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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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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른 세상이다. 울분을 삼키다 보니 울화가 쌓였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릴없이 마른 기침 뿐이다.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오래 전 어느 시인의 눌함이 새삼 그립다. 정처 없이 길을 오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가련하다 느끼고 있을 무렵, 주름진 노인이 말을 건네 왔다. “분노하십시오!” 그는 자신을 레지스탕스라고 했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그는 차분하되, 틀림없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를 분노로 정리했고, 분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다만 분노해야할 것들을 찾고자 하는 이들만이 자신의 존엄과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했다. 가령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이나 정치적 무관심,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 현실 등은 그에게 있어 분노해야만 할 것들이었다. 분노는 저항을 낳고, 저항은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한다고 그는 믿었다. 하지만 그는 자칫 분노가 폭력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계했고,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그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었다. 부침 많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선할 것도, 흥미로울 것도 내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장황하거나 진부하지 않게, 차분차분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그의 말은 따뜻했다. 지나친 과장이나 격앙은 없었다. 기실 그의 언어는 분노의 능력을 상실한 세대에 보내는 진심어린 격려의 메시지였다. 억압당한, 자신도 모르는 채 자유를 잃고, 저항의 발톱을 잃어버린 젊은이들을 향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였다.

 

그의 말은 그쳤고, 나는 곱씹는다. “잘 되어가는 사회란 무엇입니까? 모든 시민에게 생존의 방편이 보장되는 사회, 특정 개인의 이익보다 일반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 금권에 휘둘리지 않고 부가 정의롭게 분배되는 사회입니다.”(61-62) 우리는 지금 잘 되어가는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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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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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나의 전제 ; 기계론의 산모, 理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일언(一言)에서 유출된 ‘코기토cogito’, 즉 ‘생각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은 17세기 유럽을 중세의 암흑 속에서 구출하였다. 카톨릭의 권위 아래서 신음하던 중세의 인민들은 더 이상 종교라는 명분하에 공공연히 자행되었던 (한 개인의 사유와 감정과 느낌 등 모든 총체적 의미로써의) ‘수탈’에서 해방되었고, 새로운 인식론적 지평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뉴턴과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은 철학과 신학의 그늘 아래서 숨죽이던 인간의 의식에 한줄기 햇빛과도 같았다. 이로써 소위 ‘근대’는 시작되었으며, 과학과 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이성은 더 이상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실체에 대해 ‘지각 가능한’ 구원의 한 정점이었다. 이처럼 그들의 ‘구원’은 신(神)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치욕의 세월을 독재했던 저 무지몽매한 종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지만, 이른바 ‘기계론(mechanistic)’이라는 그들의 사고방식은 ‘기계론적 세계관’을 잉태하였다. 특별히 길게 부연할 것도 없거니와 그 ‘기계론적 세계관’이 결국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 인식의 토대 위에 자연과 인간의 공멸을 걱정하게 된 작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인도한 안내자임은 주지의 사실이다.(이에 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캐롤린 머천트의 <자연의 죽음>을 참조하십시오.)

2. 다시 하나의 전제 ; 이성은 실체를 증명하는가? 

 헤겔의 논리학적 대명제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현실이 이성과 합치하게 되는 변증법적 미래와 당위를 말하는 것’(이경재)이거니와 인간의 현실이 다분히 이성을 통해 인지되고, 판명되며, 인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부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일찍이 동양의 직관 속에서 이성, 즉 분별지(分別智)는 근원에 가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장자(壯子)도 그렇거니와 ‘늙은 할아버지’(老子)께서도 ‘도(道)’(실체 혹은 실재)란 본디 ‘불립문자(不立文字)’임을 일러주셨으니 이성이 현상이나 물체 따위는 가늠케 해 줄 망정 실체로 인도하는 문은 아니라는 것이다.(글쎄 이 지점에서 후설의 ‘현상학’과의 만남이 일정 부분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동양의 지혜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현대 물리학이 소위 ‘불가시적 세계’에 대해 인정하게 되면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동양의 사상들에 대한 수용과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남긴다. 우리는 과연 서구적 ‘이성’의 도그마가 진정 적실한 것이라 여길 수 있는가? 

 없다. 나는 당췌 ‘이성’이 궁극의 실재를 증명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다. 예컨대, 시멘트 바닥의 갈라진 틈사이로 꽃을 틔운 민들레의 저 질긴 생명을 보면서 나는 도저히 경외의 감정을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시인 김지하는 그 오랜 옥고의 세월을 거치며 감옥의 창틈에서 돋아난 민들레를 통해 ‘생명’이라는 화두와 만나게 되었죠.) 만약 이성의 ‘눈’으로만 파악한다면 그것은 내게 그저 ‘민들레’라는 이름의 풀 한포기일 뿐 일체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경외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민들레라는 이름의 ‘생명’은 ‘신성(divine)’의 깊이로 ‘우리를’ 인도한다.-그리고 나는 철저히 압도당한다.-비단 저 놀라운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소로우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신적 현존을 찬미하였으니 어찌 나 혼자만이 영역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도저히 그 ‘이성’이란 것에 모든 것을 의존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3. <만신>에 응답하며, 하나 - 이성이 진리를 담보하는가  

 내가 이토록 구구절절 ‘이성’에 대해 논한 까닭은 <만들어진 신>을 읽는 내내 지배했던‘이성에 대한 맹목적 믿음’에 관한 나름의 심기불편에서 비롯된다. 내가 ‘맹목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가 일관되게 합리적 이성에 근거한 ‘증명가능한’ 과학적 근거가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해답의 열쇠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성’이라는 프리즘을 적합하게 통과하지 않고서는 모든 논의들이 가차없다는 식의 언조(言藻)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 책을 관통하는 일종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과학자이다. 그 과학이란 것이 정말 완전히 ‘이성’의 탐구로만 한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 왕립협회 소속 과학자인 루퍼트 쉘드레이크의 경우는 주목할 만하다.

