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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었고, 먹먹했다. 사랑스러우리만치 공정(fair)하면서도, 불편하리만치 불공정(unfair)한 사랑의 공정성. 기계란 “관계만 알면 못 고칠게 없다”지만, 사랑이라는 관계의 기술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은 ‘신비’이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다 신비롭다”는 극중 대사는 어느 면에서 적확하다. 하지만 사랑 앞에서만큼은, 신비로운 작인作人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사랑 앞에서) 누구나 다 똑같기 때문이고, 공정하리만치 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또는 물결 위로 비치는 햇살의 잔영처럼, 사랑은 결과 결을 넘나들며, 변화무쌍의 포물선을 그린다. ‘이별’이라는 ‘공정한’ 낙하지점이 포물선의 끄트머리에서 기다린다. 끄트머리는 ‘끝이면서, 머리인’, 즉 처음과 나중을 하나로 묶어주는, 참 고마운 말이다. 끄트머리 공식; ‘사랑이 이별을 낳는다면, 이별은 사랑을 낳고, 또 사랑이 이별을 낳는다.’ 그러니까 사랑은 영원한 ‘시소놀이’가 아니던가? 끄트머리라는 말에 끝이 없듯이, 사랑과 이별의 이중주에도 끝은 없다. 이 대책없는(unfair) ‘게임’이 늘 변함없이 그대로인(fair)-관계의 끄트머리를, 우리는 일컬어 <fair love*>라고 부른다.   

*fair love: '공정한', '흠없는', 혹은 '아름다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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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4 0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7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결 고운 영화를 만날 제면 나는 짐짓 일렁인다. 그 일렁임으로 인하여 고만 영화에 대한 나의 방외인적 시각은 결여를 짐작하게 되고, 일체의 평評이나 논論은 슬그머니 멀찍한 거리로 밀려난다. 그저 하릴없이 영화의 고운 결에 따라 거닐기 시작할 때, 영화는 어느덧 나의 이야기가 된 듯 하고, 때문에 감정의 스펙트럼은 내러티브의 흐름에 귀속된 채로 부유하기 마련이다. 판단이 유보된 자리에 들어 찬 영화의 고운 결은 나를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린다. 일종의 감염이랄까? 

 간만에 맞이한 휴일이, 홀로된 자에게는 잔인한 시간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지난 개천절의 일이다. 슴슴한 가을의 하루를 보내는 일이 내게는 버거웠던지 집 근처 영화관을 찾았고 주저 없이 <행복>을 택했다. 허진호 감독에 대한 나름의 애정은 몇 편의 전작들을 통해서 퇴적되어 왔던 바, 나는 짐짓 그 섬세를 그리며 영화를 기다렸던 터였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울었고, 그 울음은 작위가 아닌 무위였다. 많은 영화들이 때론 허장과 성세의 파노라마 속에서 관객의 눈물을 그야말로 ‘작위적’으로 지었던데 반해서 예의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결대로’ 보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 

 나는 이후로 며칠을 더 지내다 다시 극장을 찾았다. 잘 기억하진 못하지만, 두 번이나 극장을 찾게 만들었던 영화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이후 처음인 듯 싶었다.(참고로 허진호 감독의 전작 <봄날은 간다>나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같은 영화는 비록 극장에서 한 번 밖에 마주하지 못하였지만 DVD를 통해서 셀 수 없이 보아오던 터였다.) 어쨌거나 내가 이 영화를 다시 찾았던 건, 서두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영화의 그 고운 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어느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이 밝힌 것처럼, 지극히 ‘통속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 주위의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었을 법도 하다. 그만큼 통속적이면서도 (통속적이라는 말의 함의하는 바와 같이) 상당히 현실적이다. 여튼 보는 이는 영화를 보면서 나의, 혹은 그 누군가의 기억을 오버랩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주는 울림은 상당히 크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은 소위 ‘통속적’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히려 많은 (통속적인) 영화들이 일쑤 겪곤 하는 시행착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시행착오란 영화의 통속성을 빙자해 만들어내곤 하는 ‘보편성으로 부터의 자기 초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많은 영화들이 내러티브의 구체 속에선 통속적이면서도 전체 속에선 일순간 범속적인 형태를 띠게됨으로 인해 소위 ‘최루성 멜로’, 혹은 ‘판타지 멜로’라는 혐의를 지니게 되곤 한다. 허나 <행복>은 구체의 결을 곱게 유지하면서 전체를 형성해간다는 측면에서 범속적이지 않다. 상당히 통속적인 제재 속에서도 말이다. 

