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처벌하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위반이 필요해진다. 위반을 통해 자신의 죄를 확인하고 그것을 처벌함으로써 자신의 도덕의식을 더욱 확고하게 확립하는 개인을 우리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또 순수한 처벌의 목적으로 타인의 위반을 치밀하게 감시하고 단죄하는 개인을 역시 상상할 수 있다. 다양한 변이가 가능하겠지만 모두 같은 심리구조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쾌락은 위반의 쾌락이 아니라 위반 뒤의 처벌의 쾌락이다. 위반은 처벌을 위해 봉사하는 법의 노예로 전락한다.
초자아는 위반을 먹고 자라는 괴물처럼 그 잔인성을 점점 강화한다.
금지와 위반은 서로 기묘한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위반이 초자아의 망에 잡혀있는 한 위반은 결코 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위반과 처벌의 악순환은 지속되는 것이다. 위반은 더 이상 반역의 실천이 아니라 죄의식에 이르는 통로이다. 이런 식의 위반은 결국 법의 현상유지나 강화에 기여할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반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위반의 욕망에 바탕을 둔 정신분석의 윤리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좇음으로써 초자아의 가학적인 요구를 무력화하고 욕망의 만족을 성취하고자 한다. 성욕의 희생을 강요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지배질서는 따라서 근원적으로 부정되고, 만족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가 지속적으로 추구된다. 위반은 결국 아버지의 도덕주의 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
같은 쾌락에서 출발하지만 법의 금지를 만나면서 쾌락은 문화의 테두리 내에서 용인되는 쾌락과 문화가 금지하기에 고통을 수반하는 희열로 나누어진다. ‘희열은 금지를 넘어섬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고통스러운 쾌락‘이다. 반면 쾌락원칙은 희열을 포기하고 쾌락에 안주한다.
쾌락원칙은 사회가 정해 놓은 법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주체를 금지된 대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주체가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쾌락은 따라서 도덕적 선(善)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라캉은 의도적으로 도덕적 선을 영어 ‘the good‘으로 제시한다. 영어에서 ‘굿‘은 도덕적인 ‘착함‘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맥락에서의 ‘상품‘을 의미한다. 쾌락은 도덕적인 선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으로 그 뜻이 확장된다. (중략) 쾌락원칙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지배질서의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보수적인 원칙이다.
간단히 말하면 욕망은 욕망과 충동을 포괄하는 상위개념이다. 상위개념으로서의 욕망이 다시 그 하위개념으로 자기 자신과 충동을 거느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쾌락이 다시 쾌락과 희열로 나누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식의 개념 구성은 정신분석 이론에서 결코 낯선 일이 아니다.
칸트의 윤리학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재해석에서 특히 놀라운 것은 라캉이 칸트를 사드와 연결한다는 점이다. ‘불온하고 사악한‘ 난봉꾼 사드를 ‘순수하고 선한‘ 철학자 칸트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그는 칸트 윤리학의 그늘을 드러내고자 한다. 🙄 사드 또 나오는 데 ㅋㅋㅋ 칸트랑 나와버림ㅋㅋ
프로이트를 인용하며 라캉은 ‘이상화는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시(identification)와 관련되는 반면 승화는 (이와)매우 다른 어떤 것‘이라고 단언한다.(111)대상에게 완전한 속성을 부여하는 이상화의 과정은 그 바탕에 대상과의 동일시를 깔고 있다. 다시 말해 대상을 향한 이상화는 주체의 자기 자신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동일시를 통해 대상에 투사하는 심리 과정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아도취적이다. 이에 반해 승화는 이상화와 ‘매우 다른 어떤 것‘으로 제시된다. 적어도 승화는 동일시나 자아도취(narcissism)와는 다른 맥락에서 사유되어야 함을 라캉은 암시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안티고네의 오빠는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279)
이러한 ‘대체될 수 없는 특이성‘은 영웅이나 배신자와 같은 구체적인 특성보다는 폴리네이케스의 존재 그 자체를 지목한다. 어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거나 지적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남다른 용맹함을 지녔다거나 하는 이유로 안티고네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공동체를 배반한 배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가 사랑하는 폴리네이케스의 ‘독특성(singularity)‘은 그가 구체적으로 지닌 어떤 특징의 차원을 넘어선 그의 존재 자체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어떤 특징도 지니고 있지 않음에도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실재를 가리킨다. *안티고네는 구체적인 ‘무엇‘이 아니라 존재의 한가운데에 자리하는 ‘공백‘을 사랑한다.* 🫣공백
사드가 희생자의 깊은 곳에서 ‘파괴될 수 없는‘ 본질로 발견하는 것은 타자의 결여의 자리를 채운 자신의 환상이지만, 안티고네가 발견하는 타자의 ‘지울 수 없는 성질‘은 환상으로 채울 수 없는 실재의 공백 그 자체이다. 사드는 타자의 결여를 부인하지만 안티고네는 결여를 긍정하고 사랑한다. 사드는 결여를 환상으로 채우지만 안티고네는 실재를 결여로 비워둔다.
라캉의 정신분석이 제시하는 윤리는 "네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라는 정언명령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때 주체가 충실히 실천해야 할 ‘욕망‘은 생물학적인 본능이나 자본주의적인 물신숭배, 나아가서 체제 순응적인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불순한‘ 욕망들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그것은 ‘순수욕망‘이라 불려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이 문명 이전 자연 그대로의 ‘본능‘을 회복하려는 낭만적인 기획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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