“나는 무신론자였습니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나의 생물학 선생은 종교는 지난 과거의 것이고, 과학의 미래의 것이라고 내게 확신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을 미신과 성직자와 도그마에 붙들어 놓았지만, 과학은 인간을 해방시켰으며 인간을 번영과 형제됨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신앙과 미신적 숭배를 통해서가 아닌 인간 이성을 통하여, 기술적 진보는 지상에 이런 천국이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인도와 스리랑카를 여행했는데, 이것은 정말 눈이 휘둥그래질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시아에 머무르면서 나는 세상을 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배웠습니다.(......)나는 기계론적 접근이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성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매튜 폭스, 루퍼드 쉘드레이크, <창조, 어둠, 그리고 영혼에 관한 대화>, 27-29쪽.) 

 그에게 있어서 과학은 단순히 인간 이성과 기술적 진보로 담보되지 않는다. 아시아에서의 여행 경험은 그가 기계론적 접근, 즉 이성을 통한 분절(分節)의 방식을 통해서 모든 것이 증명가능하다고 여길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경우는 ‘오직 이성으로만’ 모든 것이 분별된다. 종교도 ‘이성적 접근’ 속에서 확실한 법칙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폐기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4. <만신>에 응답하며, 둘 - 도킨스의 ‘이분법적’ 징후; 과학이라는 일방통행? 

 이처럼 그의 책에서 이성의 도도한 흐름을 감지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성이 그 모든 실체를 밝혀주는 척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사라진 종교의 자리를 마뜩치 않게 여기는 나로서는 그의 문제의식에 일정 부분 동의와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근대를 거치며 이룬 과학의 경이로운 성과들이 분명 우리의 삶을 (지적으로) 풍요롭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선택’이라는 다윈의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은 몽매의 그늘에 갇혀있던 인간의 탄생과 역사를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 창문이었다. 

 물론 저자인 도킨스는 이 ‘자연선택’-과 함께 맹목적 우연-이 생명을 읽는 가장 정확한 설명이며 독해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호트(John F. Haught)의 분석처럼, “진화와 종교에 대한 도킨스의 방대한 설명 전체는 생명이 자연선택과 유전자 생존의 차원에서 가장 깊이 읽힐 수 있다는 그의 확신을 전제로 한다.” (존호트, <다윈안의 신>, 165쪽.) 때문에 생명과 진화의 문제는 더 이상 일체의 신학적․섭리적 설명도 허용되지 않으며, 다윈주의와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종교와 과학의 대화는 불필요한 것이며, 나아가 종교 자체의 폐기를 주장함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도킨스의 주장이 ‘이분법적 오류’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본디 이분법은 ‘제3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 차원으로써 일체의 대화나 관용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명징한 과학적 법칙-과 종교의 해악-을 통해 종교의 폐기로까지 나아간다는 점은 그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모든 이분법이 사라진 곳에 낙원이 있다”고 말했던 롤랑 바르트의 주장처럼, 각 나름의 역할과 차이에 대한 존중의 소통이 사라진 자리는 결국 불통(不通)난 ‘지옥’일 수밖에 없으며, 또 다른 ‘독재’의 혐의를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분법은 누구의 소산인가? 내가 보기에 이분법은 인간의 무수한 역사와 그 질곡 가운데 ‘근본주의’라는 유령이 낳은 사생아였다. 

5. <만신>에 응답하며, 셋 - 근본주의가 아닌 종교의 문제라고? 

 근본주의는 보통 ‘어떤 이념 체계에 대한 광신적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을 보여주는 종교 운동이나 세속 운동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특히 오늘날 이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종교와 관련하여 빈번히 사용되는데, 이를 테면 기독교의 ‘인격신의 절대성’, ‘성서무오류설’과 같은 주장들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근본주의라는 용어가 단지 종교에만 국한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오히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여하한의 ‘광신적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들이 모두 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근본주의의 이념상 특징들은 보통 선악의 이원론, 나르시시즘적 욕망, 불관용 등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사실상 도킨스의 주장은 (앞서 언급했듯이) 이분법적 징후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불관용의 문제와 긴밀하게 잇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책에서(583-585쪽 참고.) 그는 근본주의의 혐의와 관련하여 부인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근본주의란 단지 종교적 범주로써 규정된다. 하지만 근본주의를 종교에 예속시키지 않고, 하나의 광(신)적 신념의 문제로 그 범주를 확대하면 분명 근본주의의 카테고리 안에 존재할 측면이 없지 않다. ‘지젝(Slavoj Zizek)은 자유주의자들은 최상의 ‘관용적 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신적 열정을 결핍하고 있는 반면에 근본주의자들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최악의 ‘불관용적 윤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신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이경재) 이와 관련하여 ‘종교가 없어져야 한다’는 도킨스의 주장은 적어도 자유주의자들의 ‘최상의 관용적 윤리’를 담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에게서 ‘광신적 열정’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건 무리일까? 