 잘 모르는 말을 너무 많이도 지껄였다. 그냥 내가 느낀대로 말하자면, <행복>은 사랑과 치유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인생의 중심, 곧 찬란한 청춘의 시절에서 어느 정도 언저리로 내몰린 이들, 영수와 은희는 하방연애下方戀愛를 시작한다. 영화는 그들의 사랑 얘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아주 곱게 전개한다.(사랑의 절정에 이르는 과정은 상당히 즐겁고, 재미있다. 임수정과 황정민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름답다.) 그러나 어느결에 그들의 사랑도 저물고, 영수는 하릴없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주 흥미롭게도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진행되고, 마치 감독은 간결하고, 단순한 삶을 상징하는 농촌의 삶이 사랑과 아주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본디 그렇지 않은가? 현실의 복잡다단함 속에 사랑이 귀속될수록 사랑은 어려워지지 않던가? 때문에 감독은 은희의 입을 빌려 “오늘 잘 살고, 내일 또 잘살면 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성복의 시 <편지1>를 떠올렸다.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성복, <편지 1>, 전문) 

 

 이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하응백은 이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사랑은 불연속적인 두 개체가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심심하고, 외롭고, 허전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오락가락하다가, 그 힘든 시소놀이를 하다가, 사람은 죽는다.” (하응백, <사랑을 다 그렇다>, 일부)  결국 영화는 그들을 단순하고, 간결한 사랑 속에 가둬두질 못하고, 우리네 사랑이 곧잘 그렇듯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그 힘든 시소놀이’끝에 은희는 죽는다. 

 

 한 후배와 다시 <행복>을 보고났을 때, 그 녀석은 이렇게 말했드랬다.

 

“오빠, 근데 황정민이 임수정한테 뽀뽀하는 장면 있잖아요. 그때 황정민이 너무 멋있어서 가슴이 떨리더라구요. 근데 갈수록 황정민이 못생겨지는 거 있죠? 그리고 영화 끝자락에 다다라서는 정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있더라구요. 영화에서도 같이 사는 사람이 “자기, 못 생겨졌어”라고 했을 정도니...참...사랑이 사그러 들수록 사람은 못생겨지나봐요...” 

 

 정말 영수(황정민 분)는 갈수록 못나게 변한다. 그의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 (외면적이지만) 그는 자신을 옥죄던 병마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던 마음조차 치유된다. 말그대로 사랑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가 언저리에서 중심의 ‘몸’으로 가닿기 시작할 때, 그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균열은 그를 휘감았던 사랑의 치유로부터 이탈하게 한다. 그도 은희가 죽어가듯이 서서히 죽어간다. 

 

    

 

 말이 참 많았다. 어쨌거나 두 배우의 연기는 두고 두고 칭찬해야할 부분이겠다. 특히 은희 역을 맡은 임수정의 연기가 빼어나다. 영화의 결에 참 잘 들어맞는다. 황정민 또한 허진호 감독의 전작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그 고운 결이 주는 사랑의 회한과 눈물은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롯하다. 물론 영화가 제 속도를 끝내 유지해내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난 그저 그 결 고운 빛이 아프고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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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10-0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쪼록 <행복>을 기대하시고 계시는 분들에겐,
죄송합니다.
참조도 마시고, 읽으셨으면 흘려주십시오.
영화가 참 좋습니다. 그 말이 사실 전부입니다.;;

