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 천재 시계사와 다섯 개의 사건
다니 미즈에 지음, 김해용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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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전 꿈에 피투성이 첫사랑이 오랜만에 나왔다. 그녀석의 등을 꼭 안고 

"난 이렇게 절실한데 넌 왜 내가 필요 없어 졌어?"

십수년만에 만나서 묻는 말이 겨우 저런거라니.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애원한다는 말이 표현할 수 있는 대부분의 찌질한 행동을 보인 끝에도

잡을 수 없던 마음인데, 그렇게 뒷모습이라도 봐도 여전히 좋더라는 것. 

참 어처구니 없게 속이 없는 인간이다.


이 책은 이렇게 소중했지만 잊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한때는 베드타운을 끼고 번성했지만 지하철 쪽에 다른 상가가 생기며 쇠락해버린 상점가의 시계방과 미용실이다. 


소재가 무엇이든 작은 상점가의 이야기는 언제나 듣고싶다. 미미여사가 쓰고 있는 에도시대 거리 이야기나 작은 서점, 밥집, 빵집 이야기들를 많이도 읽어왔고 항시 추억에 잠긴다. 지방 소도시 중심상가의 밥집 딸로 다섯살 무렵엔 노점에서 프랜치토스트를 사먹고, 집 맞은편 약속다방에서 우유를 얻어먹는 촌놈이지만 그닥 촌스럽지 않는 어린시절을 보낸 탓이다. 도심이 이동하면서 이제는 상점의 반쯤은 문이 닫혀 있지만 아줌마가 된 어린시절 동무가 여전히 찻집을 하며 일년에 한두번 찾아갈때마다 어제 온 것처럼 우롱차 한사발을 내놓고 수다를 떠는 그런 거리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런 곳을 배경으로 하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추억은 두어개쯤 수리해 줄 법도 하다. 


이 책은 어떻게 추억을 수리할까. 고장이 났다는 사실은 이제와 어찌할 수 없다. 고장난 것이 관계라면 전화를 해보던가 찾아가 사과를 하던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고백할 기회조차 없었던 사랑이거나, 죽어버린 소중했던 사람과 하고 싶던 일, 너무나 소중했지만 자신조차 잃어버린 기억들이다. 그야 말로 되돌릴 수 없다. 


이 책에서는 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은 '추억이란 어짜피 살아있는 사람들의 것'이니까 추억을 간직한 사람에게 소중했던 순간을 되살려내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을 위한 굿이다. 너를 만날 수 있었던 운수 좋은 날도 있고, 너를 보낼 수 밖에 없던 운수 사나운 날도 있었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렇게 모자란게 인간이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는게 삶이니까 말이다.


22살에 만난 백석과의 사랑을 자야는 평생 간직했다. 이런 시를 지어주는 사람과의 사랑이라면 아파도 해보고 싶다. 아픔 보단 함께한 순간들이 더 중요하니까.


고맙다 내 소중한 순간들에 함께해 준 모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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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0-22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의 책을 읽겠다고 해놓고 소재 파악이 안되고 있다. 회사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집에 있나... 책상에 없었는데 화장대인가... 청소라는 걸 할때가 왔나보다 --;;

하늘바람 2014-10-2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갑자기 엄청 센치해지게 하는 리뷰에요.
시두 그렇구요.
슬퍼지기도 하네요.
나도 쓸모없어진 건 아닌지

무해한모리군 2014-10-23 10:25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기억이 있는한 살아야하는거라고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말한게 생각나네요. 너무 아름다운 연애시를 읽으면 슬퍼지는 것은 내게 그 순간이 지나가버렸기 때문일까요?
 
플랫 8 - 완결
아오기리 나츠 글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참으로 쿨한 만화답게 이별도 밍숭하게 하는구나. 아키와 헤이스케의 성장을 좀더 보여주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귀여운 아키의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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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0-2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만화였지만 어느순간 애정이 식어서 끝나서 다행 ㅠ.ㅠ
 

차가운 공기속에 새벽녘에 눈을 떴지만

정신이 든것은 쓴커피 한사발에 

녹차 한주전자까지 들이킨 후다. 