 그의 주장이 보여주는 근본주의적 성격을 뒤로 하고서라도 도킨스의 여러 가지 주장을 종합해보건대,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은 종교적 근본주의가 되어야함이 옳다.  왜냐하면 그가 종교 비판을 위해 사용했던 여러 가지 논증들은 분명 기독교 근본주의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지적되는 창조론, 인격신, 성서무오류설 등에 관한 내용들은 대개가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 일치하며, 대신에 기독교 일반의 문제로는 그것을 확대시킬 수 없다. 물론 그가 ‘최악의 사례’를 공격한다는 점을 밝히고는 있지만 결론이 ‘종교의 폐기’를 향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사례’를 공격함으로써, (정작 결론에서는) ‘최선의 사례’ 또한 그에 복속 된다는 점은 심각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최선의 사례’나 ‘최악의 사례’나 종교라는 얼개 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참’ 종교, ‘거짓’ 종교라는 식의 구분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종교를 믿고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참된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애쓰고 있고, 또 이성과 과학의 공헌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며 수용하는 입장에 서있음을 감안할 때, 종교(기독교)에 대한 도킨스의 단일선적인 이해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6. <만신>에 응답하며, 결론 - 과학과 종교의 상생을 생각한다

“신학자들은 가치 있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92쪽) 

 

 나는 물론 신학자가 아닐뿐더러 ‘신학’에 관하여 많이 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간의(7년간) 신학 여정 속에서 신학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족히 경험하였다고는 말할 수 있다. 굳이 틸리히나 본회퍼, 불트만과 같은 훌륭한 신학자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신학은 분명 인간의 궁극을 추구해간다는 깊은 관심 속에서 참된 지혜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러한 와중에 ‘참된 가치’라는 종교적 본질에의 탐구는 더할 수 없는 고민과 번뇌를 안겨주었고, 나는 적잖이 방황하였다. 그러나 몇몇 신학자들의 수혜로 말미암아 정직한 이성의 추구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고, 그러한 때문에 나는 존 캅(J.Cobb)의 표현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간디의 ‘샤티아그라하’가 ‘진리 파지’, 즉 진리를 향한 실험의 운동이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이러한 나에게 누군가가 ‘신’에 대해 묻는다면 분명 나는 ‘초자연적 유신론’의 시대는 종언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대신 틸리히의 표현처럼, ‘존재의 근거(혹은 기반)’이라거나 ‘생명의 바탈’, 그리고 너무나도 거창하겠지만 ‘사랑’이라 이름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신학적 문제들에 대하여 일정 부분은 ‘전통적 기독교’(인격신론, 창조론, 선악이원론 등)와의 결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고도 밝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다른 이의 신앙 또한 무의미한 것이라고 가차 없이 재단할 수 없다. 종교는 (이성과 감정이 응축된) 경험이며, 분명 그들의 경험을 나는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 때문이다. 물론 무신론 또한 내게는 험담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믿음’ 또한 나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나의 신앙으로서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내 경험이며, 내 생각이다. 

 

 결론을 맺으며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 분명 (리쾨르의 해석학적 용어인) ‘우상파괴의 해석학’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약간의 경의를 표하고 싶다는 점이다. 그의 문제제기는 분명히 온당하며, 시의적절하다. 물론 미숙한 신학적 견해들은 상당히 많다. (성서에 대한 입장에서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아주 보수적인 신학자를 제외한 모든 신학자들이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으며, 일종의 문학적 형식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말의 실체 혹은 표면이 아니고 ‘말의 중심’이며, ‘의미’이다.-그러한 점에서 구약성서를 통해 무한한 상상력을 보았다라는 진중권의 말은 의미심장하다.-또한 기도의 행위는 개인적 청원의 차원보다는 오히려 우주적 사랑의 원칙에 근거한다. 그 모델은 예수이며, 그의 기도는 복음서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그 누구도 도덕적 요청으로써 종교를 믿지 않는다. 다만 ‘사랑’이신 하나님과, 예수가 보여준 ‘사랑’의 태도에 주목할 때, ‘사랑’으로 세상을 보고, ‘사랑’으로 살아갈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이 사랑 역시도 이성적 판단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마음의 영역이며, 실재의 한 측면이다. 증거는 그 삶의 행위로써 분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근본주의’의 해악이 오늘날과 같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상황 속에서 그의 주장을 경청할만한 하다. 하지만 광고 카피에서처럼 종교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악의 근원은(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모든 인간의 내면(혹은 자아ego)에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정말 그렇지 않은가? 

 

 <만신>열풍이라고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종교 비판’의 대열에 합세하는 추세이다. 좋은 비판이다, 좋은 견해이고. 하지만 견해가 진리를 담보하진 않는다. 그러므로 견해가 진리라고 주장할 때, 비로소 또 하나의 ‘근본주의’가 탄생한다. 독자들의 세심한 글읽기와 더불어 마음읽기, 세상읽기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다른 근본주의를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성’을 절대우월의 가치로써 상정할 때, 그래서 그것이 진리의 자리로 등극할 때 (‘장미의 이름’의 등장하는 수도사인) 또 다른 ‘호르헤’가 출현할까 나는 두렵다. 다만-진리와 무리를 뛰어넘은-‘일리’(김영민)적 상생의 만남이 종교와 과학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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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쓰셨네요. 일단 찜해놓고 갑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 글을 보기가 좀 그래서요..
나중에 꼼꼼히 읽고 배우렵니다.^^

바람결 2007-08-30 00:48   좋아요 0 | URL
네...쓰고야 말았네요. 다 쓰고 나니 너무 길어서 읽기가 좀 그렇겠다 싶군요. 그런데도 미처 적어내지 못한 생각들이 많아 아쉬움도 있습니다. 쓰다보니 또 언어의 나열은 아닌가 싶기도 해서 부랴부랴 방점을 찍어버렸습니다. 부디...꼼꼼히 읽지도 마시고, 배우지도 마시구요. 그냥 저의 견해일 뿐이니 대충만 봐주셔도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이지요. 그나저나 머리가 아프시다니요. 많이 무리하셨나 보군요. 생활이든, 마음이든, 뭐든지 간결하고 단순한 것이 좋답니다. 얼른 회복하시구요.

밖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군요. 좋네요...

2007-09-03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04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정수 2007-08-3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쓴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종교적 광신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듯합니다. 성서를 비판한것도, 신학자들과는 달리 해석을 글자 그대로 한것도 신학적 이해 부족이라기 보다는 실제로 목회에서는 목사들이 성서를 그대로 해석하며 설교합니다. 성서는 오류가 없는 절대적 진리라는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에서 주류라는 사실을 안다면 글쓴이 비판이 틀린것이 아닙니다.

