사고. 모든 인물들이 아프고 조용하다보니 그녀의 소설은 모두가 비슷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소복히 쌓인 재 같은 글도 비슷하고 인물들이 취하는 행동이나 가치관도 비슷하고 결말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미묘하게 다르다. 한강의 글을 계속해서 읽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한강의 소설을 한 단어로 표현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할 것 같다. 한강은 비슷하면서도 참 다른 작품들을 보여주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이나 감각에는 변화가 없지만 때론 [채식주의자] 같은 파격적(한강은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싫다고 하였지만)이고 진지한 소설을 쓰는 한편, [희랍어 시간] 같은 아주 얇은 유리잔 같은 소설을 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답을 독촉한다면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이렇게 답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아." 그 말고도, "한강의 소설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글로 옮긴 것 같아." 나는 전자가 마음에 든다. 어린 새의 뛰는 심장은 여리게 느껴진다. 조금만 건드려도 봉숭아 꽃 터지는 톡 터질 것 같다. 그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는 모습은 전혀 여리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심장이 뛰는 횟수만큼이나 가슴에 콕콕 박히는 느낌이다. 즉 이중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사상처럼 이원적인 것이다. 한강의 소설은 이중적이다. 실레의 그림처럼 여리고 섬약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면에는 피를 온몸으로 순환시키기 위해 열심히 뛰는 심장이 존재한다. 그것이 지치고 힘든 한강의 인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유리막, 이라는 표현은 사실 한강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을 인간이 가진 아주 연하고 투명한 부분을 생각하며 썼다고 밝혔다. 나는 [희랍어 시간]을 읽었으나 글이 계속 겉돌아 깊은 것을 느끼진 못했지만 그래도 소설의 분위기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조용했으며 고요했다. 소설이 이렇게나 고요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깊은 고요였다. 


적요


, 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 고요와 적요 속에 한 여자와 남자가 격렬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괴리적이고 부조리적이어서 놀랐었다. 그것은 [노랑무늬영원] 전체를 휘감고 있다. [노랑무늬영원]은 괴리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현실적이나 현실적인 것을 감싼 기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인도 여행기마다 나오는 구도적인 분위기 같은 건, 난 전혀 못 느꼈어. 굳이 특별한 게 있다면, 숨겨진 게 없다는 것? 예를 들면 죽음, 거기선 시체를 밖에서 태워. (중략)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다. 저녁에 붙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 아직도 모르겠어. 지글지글 끓는, 마지막 지방이 타들어가고 있는 그 심장을 보고 있는데, 왜 저절로 내 손이 심장 위로 올라왔는지.


한강, 밝아지기 전에 '노랑무늬영원' 109-110





[노랑무늬영원]은 한강다운 글이다. 7개의 옹기종기 모인 소설이 어쩜 그렇게도 한강 같은지 보면서도 신기했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의 긴 텀이 있는 소설들. 그중에는 내가 처음 한강을 만났던 '왼손'이라는 작품도 있었다. [노랑무늬영원]에서 가장 한강답지 않은 소설인데, 책장을 덮은, 지금보다 한 살 어린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었다. 문장과 구성의 탄탄함과 어떠한 경지는 둘째 치고라도 놀라울 것이 많았다. 알라딘에도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대체 왼손이 움직이는 것을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한강은 무얼 말하려고 왼손을 통제불능으로 만든 것일까? 그 해답을 나는 후일에야 알게 되었는데,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이었다. 외계인손 증후군이라는 것도 셋째 치고나서 나는 '왼손'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한다. 일 년 전의 나는 돈이든 이성이든 권력이든 욕정이든 자신에 의해서 모두 잃게 된다는 것이다, 라고 읽었다. 불현듯 제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한 왼손과 그로 인해 수 년 만에 만나게 된 하나의 인연이 평범하고 순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마침내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서사적이고 기이하고 비실존적인 흐름... 어쩌면 현실적이기도 하나 비현실적으로 읽히는 이야기... 바로 그것이다. 여운조차 찝찝하다. 마치 피를 뒤집어 쓴 듯 끈적하고 꾸덕한 여운이 남는다. [노랑무늬영원]에 자리 잡은 7권 중에서는 가장 동떨어져 있지만 이 소설이 가장 한강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한강답지 않지만 가장 한강다운 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훈자'와 '밝아지기 전에'와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구조가 비슷하다. 마치 영화의 교차편집(교차편집의 개념이 여기에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처럼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고 그로서 시의 모습과 영상의 형상도 공존하는 듯 보인다. 한 단락, 한 문장, 한 단어 모두가 한강이 창조한 하나의 상징체이다. 한강은 말을 적당히 아끼는 법을 안다. 특히 '훈자'에서 한강은 한강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잔잔한, 그러면서도 충분히 짧은 단락들이, 역시 뒤죽박죽 이어지다가 끝에 이르러서는 여러개의 시각이 스치듯  빠르게 지나가며 각자의 말을 내뱉는다. 그 수많은 발화와 언어의 가닥이  꼬이고 꼬여 만들어 낸 질문. 곰비임비 흐르는 사건이 쌓이고 쌓여 건축된 탑. 그것이 '훈자'이며 나머지 한강의 소설이다. 한강은 평범하게 순행적으로 흐르는 구성보다는 역순행적인 구성을 좋아한다. 그것이 한강을 잘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구성이기도 할테고.



