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반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절판


주님에게 기도는 무기력하게 울부짖는 군중들로부터 한발 물러서 전열을 가다듬는 피난처이기도 했고, 악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통로이기도 했다.-136쪽

앤더슨은 유다의 사례에서 기도의 핵심 원리 하나를 추출해냈다. "기도는 삶에서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런 성분들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은혜의 사역에 포함시키는 도구다."-139쪽

이유야 어찌됐든,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너그럽게 봐주고 계신다. 아버지가 몸이 성치 않은 아들을 학대하고, 자녀가 선천적인 장애를 지닌 채 살아야 하고, 유방에 생긴 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되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상을 꾹 참고 지켜보시는 중이다.-149쪽

주님은 시험 자체를 없애달라든지 결코 실족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신다. 비록 시험을 당하고 실패를 거듭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의 유익한 일꾼이 되고 주님을 좀 더 닮아가길 간청하실 따름이다.-152쪽

트렌치 대주교는 단언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꺾는 작업이 아니다. 기꺼이, 자발적으로 베풀어주시려는 그분의 마음을 붙잡는 행위일 뿐이다."-164쪽

역사란 창조주가 인간에게 통치권을 나눠주시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 앞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선물로 주시고 그 대표들을 불러서 파트너 역할을 맡기셨다.-175쪽

기도는 하나님과 협력하는 도구다. 은혜가 작동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179쪽

묵상이란 기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기도의 궁극적인 대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행위다.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또 찾는다면 결국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분을 만족시켜드릴지 연구하게 될 것이다.-190쪽

하나님은 기도를 인간의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도구로 삼으셨다.-190-191쪽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는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추구하는 동시에, 무슨 일이든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헌신해야 한다.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셨다. 이건 차분하고 온건한 분위기의 말씀이 아니라 명령조로 다그치는 쪽에 가깝다. "정의를 세워주세요! 세상이 똑바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하나님은 세상에 치유와 구원을 전달하는 사절로 일할 파트너들을 부르고 계신다.-196쪽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를 돌본다면 곧 예수님이 보살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용서하면 그리스도가 용서한 것이다. 상처 입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건 주님이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196-197쪽

세상 권력에 연연해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일수록 기도를 통해서 더 위대한 권세에 다가설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가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한다.-205쪽

칼 바르트는 "기도하기 위해 두 손을 모으는 행위야말로 무질서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서는 출발점"이라고 썼다.-209쪽

본회퍼는 기도의 본질을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하나님과의 파트너십"으로 파악했다. 세상에 가득한 악을 보고도 지레 체념한 채("세상이 다 그렇지 뭐") 신앙생활에만 전념하는 독일 그리스도인들을 맹렬하게 꾸짖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기도만 해놓고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한테 떠맡기는 것도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기도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무작정 악에 맞서겠다고 덤벼드는 행동주의에 대해서도 엄중히 경고했다. 악과 싸우려면 '행동하는 기도'와 '기도하는 행동'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219-220쪽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확실히 신뢰하는 믿음을 갖는 동시에, 반역적이고 타락한 세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삶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소명감을 품기 마련이다.-220쪽

"역사는 장차 다가올 세상의 참모습을 아는 이들의 중보기도에 따라 달라진다." 기도하는 이들이야말로 악과 고통, 죽음을 이기고 최후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핵심 요원들이다.-231쪽

그리스도는 병자를 고쳐주고, 죄인을 찾아다니고,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나그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따위의 힘들고 고된 일들을 하라고 명령하셨다. 갈릴리에서 벌이셨던 사역을 손수 세계 방방곡곡으로 확장하시기보다 우리 손에 위임하셨다. 파트너로 삼은 인간들이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243쪽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을 한 점으로 수렴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 속으로 끌어들인다. 기도란 시간에 묶여 사는 지상의 인생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좀 더 직접 개입해주시도록 요청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247쪽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고 가르쳤다. 킹 제임스 성경은 "아뢰라present" 대신 필요를 "알려드리라making known"고 쓰고 있다. 모든 걸 알고 계신 주님께 어떻게 필요를 알릴 것인가? 열쇠는 바로 관계다.-255쪽

쇠렌 키르케고르는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지 않는다. 기도하는 사람을 바꿀 뿐"이라고 말한다.-271쪽

기도라는 바로 그 행동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채널이 열린다.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보게 해서 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관계가 진전되면서 저마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이 정작 본인들보다 더 분명한 그림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272쪽