바람결 2007-08-30 20:42   좋아요 0 | URL
정수님, 좋은 의견 감사해요. 말씀하신대로 저자의 집필 동기는 분명히 '종교적 광신'에 대한 반발이지요. 하지만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무신론에 대한 열망'이기도 하답니다. 그리고,

소위 '주류'라고 불리는 미국 개신교의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선 모르지 않습니다. 그 주류 목사들의 성서해석 또한 온당치 않다고 저 또한 느끼고 있구요. 정수님, 하지만 목사와 신학자는 분명히 다르겠죠? 도킨스는 신학자의 성서해석을 타겟으로 삼아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도킨스와 같이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도킨스가 신학자보다는 그 주류의 목사들을 겨냥했다면 더 좋았을 듯 싶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최근 몇 년간 진보적 신학자들을 위시로 한 '예수 세미나'라는 모임을 중심으로 하여 편협적 사고 양태를 보이는 '복음주의자'들과는 분명히 다른(급진적인)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생각하는 신자'들이 점차로 늘어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끝으로 저는 (글에 적은 것처럼)글쓴이의 비판이 완전히 틀리다고 보지 않구요, 일정 부분 지지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하지만 글쓴이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종교 폐기'는 과학과 종교의 어떠한 만남도 거세한다는 점에서 '생각하는 신자'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지요. 만약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반대한다는 식이었다면 좋았을 테지만요. 역시 이분법적 인식의 한계라고 볼 수 밖에는 없겠습니다.

말이 길었네요. 무튼 좋은 지적 감사드리고, 미천한 글을 읽어주셔서 또 감사합니다.

정수 2007-09-01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람결님.글쓴이의 의도를 약간 오해하셌네요.책에도 지은이는 신학자들이 글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마 자신에게 항의할거라고 덧붙이기도 합니다.그럼에도 성서를 가지고 딴지를 건 이유는 미국 기독교 주류들 특히 목사들이 대중들에게 성서의 비오류를 강조하며 선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결님처럼 이성을 가진 종교인보다 선동에 넘어가는 순진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지은이가 이 책을 쓴 원인이 되었겠지요.
지은이는 이미 악의 근원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의 주류인 복음주의 목사들과 인터뷰를 했고 나중에 영국 대중들에게 왜 저런 극단주의자들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냐는 항의를 받았습니다.하지만 영국인들에게 극단주의들로 보인 미국 목사들은 사실 미국에서는 주류입니다. 이게 지금 현실입니다.지은이가 이런 책을 쓴 동기는 이런 종교 광신이 과학교육을 망친다는 분노에서 시작한것입니다.

바람결 2007-09-01 17:29   좋아요 0 | URL
네, 정수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전 존중하겠습니다. 다만 제 글을 조금만 더 꼼꼼히, 그리고 찬찬히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말의 중심을 보아주셨으면 하는 바램이지요. 주류가 '종교 그 자체'는 아님을 보아달라는 얘깁니다. 또한 그의 과학적 견해라는 것 또한 모든 진리를 담보하는 매개가 아니라는 것을...모쪼록 앞으로도 좋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추적거리며 비가 옵니다. 내내 평안하시길...

비로그인 2007-09-07 03:27   좋아요 0 | URL
네 ..제가 답글을 지웠는데 보셨었는지 답글을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저는 니체와 빌헬름라히히가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책을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아마 저자가 말하는 종교가 무엇이며 또 왜 종교가 없어져야 하는지를 잘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첫 답글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 신앙이 아닌 사상인> 그리스도 사상이 기독교라는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재 탄생되었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였습니다.

답글을 주셔서 .. 의견의 교류가 있을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더군다나 종교라는 민감한 주제에 대한 토론을 끝까지 감정을 배제하고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주시려 하시는 모습에 많이 배우고 또한 감사드리니며 돌아갑니다. 바람결님.. 좋은 하루 되세요.


바람결 2007-09-07 00:1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수경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부족한 견해지만 조금 말씀을 드릴께요.

일단 파시즘과 같은 경우는 '근본주의'와 파시즘 그 자체로 구분하기에 무리가 있는듯 싶습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성격은 그 본질 자체가 근본주의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일단 그 문제는 차치하고요.

먼저 기독교가 이미 근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는 조금 수긍하기가 어렵네요. 왜일까요? 그건 아마도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놓고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교리화'를 거친 사상일 뿐, 기독교 자체의 결함이라고 생각할 순 없겠습니다.(이를 위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요. <이름없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추천해드리는 것으로 대신할께요.)

그리고 작금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분명 기독교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가 기독교 자체는 아니지요. 만약 그렇게 본다면 저는 아주 심각한 일반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또 어떠한 사상체계건 간에 '근본주의'는 그 자체의 참된 이상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참된 종교, 혹은 참된 이념이라 볼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수경님의 말씀처럼, 물론 도킨스의 주된 비판 대상은 기독교 근본주의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교의 폐기'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제의식을 갖게된 것이죠.

분명 그의 문제의식이 시의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의 문제의식도 하나의 견해이며, 그러한 점에서 무엇의 존재 가치를 운운한다는 것은 오만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인간의 이성이란게 늘 그렇지만요. 무튼 이 정도로 줄일께요.

너무 말이 많았습니다...쓸데없는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지적, 조언 부탁드립니다.^^
 
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얇고 가벼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줄곧 가슴이 짓눌려야 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제목과 함께 표지에서 전해지는 강렬함은 마찬가지로 책의 전편에 녹아있었고, 그 강렬함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린이들의 무덤”이 늘어만 가는 세계 현실을 목도하며, 한 맺힌 서글픔이 밀려들었으며, 지표화된 기아와 죽음의 숫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분노가 일었다. 세계는 발전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가라는 다소 고답적인 본 책의 문제의식이 철저한 자료와 저자의 경험 속에서 전혀 새롭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써 느껴야할 연민과 애통이 들끓었다.

