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소진)12월 이것만은 꼭 읽겠닷!!
이 늦은 밤에 새빨간 무말랭이를 순대에 얹어 먹으며 페이퍼를 쓴다.
뭔가 예민하며 몰랑한 글을 쓰려는 이 순간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풍경인데다, 순대는 넓디넓은 테이블에 컴퓨터는 좁디좁은 밥상에 얹어두고 글을 쓰자니 내 마음속에 책과 먹을 것의 위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음..
어쨌거나 이 사람 지넷 윈터슨, 광신적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되서 선교사로 키워지던 중 어느날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집을 뛰쳐나와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었다는 사람. 스스로를 차세대 버지니아 울프라고 자칭했다는 이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인 이 소설의 몇 대목을 옮겨보고자 한다.
유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시기, 가족이라는 나를 보호하는 한편 제한하는 담장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인 만큼 예민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을 콩닥대게 하는 순간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에 가슴을 치게 하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유년시절과 완전히 결별할 수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어미들은 우리의 가슴팍에 작은 실을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땐 언제든 그곳으로 돌아오게 당길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 속의 그녀는 어머니가 준 '선교'의 소명은 버렸지만, 그것을 부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보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그 태도는 같아 보인다. 각 쳅터의 끝에 삽입된 우화들은 '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는지', '선과 악, 진리'에 대한 은유들로 넘쳐난다. 이 역시 그녀가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말하기로 약속된 것을 말하는 신부 대신, 변하는 것 앞으로 올 것을 말하는 예언자가 되었을 뿐 그 소명의식은 그대로다.
문득 이 글을 읽으며 입버릇 처럼 말하던 두가지를 다시 떠올린다.
언제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손한 자세, 그리고 내가 틀린 것을 알면 삶의 습관을 고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없이는 진보가 아니라는 것. 다른 하나는 누구에게나 나의 가치판단과 지식을 강변할 수는 없다는 것(그것이 자식이라 할 지라도) 그저, 내게 가치 있는 것, 내가 지식을 접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설명하고 내 감정을 말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는 것.
그럼 내 마음에 든 몇 대목을 옮기고자 한다.
미리 말하지만 아주 길고 길다.
"단지 선생님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에요."
(중략)
선생님은 예상되는 것과 주변 환경에 따라 사물을 인식했다. 사람들은 특정 장소에 있을 때 특정 사물이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 (중략)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부딪쳤을 때 하는 그런 반응을 선생님은 보인 것이다.
경악.
문제를 구성하는 것은 사물이나 그 사물이 있는 주변 환경이 아니라, 사물과 환경의 결합이다.
(81~82쪽)
요즘 세상에 보이는 것만 믿는 바보는 없지 싶다. 콩처럼 보이는 팥도 많고 많으며, 팥을 팥이라고 말했다가 사기죄로 경찰서 가는 경우도 많고 많다.
어떤 감정도 최후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89쪽)
실연을 당할 때 유일한 희망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점 뿐이다.
나는 천천히 책을 덮었다. 내가 우연히 무시무시한 음모에 걸려든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는 여자들이 있다.
세상에는 남자들이 있다.
그리고 야수, 즉 짐승들이 있다.
짐승과 결혼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키스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짐승들은 간교하다. 이들은 당신과 나처럼 변장을 한다.
[빨간 모자]의 늑대처럼 말이다.
왜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 것일까?
전 세계에 걸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들이 계속 짐승과 결혼하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목사님은 남자지만 치마를 입는다. 그래서 목사님은 특별한 거다. 그렇지만 그런 남자가 많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여자들은 많고, 대부분 결혼을 한다. 여자들끼리 결혼할 수 없다면(아이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의 일부는 필연적으로 짐승과 결혼하게 될 것이다.
(126쪽)
참으로 나도 궁금하다. 666처럼 짐승의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저 남자들은 다르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 생물학적 성별이 남인 짐승들이 주변에서 발견된다.
아래 한대목은 접기로 숨긴다. 이 대목은 이 책의 절반까지 약간 비밀로 다뤄지는 엄마의 연애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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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를 교환한 두 사람은 서로 구애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느낌을 경험하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속이 부글거리고 귓속이 윙윙거리는 어떤 아찔함. 피에르와 함께일 때뿐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을 때나 찾아왔던 그 느낌.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했지"
(중략)
피에르와 함께 지낸 며칠 후, 어머니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충동적으로 병원에 갔다. 어머니가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의사는 어머니의 배, 가슴을 찌르며 아찔한 느낌이나 복부에 거품이 이는 느낌이 없었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수줍어하며 자신은 사랑에 빠졌으며, 종종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병원에 온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무방합니다만....."
의사가 말했다.
"위에 종양도 있군요."
(중략)
"그러니까 조심해. 네가 심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기관일 수도 있어."
(151~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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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순간 내 감정에 대해 저런 식의 회의를 하는지 모른다. 혹시 나는 몸이 간지러워서 연애를 하는게 아닐까 이런.. 부디 이젠 그러지 않을 만큼 충분히 신중해졌기를.. 물론 타인의 보살핌과 관심 앞에선 언제나 성급해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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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가 한참 동안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러다 우리는 포옹했고, 물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나는 덜컥 놀랐으나 멈출 수 없었다. 나의 배 안에서 뭔가가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안에 문어가 있었다.
(153~154쪽)
나는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온순해 진다. 첫 경험의 이 귀여운 표현을 보라. 배안에서 꾸물꾸물.
나는 신이 그립다.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립다. 나는 아직도 신이 날 배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을 모시는 하인들의 배신. 그래. 하지만 하인들은 그들의 본성 자체로 배신하게 되어 있다. 나의 친구였던 신이 그립다. 난 신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이 감정적 역할 모델이라면 극소수의 인간관계만이 이에 견줄 수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언젠가 이런 인간관계가 가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81쪽)
심리학 카운셀러들만큼은 종교지도자들도 이 외로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 만은 틀림없다. 때로 나는 자기 뒤에 든든한 빅브라더가 있는 것 같은 평안한 독실한 친구들의 표정이 부럽기 그지 없다. 언젠가 내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듯도 한데 말이다.
나는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날 사랑할 사나운 사람을 원한다. 사랑은 죽음만큼 강하고 영원하며 또 평생 나의 편일 것임을 알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그리고 나에 의해 파괴될 사람을 원한다.
(중략)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에 겁이 난다. 이 필요가 얼마나 거대한지 얼마나 높은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충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뿐이다. 기름 한 방울의 원주를 알고 싶으면 송진가루를 사용하면 된다. 내가 찾는 것이 그것이다. 송진가루 한 통, 그리고 이 가루를 나의 필요 위에 뿌릴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지 알아낼 것이다.
(282~283쪽)
변화와 함께 오는, 부득이하게 죽어 가는 모든 것들 때문에 슬펐다. 손실을 의미하지 않는 선택이란 없다. 그러나 내 개는 깨끗한 흙에 묻혔다. 그리고 내가 묻은 것들은 자신을 파헤치고 있었다. 내가 더 편리한 시간을 위해 제쳐 놓았던 냉습한 두려움과 위험한 생각과 그림자들.
(285쪽)
이 대목을 읽으며 젊음의 고민들에 보편성과 그 순수함과 그 엄숙주의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