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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있어 여류의 노래 1
이병철 지음 / 민들레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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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신으로 하여 내가 있고, 나로 인해 당신은 있습니다. 不二면서 非一인 '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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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당신을 안고 내가 물든다
문태준 엮음 / 해토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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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_김훈 

 해마다 가을이 올 제면 얼마나도 많이 이 구절을 되뇌었던가.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은, 비록 중년은 아닐지라도 상실한 청춘의 가슴에겐 증발된 마음의 허기와도 같았으리라. 허허로운 제 가슴의 공간은 ‘여름의 무자비한 증발작용’이 남긴 염분의 흔적처럼 짜고, 썼다. 그 쓴맛의 뒤끝은 마치 사랑의 흔적처럼 몸서리치도록 안달난 마음과도 같았지만, 이내 엄습하는 후회와 상실은 내일을 곧잘 ‘기대 없음’의 시간으로 연소시키곤 하였다. 여름 같던 사랑이 덧나기 시작할 때 가을은 왔고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청춘은, 그래서 내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감이랄 것도 없이,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사실 그녀와의 오랜 연애에도 매년 가을이 올 때마다 쉼표를 찍곤 하였다. 폭폭거리던 날들 속에서도 무진무진 초록의 생기를 품어내던 나무들이 흐드러질 즈음이면, 사랑도 그와 같아서 탈수증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땀 냄새 나도록 뒹굴었던 사랑의 자취는 염전처럼 마르고 말라 겨우 한 자락씩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고, 마음은 계절의 경계만큼이나 멀찌감치 배회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마음이 계절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어서 자꾸만 경계를 넘나들며 시절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서 시인 이성복은 ‘그 여름의 끝’에 ‘남해금산’에 올라 “당신을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허지만 가을은 못내 저버린 사랑의 기억을 어느덧 추억으로 편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잊어야 될 것들이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무채색의 추억만이 빈자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이토록 난감한 청춘의 계절에 시는 오랜 벗과도 같아서 한숨 찧는 인생들을 슬며시 포옹한다. 한 줌의 시어들이 마음결에 스밀 때, 시는 번지고 무너진 마음자리는 서서히 물든다. 시가 나를 감싸듯, 나도 시를 안는다. 그리하여 무너진 가슴에도 볕이 들고, 절망의 채도는 비움의 자리에서 탁함의 비늘을 벗는다. 어느 틈에 시는 번져 마음이 되고, 마음은 ‘체념할 것들을 체념하여’ 맑다.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마음 없이’라던 황동규 시인의 노래처럼, 어쩌면 체념한 마음자리는 비로소 마음이랄 것도 없어 뵌다. 그렇게 시가 번진 ‘수묵의 정원’(장석남), 즉 무심(無心)의 공간은 느슨하고, 서러운 포옹으로 조금씩 ‘홀로와’지고 있었다.(‘홀로 있는 즐거움’을 황동규는 ‘홀로움’이라고 명한 바가 있다.) 