기도는 독백이 아니라 서로서로 관계 안에서 맞춰가는 진실한 대화다. 처음에는 자기 소원을 아뢴다 할지라도 시간이 흘러 대화가 깊어지면 전혀 다른 관심사를 갖게 된다.(......) 지속적이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욕망과 계획은 차츰 하나님의 뜻이나 섭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273쪽

시몬느 베이유는 묻는다. "하나님과 씨름을 벌이고도 깨어지지 않았다면, 그보다 더 큰 재앙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지금은 패배처럼 보여도 언젠가 영원한 승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속이는 자' 야곱은 멀쩡한 두 다리를 뽐내며 돌아다녔지만, 이스라엘은 다리를 절었을지라도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끈질긴 기도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다.-275쪽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를 재건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조각가처럼 정으로 대리석을 다듬고, 화가처럼 색깔을 입히며, 작가처럼 말을 다듬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완성되지 않으며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계속된다.-2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도 (반양장) -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길
필립 얀시 지음, 최종훈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월
절판


인간은 삶 속에서 만난 멋지고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감사하고 싶을 때 기도를 드린다. 자신이 너무나도 왜소하고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그리하여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도 기도가 나온다. 용서를 받고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서도 기도한다.-15쪽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기도는 인간이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행위다. 인간은 불완전성 그 자체다.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져야 할 간격이나 공간과 같다."-15쪽

세상은 날이 갈수록 빨리 돌아가고 있으며 느긋하게 앉아서 기도할 여유는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짧아지고 더 비밀스러워졌다. 편지 한 장도 버거워서 이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로 처리해버리고 만다. 대화는 줄어들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없어"가 붙는 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간이 없고, 쉴 틈이 없고, 운동할 여유가 없고, 놀 짬이 없다. 이렇게 온갖 스케줄이 꽉 들어차 있는 삶에 무슨 여백이 있어 하나님이 끼어드실 수 있겠는가?-19-20쪽

기도는 마음의 근시를 바로잡게 해준다. 잊어버리기 쉬운 하나님 관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역할을 뒤집어버린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해 봉사한다고 착각하기 일쑤다.-29쪽

손튼 와일더의 연극 <우리 읍내our town>에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어느 날 제인에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된다. 그런데 겉봉에 적힌 주소가 특이하다. 주소는 농장의 이름과 읍, 면, 군의 명칭을 적는 데서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미국, 북아메리카 대륙, 북반구, 지구, 태양계, 우주, 하나님 마음." 그리스도인은 순서를 거꾸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토대를 두고 삶을 바라본다면 그 밖에 잡다한 일들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게 마련이다.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최소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상황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32-33쪽

은혜는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흐른다. 사랑도 시냇물처럼 흘러내린다.-34쪽

기도, 오직 기도만이 하나님과 같은 관점을 갖도록 시력을 회복시켜 준다. 눈을 가렸던 비늘이 떨어지면서 부의 이면에 무서운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종이나 지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진리가 새롭게 다가온다.-35쪽

"근본적으로 기도는 자세, 즉 자신을 어디에 놓느냐의 문제다. 초점을 맞추는 기도란 시야를 제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체에 주의를 집중하는 습관이 기도라는 말이다."-37쪽

"하나님은 조금 쉬자고, 잠시 농땡이를 치자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자리를 차고앉아서 제 힘으로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려 들지 말고 그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되시도록 모든 일을 맡겨버리자." 기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한없는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주님 앞에 온갖 실수와 약점, 한계 따위를 인정할 힘을 주는 것이다.-38쪽

기도는 질서를 재조정하는 과정이다. 우주를 아우르는 진리를 회복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과 자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44-45쪽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부터 우주는 질서를 회복한다. 고백이란 피조물이 창조주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일 뿐이다.-49쪽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다.-49쪽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온전한 빛 속을 걸어가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인간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 역시 가끔씩 용서를 베푸는 창조주가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가 잘못됐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죄인이며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사랑이시다."-53-57쪽

도움을 청하는 자세야말로 기도의 뿌리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만 봐도 온갖 요청이 줄줄이 이어진다.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선언, 그것이 기도다.-57쪽

성공을 으뜸으로 떠받드는 세상에서 스스로 약점을 인정하는 태도는 교만한 마음을 무장해제시키는 동시에 은혜 입을 준비를 갖추어 준다. 연약함을 기도를 부른다. 긍휼과 권능으로 응답해주시도록 하나님을 초청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의사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할 가장 적절한 행동은 상처를 보여드리는 것뿐이다.-57쪽