 신자유주의의 세계질서 속에서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가진 자들이 자신의 배를 더 채워가는 만큼 자신의 허기를 달래지 못해 죽어가는 이들의 수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랜 정설이다. 게다가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파괴와 자연재해의 급증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결핍을 강화한다. 궁지에 몰린 이들은 적절한 돌파구를 찾지 못해 좌충우돌하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사실 그들에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일부만 주어진다 해도 굶주림으로 인한 처참을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다. 아니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대기업의 횡포가 조금만 줄어든다면 그들에게 생을 연장할 기회는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이 살인적인 사회구조는 오로지 “이윤극대화”라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질주하고 있다. 그들의 안중엔 인간도 없고, 생명도 없다. 오로지 ‘자본’만이 있을 뿐이다. 

 지글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희망을 본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인간의 희망을 찾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그만큼 인간의 탐욕으로 얼룩진 세상이다. 하지만 인간에게서가 아니라면 과연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더 나은 세상, 즉 기아가 사라지는 세상은 과연 무엇을 통해 가능하단 말인가? 결국, 결국에는 인간 밖에 없다. 정의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지향성은 세상을 변화시킬 거의 유일한 동인(動因)이자, 대안이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분노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인간성은 오늘날 분노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지글러의 말대로 오늘날,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성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우리는 기아와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 

 지난날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망령과 싸우던 이들은 대부분 낙담하거나 좌절하였다. 도무지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 ‘괴물’은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점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일상풍경이 되어버린 굶주림을 모른 체 했고, 오로지 ‘자본’의 증식이 세계를 구원해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시간에도 지구 한 편에서는 수많은 어린이들이 단지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그들의 죽음을 응시하고, 음식 쓰레기는 그 처분을 위해 골치가 아플 정도로 길거리에 넘쳐난다. 사람들은 멜서스주의와 같은 자연도태설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고 있다. 하지만 지글러는 “오늘날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인간적인 지구를 만들기 위해 이제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가면 된다. 이를 위해 멜서스적인 선입견이 없어져야 한다. 이 책은 그것에 기여하고자 쓰였다.”라고 말한다. 지글러가 인간의 변화에 희망을 두고 있다는 점은 다소 낙관적이다. 하지만 그 미래가 비관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결국 희망의 틈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기아에 관한한) ‘사람만이 희망이다’.

(추기: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실린 부록은 참 적절하였다. 또한 아빠와 아들의 대화형식으로 구성한 것은 단연 돋보이는 부분이다. 아마도 가장 쉬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신자유주의의 입문서로 단연 최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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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1:40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은비뫼 2007-08-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빠와 아들의 대화형식이라 참 쉽고도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서평 잘 읽었습니다.

바람결 2007-08-21 1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은비뫼 님. 참 인상적인 책이죠. 쉬우면서도 이리도 무거우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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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 - 다섯 지식인이 말하는 소통과 공존의 해법
신영복 외 지음, 프레시안 엮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지난 2001년, 한국의 수구적, 보수적 언론 지형도 속에서 일종의 대안언론 혹은 대항언론적 성격을 모체로 프레시안<presian>은 탄생했다. 그리고 지난 5년여 간, 프레시안의 행보는 몇몇 대형언론(예컨대 조,중,동과 같은)이 주류담론을 잠식해가던 ‘판’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 자신의 수구적 성격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선동했던 기존의 수구 언론들의 작태와는 달리 프레시안은 일정한 당파성을 견지해가면서 일획적인 주류담론적 가치관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프레시안의 열혈 독자는 아니면서도 그들의 행보에 관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중에 지난해 열린 <프레시안 창간5주년 연속 기획 강연>은 프레시안의 저널리즘, 그리고 그들의 기본 노선을 정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새삼스러운 것이었지만 나의 이목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나의(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시대의) 사상적 은사라고 생각하는 신영복 선생님과 김종철 선생님의 연속 강연은 역시 주목의 대상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프레시안 홈페이지를 통해 두 분의 강연 녹취록을 들여다보는 수순에서 만족해야했지만, 다시 한 번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숙고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5월, 총5회에 걸친 연속 강연을 책으로 엮어 발간하였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사실 이미 두 분의 강연은 녹취록으로 읽었던 터라 구입을 주저하였지만 나머지 세 분 역시 각기 다른 영역 속에서 지배담론과 쟁투하며,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가고 계시는 분들이라 소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약간의 주저 끝에 한 달이 넘도록 지나서야 책을 손에 들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5명의 각 강연자들이 지니고 있는 학문적 소양의 진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각자의 사상적 프리즘을 통해 한국사회를 분석해내고, 오늘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대안들이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근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근원적이고도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포함한다. 나아가 수구,보수적 기치 아래 길들여져 온갖 병폐들을 낳아왔던 한국사회의 올바른 지향성에 대한 제언들을 또한 담아낸다. 때문에 이러한 제언들이 소위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것도 타당성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간 우리 사회 속에서 지속되어져왔던 불합리한 보수 의식에서 기인한 탓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들의 진보성은 차라리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며, 그들의 주장은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5명의 강연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먼저 신영복 선생은 대립과 갈등의 시대로 보고, 진정한 소통을 회복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은 바로 인문학의 회복으로 대변되는 참다운 인간사회의 회복이다. 이 사회는 사람의 가치가 돈이나 물질가치로서 환산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그물망처럼 관계적으로 얽혀있는 사회이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 뜻을 모으고, 우직하게 걸어감으로써 조화와 균형을 회복하고, 참된 회복에 이르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여기의 현실 속에서 자신을 사람에 비추어 보아(鏡於人) 성찰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종철 선생은 한미 FTA를 통해서 ‘경제중심주의와 에콜로지의 갈등’에 봉착한 오늘날의 위기를 진단하고, 적극적인 연대와 용기있는 행동으로 성장주의 패러다임이라는 ‘타이타닉호’에서 뛰어내리자고 호소한다. 또한 <한미 FTA 타결 유감>이라는 보론을 통해서 초국적 자본의 세계 경제 지배방식을 넘어 상부상조와 호혜적 경제를 배우고 실천하자고 역설한다. 바로 그것이 인간 공동체, 그리고 생태를 지키고, 살리기 위한 대안인 것이다.