 그 ‘홀로움’의 여정에서 나는 또 한권의 시집을 손에 들었다. 특별히 추석 연휴를 목전에 두고 귀향의 장도(長途)에 오를 예정이었던 나는, 오랫동안 보관함에 묵혀두었던 시모음집 <포옹>을 길손삼기로 작정하였다. 예의 시모음집들의 조악함 탓에 이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난 몇 편의 시집들을 통해서 보여준 문태준 시인의 깊고, 맑은 서정은 나에게 주저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포옹하였던 시들이 나에게도 깊고, 넓게 물들길 바랐다. 그 기대를 안고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한 줄 한 줄 읽고, 느끼며, 어느덧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수런거리는 뒤란’을 ‘맨발’로 거닐다, 한 쪽 눈마저 다른 한 쪽 눈으로 옮아간 ‘가재미’를 들여다보던 시인은 이제 득달같던 청춘의 시절을 물들인 보물 같은 시들을 노래한다. 여기에 묶은 시들은 시인의 고백처럼, ‘때로는 슬픔 쪽으로 때로는 미소에 가깝게 데려가 준 시들’이지만, 또한 한결같이 ‘매혹적인 끌림’을 지닌 것들이다. 그 매혹적인 끌림을, 시인은 ‘목단무늬 꽃살문’이라고도 하고, ‘싸락눈 내리는 소리’라고도 부른다. 그 속에서 기어이 시의 품에 안기어 물들었던 그는 이제 자신을 포옹했던 그 시들을 한데 펼쳐놓고 읽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꽃을 기르는 마음으로 이 시들을 보아주셨으면 합니다...... 붉은 꽃잎이 당신의 마음을 물들게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시인의 당부처럼, 이 시집은 꽃을 기르는 마음처럼, 조심스럽고 다소곳하게 읽어 내려가야 옳다. 왜냐하면 시인이 엮어놓은 시들이란 하나같이 낮고, 여리며, 가녀린 존재들을 향한 애가(愛歌)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낮고, 여리며, 가녀린 존재들이란 사랑의 상실에 처한 청춘들이기도 하고, ‘시대의 변죽’(배한봉)으로 밀려난 어느 쪽방촌의 빈민이기도 하다. 하여 그네들의 가슴을 넉넉하고도 따뜻하게, ‘낮은 목소리’(장석남)로 물들이는 이 시들을 허투루 읽어내려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어語와 절節을 조심스럽게 마주하며 곱씹을 때, 그리하여 시와 내가 오롯이 포옹하게 될 때, 시나브로 나는 시로 하여 물들고, 시는 나로 인해 번진다. 그렇게 시의 너른 품에 이드거니 안길 때, 고작 명도(明度)뿐인 마음자리에 색이 물들고, 무늬가 깃든다. 

 그러한 향연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비단 시 때문만은 아니다. 이 시들과 더불어 가슴깊이 포옹한 시인의 덧글이 또한 각별하다. 시인이 전작(前作) 시집들에서 노래했던 바와 같이 생의 변방, 바깥, 뒤편은 여전히 관심의 주파에 포착되고 있다. 예컨대 천양희 시인의 <뒤편>이라는 시를 읽고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뒤편을 볼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한 사람이다. 넉넉한 사람은 고통을 몸소 참고 견딘 사람이다. 자신의 뒤란으로 돌아가본 사람이다. 뒤란에서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으고 울어본 사람이다. 뒤편에는 숭고도 있고 남루도 있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뒤편을 감싸 안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마치 비 오기 전 마당을 쓸 듯 그의 뒤로 돌아가 뒷마당을 정갈하게 쓸어주는 일이다.”(31쪽) 

   한편 배한봉의 <이 시대의 변죽>이라는 시에서는,

“가장자리를, 언저리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생겨났을까. 고약하다. 위와 아래가, 속과 겉이, 처음과 나중이, 다수와 소수가, 저택과 쪽방촌이, 어쩌다 이처럼 아니 볼 듯 갈라서게 되었을까. 양극에 달하게 되었을까.”(86쪽) 라며 성토하기도 한다.

 이렇듯 시인은 복판, 곧 중심에 가닿지 못한 존재들을 애정의 눈길로 응시한다. 그것은 단지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진정 소중한 것이 그 작고 가녀린 존재들에 있음을 깨우치는 과정이자, 진정한 사랑을 깨치는 일이기도 하다. 이는 오지랖은 넓어졌지만 품은 좁아진 오늘날의 각박한 세상을 극복하는 일이자, ‘아름다운 후미後尾’로 들어가 ‘넉넉한 시간’을 몸소 살아내고픈 바램이다. 그 속에서 어우러지며 비로소 당신과 내가 ‘무릇 동근同根’임을 발견할 때, 사랑에 너와 내가, 변죽과 복판이 물들고, 번진다.