모든 행동 뒤에 감춰진 이기적인 동기나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 완벽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게 만드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 따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 전체를 들고 나와서 정결하게 씻어내고 제 모습을 되찾으라고 초청하는 안내장이다.-70쪽

관계가 아니라 거래로서의 기도는 기쁨이기보다 정해진 규정을 지키는 관습으로 변질된다. 생명과는 별 관계가 없는 순간적이고 임시변통적인 숙제로 전락하는 것이다.-76쪽

그리스도인은 한 손으로는 창조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는 진리를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매달리는 것이다.-81쪽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지내면서도 일기 쓰기를 잊지 않았던 에티 힐레숨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글을 남겼다. 도덕의 불모지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힐레숨은 진리를 꿰뚤어보고 있었다. "가끔 수용소 한 모퉁이에 서서 두 다리로 주님의 땅을 딛고 눈을 들어 하늘나라를 우러러보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깊은 감동과 감사의 눈물입니다."-85쪽

글을 맺으며 힐레숨은 말한다. "일단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면 꾸준히 그분과 더불어 걸어가야 합니다. 삶이란 긴 산책과도 같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85쪽

기도란 하나님을 가까이 불러오는 도구가 아니라 거룩한 임재에 반응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기도하는 쪽에서 실감하든 못하든 주님은 엄연히 그 자리에 계신다.-86쪽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마음이 평온할수록 기도는 더 강렬해지고, 더 소중해지고,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고, 더 완전해진다"고 했다. -91쪽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묵상하는 기도를 드리다보면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상태에 이른다. 개중에는 이런 형태를 '무심한' 기도라고 부른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매달리는 게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사심 없이 자연스럽게 간구한다는 뜻이다. 주님과 더불어 충분한 시간을 가진 뒤에는 여태까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긴급하게 구하던 일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93쪽

거래가 아니라 관계에 토대를 둔 기도야말로 하나님께 다가서는 가장 자율적인 방식일 것이다.-93-94쪽

기도의 주목적은 생활을 더 편하게 만들거나 기적적인 능력을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95쪽

하늘 아버지는 진즉부터 자녀들을 돌보고 계시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이 관여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께 새로운 정보를 드리는 의식이 아니다.-99쪽

앨런 에클스턴은 "기도한다는 것은 인식의 기회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나란히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 멈춰서서, 선물을 뜯어보듯 차근차근 살펴보고, 과거와 미래의 맥락에 넣어보고, 마음속으로 가능성을 진단해본 다음에 그 안에 담긴 것들을 끄집어낸다." 게다가 하나님은 시종일관 현장에 계신다.-107쪽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비결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기도할 따름입니다. 기도는 꾸밈없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듣습니다. 우리가 말씀드립니다. 그분은 듣습니다. 양방향의 교감, 말하고 듣는 것입니다."-11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철수, 나뭇잎편지 "웃을 수가 없습니다", 2010. 5. 23>


괜찮다. 무책임한 말이라는 것 잘 안다. 그래도 괜찮다. 속상해할 것없다. '한순간만 통할 뿐인' 가소로운 거짓말에 애면글면하지 말자.  저들은 자기 일을 하고 있고, 그 일로 자신들의 영혼마저 속이고 있는 중이다. 우리라도 우리의 영혼을 힘써 지켜내자.

"진실한 말은 영원히 남지만,
 거짓말은 한순간만 통할 뿐이다.
 악을 꾀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속임수가 들어 있지만,
 평화를 꾀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다." (잠언 12:19-20, 새번역)

 곧 (반드시!) 다가올 평화의 미래를 지금부터 살아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메시지 신약 -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영봉 감수 / 복있는사람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읽혀야 책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고, 밑줄이 그어져야 비로소 책이다. 성서라고 다르겠는가? 책장의 무게만 더하는 성서는 이미 성서가 아니다. 손이 닿고, 눈이 머물고, 침이 고여야 진짜 살아있는 글이다. 살아있는 글이라야 ‘거룩한 말씀’(聖書)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으로 펄펄히 살아 움직여 읽는 이를 거룩의 지평으로 인도할 때, 바야흐로 성서는 성서가 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사하신 최고의 선물은 ‘하늘의 언어’였다. 하늘의 언어는 천상에 갇힌 언어가 아니다. 두루 막힘이 없이 통通하는, 자유의 언어다. 땅과 만나고, 사람과 만나고, 모둠살이(日常)와 만나는 언어다. 하느님은 그런 언어를 통해 세상과 관계 맺고 싶으셨던 게다. 하지만 말이 문제였다. 사람의 말이라는 게 원래 그러해서 하늘의 언어를 옮겨 적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괜스레 복잡한 단어와 개념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 배후를 탐색하고 번안하는 일에 성서학자들이 애를 썼지만, 범상한 이들은 ‘그 말씀’ 앞에서 늘 속수무책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사람들은 더 쉽고 평이한 말씀을 원했다. 그래서 각종 번역판이 등장했지만, 그마저도 살갑지는 않았던가 보다.  

