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신대 기독교윤리 비정년트랙 임용을 위한 공개강좌(2007/5/3)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교회의 윤리적 실패 속에서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김준우
I.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학의 존재 이유는 본질적으로 갈릴리의 예수의 삶과 죽음, 가르침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이 세상의 불의한 지배체제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하기 위한 목회에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회를 틀에 박힌 업무, 즉 예배 인도, 설교, 심방, 신자관리 등의 협소한 업무로 축소시키는 이유는, 도날드 메서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미칠 듯 분통터지는 목소리를 기꺼이 전하려고 하지 않는 약삭빠른 카멜레온"이 되어, "이 세상 속에서의 평화와 정의라는 하나님의 보다 큰 소명 사이의 관계"를 망각하고 있으며, "목회는 온 세계에서 전투에 임하는 소명"임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이 복음에 대한 재해석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칠 듯 분통터지게 만드는 이 세상의 지배체제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구조악, 특히 문명의 위기에 대해 민감해야 할 뿐 아니라, 교회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도 그 돌파구를 모색해야만 한다. 이 글은 20대 80의 세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제구조와 전쟁과 폭력뿐 아니라 환경파괴로 인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그 위기를 감당해야 할 교회가 당면한 위기의 윤리적 및 신학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쇠퇴에 대한 회개의 요청은 높으며, 그 원인 분석에서도 설교학적 분석과 종교사회학적 분석은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윤리적 및 신학적 원인 분석은 미흡했기 때문이다. 주류 개신교의 쇠퇴 현실은 단순히 교인 감소 자체가 중요한 문제라기보다 죽임의 지배체제에 굴복하는 개신교인들의 비윤리성,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선포되는 복음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신학적 결함, 비기독교적 영성 등 보다 심각한 위기의 증상이며 신호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II.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일차적 컨텍스트는 이 세계의 고난과 죽임의 현실이며, 그것은 인류가 당면한 문명의 위기, 한마디로 대량학살의 위기, 즉 전 세계적인 종족학살(genocide)과 종자학살(biocide), 그리고 지구학살(geocide)의 위기다. 첫째로, 인류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며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에 가진 자들의 식량 독점으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종족학살, 둘째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 가운데 20∼30%가 앞으로 30년 내에 멸종할 것으로 예상될 정도에 이른 종자학살, 셋째로 이런 멸종의 규모와 속도, 삼림파괴와 사막화, 대기변화로 인해 생명의 자궁 자체를 학살하는 모친학살(matricide)의 위기로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총체적 위기다.
또한 이런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는 생명계 전체의 위기이며 이 우주 안에서 유일한 녹색별 지구의 위기라는 점에서 전 우주적인 위기로서,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최대의 윤리적 스캔들이다. 특히 대규모 멸종은 하나님의 현존의 방식들을 파괴하는 것임을 뜻할 뿐 아니라, 인류가 자멸의 벼랑 끝에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최근의 여러 변화들을 통해 환경위기가 이미 어느 정도까지 악화되었는지를 피부로 확인하게 되었으며, 또한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한결같이 바로 우리들의 자녀들 세대에 그처럼 엄청난 환경재앙이 닥칠 것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류가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는 채 전속력으로 대멸종을 향해 치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녀들의 안전과 행복을 우선시하는 가족이기주의라는 본능적 욕구조차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사탄적인 지배체제, 그 가부장적-시장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소비주의적인 경제-정치-군사-종교문화적 구조와 그 세계관 및 생활방식, 곧 약육강식의 경쟁과 적대감, 지배와 착취, 독점과 축적과 폭력의 구조와 자폐적 생활방식에 중독되어 그 악마적 힘에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III. 개신교 쇠퇴의 윤리적 원인
기독교 신학의 두 번째 컨텍스트는 교회의 위기다. 즉 이처럼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절박한 죽임의 체제 속에서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교회는 1980년대 초반까지 교회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전도활동을 벌였지만 세상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 채, 현재 주류 개신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쇠퇴와 "교회의 죽음"을 논의할 정도로 몰락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일반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있으며, 2000년도 이후에는 안티 기독교 운동이 "기독교 박멸"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한국의 전체 비종교인 가운데 개신교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73%나 되며, 개신교가 가장 호감을 얻지 못하는 종교가 되어버린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교회가 이기적이며 보수적이며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로 개신교 목사들과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가장 쉽게 드러나며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첫째는, 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신학이라는 개교회 중심주의에 기초하여 초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자칭 복음주의 목사들)의 전횡, 곧 교회세습과 재정 비리, 성추문 등으로 나타난 비윤리적 행태가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는, 개신교를 떠나는 사람들 중에서 특히 고학력자와 젊은 층이 가장 많다는 사실은 교회성장 신학에 사로잡힌 많은 개신교 목사들의 반민주적 권위주의와 반이성적이며 기복적인 신앙 태도뿐 아니라, 배타적 우월감과 폭력성, 특히 냉전적 보수주의 목사들이 시청 앞 집회들을 통해 보여준 "친미적, 반공주의적, 친자본주의적, 무력전쟁불사적, 민족화해와 협력 부정적 집단"이라는 강한 인상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로날드 사이더가 {복음주의자들의 양심의 스캔들: 왜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가?}(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Why are Christians Living Just Like the Rest of the World, 2005)에서 수많은 통계를 근거로 하여, "거듭난" 복음주의자들은 이혼(프린스턴대학교 종교사회학자 브래드 윌칵스의 2001년 조사: 복음주의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남부 '성경지대'의 이혼율은 미국 평균 이혼율보다 약 50% 더 높다), 돈에 대한 집착(2002년 바르나 조사: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6%에 불과하다), 혼전 동거(성경지대의 동거율 상승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다)와 성적인 방종, 아내구타, 인종차별주의(1989년 조지 갤럽 조사: 주류 개신교인보다 침례교도와 복음주의자들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고, 남침례교도가 가장 심하다)에서 전혀 더욱 윤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오늘날 우리의 위선이 흔히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개신교가 외면당하는 일차적 원인은 개신교인들과 그 지도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있다.
