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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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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는 인간을 상상하는 일은 괴롭다. 꿈을 망실한 인생의 불우는 곧 희망과의 절맥(切脈)을 의미하기 때문이리라. 인간이 비루한 일상을 면면히 버텨내고, 지난한 인생을 어렵사리 살아내는 건 꿈이 있어서이고, 꿈에 잇댄 희망의 조짐 때문이다. 기실 희망의 생명력이 ‘도래하지 않은 미래’라는 시간적 속성에 있듯이, 꿈의 존재 근거는 바로 그 오지 않음, 反-현실, 무한성, 가능성과 같은 미증유(未曾有)의 맥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그대로 꿈’이고, ‘그대로 꿈’은 바라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희망의 수치를 유지한다. 이는 다만 ‘오지 않음’이라는 그 속성을 설명하기 위한 언사에 불과할 따름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꿈은 결코 현실일 수 없고, 희망 또한 성취될 수 없을 때, 꿈은 꿈이요, 희망은 본디 희망이라는 말이다.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본문, 7쪽) 

  '별이 아름다운 건 멀리 있기 때문'이라는 혹자의 말처럼 꿈 역시 멀리 있어 아름답다. 그 멋과 풍미는 ‘거리’로서 발생하고, 아득함으로부터 전해온다. 그러나 현실의 가차 없음에 복속된, 그리하여 꿈과 환상의 상상력마저 빼앗긴 존재들은 허덕지덕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시지프스를 떠오르게 한다. ‘멀리’의 관조, ‘거리’의 여유를 상실한 이 사회가 낳은 사생아들은 그렇게 꿈과 희망을 예단 당했고, 부박(浮薄)한 성공을 천형으로 삼는 인간 군상들로 변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밤하늘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열지 않는다. 예컨대 책에서처럼, 적금과 부동산에 관심하며, 사업의 무한한 번창을 바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꿈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고 책은 말한다. 그 대목. 고모의 남자친구 알리의 입을 통해 발설한 작자의 심중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배우들은 모두 요정들일세. 이젠 대기 속으로, 엷은 대기 속으로 사라져버렸지. 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환상의 세계처럼 저 구름 위에 솟은 탑도, 호사스러운 궁전도, 장엄한 신전도, 이 거대한 지구도, 마침내 다 녹아서 지금 사라져버린 환상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걸세. 우리 인간은 꿈과 같은 것으로 되어 있고 이 허망한 인생은 긴 잠을 막을 내리게 되지.  
 

 (본문, 116쪽) 

  꿈이 사라진 자리에, 환상이 증발한 자취에 현실 또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말로 이해한다. 결국 꿈이라는 골간 없이 고단한 현실을 살아낼 수 없음은 물론이요, ‘긴 잠’은 언제고 목전에 둔 인생이라는 현실을 긍정해야 꿈도 가능하다. 성급하게나마-요는, <달의 바다>는 <생의 바다>고, <꿈의 바다>라는 사실을, 그 생과 꿈의 긴장 속에서 유영하며(노닐며), 희망을 꿈꾸는 몸짓이 우리에겐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겠다는 것이다.

   
 

“왜 할머니한테 가짜 편지를 쓴 거야?”

고모는 미소를 지었다.

“즐거움을 위해서. 만약에 우리가 원치 않는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며, 그런 작은 위안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잖니.”

 
 

(본문 126-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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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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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한다는 것은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산 사람의 몫이니까.-46쪽

"힘이 들 때면 오늘만 생각해. 지금 이 순간만. ......있잖아. 그런 말 아니? 마귀의 달력에는 어제와 내일만 있고 하느님의 달력에는 오늘만 있다는 거?"-49쪽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그건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거야."-51쪽

"쉽게 이해하고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구. 그건 미움보다 더 나빠. 진실이 스스로를 드러낼 시간을 자꾸만 뒤로 미루어서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를 빼앗아갈 수 있으니까."-57쪽

