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대신해 전화를 받고, 연락할 사람의 전화번호를 메모하고, 그의 말을 대신 전하는 사람.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을 고치고, 작가가 되는 대신 작가를 보필하며, 쉼표와 마침표를 잘못 끼워넣어 뻑뻑한 문장을 뜯어내고, 못질하고, 최종 마침표를 찍는, 완벽한 '대신' 인생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였든 가을에서 겨울로 스러지는 길목이었든 중요치 않다. 다만 언젠가 나도 내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으리란 희망이 점점 시들어갔다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란 모름지기 만기가 된 주택청약부금이나 의대에 들어간 아들만으로도 행복에 겨워야 한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던 순간의 밤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 강묘희 미용실 中 155쪽
나를 이보다 더 우울하게 할 책도 찾기 어렵지 싶다.
나는 이 책에 나오는 표현대로 하면 영수증처리반이다. 영수증처리반이 된지 8년, 하루 평균 12시간을 그 역할로 보낸다. 그런데 영수증처리반으로서의 '나'가 다른 영역의 나를 슬금슬금 뒤덮어온다. 숫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고, 아무리 사소한 문서라도 두번세번 되새김질하며 맞춰보는 인간. 하도 나대서 조증이 의심되던 아이는 흔적없이 사라졌다.
삶 자체를 영수증처리반스럽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나로 말하면, 사탕을 좋아하는 건지 연예인 같은 부류의 여자가 딱 좋다. 충치 하나 없이 웃으면 여남은 개의 이빨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어서, 어김없이 입을 벌려 세어보고 싶게 만드는 여자들이 있다. 그런 여자들은 대부분 크게 웃고, 크게 울며, 자기 감정 표현이 확실하다. 섹스 후에, 싫거나 좋거나 상관없이 '오빠 좋았어!' 정도는 날려줄 줄 아는 센스. 영화를 보여주면 커피 정도는 사는 옵션! 애매모호란 말은 어쩐지 프랑스 말처럼 느껴져 질색이다. 프랑스 영화처럼 내용 파악 안되고, 복잡한 여자? 정말 싫다.
그러니까 미라와 내가 진짜 연애를 하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미라 같은 상상력 과잉의, 정신상태 복잡한 여자와 말이다. 그러나 미라는...... 어쩔 수 없이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여자였다. 왜냐구? 예쁘기 때문이다. 얼굴은 작고, 가슴은 크고, 발목은 가늘고, 엉덩이는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의 예쁜 애들은 자기가 얼마나 이상한지 잘 알지 못한다. 투명한 유리 공예품처럼 얼마나 잘 깨지는지도.
- 미라 中 219쪽
처음엔 회사에서의 삶이 철저히 가면 같았다. 마쵸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 민감한 주제는 안들리는 척하고 정치적 주제엔 말하기 보다 들으며 산 어느날, 심지어 나의 상사는 내게 '자기 주장이 약한 것' 같다는 평가를 했다.
그런데 그 가면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지 정작 말하고자 할 때는 단어가 생각이 안나거나 이유없이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순간이 잦아졌다. 또 이상한 건 유난히 내게 찾아와 정치적 주제를 강변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많다. 미라처럼 꼬리를 숨기려 할 수록 드러나는 것인가.
요는 역할에 나를 구겨넣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영수증처리반도 감성적인 연애를 하며 살고 싶다. 기왕이면 역할에 나를 맞추는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역할로 인생을 살고 싶다. 물론 이래도저래도 월요일엔 출근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