 가을의 하늘은 여전히 높푸르다. 허나 그 하늘 아래의 많은 인생들은 가늘게 떨고 있다. 마치 더 이상 내일은 새로운 일이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어떤 이는 품을 잃어버린 이 세상에서 밀려남으로 하여, 또 어떤 이는 저문 사랑이 남긴 상처와 남루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의 고백처럼, “꽃이 필 땐 꽃 지는 내일을 생각 말자. 오늘 흰 매화 피는 것만 보아라. 그 꽃그늘 아래서 춤추는 게 사랑”(69쪽)이라면, 그래, ‘오직 이 순간’을 받아들고 살아볼 일이다. 시가 주는 매혹적인 끌림도 느껴볼 일이고, 그로 하여 지친 영혼의 허기를 달래기도 해봐야 한다. 그러다가 문득 시가 번지고, 내가 물들 때, 무채의 인생에도 결 고운 빛살이 ‘따뜻하고, 넉넉하고, 느슨하게’ 비추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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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한편의 시문 같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꽃잎 진 사랑이라면 다시 피어날 날도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덧글들도 마음에 들고
님의 절절한 글도 마음에 닿습니다. 꽃그늘 아래서 춤추는 사랑.. 통속적이고도
어려운 게 사랑이라지만 그런 사랑을 초월한 '사랑'이 되어야 할 텐데요,
제겐 너무나 먼 바람입니다.

바람결 2007-10-04 21:46   좋아요 0 | URL
잘 읽어주셔서 다행이고, 참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봄이 저물어 이내 겨울오고, 그리고 다시 봄 오듯,
진정 '사랑'이라면 다시 올날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흐득흐득 가는 세월 속에서 한 그루 나무처럼
서있을 일이겠지요. 루미가 말한대로,
제 가슴을 잃어버리고 말입니다.

모쪼록 혜경님도, 그리고 저도 더 깊고 높은 사랑에
이를 수 있기를...그 길 바라며 아름답고, 순한 존재로 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가재미 문학과지성 시인선 32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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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영 문외한이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안다. 시는, 좋은 시는 말보다 빠르게, 생각보다 먼저 고조곤히 살갗에 와 닿는다. 이 겨를없음은 어쩌면 시이기에 가능한 것이고 시가 주는 최대치의 선물이다. 살갗이 서걱거리면 슬픔이라든가 우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가슴까지 이르고 혈관 곳곳에 깊게깊게 스며든다.

 문태준의 '가재미'를 읽는 내내 나는 그러했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 그리하여 말과 말 사이의 그 모든 행간을 나는 맨몸으로 받아내며 살갗 어느 곳인가가 쓰라림을 눈치챘다. 그의 시들마다 바닥은, 아래는, 혹은 삶의 언저리는 소름같이 돋아있었다. 그곳은 비어있음이 공간이었고 또한 소멸되었거나 마침내 소멸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공 속에 시인은 무심하게도 '나'를 비벼넣고 있었다. 텅비어있거나 급기야는 소멸되어야 할 '나'는,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가 부끄럽고 가난한 존재이다. '나'는 인지되는 그 어떤 사물보다 텅 비어있고, 모자라며, 게으르다. 이것은 어떤 까닭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인다. '바깥'이란 시에서는 그는,

'다시 생각해도 / 나는 / 너무 먼 / 바깥까지 왔다'고 말한다. 안이 아닌 바깥, 중심이 아닌 변방, 나는 그 언저리에 존재하는 것이다. '극빈'이라는 시에서는,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없었'을 만큼 '나'는 극도의 가난으로 점철되어있다. 이러한 나는 '강대나무를 노래함'이라는 시에서처럼 별 수없이 '강대나무를 서럽게 불러 내 곁에 세워두'고야마는 서 있지만 그대로 말라 죽은 나무 같은 슬픔을, 혹은 아픔을 지닌 존재이다.

 그의 이러한 인식은 사람됨으로서의 겸손을 뛰어 넘어 사람됨으로서의 슬픔이며, 스스로 無와 空을 향해야할 신념처럼까지도 느껴진다. 한참이나 아득한 밑 바닥, 생의 변방에서의 삶이란 기껏해야 모자른 것들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그러한 현실은 비루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 가운데서 주어질 찬란한 슬픔과 '텅 빈 충만'을 선사하는 은총이리라 생각된다.