"어떤 부모든 최선을 다해. 하지만 자식에게 상처를 줘. 그건 어쩌면 인간의 운명 같은 걸 거야. 그래서 그 많은 심리학자들이 어린 시절을 연구하는 거고."-82쪽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어서는 안 돼. 너도 모자라고 엄마도 모자라고 아빠도 모자라......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자람 때문에 누구를 멸시하거나 미워할 권리는 없어. 괜찮은 거야. 그담에 또 잘하면 되는 거야. 잘못하면 또 고치면 되는 거야. 그담에 잘못하면 또 고치고, 고치려고 노력하고......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을 사랑할 수가 있는 거야."-85쪽

그래, 상처와 치유가 별개냐? 내가 내가 아닐 때, 그것은 상처이고 내가 다시 나를 찾을 때, 누구에게도 먼저 내 잘못이 아니라구요, 변명하지 않을 때 그게 바로 치유가 아니겠냐고......-128쪽

내 슬픔 하나를 두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 그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시킨 채로 우리는 또 얼마나 남의 상처를 헤집는 것일까.-177-178쪽

자극과 반응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영어의 responsible이라는 것은 response-able이라는 거야. 우리는 반응하기 전에 잠깐 숨을 한번 들이쉬고 천천히 생각해야 해. 이 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에 내 의지대로 반응할 자유가 있다,고.-179쪽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작가의 말 중에서-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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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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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치유, 그 지난한 과정으로서의 삶을 담아낸 가족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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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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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온갖 신변잡기가 소설의 주요 테제로 자리 잡게 된 지난 수년간, 소설의 진정성에 대한 논의들이 다발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그 지난한 속에서 거대와 미시, 총체와 구체라는 이분적 도식에 의해 사람들은 이합하거나 집산하였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나름의 비판의식에 따르자면, 신변잡기적 소설들의 다양한 양산이 진정성을 담지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형태로 무수히 쏟아지고 있으며, 이는 끝없는 해체와 비체(非體)라는 포스트모던식의 ‘목적 없는’, 말하자면 한가로운 글쓰기에서부터 기인한다. 반면에 목적성에 함몰되어 소설 나름의 태도, 즉 이야기의 충실성을 거세한 채, 자신의 신념 따위를 주조해내는 일군의 사실주의적 소설들에 대한 심기불편 또한 없지 않았다.

 

 때문에 ‘광장’(거대)과 ‘자기만의 방’(미시) 사이에서 방황하던 나와 같은 독자에게 있어서 지난날 황석영의 소설 몇 편은 일종의 해방감과 더불어 두 간극을 해소해나가는 소설가의 전형으로 비추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그가 출소 이후 발표했던『오래된 정원』,『손님』등의 소설은 그러한 층위들에서 파악된다. 사랑과 현실, 민족과 이데올로기의 충돌이라는 보편적 주제들은 그의 연금술에 의해 역사와 시대 속에 배치되고, 인간과 그 삶 속에서 빚어졌다. 그리하여 거대와 미시, 총체와 구체와 같은 이분적 도식들은 붕괴되고, 인간의 구체적 삶 가운데 성취되어야 할-이성 혹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라는-보편적 주제들이 안전하게 정착함으로써 마감되었다.

 

 물론 이러한 황석영 예찬은 그의 새 소설『바리데기』를 읽고 난 후에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그에 대한 긍정이 나로서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이전의 작품들과의 발전적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의 공간이 (이전 소설들의 주요 공간적 배경인)한반도라는 소위 민족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세계 현실인 ‘이동과 디아스포라(diaspora)’를 인류 보편의 문제로 주제화시켜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지녔던 국소적 한계, 즉 한반도라는 특수한 지형적 공간 안에 머물지 않고, 소설의 주인공 ‘바리’를 ‘오래된 제국’, 영국의 어느 모퉁이에 위치시킴으로 공간적 배경을 확장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적 차이가 민족적 현실을 초월한 것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소설에서 나타나듯이 ‘세계’로의 확장은 바로 ‘한반도’의 시대적 모순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고민이자 오늘날 세계 현실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한반도의 삶을 세계인과 공유하고 싶었다”는 그의 야심찬 의도는 비교적 적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모든 것을 잃은 자의 불우는 그야말로 참담하다. 더 이상 자신에게는 전혀 새로운 일이 없으리라는 비관적 확신이 경계 없이 스며든다. 그 참담의 자리에서 하릴 것 없는 인생이란 그저 떠돌고, 떠돌아 티끌처럼 대지에 얹혀 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결코 뿌리는 없고, 색 바랜 낙엽처럼 뒹구는 꼴이 그 ‘꼴’일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바리가 그렇다. 아! 가엾어라. 그러나 바리의 영묘는 차라리 그녀의 불우가 숙명이 아니라 운명임을 보여준다. ‘영매(靈媒)’ 혹은 ‘중보자(中保者)’로 택정 받은 그녀의 인생은 지난한 것임이 오히려 당연했다. 그래서 어쩌면, 그녀는 살았고, 또 살아남았다.