앞의 소설들은 '인간'을 그린 것이라면 뒤의 소설 두 개,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여성을 그린 소설 같다. 여성이라기보다 연인, 사랑을 그렸달까. 나는 이 소설 두 개를 근 한 달 동안 읽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었는데 읽고 난 지금 왜 그랬을까 의문스럽다. 이 소설 두 개는 [노랑무늬영원]의 소설들 중 어떤 것보다도 재밌다. 재밌으면서도 잔잔하고, 잔잔하면서도 애달프다. 그래서 재밌다. '파란 돌'은 읽으면 설레게 되는 소설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게 되는 소설이다. '파란 돌'은 막 피어나는, 조심스럽고 애틋한 사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지칠대로 지치고 힘들대로 힘들어 서로가 지겨워진 막바지의 사랑이다. '파란 돌'은 시작이고 '노랑무늬영원'은 끝이다. 그러나 정작 죽음은 '파란 돌'에 있다. '파란 돌'에서 파란 돌은 곧 생명이지만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남자는 혈우병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혈관이 터지는 통에 조심히 살아가야했다. 그래서 남자는 인생 자체가 조심스러운 남자였다. 여자를 만나고, 좋아하게 된 후로도 조심스러웠다. 여자도 남자를 조심스레 대했다. '파란 돌'은 조심스러운 사랑의 일련의 기록이다. 남자는 뇌에 피가 고여 죽은 채로 발견된다.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였다. 한강이 야속했다. 그를 왜 죽였나요. 살려서 여자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여주시지. '노랑무늬영원'의 여인은 검정 개를 피하려다 차가 전복했다. 그림을 그렸던 여인은 왼손을 못 쓰게 되었고 덩달아 오른손마저 고장났다. 여인은 몸을 회복하는 이 년 동안 마음을 잃었다. 더 정확히는, 情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다. 남편은 여인이 지겨워졌고, 그만큼 여인도 남편이 지겨워졌다. '노랑무늬영원'도 조심스러운 사랑이다. 다만 언제 깨질지 알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조심스러움이다. 그런까 사랑이 없는 조심스러움이다. 사랑 없는 사랑을 지속해나가려니 여인과 남편은 서로를 경멸하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아니 그것이 미움의 감정일까? 아니지. 미움이 아니지. 



[노랑무늬영원]은 한강이다. 실레의 여리고 섬약한 나무 그림과 같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살아가야하는 소설이다. 살아내야 한다.








그러나 막상 당신에게 가지 않자, 깊기만 하던 가슴의 통증이 마치 넓게 도려내어진 듯 슴벅거려 더욱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당신을 찾았을 때 나는 얼마간 체념한 채 당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습니다. 내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선을 들키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토록 내 마음을 괴롭혔던 그 사람인지, 할 수 있다면 나를 단번에 실망시킬 구석을 찾아내 그 이상한 고통을 통째로 들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디가, 아팠니?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격렬한 비참함과 환희가 동시에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그 혼란한 순간 내가 희미하게 깨달은 것은, 그 모든 고통이 아마도 당신을 통해서만 달래어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강, 파란 돌 '노랑무늬영원'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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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2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4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3-01-02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강은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진님 때문에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근데 왜 우리동네 도서관에 한강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없는 걸까요...............?

이진 2013-01-04 00:14   좋아요 0 | URL
한강은 동네 도서관에서 취급할 정도의 인지도는 없다고 봅니다.
이쪽에서야 대단한 문인이지만 아직 세상에 나가면...
친구들에게 한강 아냐고 물어보아 소설가 한강? 알지알지, 하는 답변 들을 수 있을까요...

