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기도하는 집>을 읽으며, 담담하고 우직한 문학의 한 경지를 알음 알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의 눈금>은, 생의 궤적을 탐색해나가는 순례자의 '무던한' 정신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어딘가에 적어두었던 책의 한 대목이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적십니다. 

"아탈리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유목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단촐하게 짐을 꾸려 풀 좋은 초원을 찾아다니는 그런 유목민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통역 데리고, 김치 항아리 짊어지고 다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몽골의 초원에서 올 여름에 내린 결론은 이것. 짐을 줄이자, 나는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한껏 가벼워지셨겠지요...? 

언젠가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셨던 카잔차키스의 말을 빌려 이런 말을 남기셨다는데요.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와서 또 하나의 심연으로 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지금쯤이면 또 하나의 심연에 당도하셨을른지요...?  그 심연에는 '쉼'이 있기를. 그 적막하고 깊은 못가에서 평안하시길. 내내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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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웹 사이트를 오락가락하다가 뒤늦게 김규항 님과 진중권 님의 '논쟁'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분을 앉아서 꼬빡, 내용 파악에 몰두했드랬지요. 그리 비상식적이라거나, 비합리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글 한 토막이 불씨가 되었더군요. 몇 번을 되짚어가면서 읽어보았지만 제 눈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3의 눈'이란 늘 그런 것이어서 당사자의 내밀한 감정까지 짚어낼 수는 없겠지요. 글의 어느 대목이 마뜩찮게 느껴졌는지 감정의 동요가 퍽 심하게 느껴지는 글이 반론으로 접수되었더군요. 재차 이어진 반론과 그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이 거듭되면서 원의原意가 점차 흐려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논쟁의 공방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는지, 논객 두 어 분의 주장이 거칠게(?) 추가되면서 그만큼 소통의 여지 또한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원래 믿을 것이 되지 못해서 말을 거듭하면 할수록 ‘단절만 완성해가는’(김훈) 경우가 다분한데요, 꼭 그러했습니다. 논쟁이란 말 자체의 함의가 ‘말다툼’이고 보면 ‘그렇지, 뭐’하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논論이라는 말이 ‘진술하다’는 뜻과 동시에 ‘고하다’, ‘여쭈다’라는 뜻 또한 지니고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분명 말하는(혹은 글쓰는) 태도나 방식 상의 문제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상대방의 글 속에서 행간을 읽어내고자 하는-겸비謙卑의 자세가 포함된-진지한 노력이 결핍된 ‘논쟁’은 쉬이 ‘질펀한 말言들의 성찬’에 불과하기에 정신의 아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난이 내깔린) 비판의 포화 속에서 두 분 모두 치열한 고뇌의 산물로 내놓은 글들이라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불통의 벽은 높아져만 가는 듯 싶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설득을 담아내기에 앞서 포용과 배려의 마음이 전제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두 분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철학적 지식도, 정치적 식견도 심히 모자란 사람에게는 분명 좋은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허나 이 논장論場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상의 난장煖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네요. 문득 루미의 문장 한 구절을 되내입니다. 

 "상호 이해는, 같은 언어를 말하는 데서 오지 않고 같은 지혜를 말하는 데서 온다. 혀를 서로 나누는 것보다 가슴을 서로 나누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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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반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절판


기도가 하나님 임재에 대한 나의 반응이라면, 먼저 그 임재에 주파수를 맞추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주님이 움직이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드리라"고 제안한다. 문자 그대로 공간, 즉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 구역'을 확보하고 잡다한 것들이 삶을 채우지 못하게 지키고 싶어 하신다.-515쪽

하나님과 시간을 '낭비'하는 과정은 내면으로부터 인간을 변화시킨다. 아이는 작심하고 몸가짐이나 독특한 버릇, 목소리 따위를 연습해서 아빠와 비슷해지는 게 아니다. 가족들 사이에 섞여서 계속 접촉하노라면 저절로 가족의 특성이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518쪽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열매는 저절로 열리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붙어 있는' 것뿐이다.-519쪽

돈 포스티마는 "기도란 조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는 예술가이신 하나님께 인간을 재창조하고, 더불어 활동하며, 다시 매만지실 기회를 드리는 행위"라고 말한다.-524쪽

십자가의 요한은 기도할 때마다 고개를 쳐드는 '어지러운 마음spiritus vertiginis'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528쪽

내가 드렸던 기도는 뼛속까지 이기적이었다. 주님을 사주해서 욕심을 채울 속셈이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증거가 사방에 깔려 있는데 그걸 죄다 무시하고 그분을 다만 해결사로만 대접했다. 그러고 나서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싶으면 금방 조급해졌다.-534쪽

기도를 따라다니는 조급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다. 계속 기도하는 것이다.-534쪽