IV. 개신교인들의 윤리적 실패에 대한 신학적 원인 분석
"거듭난" 신자들로서 가장 성경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자처하며,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조차 세상 사람들보다 결코 윤리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신앙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인가?
첫째는 돈 문제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의 백합화처럼 생활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면서 살 수 있지만(눅 12:22),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목사들이 그만큼 부유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돈을 신뢰하게 될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눅 18:25). 이것은 일찍이 "돈을 벌 수 있는 만큼 벌고,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고, 줄 수 있는 만큼 주라"고 가르쳤던 요한 웨슬리 목사가 교인들이 점차 부유하게 되자,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재물이 늘어가는 것과 꼭 정비례해서 그들의 은혜가 줄어든다"고 탄식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처럼 시장 자본주의가 인간과 사회의 질서뿐 아니라 교회까지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이런 상황을 김경재 교수는 "교회의 제3차 바벨론 포로기"라고 부른다.
둘째는 개신교의 일반적인 영성의 문제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가 모든 기업과 개인을 "경제성장주의"와 "무한경쟁"이라는 생존경쟁 속으로 내모는 상황에서, 교회성장론을 신봉하는 많은 목사들은 "적극적 사고"에 근거하여, "축복, 다산, 건강, 번영, 성공"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포함으로써, 신자들을 그 생존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공하도록 부추겨왔다. "남보다 강해지는 법, 남보다 앞서나가는 법, 남을 이기고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회의 강단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가르친 축복과 성공과 번영 중심의 "라스베가스 영성"이었고, 이런 영성에 사로잡혀 목표의식을 갖고 달려나간 사람들 중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상당수 나타나게 되었다. 반면에, 그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IMF 사태 이후 그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구조화되면서 낙오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자, 이제는 그 무한경쟁에서 이탈하여 세상의 소란함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욕심을 비움으로써 오직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에 몰두하도록 촉구하는 "백담사의 영성"도 인기를 얻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라스베가스의 영성이나 백담사의 영성은 모두 극히 개인주의적인 영성으로서, 예수가 가르친 "갈릴리의 영성," 곧 이웃들의 아픔에 대해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가슴을 열고 함께 하는 공동체의 영성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셋째로, 한국 개신교의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인 "사영리" 복음과 구원 이해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신학적 결함 때문이다. 즉 개신교인들의 윤리적 실패의 핵심적 원인은 복음과 구원 이해가 변질된 데 있다는 말이다. 우선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 신앙을 중심으로 한 "사영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죄의 용서의 복음"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싸구려 은총"일뿐 아니라 칭의(justification) 이후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이끄는 성화(sactification)의 과정을 도외시한다. 또한 사영리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지옥을 면하며 축복을 얻는 "이중보험 종교," 그것도 개인적으로 "아무런 보험료도 물지 않는 화재보험"으로 전락시키며,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의 육체적 생활까지 포함하는 통전적 구원을 막아버린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 것은 단지 16회뿐이지만 "주님"으로 고백한 경우가 420회에 달한다는 사실은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닮는 것이며 우리의 생활 전체에서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제자직을 뜻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넷째로, 이런 신학적 이유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규명되고 있는 것처럼 "예수의 복음"(gospel of Jesus)과 "예수에 관한 복음"(gospel about Jesus) 사이의 간격,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라는 "직접종교"(immediate religion)와 후대에 사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도화된 "중보종교"(mediated religion)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중보종교가 된 기독교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배반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 주장하듯, 예수는 브로커체제(brokered kingdom)에 맞서서 브로커없는 나라(brokerless kingdom)를 가르쳤는데, 교회는 또 다시 브로커체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돈 큐핏 역시, "예수는 종교적 (성전)중보종교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다 죽어갔지만, 그의 비판과 반대는 이제 새로운 종교적 중보체제의 토대로 둔갑"했으며, 교회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종교체계들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매우 차별적인 형태로, 또한 잔인하게 핍박하는 중보종교 체계로 발전했다."고 비판한다. 