한참동안 그의 시를 읽고 나는 스윽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구나'(65쪽)하고 나도 무릎을 탁 쳐보는 것이다. 이 살갗쓰린 아픔 정도는 어느 '평상이 있는 국숫집'(72쪽)같은데를 생각해보면, 그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위로를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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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 현대문학북스의 시 1
안도현 지음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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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도현 시의 미덕은 무엇보다 고도의 상징성이나 난해한 은유, 현학적인 용어의 사용을 극히 절제하고, 현실적이고, 직유적이며, 대중의 언어를 고루 사용하는데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시의 서정성이나 낭만주의적인 요소들이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되려 현실주의와의 변증법적 원융을 통해 시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로 위와같은 성격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하여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떤 관념적인 방향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이기도 한 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시집에서는 '나무'가 제재를 이루어 절반에 가까운 시들에 포진해 있는데, 하나같이 시인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그 '나무'를 보며 안타까워 합니다. 특히 '나무생각'이라는 시에서처럼 시인은 '무조건 무릎꿇고 한 수 배우고 싶'어하는(마치 신앞에 선 인간처럼)겸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거의 모든 시의 소재는 '자연'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대한 '자연'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자연'을 이루는 작은 것들 말입니다. 이를 통해 시인의 눈이 결코 '거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미시'를 말하면서, 끝내 그것을 관통하여 우리네 삶의 아픔을 구구절절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밖에도 시인으로서의 삶을 중얼거리는 시들을 만날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것을 말하자면 위와 같다고 할 수 있겠어요.

여전히 안도현 시인은 작은 것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사색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라고 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이와 속깊은 통찰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범상치 않게'라고 하는게 맞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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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 문학동네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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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일년을 두고 볼때 내가 읽는 시라고는 고작 10편 내외로 한정된다. 그리고 그 10편 내외의 시라고 해야 늘 알고있는 시를 한번 더 읽어보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4월이오면 김수영과 신동엽 시인의 시를, 가을이면 김현승과 윤동주, 김광균 시인의 시를 다시 펼쳐드는 정도이다. 그러한 시들도 처음 접하게 된 것이 고등학교 시절 입시준비를 위해 공부했던 시들을 다시 읽는 것이니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미천한 수준의 시읽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나에게 절친한 교회후배가 시집 한권을 선물해줬으니 바로 그 책이 <바닷가 우체국>이라는 안도현의 시집이다. 신문지면이나 잡지 또는 인터넷을 통해 안도현 시인의 시를 간간히 접해보았던 경험이 있는지라 나름대로는 이 기회에 시집 한번 제대로 읽어보리라고 생각하며 펼쳐들었다.

이미 듣던 바대로 안도현의 시는 구수했다. 시 한절 한절 마치 어린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할머니처럼, 주름진 손으로 화롯불에 구워주시던 그 밤맛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절절하게 마음을 울리는 시구들이 꼿꼿한 마음을 녹아내리게도 해주는 듯 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부박한 현실과 이상 속에서 괴리하던 나의 마음을 더 복잡하고, 답답하게 만들어준 것은 나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치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기다렸지요'(p.13 '고래를 기다리며' 中)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p.16 '숭어회 한 접시'中)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p.40 '양철지붕에 대하여'中)

다른 시인에게서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분명 있었다. '삶'이라는 화두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사여구로 치장하는 시쓰기가 아닌 '삶'그대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몸뚱이로 살아내려는 마음들이, 그 언어들이 시 속에 구구절절 박혀있었다.

그 누구라도 삶이 지치고 힘들다면, 이 시집 한권 읽어보며 힘든 삶에 눈물 흘려봅시다. 찬 소주 한병에 숭어회 한 접시 먹은 것처럼 콸콸해진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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