기도하는 데는 주님께 자신을 활짝 개방하고 인간의 선입견으로 그분을 제한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한마디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정녕 하나님이 되시도록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뜻이다.-535쪽

인내는 성숙의 상징이며, 세월의 단련을 통해서만 개발할 수 있는 자질이다.-535-536쪽

기다림이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기다리는 법이며, 그 과정에서 인내를 배우게 된다.-536쪽

산다는 건 무의미한 행동들의 연속이 아니다. 삶은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자신의 몸으로 살아내는 경기장이다.-540쪽

기도의 시스템은 수학 공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하늘나라에 가해지는 기도 압력의 총량으로 응답 여부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544쪽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내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시각으로 상대를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하나님이 이미 그를 향해 흘려보내고 계신 사랑의 물결에 자연스럽게 편승한다.-546쪽

기도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누군가를(그리고 자신을)보게 한다. 인간은 저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독특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같이 깊은 흠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런 상대를 예수님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식이 너무 사랑스러워 와락 껴안아주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눈길이다.-546-547쪽

디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가 우리 사이에 서 계신다. 주님을 통해서 이웃에게 다가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549쪽

중보기도는 잔잔한 호수에 이는 파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점점 넓은 동심원을 그리며 내게서 가장 가까운 이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들에게까지 멀리멀리 퍼져나간다.-549쪽

기도는 하나님을 조종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연못에 한 방울의 사랑을 보태어 그 동심원을 폭을 더욱 넓힐 따름이다.-555쪽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충격적인 명령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사랑이 미치는 범위를 확장할 수 있으며, 결국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그 은혜를 경험하는 이들도 나타날 것이다.-560-561쪽

그리스도인은 친구와 가족, 지인의 범위를 넘어서, 그리고 타당성과 정의의 한계를 초월해서 원수에게까지 하나님 사랑의 범위를 확장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주님의 사랑이 이미 거기까지 미쳤으므로 우리는 그저 따라갈 따름이다.-562쪽

본회퍼는 결론지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셨다. 그것이 주님 사랑의 결정판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으로 원수를 무너뜨린다. 기도는 그런 사랑을 활성화시키는 촉매 구실을 한다. 가슴에 맺힌게 있는데 도저히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상처를 입힌 당사자와 아울러 그 원한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헤어날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562-563쪽

기도는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일을 가리킨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무언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명백히 드러내는 증거다.-567쪽

시몬느 베이유는 "기도는 관심으로 구성된다. 힘닿는 데까지 하나님을 향해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라고 했다.-567쪽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주변에서 일어난 평범한 일들을 '빛 한가운데'로 끌어낸다. 거기서 모든 일이 재조정된다. 걸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변한다. 복수의 기회는 은혜의 기회로, 탐욕의 유혹은 자선의 욕구로 바뀐다. 처음에는 한 가지 일을 두 가지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분리된 삶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훈련이 되면, 하나의 삶으로 온전히 통합된다.-568-569쪽

예수님은 기도로 아뢸 수 없을 만큼 시시한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녀들과 관련된 모든 일(생각, 동기, 선택, 기분 등)에 관심이 많으시다.-571쪽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냐 아니냐에 특별히 개의치 않으신다. 주님은 그저 기도를 듣고 싶어 하실 뿐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자신의 필요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 일종의 교만이다.-572쪽

기도를 기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그분과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부적절하거나 엉뚱한 기도에 대한 염려는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573쪽

찬양은 인간의 지위를 낮추는 게 아니라 완성시키므로, 무릎을 꿇는 순간 더 크게 성장하게 마련이다. 우주에서 자신의 자리와 하나님의 좌표를 정확하게 설정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581쪽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도와 관련된 상세한 책을 쓰면서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했다. 오직 기도하는 가운데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582-583쪽

모든 심령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세는 기도를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다. 똑같은 곤경을 눈앞에 두고도 전혀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게 해준다.-584쪽

건강하고 아픈 것 가운데, 넉넉하고 가난한 것 가운데, 그 밖에 세상에 속한 무엇이 내게 유익한지 나는 모른다. 그런 분별은 인간이나 천사의 능력 밖의 일이며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 속에 가무어져 있다. 나는 다만 찬양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584쪽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데려가며 높은 곳에서 조망하게 해줌으로써 삶을 체험하는 방식을 철저히 바꿔놓는다. 고통을 치유하는 것보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벌을 피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육체의 가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겸손을 배우는 걸 더 소중히 여기게 된다.-585쪽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무지개처럼 세상에 두루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588쪽

하나님은 지속적인 관계를 원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고 기도한다. 기도라는 행위는 무한하신 창조주와 유한한 인간 사이에 난 커다란 틈을 메우기 위해 주님이 직접 정하신 방법임을 신뢰한다. 그리고 세상을 치유하시는 거룩한 사역의 물결에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마치 숨을 쉬듯 기도한다. 숨을 멈추면 누구도 살 수 없다. 기도는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아니다. 불완전한 물질계에 사는 흠 많은 내가 완전하고 영적인 존재를 향해 손을 내미는 행위이기 때문이다.-589쪽