 

 이 불우한 자의 인생이 어찌 혼자의 것일 수 있으랴! 그가 밀려난 생의 변방마다 수많은 상처들이 널려있었고, 한(恨)많은 인생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거리에 넘쳐나고 있었다. 그네들의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모진 인생의 굴곡을 가늠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자신의 삶마저 송두리째 빼앗긴 인생에게 다른 이의 회한 맺힌 인생을 위로하는 일은, 어쩌면 이중의 고통을 가중하는 일이었으리라. 그러나 바리할미는 자꾸만 그 길을 가리키고만 있었다. 그 길은 끝없는 나락이며, 생지옥이다. 절규와 몸부림이다. 인생의 하방으로 내쫓긴 자들은 그 길을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걷는다,(아니 오히려 수동형으로) ‘걸어진다.’ 바리도 그렇게 걸었다. 별 수 없이, 자신의 운명으로 체념하면서.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늙은 제국’의 후미진 그늘이 운명이라고 할 수 없듯이 바리에게도 그러했다. 그 모진 시련을 버티는 것은 그녀의 운명이었지만 자꾸만 인생의 하방으로 밀려나는 현실은 ‘운명적’이라 할 수 없었다. 그건 다만 세상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 “아무런 악한 짓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신은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는 거예요?"라는 바리의 탄식이 그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고통은, 기실 신에게서 발본하지 않았다. ‘불행과 고통은 모두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예컨대 전쟁이 그러했다. ‘전쟁은 힘센 자의 교만과 힘없는 자의 절망이 이루어낸 지옥’이었고, 그 지옥은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겪어야 할 우여곡절이었다. 이 풍진 세상을 굳이 살아가야만 한다면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마땅히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며 살아야’ 할 터였다.

 

 “생명수 약수를 달랬더니 그 놈에 장승이가 말허는 거라. 우리 늘 밥해 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 약수다. 기럼 공주님이 헛고생한 거라? 바리야, 기건 아니란다.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을 얻었지비.”(81쪽)

 

 바리는 다시 일어섰고, 또 걸었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고통은 ‘우리 속에 살아계신’ 바리 큰할미의 마음을 깨우치도록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바로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고통 속에서라도 밥해 먹구 빨래하던 그 평범한 물속에 길이 있었다. 생명수는 다른데 없었다. 고통스럽지만, 평범한 그 삶 속에 있었다. 그것은 미움과 절망으로 점철된 생이 아니라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눈물 속에 꽃피는 희망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그걸 보여주고 있었다. 폭발 속에 피 흘리는 살풍경 속에서 아기에게 미안하다고 읊조리며 흘리는 바리와 알리의 눈물은 눈물과 희망(새생명)의 중첩이었다. 비로소 생명수는 그 모진 세월을 거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압둘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던가 보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었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286쪽)

 

3.