프레이야 2007-10-0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결님, 두번이나 보셨군요. 전 '봄날이간다'가 그런 경우였는데 펑펑 울어드랬죠.
고운결, 그런게 느껴지는 점이 비슷한가 봐요. 화요일쯤 보러가야겠어요.
님의 결 고운 글이 전 정말 좋아요. 이성복의 시도요^^
주일은 잘 보내셨지요? 여긴 아까부터 내리던 비가 잦아들었나 봐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편안한 밤~

바람결 2007-10-08 01:21   좋아요 0 | URL
혜경님, 저도요.
<봄날은 간다>는 지금도 저를 눈물겹게 하는 영화에요.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도 참 많이 울었구요.
정말 결 고운 영화들이지요?
모쪼록 <행복> 아프게 보세요.
(혜경님 무비프리즘 기대할께요^^)

그리고, 이곳도 참 고요합니다.
조금 내렸던 비가 때묻은 마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씻고 내려간 느낌이에요.

저는 그저, 감사한 주일이었구요,
혜경님도 행복한 주일 보내셨나요?

비로그인 2007-10-08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잘 읽었습니다 ^^ 별 관심없었는데 급호감가네요~ :)

바람결 2007-10-08 22:52   좋아요 0 | URL
앗, 체셔님 오랜만이에요ㅎㅎ
제 생각엔, <행복>이 가을과 참 잘 어울리는
영화인 듯 싶어요.
마음 슴슴한 날 찾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어린 시절, 실컷 낮잠을 자고 나면 한동안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여 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 대한 관념들은 이미 그 벼리를 잃었고, 인간에 대한 판단조차 꿈과 현실을 오가며 가늠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이 삼간(三間) 모두가 꿈, 그리고 현실이라는 경계에서 좌표를 잃었고, 등대를 잃은 난파선처럼 표류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꿈이란 것은 무엇인가? 혹자는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반영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현실에 대한 왜곡된 형태의 뒤틀린 반영이라고 했으니 꿈이라는 것은 딱히 정의할 수 없는 미개의 영역이자, 신비의 보고이다. 그런데 문제는 꿈이 현실의 반댓말이라는 착각은 바로 우리가 만들어내었다는 데 있다. 오히려 꿈은 현실의 연장선이고, 현실은 꿈의 도화선이 아닐까? 아니면 그 반대일수도. 혹은 꿈과 현실은 말그대로 자리없는 뒤범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수면의 과학'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린 채 뒤죽박죽 살아가는 스테판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성찰하게 만든다. 자신의 꿈이 성취되지 않는 직장에서 그저 희망을 잃은 존재로 살아가는 스테판에게 꿈은 자신의 비루한 현실을 벗어나 꿈과 희망이 성취된 유토피아로 이끄는 마법이다. 그 마법이 빚어내는 환상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완성해간다. 하지만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는 그의 일상에 치명적인 결과들을 낳는다. 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어디 한 곳에 나사가 빠진 것 같다. 엉뚱하기는 이를데가 없고,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러한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스테파니. 옆 집으로 이사 온 그녀의 묘한 매력에 그는 점점 빠져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늘 그녀 앞에서 보여주는 어설픈 모습들은 그녀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스테파니는 오히려 그의 기발하고 엉뚱한 행동들이 천진난만하게 느껴질 뿐이다. 스테판과 스테파니는 은연 중에 서로의 공통점들을 발견하며 마음을 나누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보여지는 것보다 커져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꿈 속의 사랑 또한 완전할 수 없다. 소심함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한 현실에서의 사랑은 꿈 속에서도 예의 그 소심함 때문에 성취되지 못한다. 스테판은 그녀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열렬히 기대하고 있지만 스테파니 또한 그 기대에 완전히 부응할 수 없는, 인간일 뿐이다. 외톨이같은 자신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인 그녀이지만 그녀는 스테판의 세계 속으로 완전히 들어올 수도, 나설 수도 없는 여자일 뿐이다.