기도의 형식은 필연적으로 변하게 마련이지만(완성품이 아니다), 기도의 본질은 언제나 '대화'에 있다.-5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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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반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절판


이제는 승리주의에 빠지지 않은 감사와, 작위적이지 않은 동정심이 깃든 겸손한 태도로, 기도의 비밀을 최대한 존중하며 간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401쪽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족을 구하는 태도가 문제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에 초점을 맞추는 게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훗날 야고보 사도는 이 원리를 다시 한 번 부연해서 설명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404쪽

마하트마 간디는 세상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무슨 일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능력을 폐기시킬 힘을 달라고 기도하겠소."-413쪽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응답없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일지 모릅니다.-414쪽

기도의 핵심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결과를 강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혜가 무궁무진하신 분께서 어리석기 한량없는 피조물의 요청을 듣는다면, 경우에 따라 들어주기도 하시고 거절하기도 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응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마술에 가까운 현상일 뿐이다.-422쪽

우리 기도 역시 기도의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다든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따뜻한 마음을 품는다든지, 성령의 열매를 키워가는 데 진보가 있도록 도와달라든지 하는 문제는 아무 조건 없이 간구할 수 있는 제목들이다. 하지만 '가시'를 제거해달라고 간청했던 사도 바울의 기도처럼 제한적으로 구해야 하는 사안들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법칙을 십분 존중해서 자제해야 할 일도 있다.-427쪽

하나님의 계획은 '베스트 아리아 40곡' 방식이 아니라 느릿느릿 흘러가는 오페라처럼 진행된다.-429쪽

바로 지겨운 과정, 기다리는 행동 자체가 인내와 끈기, 신뢰, 온유, 긍휼 따위의 자질을 키워내는 자양분을 공급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흐름에 몸을 담고 있기만 하면 자연히 그런 성품들을 갖추게 된다.-429쪽

믿음은 미래지향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요구한다.-430쪽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내내 기다리고 계신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사랑하시기에 인류사 전반에 걸쳐 가해지는 모욕을 참아내시는 것이다.-430쪽

원하는 응답을 받든 말든, 무슨 기도를 하든, 나는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모두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의지할 수 있다. 하나님이 구속하실 수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영국 작가 존 베일리는 "오 하나님, 저를 가르치소서, 오늘 제 삶의 모든 환경을 사용하셔서 죄가 아니라 경건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432쪽

국제 구호 단체 월드비전의 창설자 밥 피어스의 간구가 뒤따라야 한다. "주님의 마음을 울리는 일들이 내 마음도 울리게 해주세요." 여기에 반응한 이들은 스스로 그 기도 응답이 되었다.-439쪽

하나님은 아버지고 우리는 자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은 극작가고 그리스도인들은 배우다. 기도의 존재는 은혜의 선물이며 조화로운 미래로 우리를 부르는 너그러운 초대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바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신비, 즉 하나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진리와 마주치게 해준다.-444쪽

인간이 제아무리 지혜롭고 신령하다 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을 꿰뚫어볼 수 없다. 누구에게는 기적이 일어나고 다른 이에게는 침묵하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이 일에는 개입하시고 저 일은 그냥 놔두시는 까닭도 파악할 수 없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저 기다리고 신뢰하면 그뿐이다.-447쪽

예수님은 모든 가난과 모든 고통, 인간의 모든 필요를 해결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다만 예쁘고, 능력 있으며, 제 힘을 믿는 이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라를 선포하셨다.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음을 가장 흔쾌하게 인정하는 이들은 대부분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장애인이나 고통중에 있는 이들,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처럼)이었다.-477쪽

죄는 몸과 혼과 영의 조화를 깨뜨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린다. 고백은 근심과 죄책감, 두려움 등 건강을 망치는 장애물들을 쓸어내는 동시에 하나님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통로를 회복시킨다.-486쪽

보통은 기도를 씨름하듯 매달려야 하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했었다. 누군가를 고쳐달라고 간구하고 나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기도하면서 너무 괴로운 나머지 주먹을 꼭 말아 쥐고 있었던 까닭이다.-489쪽

어려운 시기를 만나면 시야가 좁아져서 나 자신과 내 문제들 외에는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반경을 넓히자면 모든 눈을 들어 훨씬 먼곳을 볼 필요가 있다.-495쪽

그러나 허다한 유익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결함이 있다. 미래, 즉 마음이 소원하는 변화에 전부를 건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변화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건강해지거나, 직장을 얻거나, 결혼하거나, 그 밖에 무엇이든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아무 일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작업은 당장 해야 한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다.-504쪽