문제는 중보종교체제로 발전하는 동기가 단순히 직접종교의 카리스마를 지속적으로 전수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특히 성직자들의 특권과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동기가 작용하여, 중보종교는 자신의 안전성을 위해 지배체제나 제국주의와도 결탁할 수밖에 없게 되고, 착취당하는 대중들(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당근과 채찍"으로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죽음 너머 저 세상의 낙원으로, 혹은 역사의 종말 이후의 낙원으로 밀쳐버리게 되었다. 또한 예수가 직접 가르친 바 없는 성육신 교리, 대속론 교리,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여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예수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억압적 교리들의 절대화, 성전체제의 정결/배제의 정치학을 다시 강조하게 되어 결국 예수를 배반하게 된다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경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V.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이처럼 절박한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교회 자체의 위기는 죽임의 지배체제, 곧 가부장적-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소비주의적인 경제-정치-군사-종교문화적 구조와 그 세계관 및 생활방식, 곧 약육강식의 경쟁과 적대감, 지배와 착취, 독점과 축적과 폭력의 구조와 자폐적 생활방식에 교회마저 항복하거나, 중보종교체제로서 그 사탄적 구조에 복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죽임의 지배체제에 대해 체념하여, 구원은 체제에 순종하는 데 있다고 믿어 그 체제에 대한 도덕적 분노조차 갖지 못한 채 개인화된 영성에 사로잡혀 있고, 심지어 신학조차 "목회 후보생을 훈련시키기에는 너무나 지적인 오리엔테이션에만 치우친 지 오래"인 현실에서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로, 기독교 신학은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실천적 삶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백이며 반성으로서, 신학이 중보종교체제의 핵심적/절대적/객관적 장치로서 예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이 역사적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복무해야 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의 신학적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놀람과 표현 불가능함으로 초대하는 하나님과의 위대한 교제를 통해, 창조주의 해산의 고통과 환희뿐 아니라 무고하게 대량학살 당하는 생명체들에 대한 비탄과 분노에 대한 공감(orthopathy)이 필요하다. 150억 년의 우주 진화와 46억 년의 지구 진화, 35억 년의 생명의 진화과정 속에서 창조 사역을 계속해온 하나님께서 그 생명사의 막내인 인간이라는 한 종자에 의해 당신의 피조물들이 무차별적으로 멸종당하는 현실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일은 우리가 이 우주의 두뇌와 심장으로서 회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셋째로, 성경의 하나님은 불의와 폭력, 전쟁의 제국주의 문명에 맞서는 생명과 평화의 비폭력의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황제가 지배하는 착취와 전쟁의 체제에 맞서는 정의와 평화의 왕이며, 성령 또한 개인적 성공과 내면적 평화의 힘이라기보다는 죽임의 체제에 대해 저항할 용기를 주는 생명의 영으로 인식할 필요(orthodoxy)가 있다. 또한 교회 역시 중보종교로서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주는 기관이라기보다, 예수의 직접종교가 가리킨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오늘날의 죽임의 체제에 대항하는 "대항문화적 대항공동체"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한, 자신을 절대화하고 예수를 배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중보종교체제의 기타 요소들인 예배, 성직자, 경전, 교리, 신학 등도 모두 이 시대의 죽임의 체제를 돌파할 생명과 평화사역의 도구에 불과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을 가장 크게 파괴시키는 적(敵)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사탄적인 지배체제는 이처럼 복합적이며 구조적이며 전 세계적인 세력으로서 내재적 영성까지 갖고 있는 세력이지만, 결코 신화적인 세력이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낸 세력이다. 그 죽임의 지배체제의 치명적 약점은 두려움과 이기적 탐욕에 근거한 거짓 행복감과 안전의식으로서 불신앙적인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그 가면을 벗기고 난 후 싸울 필요가 있다.
다섯째로, 죽임의 체제와의 전쟁에서 우리가 사용할 전략들(orthopraxis)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의 영성을 깊이 배우는 길이 예수를 닮는 첩경이며, 로마제국에 맞선 예수의 전략대로, 이 세상의 지배체제의 질서와 정반대되는 삶의 방식, 곧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생명에 대한 경이감과 경축, 청빈과 자기비움, 연민, 나눔, 사랑, 섬김, 돌봄, 협동, 연대성, 비폭력, 온유, 겸손, 부드러움, 자기희생 등의 방식이 우리가 사용할 전략들이며, 교회 공동체는 이런 생활방식을 통해 이 세상 속에 생명과 부활의 증인으로 존재할 때 구원의 빛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기 의로움과 도덕주의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여섯째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영성을 개발하고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재 국내와 국외에서 등장하고 있는 많은 신앙 공동체 운동들처럼, 각자의 영적인 선물들을 개발하여 극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희년마을교회(최철호 목사)처럼 가족 이기주의조차 극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일곱째로, 교회가 지적인 정직성에 기초한 신앙을 갖기 위해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소화할 필요가 있다. 교리 중심의 전도는 삶 중심의 전도보다 비효과적이며, 믿음 중심의 전도는 이해 중심의 전도보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보적 작은 교회운동"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희망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목회는 죽임의 체제에 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모든 운동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