 사랑은 어쩌면 다 그런 것이다. 나에게 만큼은 정말이지 특별하고,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 사랑이란 다 그런 것이다. 게다가 사랑의 특징이란 것이 '좀처럼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기에 사람은 그 와중을 헤메다가 절망하기도 한다. 어쩌면 스테판은 몽환적 현실을 살면서 절망한 것이 아닐까? 현실이 꿈처럼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랑도 꿈처럼 성취되지 않으며, 현실이 비루한 것처럼 사랑도 비루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아닐까? 꿈과 현실, 사랑과 체념된 소망, 난파선, 등대를 잃어버린. 가엾은-사랑스러운 스테판, 스테파니.

 

"날 구해준다면
평생 당신의 친구가 될게요
당신의 침대에 넣어주세요
겨울에 따뜻하게 해줄게요
즐겁게 장난치는 새끼 고양이들처럼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당신이 날 구해주면
난 다시 외톨이가 될 필요 없겠죠

차들은 빨리 지나다니고 사람들은 못살게 굴고
가끔은 먹을 걸 구하기 힘들어요
당신의 세계에 넣어주세요
당신을 따뜻하고 즐겁게 해줄게요
비가 올 때 우린 뭘하고 놀까요

당신이 날 구해주면
평생 친구가 될게요
침대에 넣어주면
겨울에 따뜻하게 해줄게요
언젠가 누군가 내 눈을 보며
안녕 넌 나의 정말 특별한 고양이야라고 할 거라는 거 알아요

그러니 당신이 날 구해주면
난 다시 외로워질 필요 없어요
난 다시 외로워질 필요 없어요
난 다시 외로워질 필요 없어요"



<수면의 과학>에서 스테판(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부르는 노래 “If you rescu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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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 무엇을 이야기 하시나요?

사랑할 때 무엇을 감추시죠?

본래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감추는 게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각자의 은밀한 부분들을 적당히 숨기고 만나지요. 표리부동인가요?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요. 정말 너무나도 말하기가 어려워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란 고작해야 피상적인 것들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각자의 비밀은 감춘 채로 만나니까 할 얘기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이야기하기란 이렇게 어려운가 봅니다.

영화는 그 미묘한 거리를 잘 그려내주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을 꺼리는 그들에게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남은 자꾸만 어긋납니다. 서로에게 빠져들수록 상대방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까 두려운 것이지요. 혜란(김지수)은 그렇게 도망칩니다. 그 균열의 상태에서 인구(한석규)에게 갑작스런 슬픔이 닥쳐옵니다. 어머니의 죽음. 그것도 못난(?) 형 때문이니 오죽 가슴이 아팠을까요?......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은 영화에서 큰 터닝 포인트가 됩니다. 모친상을 치른 후 인구와 혜란은 늦은 밤 동대문 야구장 관중석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인구의 한 마디가 혜란의 마음을 저의 마음도 찌릅니다. "참 쉽지가 않죠?......."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하여 사랑을 싹 틔우고 열매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그 과정 모두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영화는 그 쉽지 않음, 거리라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비밀, 적당한 사생활, 적당한 거짓이 모두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거리'없는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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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사랑. 성공과 꿈의 파열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그걸 잘 보여주는)그런 영화다.

우연히 찾아 온 기회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여인에게 정작 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최고의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그녀의 출세를 보장한 곳은 세계 최고의 패션지 '런웨이'였다. 물론 그곳에서의 삶이라는 것 또한 기쁨과 희열이 넘치는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완전한 행복을 줄 수 없었다. 게다가 그곳(런웨이)에서의 일과 성공의 뒤란에는 사랑이 내동댕이쳐져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일과 사랑, 꿈과 성공 그 모든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같은 몸으로 섞여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전혀 별개의 것들을 서로 요구한다. 그 요구의 중심에서 누구나 고민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 용기 있는 선택이란 일보다는 사랑을, 세속적인 성공보다는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해나가는 것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다만 현실의 이유가 그것들을 훼방하는 걸림돌로 기능할 뿐이다. 일인가, 사랑인가? 성공인가, 꿈인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사랑과 꿈이 선택된다. 정말이지 온당한 선택임에 틀림없다. 주인공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쇠귀 선생께서는 선택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용기란 선택이며, 선택이란, 어느 하나를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를 버리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버리라! 그리하면 진정한 행복을 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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