아직 어둑한 아침 

월요일의 우울을 좀 상쇄시킬 수 있을까해서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를 출근길에 뽑아들고 왔는데, 첫 에피스드만 읽어봤는데 아직은 다소 평범.


주말동안은 헤밍웨이 위조사건을 읽었는데 에스프레소 노벨라 시리즈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졌다. 이 작품은 영원한 전쟁으로 유명한 조 홀드먼이 중편이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조, 이야기, 소재가 완벽하게 맞물린 작품이다. 


독서경험이 일천한 내게 헤밍웨이는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기억된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미국은 영화 속 브루스윌리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거칠고 술담배도 잔뜩하는 나쁜 어른인데 가부장적 책임은 끝내 버리지 않는. 조 홀드먼 역시 헤밍웨이 처럼 참전 군인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그렇다. 그들을 사로잡아 전쟁터로 내보낸 이유가 무엇이든 그곳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죽이며 살과 피가 튀는 장면일 것이다. 나 같은 소심한 인간은 무서움에 진작에 미치거나, 인간 존엄에 대한 회의로 사람을 무차별하게 죽이거나, 그러는 내가 무서워서 총을 입에 박고 자살했을텐데 이 위대한 인간들은 글을 쓴 것이다. 운명이라는 덫에 걸린 인간들의 모습을.


우리의 작가 조 홀드먼을 꼭 닮은 주인공은 실감나게 다양한 종류의 죽음을 경험하고, 점점 나쁜 상황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배나온 중년의 헤밍웨이 덕후가 세상종말과 관련이 있다니, 인류란 참 사소한 이유로 서로를 죽일 수 있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읽자 마자 다시 한번 읽고, 나온 연도를 확인하고 놀랐다. 평행이론을 다룬 다른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있지만 주제와 이렇게 멋지게 어울리는 작품은 드물다. 훌륭한 소설이다. 


아이의 텐트에 마노아님 서재에서 본 꽃책을 놓아주었다. 곱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사진은 폰으로 찍어 엉망이지만 실제로 더 곱다.


 

펼친 부분 접기 ▲


내일 읽을 책

 존 버거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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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10-20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책 정말 곱네요. 저도 사서 조카줘야겠어요. 조카네 집으로 보내지않고 일단 제가 받은 뒤 나중에 조카집에 갈때 들고 가야겠어요.

무해한모리군 2014-10-20 18: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세상엔 예쁜 책들이 너무 많아요~ 조카분은 좋겠어요 오호호홍
 


많은 이들처럼 스무살에 상실의 시대로 하루키를 만났다. 에세이까지 포함한다면 내가 가장 많은 작품을 읽은 작가들 중 하나다. 늘 좋기만 했던건 아니지만 상실과 고독, 공허를 그려내는데 참으로 탁월한 작가임엔 틀림없다. 시간도 음악도 그는 공간으로 멋들어지게 그려낸다.     


이 책 여자없는 남자들에서 


조용한 바닷속 물에 산란된 빛은 가지가지 색으로 반짝이고 바다바닥에 빨판을 붙이고 물구나무서서 송어가 오기를 기다리며 하늘거리는 칠갑장어. 참으로 아름답게 그려진 고독이다. 


이런건 어떤가. 어느날 눈을 떠보니 인간이 된 애벌래. 먹고 움직이는 것 자체도 고되고 낯설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같은 공간을 오가던 어느날 문득 자신은 이 세상에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고, 익숙한 공간은 낯설고 위험한 곳임을 인식하게 된다. 


또 다른 글에서 그는 헤어진 옛연인을 14살에 만났어야만 하는 인연이었다고 말하고, 그녀를 잃자 자신의 14살을 잃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순간 만져지는 마음속 빈구멍을 기가 막히게 그리는 것이다.