 또한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가 대면하는 오늘의 문제가 바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시작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 민중들의 삶의 현실에 동참하고, 이를 위해 복무하는 참다운 민주주의적 정당 정치를 주장한다. 한편 ‘희망제작소’의 설립자인 박원순 상임이사(사실 그에겐 인권변호사라는 닉네임 더 걸맞는다.)는 ‘시민운동의 위기’로 회자되는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들을 통해 시민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요청하고 있다. 

 끝으로 백낙청 교수의 강연은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할 만큼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강연에서 ‘6.15 남북공동성명’ 제2항(“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였다.”_189쪽)을 한반도식 통일의 기본 방안으로 삼아야하며, 이를 골자로 한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의 강연에서 토론자를 맡은 박경순(진보운동연구소 소장), 이대훈(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실행위원장)씨의 팽팽한 토론은 현장의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를 가늠할 수 있을 만큼 생동감 있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 또한 북핵에 관한 나름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두 토론자의 발언을 보면서 나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처럼 다섯 명의 강연자들은 각기 다른 관점들을 통해서 오늘의 현실을 진단하고, 적실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내가 정리해본대로라면 인문사회(신영복), 생태사회(김종철), 민주사회(최장집), 시민사회(박원순), 통일사회(백낙청)로 그들의 관점을 파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여하한의 관점들은 그 모두가 ‘더불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는 하나의 목표로 합류한다는 사실에서 다르지 않다. 오히려 현실의 문제를 푸는 이 다섯 가지 열쇠들이 빠짐없이 우리 사회 속에서 기능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가 꿈꾸던 사회는 비로소 (너무나도 완벽하게)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최장집 교수의 말처럼. 

 “보수적인 사람들이 비전을 갖고 만드는 것은 쉽습니다. 기존 틀의 연장선에서 합리적으로 이끌어 가면 되죠. 그러나 기존 질서에 대응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개혁은 기본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조직하는 일입니다.”(136쪽) 

 그러나 지금과 다른 미래를 조직하는 일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희망은 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인간다운 삶을 동경한다. 온갖 현장에서 이들은 돕고, 나누고, 사랑한다. 그런 이들이 있는 한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면 괜찮다. ‘여럿이 함께’라면 괜찮다. 정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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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죽음
캐롤린 머천트 지음, 이윤숙.전규찬.전우경 옮김 / 미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400년 전, 영국의 문학가인 에드먼드 스펜서는 ‘가장 위대한 여신’ 대자연은 창조주의 부관처럼 행동한다고 말했다. 스펜서는 또한 자연을 어머니이자 심판자로 묘사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대자연은 생물들 간의 관계를 심판한다. 자연은 모든 것들의 ‘공평한 어머니’이며 ‘각각의 개체들을 형제처럼 엮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펜서의 관점에서, 생산력과 질서라는 자연의 원칙은 정의의 원칙과 정확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르네상스 시기의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자연은 양육하는 어머니이자, 언제든 인간에게 공황사태를 가져다줄 수 있는 심판자이기도 하였다.

        그로부터 약 4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지구와 인간, 혹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염려하며 공생을 꿈꾸는 일군의 무리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철저히 인간 삶의 안락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보고 있다. 인간이 원한다면 언제든, 그리고 무엇이든 자연은 제공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이 마치 주술처럼 기저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성장이라는 기치 아래 사람들은 끊임없이 개발하며, 그것만이 유일한 진보의 조건처럼 여긴다. 고욤나무가 뿌리내리던 산들은 골프장으로 둔갑했고, 백합 조개가 가득했던 개펄은 황무지로 변했다. 끊임없이 자연은 -좋게 말해서-변하고 있다.(엄밀히 말해서 파괴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도 허천난 듯이 보이는가?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 길래? 성장 못해서 안달난 이들에겐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구는 지금 성장통(?)을 앓고 있다. 아니 오히려 성장암 정도라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만큼 자연은 훼손되었고, 더 이상 복기가 불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손상되었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의 생활의 조건 또한 확단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금-당장 생활의 방식에 제동을 걸든지, 아니면 죽음의 길로 가속페달을 밟던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나와 모두, 지구와 내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이요, 또 하나는 공멸로 가는 것뿐이다.