줄탁동시(啐啄同時)! 알 속의 병아리와 알 밖의 어미닭이 동시에 껍질을 쪼는 순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말씀 앞에서라면 까막눈 신세를 면치 못했던 이들의 곤란과,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던 연민의 마음이 감응感應하여 새로운 말씀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메시지’-전언傳言이다. 하늘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이다. 유진 피터슨이 그 통로가 되었다.(그의 노고는 두고두고 감사해도 모자라겠다.) 그리고 번역자들은 기꺼이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슬그머니 산상수훈(예수께서 산에 올라 하신 말씀, 마태복음 5-7장) 말씀의 한 자락을 펼쳐 본다. 기가 막히다. 내친 김에 적어본다. 

“거울 앞에서 설친다고 해서 키가 단 1센티미터라도 커진 사람이 있더냐? 유행을 따르느라 버린 돈과 시간이 그토록 많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 같더냐? 옷을 볼 것이 아니라 들판에 나가 들꽃을 보아라. 들꽃은 절대로 치장하거나 옷을 사들이는 법이 없지만, 너희는 여태 그런 색깔이나 디자인을 본 적이 있느냐? 이 나라의 남녀 베스트드레서 열 명이라도 그 옆에 서면 초라해 보인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들꽃의 겉모습에도 그토록 정성을 들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시고 자랑스러워하시며, 너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시지 않겠느냐? 나는 지금 너희로 여유를 갖게 하려는 것이며, 손에 넣는 데 온통 정신을 빼앗기지 않게 해서, 베푸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은 그런 일로 안달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일하시는 방식도 안다. 너희는 하나님이 실체가 되시고,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삶에 흠뻑 젖어 살아라. 뭔가 놓칠까 봐 걱정하지 마라. 너희 매일의 삶에 필요한 것은 모두 채워주실 것이다.”(메시지, 58. <마태복음6:27-33>) 

하늘의 언어가 이렇게 촉촉할 수 있다니! 우리의 삶도 그 속에 흠뻑 적실 일이다. 다만 욕심내서 읽을 필요는 없지 싶다. 손닿는 가까운 곳에 두어 조금씩이라도 자주 자주 펼쳐보는 일이 마냥 즐거울 것 같다. 그렇게 그 분의 메시지에 잇대어 살면서, 매일 매일의 일상이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장의 편지가 된다면 참으로 더할 나위 없겠다. 

“여러분의 참된 삶이야말로 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는 편지입니다.”(메시지, 486. <고린도후서 3:1-3 일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무엘상 17:38-40] 

38 사울은 자기의 군장비로 다윗을 무장시켜 주었다. 머리에는 놋투구를 씌워주고, 몸에는 갑옷을 입혀 주었다. 

39 다윗은, 허리에 사울의 칼까지 차고, 시험삼아 몇 걸음 걸어 본 다음에, 사울에게 "이런 무장에는 제가 익숙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무장을 한 채로는 걸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고는 그것을 다 벗었다. 그렇게 무장을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40 그런 다음에, 다윗은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골라서, 자기가 메고 다니던 목동의 도구인 주머니에 집어 넣은 다음, 자기가 쓰던 무릿매를 손에 들고, 그 블레셋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갔다.  

------------------------------------------------------------------------------------- 

몸이 무거워서는, 도저히 '골리앗'이라는 장벽을 넘어설 수 없다. 사람이란 본디 알몸으로 태어났으니, 다 벗었을 때가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다. 불편한 옷처럼, 고단한 짐을 이고가는 인생들은 잘 걸어갈 수도 없다. 무거운 옷가지를 하나씩 내려놓을 때에라야 비로소 발걸음은 가벼워진다. 우리는 모두 순례자이고, 순례자는-진리를 향해 걷는 순례자는 단출한 행장으로 나서야 한다. 그 때 그는, 육중한 세월을 징검다리 삼아 건넌다.  

법정스님이 돌아가셨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0-03-17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7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