자비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표현대로라면, 은혜는 "하늘에서 보슬비가 부드럽게 떨어지듯" 온 세상에 내린다. 거기에 반응하여 인간의 영혼은 제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높이까지 솟구쳐 오른다.-5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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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반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절판


사랑을 나누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무수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기도의 당사자들 또한 무수하게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생긴다 한들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지 않은가?-286쪽

어떻게 해야 제대로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기도하면 됩니다. 더 잘 기도하고 싶으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288쪽

신약 성경은 기도를 장기전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무기로 소개한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라. 불쌍한 과부는 불의한 재판장을 악착같이 괴롭히고 나그네를 위해 음식을 얻으러 간 남자는 이웃집 문간을 끈질기게 두드린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의 "전신갑주"(엡6:11)를 입은 군사로 묘사한 뒤에 "무시로 깨어 기도하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명령했다. 자식처럼 사랑했던 디모데에게는 군사답게 고난을 달게 받고, 농부처럼 수고하며, 운동선수처럼 달리라고 가르쳤다.-295-296쪽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무려 10년에 걸쳐 귀, 팔꿈치, 손 등 신체 부위를 다양한 시점에서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연습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정확하게 그려냈다. 운동선수나 음악가들도 마찬가지다. 꾸준히 훈련하지 않고 거장이 되는 길은 없다. 주님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의사소통하는 특별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꼬박꼬박 기도하는 훈련이 필수적이다.-299쪽

기도란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 세계의 사건들(자연의 변화, 골치 아픈 과제, 혼란스러운 감정, 인간적인 고뇌 등)을 하나님 앞에 꺼내놓고 다시 세상에 나가는데 필요한 새로운 시각과 에너지를 요청하는 일을 말한다.-300-301쪽

기도는 하나님의 인간의 세계로 초청하는 동시에 속사람을 거룩한 세계로 들여보내는 작업이다. 예수님은 홀로 한적한 곳에 나가서 오래도록 기도하셨지만 결혼식이나 저녁식사 따위의 행사가 즐비하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이 아우성치는 분주한 세계로 어김없이 돌아오셨다.-301쪽

세상 일은 하루에 세 번씩 시간 맞추어 기도할 수 있도록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기도하는 구조가 모든 이들에게 유익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위험 요인은 따로 있다. 기도가 일상의 일부로 흡수되어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바람에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보여드리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328쪽

부족한 게 없는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셔 들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모자라고 부적합하다는 인식은 망가진 인류와 완벽한 하나님 사이를 연결하는 기본 원리다. 따라서 그런 인식은 창조주와의 대화를 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기도의 가장 큰 동기라고 보아야 한다.-334쪽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주님의 소중한 시간과 관심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한마디만 하겠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338쪽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는 조건 말고는 반드시 지켜야 할 기도 원칙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사람마다 성품과 외모, 훈련의 깊이, 약점, 교회나 하나님과 더불어 지내온 이력이 모두 다르다. 그래서 로베르타 본디는 말한다. "기도하고 있다면 이미 잘하고 있는 것이다."-340쪽

예수님은 모범이 될 만한 기도를 가르쳐주셨다. 이른바 '주님의 기도'다. 하지만 그밖에도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셨는데 대략 정직하라, 단순하게 고하라, 꾸준히 계속하라 등 세 가지 원리로 압축할 수 있다.-341-344쪽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도구다. 복식부기 같은 기법이나 기교의 일종이 아니다. 무슨 규정집에 따라 관계를 맺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구상의 누구와도 닮지 않은 저만의 얼굴과 몸, 지성, 감성과 기질을 소유한 인격체로서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사귈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고 왜 사는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으신다.-346쪽

C.S.루이스는 이렇게 적었다. "가장 형편없어 보이는 기도가 실제로 하나님의 눈에는 제일 훌륭한 간구처럼 보일지 모른다. 경건한 느낌이 매주 적고 대단히 내키지 않아하면서 드리는 기도 말이다. 이런 기도들은 거의 모두 감정보다 더 깊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다."-355쪽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 헤맬 게 아니라 세상 만물과 성경 말씀, 예수님, 교회 등 창조주가 이미 베풀어주신 계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본회퍼는 무슨 권리를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예외적인 영적 체험을 요구하는 인간의 허영심에 경종을 울렸다. "행복을 좇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 그것이 모든 묵상의 기본 원리다. 주님만 구하고 또 구하면 결국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약속이다."-365쪽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불평이 치밀 때마다 오히려 그분이 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불만스러워하는 게 백번 마땅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고작 몇 분을 주님을 위해 떼어놓고 온갖 생색을 내지만, 실제로 생활 중에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미세한 음성을 대놓고 거부하거나 아예 무시해버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376-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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