        말 그대로 자연의 죽음(임)을 당한 오늘날, 캐롤린 머천트는 우리에게 전자의 삶을 택할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 요청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배반되어온 인간과 자연의 온당한 관계를 재정립하는 시도이다. 그것은 합리화된 자기주장이 아닌 인간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공공의 제언인 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자연의 죽음(임)에 이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들을 여성-생태학적(Eco-Feminism)인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과학혁명에 대한 일련의 맥락들과 그에 의해 형성되었던 세계관들을 조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저자는 16~17세기 사이의, 살아있는 여성적 지구를 중심으로 한, 유기적 우주라는 이미지는 자연을 죽어있고 수동적이며, 인간에 의해 지배되고 통제되어야 할 것쯤으로 구성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의 의해 뒷자리로 밀려났다고 인식하고, 이같은 거대한 전환이 생겨나게 된 경제, 문화, 과학적인 변화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과학혁명의 시기에 사람들은 자연을 대체 어떻게 개념화했는지 이해하려는 것이며, 어떤 불변의 본질에 대해서가 아닌, 사회 변화와 자연의 변모하는 구성간의 연관성에 관해 탐색보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여성적 지구에 대한 이미지로 인해서 이 책을 이른바 ‘어머니’ 자연에 대한 헌사쯤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철저한 오해에 비롯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저자는 여성과 자연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찬양이 고유의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여성이 자연과 과도하게 동일시될 때, 그것은 곧 여성 스스로의 해방에 대한 전망에 역행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단지 자연과 여성이라는 개념은 그녀의 언급대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구성물이다. 따라서 여성으로서의 관점은 필연적 선택이며, 나아가 페미니스트의 역사가 곧 역사에 대한 인간 평등의 관점을 요구하는바, 주류적인 가치에 반하여 읽는, 말하자면 “사회의 아래로부터 보는” 사관史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자연의 죽임을 초래한 발전상들, 그리고 문화와 진보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인간 및 자연 자원의 가속화된 착취를 설명하기 위한 생태주의 관점을 정교화를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먼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유기적인 세계였다”라고 선포하면서 16세기 유럽인들에게 투영되었던 유기체라는 메타포를 설명하고 있다. 유기체 이론에 있어 핵심은 자연 특히 지구와 양육하는 어머니의 동일시에 있으며, 질서 잡히고 계획된 우주 내 인류의 필요 사항들을 제공하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여성, 그러나 이와 대조적인 여성으로서 자연의 이미지 또한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지구 이미지는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광산 채굴과 같은 행위는 인간의 윤리를 벗어난 것으로 치부되기 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학 혁명으로 인한 기계화와 합리화 과정은 양육하는 어머니라는 메타포를 사라지게 하였고, 이 사라진 자리를 기계론과 자연의 지배라는 두 가지 사상이 대체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대체 과정의 근간에는 자연과 물질은 모두 여성적인 것으로, 반면에 이데아는 남성적인 것으로 환원시켰던 플라톤이나 여성성을 수동성과 연관 지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인 틀 구조가 존재하였다. 이는 사회적인 관점에 있어서도 여성을 가정으로, 즉 남편의 지배하에 복속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이제 유럽의 농장과 소택지, 그리고 숲은 협동과 상호 의존의 생태체계로부터 분리-붕괴되었고, 초기 산업의 성장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약탈되었고, 파괴되었다.

        물론 사회에 관한 중세의 이론은 부분에 앞서 전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전체적 통일성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유기적 개념이 강하였다. 여기에서는 공동체의 완벽함과 공통의 도덕적 선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 공동체는 유기적인 형태를 띠면서 공동의 이익과 집단의 선을 추구하였다. 예컨대 안드레아의 크리스티아노와 캄파넬라의 태양의 도시는 재화와 재산, 지식이 거주민들 사이에 공유된 이상적 공동체였다.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으며, 모든 재화들이 수익의 목적이 아니라 이용의 목적으로 생산되었다. 그들에게 과학은 자연스런 조화의 연관 속에서 이용되는 것이었고, 공동체 내에서 여성은 평등한 존재로 그려졌다. 요컨대 캄파넬라와 안드레아의 유토피아는 자연과 사회 공동체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성 속에서 상호 연결되었으며,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요소는 전체의 기능 속에서 둘 다 동등한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 사회에 대한 희망도, 르네상스의 유기적 체계도 그렇게 간단치 만은 않은 것이었다. 저자는 당시의 유기체적 질서로부터 이탈된(되어진) 여성의 존재에 주목한다. 근대 초기에 있어서 중요해진 자연의 이미지는 정복하거나 통제해야 할 무질서하고 혼돈스런 영역이었는데 이는 곧잘 여성과 연결되어 마녀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먼저 이러한 사유의 형성 원인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우주론의 발견이 그 중심에 놓인다. ‘지동설’의 발견은 여성적인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남성적인 태양으로 대체하였다. 이 쇠락의 징조 속에서 자연은 마치 운명이 그러한 것처럼, ‘예측할 수 없고 난폭하고, 그래서 정복해야만 하였다.’ 여성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자연과 상징적으로 연관되면서 마녀화(化) 되었다. 물론 그것은 ‘사회적 질서와 유지 그 안에서의 여자들의 위치를 유지, 통제하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저자는 사회적으로 격화되고, 심지어는 부당하게 점지된 여성의 위치에 관해 ‘자연-문화의 이원론’을 작동 기제로 보고 있다. 이것은 자연의 희생을 담보로 한 서구 문명의 진보 관념의 핵심요소로서 자연 자원의 착취 뿐 아니라 위계적으로 설정된 자연의 질서에서 여자들을 남자의 아래에 두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남자들은 산파의 지위까지 획책하게 되면서 여성의 재생산 기능을 남성 우월성의 자리에 가두게 되었다.

        이제 여성과 같이 ‘무질서한’ 자연은 새로운 과학적 질문들과 실험적 방식에 굴복하여야만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질을 ‘공공의 매춘부’로 묘사하며, 허용이라는 언어로 포장된, 자연에 대한 강간과 착취를 정당화한 베이컨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수 있다고 한 데카르트에 의해서, 성적 은유로서-이제는 발가벗겨진 자연을 암시한 그란빌에 의해서 일종의 원칙-즉 과학적 질문과 실험적 방식의 패러다임-으로 기획되고, 건설된 것들이었다. 이러한 원칙들을 기반으로 메르센느와 가센디, 데카르트에 의해서 담론화된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통제 하에 종속된 자원으로 간주되었고,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기계론적인 사회모형을 정치철학의 전면에 부각시켰다. 이로써 기계론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를 규정하고 자연을 죽은 불활성의, 외부로부터 조작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는 곧 자연의 죽음인 것이다.