댈러웨이 2013-01-02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고로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이네요. <희랍어시간>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한강 작가 엄두가 안 났었는데 이 단편집은 추천이 많아 기대 만빵. 처음엔 반응이 좀 엇갈리는가 싶었는데 제가 잘못 알았나봐요.

소이진님, 멋지게 새해를 시작했네요! 올해 말에는 소이진님이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생각하니 긴장도 되고 그래요. 그리고 숙제. 시제는 '인어'. 안녕 소이진님. (쑝~) 아, 실레의 그림에서 태양은 제 눈에 보이지도 않았어요. --;

이진 2013-01-04 00:17   좋아요 0 | URL
<노랑무늬영원>의 시즌이죠? 저는 아마 댈러웨이님과는 다른 의미로 <희랍어시간>에서 고생을 했을 겁니다. 글이 겉돌아서 혼났어요. 실망을 좀 했는데 그건 아마 제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한 번 더 읽으려구요. 어쨌든 아무리 실망을 했어도 좋은 작가는 좋은 작가입니다. 한강 좋죠... 히히 서울예대 희망하는 것도 순전히 한강한테 배우려고... 근데 막상 가면 윤성희 작가님께 이년 내내 배울 것 같습니다. 아... 고민이군요.(순 김칫국.... ㅠㅠㅠㅠㅠㅠ)

꺄, 숙제! '인어'! 토요일까지 합평 소설을 써야하는데, 그걸 완료해내고, 아차 오늘 하나를 쓸 예정이니, 그 두개를 완료해내고 써낼게요. 다음주엔 서울에 가는데 서울가서 써야겠네요. 후후... '인어'라... 아! 제 프로필 보시고 낸 것인가요!!! ㅋㅋㅋ 인어는 왜 다 여자인가. 이거 김혜순 시인 시 제목인데, 이걸로 소설을 써봐도 괜찮을 것 같네요. 굳굳.

사실... 저도 그림 해설 보고 태양이 있구나... 아... 있구나... 태양이 있었구나... 헤헤...

마녀고양이 2013-01-0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은 한 살 나이 먹었을 뿐인데,
글은 열 살 정도 나이 먹은 듯이, 어쩜 이리 멋진지요..... 와, 물 흐르듯이 정신없이 페이퍼를 읽었답니다.

푸른 돌은 설레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군요.
짧은 이 한 줄로 저는 충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한강이라는 작가, 섬님의 페이퍼에 이어 계속 유혹하네요.
인용해주신 문구들도 너무 맘에 드네요.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다.........

소이진님, 우리 그렇게 살아요. 힘들어도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도록.... 그렇게요.
즐겁고 평안하고 건강한 새해 되시구요.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많이 부족한 리뷰입니다. ㅎㅎ
달여우님의 탄탄한 글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어요.

읽어보신다면 정말 그런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저는 평론가들처럼 치장하지 않고 그대로 단어로 옮겼어요. (이 문장은... 그러니까 평론가들보다 뛰어나다, 하는 식으로 읽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파란돌'은 정말 설레요. 연애소설은 아닌데, 연애소설보다 더 설렌다니까요.
'노랑무늬영원'은 침묵하는 글이지만, 여기도 사실 분홍빛이 있어요. 이 소설도 설레는 면이 있다니까요.
한강은... 참 매력적인 작갑니다.

우리 몸은 다 타도... 심장은 꼭 남아서 끓는 한해! 그런 힘찬 새해 보내요.
달여우님 파이팅! 나도 파이팅 ㅎㅎ 새해엔 건강하세요~

비로그인 2013-01-02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모바일로 로그인이 되네요
이런 글을 새벽으로 쓰시다니요
겸손이 끝을 달리십니다아

이진 2013-01-04 00:20   좋아요 0 | URL
유다다님 어서 글을 쓰시지요...
소설을 쓰시란 말입니다.
소설 아주 잘 쓰시더니 ㅠㅠㅠㅠㅠ

프레이야 2013-01-0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소이진님의 노랑무늬영원!
실레의 그림 중 왼쪽에서 두번째 나무, 그게 한강 같아요.
채식주의자, 중 거꾸로 박혀있던 불꽃나무의 이미지 같기도 하고. 여린 듯 강한.
아무래도 이 책을 봐야겠다는 강렬한 유혹이 활활~~~

이진 2013-01-04 00:22   좋아요 0 | URL
드디어! 드디어 올렸습니다 ㅎㅎ
젠장, 제가 그걸 생각 못했군요.
프레이야님 말이 맞아요.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바로 두번째 나무...그러니까 한강이죠.
어서 읽으십시오... 댈러웨님 말처럼 <노랑무늬영원>의 계절아니겠습니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