이 부유하며 지적인 중년의 작가는 자꾸만 커지는 마음의 구멍을 참으로 성실하게 써내고, 나는 이렇게 바람이 휑하게 부는 날이면 그의 글을 읽고 내 구멍을 만져본다. 곱게 달이 뜬 밤 숭어를 기다리는 칠갑장어처럼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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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10-16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직 하루키의 저 책은 안읽었지만 휘모리님의 이 글도 참 좋다는 말씀을 드리고 가요.

무해한모리군 2014-10-16 11:51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읽을만하게 느껴졌다면 워낙 글발이 좋은 하루키의 글을 발췌한 때문이지 싶습니다. 얇고 술술 읽히는 단편을 꽤나 길게 읽었네요.
 


열몇살에 나는 김광석이 좋아서 서울에 오고 싶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겠만 내가 기억하기로는 상경의 아주 중요한 이유였다.

대학 일학년은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며 술만 마시다 지나갔다.

불행히도 그렇게 불러도 내 노래는 그닥 늘지 않았고 안부르자 원래 음치 상태로 돌아갔다.

나는 그러니까 재능 없는 베짱이이다.

(학교 앞 모 공연술집 사장님은 내 목소리와 노래를 향한 열정을 보고 탄식했다.

목소리도 예쁘고 정말 잘할것 같은데... 저렇게 노래를 못하는게 신기하다며 =.=)


요즘 내 눈을 사로잡는 한사람,

슈스케의 곽진언군이다.

많은 사람들이 곽진언군을 김광석과 비교하는데 내 귀에는 김광석과 음색이 워낙 달라서

오히려 그의 수줍은 미소와 청순한 의상이 더해져

동아리방 가득했던 기똥차게 기타치며 노래하던 훈남 형아들이 생각난다.

(부럽? 누구하나 내것이 아니었음을... 음..)

한 다섯곡쯤 자작곡을 들어보았는데 자근자근 얘기하는 것이 꼭 한사람 꼽자면

정태춘씨가 생각났다. 

(곽진언군도 카랑한 목소리의 여성과 이제는 사라진 혼성듀오를 해도 좋을듯)


곽진언의 노래를 들으면 서점에 들러 고심하며 악보를 사던 순간들,

집안을 돌아다니던 가요대백과를 보고 또보며 부르던 오래된 노래들,

좋아하는 곡들을 모아 선물한 테이프들과 악보집들이 떠오른다.

무척 소중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도.

시도 그 시를 읊은 노래도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후 회-             작사/작곡 곽진언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

열심히 노력해봐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있지

 

죽도록 기도해봐도 들어지지 않는 게 있지

아무리 원한다 해도 안되는 게 몇 가지 있지

 

그중에 하나

떠난 내 님 다시 돌아오는 것

아쉬움뿐인 청춘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사랑하는 우리 엄마 다시 살아나는 것

그때처럼 행복하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아마도 후회라는 건 아름다운 미련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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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리풀말미잘 2014-10-1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곽진언 팬이에요. 저음의 그윽한 목소리!

무해한모리군 2014-10-15 13:51   좋아요 0 | URL
곽진언씨가 들국화 노래를 부를때 하나,둘,셋 하고 노래 시작전에 말하는데 진심 그 목소리가 너무 좋더라구요... 칙칙한 티셔츠까지 제 취향이예요 ㅎㅎㅎㅎ

웽스북스 2014-10-15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곽진언 팬이에요!

무해한모리군 2014-10-15 13:52   좋아요 0 | URL
웬디양님 그죠그죠 이 가을 사랑에 다시 빠지다니... 저 요즘 감성 돋아요~ 시도 쓸 기세!!!

뷰리풀말미잘 2014-10-15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팬클럽 결성합시다!

무해한모리군 2014-10-15 13:51   좋아요 0 | URL
곽진언 팬클럽 알라딘 지점 ㅎㅎㅎㅎ

웽스북스 2014-10-16 12:07   좋아요 0 | URL
콜!

Alicia 2014-10-18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저도 이 노래 몇번 들었어요. 아마도 후회라는 건 아름다운 미련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