“아직도 세상 도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며 하루라도 맘 편히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국경을 넘고 있었다.”(217쪽)

 

 사람들은 국경을 넘는다. 살기 위해서. 하루라도 맘 편히. 그리고 죽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도처에서. 완성된 문장을 해체해서 역순으로 떼어놓고 보니 짐짓 섬뜩하다. 그 뿐인가? 작가가 “사람들은 불꽃놀이를 보듯이 전쟁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287쪽)고 말하는 대목에서 나는 진저리쳤다. 여전한 현실이었지만 그것이 지구 반대편, 혹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자위하며 사람들은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은 그들이 ‘난이나 차파티 빵을 먹고 우리는 쌀밥을 먹는’다는 것 뿐, 그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다를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어느 추운 산길 어딘가를 헤매며, 떨고 있는 바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도시의 뒤편, 초라한 건물의 한 켠에서 설거지하고 있을 또 한 명의 바리를 생각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밀입국을 감행하고 있을 또 여러 명의 바리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불우를 넘어 생의 아름다움을 꿈꾸고 있을 어느 뒤란의 바리들 또한 생각해본다. 전쟁도, 테러도, 기아도 그칠 줄 모르는 시대에 나는 자꾸만 눈 앞이 흐려진다. 바리의 눈물을 기억한다. 그리고 바리가 찾았던 ‘생명수를 알아보는 마음’이 조금씩 움튼다. 비로소 연민의 눈물로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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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07-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민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리뷰예요. 바리데기 소설에 대한 다양한 리뷰가 참 여러모로 사람 마음을 울립니다. 잘 보았어요^^

바람결 2007-07-09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반가워요. 그리고 댓글 감사해요. 많이 부족해서 괜히 쑥스럽네요^^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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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단 하나뿐입니다. 비슷한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엘리 위젤

그 어느 세기보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 발전과 문화적 진보를 이루어내었다는 20세기. 그러나 그 수사적 화려함의 뒤안에는 잊고 싶거나, 잊혀진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바로 증오의 기억이다.

철학적, 문화적 성숙이 빠르게 진행되던 20세기 초반, 우리는 믿기 힘든 두 번의 야만의 세월을 겪어내게된다. 이른바 제1차, 2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야만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전쟁의 주체들에게는 하나같이 강한 선민의식과 혈통주의가 타 민족과 혈통을 배제하는 증오의 법칙으로 작용하였다. 그 증오의 법칙을 가장 잘, 그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이해한 예는 바로 아우슈비츠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미 끔찍한 상흔이 되어버린 이 역사적 사실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잊고 싶은 하나의 기억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끊임없이 재생산하여야할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아마도 임마누엘 레비나스와 같은 철학자나 엘리 위젤과 같은 소설가,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프리모 레비에게는 후자 쪽에 인생의 초점을 맞춘 듯 싶다. 자신들의 추체험을 묻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너무-하게도 특별했던 혹은 지난했던 시간이었으리라.

야만의 시대에 대한 프리모 레비의 증언의 기록인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페이지를 덮을 수 밖에 없었다.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때마다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고, 건조한 문체로 묘사된 수용소의 참상이 그려질 때마다 욕지기와 구토가 거의 동시에 일었다. 한 줄 한 줄을 고통스럽게 읽어내려갈 때마다 어느새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고, 급기야는 심한 몸살을 앓았다.

프리모 레비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바닥'으로 기투된 존재들의 인생을 결코 '이해될 수'없는 그 잔혹의 현장으로 그려낸다. 그곳에서의 삶이란 상상할 수 없을만큼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지만 그는 자기 슬픔에서 최대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담담하게 써-나간다. 그곳은 기껏해야 '죽 한 숟갈 더 먹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하는 곳이지만, 그리고 자신의 안위를 담보하기 위해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아야 할 말세의 곳이지만 그러나 어떤 희미한 가능성으로 그들은 죽지 않고 버.틴.다!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187쪽)

가스실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규정하기 어려운',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머금으며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쟁투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야만의 세월을 견뎌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그 죽음의 현장에서 레비는 살아남았고 그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216쪽)고 했떤 메모들도 함께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야만의 기록들은 우리의 기억을 일깨우고 있었다.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241쪽)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전제 하에 아우슈비츠는, 神이라곤, 혹은 신의 뜻이라고는 부재했던 그 현장은 이제 역사와 인간들 속에서 레테의 연가가 되어버렸는가? 신의 섭리가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었던 증오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버렸으며, 그만큼 모두가 행복한가? 레비. 그의 글은 증오와 배제와 차별이, 탐욕과 야만과 부패가 여전한 오늘날의 세상을 향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게 파렴치했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인간이, 바닥으로 떨어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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