        풍차와 수차와 시계와 같은 기계의 등장은 신의 창조행위에 버금가는 산출능력으로 이해되었고,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신의 의지와 능동적 힘을 강조하는 것은 세속적인 일들에서 인간의 힘과 활동을 정당화하였다는 것을 보았을 때, 바야흐로 인간은 지구를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이제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주류는 기계의 특성과 경험적 힘에 의해 지배되어갔고, 질서화된 권력은 자연을 포박하게 되었다.

        기계론에 의해 점령된 1500~1700년 사이의 서구 세계는 ‘모던하고 진보적인 것처럼’보이면서 발전(?)해 왔지만 아사상태에 처한 자연은 역설적이게도 유기적으로 인간의 위기를 초래했다. 자원의 부족과 심각한 건강 악화는 이제 자연과의 유기체적인 문화를 재생하기에 이른다. 자연을 식물로서 규정하고, 인간은 정복자가 아닌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관리자를 자처하게 되면서 관리주의적 생태학의 유형을 띠게 되었다. 이는 곧 오늘날의 자연-인간관계의 양상과도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본래 관리주의적 생태학이란 본질상 자연을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장기적 이용 가능한 분석 대상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이제 관리주의적인 윤리에 대항하는 대안을 앤 콘웨이를 비롯한 일군의 페미니스트들과 뉴튼과 라이프니츠를 통해 발견하고 있다. 앤 콘웨이는 ‘서로 상호의존하고 그래서 타자 없이 살 수 없는......특정 사회 또는 공동체 속에서’ 신 아래 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상호의존성에 자신의 체계를 두었다. 이것은 이른바 일원론적인 생기론으로써 모든 피조물 안에 무한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견해였으며, 라이프니츠 역시 이와 같은 그녀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의 지배원리로 점철된 사회 속에서 새로운 철학의 구성을 시도하였을 뿐 아니라 과학에의 참여로 인해 우주와 사회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사물에 빠짐없이 골고루 영향을 미치는 생명과 지각력이라는 사고방식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철학과 기계론자들의 철학을 구별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물질은 생명에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고방식에 있었다. 이것은 곧 ‘자연의 죽음’과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가치 체계로써 자기충족적인 내적 발전의 원리였다고 할 수 있다. 뉴튼의 경우는 특히 ‘발효’라는 단어에 천착하였는데, 그것은 정치적으로 선동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으며, 능동적인 원동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효작용이라는 것은 수동성 위에 성립되고, 쇠퇴와 붕괴, 그리고 필연적인 죽음으로 향하도록 운명 지워진 기계론적 우주에 가려진 ‘자연의 죽음’에 대한 대항 수단이 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머천트는 결론적으로 지난 1500~1700년대 서구 문명을 다음 몇 줄에서 ‘아이러니’로 평가하고 있다.

“생생하게 숨을 쉬던 자연이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 생명을 갖지 않는 죽은 화폐에 생명이 주어졌다. 자본과 시장의 시장이 차츰 성장과 강한 능동성, 풍요, 약함, 붕괴, 파멸이라는 유기적 특성을 보이게 되고, 경제 성장 및 발전을 가능케 하는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 관계를 모호하고 신비한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이라든지 여성, 흑인, 임금노동자라고 하는 것들이 새로운 세계 체제를 위해 ‘천연의’ 인적 자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이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제목을 보고 나는 문득 슬퍼졌다. 인간과 자연이 살아가기도 아니고 공생하기도 아니고, ‘인간과 자연이 살아남기 위해’라니. 어쩌면 그것은 ‘극단의 시대’(홉스봄)를 살면서 자연과 인간의 ‘한 살이’를 외치는 벼랑 끝에 선 존재들의 절규 같은 것은 아닐까?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 자본의 끝없는 자기 증식 운동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따라가기 위해 탈주를 감행하는 존재들의 벅찬 숨소리는 아닐까?

“참으로 죽어가고 있고, 참으로 썩어문드러져 있는 병든 지구는 오로지 주류의 가치관이 역전되고 경제 제일주의가 개혁됨으로써 장기적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는 또다시 천지가 뒤집히는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이 말처럼 지구의 건강은 주류 가치관의 전복과 동의어이다. 경제 제일주의 극복과 매 한가지이다. 아니 어쩌면 지구의 건강이란 비로소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주류 가치관=자기중심성’을 허물고, ‘경제 제일주의=물신주의’를 허물어야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한 삶은 그녀의 제안처럼 새로운 사회 스타일을 만드는 초석이며, 대우주를 회복하는 소우주의 자기 각성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바로 머천트가『자연의 죽음』에서 말하고자 했던 공공의 제언-즉 기계론으로 점철되었던 가치 체계를 물질의 각 부분에 피조물의 전 세계가 있고, 각각의 피조물 안에는 전 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식의 유기체적 가치 체계로의 전환-을 존재론적 근거로 선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인식과 주체적인 결단이 ‘인도어 라이프indoor life’에서 ‘아웃 도어 라이프outdoor life’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끝으로 지난 수 세기동안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거나, 그 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주류 기독교 가치관에 던지는 작은 파장이랄까,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이야기 모음집 『나락 한알 속의 우주』에서 나오는 말씀 하나 실으며 마친다. 자연이 죽은 시대, 자연의 살림에 이바지를 꿈꾼다.


“......나락 한알 속에도, 아주 작다고 하는 머리털 하나 속에도 우주의 존재가 내포되어 있다 그 말이에요. 불교의 화엄경 같은 데서 보면 ‘일미진중 함시방 시방일우주(一微塵中 含十方 十方一宇宙)’ 조그마한 티끌 안에 우주가 있느니라 하는 말씀이에요.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너희들이 생명에 대한 믿음이 좁쌀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저리 가라 하면 저리 가고 저 바다를 비켜라 하면 비킬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그 모범이에요. ‘너희들 나처럼 살아라’하는 말 하셨지? 너희들 속에 생명에 대한 신념이 요만큼이라도 있다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들에 피는 그 조그만 꽃속에 무한함이 있다는 걸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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