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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알고 있다.

아프간도 미국도 탈레반도 나의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을.

동의는 관두고 코웃음조차 치지 않으라리는 것을.

 

그러나, 이 말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자신 때문에,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온 세상이 아니라고 하여도 그렇다고 말하고

온 세상이 그렇다고 해도 아니라고 말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이 있다.

 

당장, 잡혀있는 탈레반 병사들을 석방하여 잡혀있는 한국인 인질들을 풀어주어라.

지금은 의와 불의를 따질 때가 아니다.

 

사람을 죽여놓고서, 누가 누구에게 정의를 실현한다는 말인가?



_다음까페 '主式會社 드림'에서 관옥님이 적고 바람결이 베껴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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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0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8월 3일 퍼왔던 "누가 더 근본주의인가?"라는 관옥(이현주 목사)님의 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참고하실 분들은 함께 읽어보시지요.
 

〈강아지똥〉과 〈몽실 언니〉를 쓴 권정생(69)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자가 많은 동화작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의 오두막으로 그를 찾아오지만 그는 사람들을 만나주지 않는다. 기자는 말할 것도 없다. 인터뷰 같은 것을 한 적도 없다. 어려서부터 앓아온 전신결핵의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홀로 살아가는 그는 “너무 아파서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사람을 맞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이 찾아와 불러도 아예 문조차 열어보지 않는다.

그런 그가 김장배추 속에 숨은 흰 속살 같은 얼굴을 내보였다. 지난 29일 그의 마을 정자 나무 아래서 한 ‘드림교회’ 예배에서였다. ‘드림교회’란 이현주(62) 목사가 지난 4월부터 주일이면 좋은 사람과 좋은 장소를 찾아 예배를 드리는 ‘건물’ 없는 교회다. 이 목사는 이 마을에 찻길조차 없던 1970년대 이오덕 선생으로부터 숨은 ‘인간 국보’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다녔던 지기다. 그는 ‘드림교회’가 뭔지도 몰랐지만 그런 이 목사의 청으로 엉겁결에 마을 정자 나무 아래 앉았다. 그를 만나고파 이 전국에서 이날 예배에 온 20여명과 함께였다.



» ‘교회 종지기’의 나무아래 예배 - 권 선생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러운 듯 모자를 눌러쓴 채 얘기를 했다. 그와 수십 년 지기인 이 목사도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이렇게 말씀을 오랫동안 하는 것도 처음 본다”고 했다. 권 선생이 생전 처음 베푼 말잔치는 소리 소문 없이 온 산하를 물들여버리는 가을 기운 같은 축복이었다.

 

작가 권정생이 말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뜻

침묵 기도 뒤 사람들은 기도를 나누었다. 참석자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저를 왜 이곳에 불렀느냐?’고 물었다”며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응답을 주었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이곳에 온 게 하나님 뜻인가요?” 

 이 목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권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을 하든 관성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갖다 붙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습관적인 말’에 대한 일침이었다.

“이라크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사람들에게 그 많은 고통을 주는 것도 하나님의 뜻인가요? 인간이 한 것이지요.”

 권 선생은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낙엽만이 침묵의 공간 속을 뒹굴었다. 마침내 여든여덟살 난 마을 할머니 얘기를 꺼냈다.

 

인간이 저지르고 하느님뜻이라니… 천당가는 것보다 따뜻한 삶이 중요

“할머니가 네살 때 부모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뒤 아직까지 소식을 모른다. 그는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버렸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못 오셨을까’만 생각한다. 결혼해 자식 손자까지 다 있는데도 할머니는 아직까지 네살짜리 아이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뜻인가. 하느님이 일제 36년과 6·25의 고통을 우리에게 주었는가?”

권 선생은 “아니다”라고 자답했다. 그 고통 역시 “인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얘기 중에도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눈으로 산과 들과 마을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마을 얘기를 이어갔다.

“우리 마을엔 당집이 있다. 거기엔 할머니신을 포함해 세 분이 모셔져 있다. 한 분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에서 온 장군인데, 죽을 줄 알던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살려줬다. 또 한 분은 비구니 스님인데,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 때 와서 사람들을 살려줬다. 당집에선 한해 동안 싸움 안하고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 제주가 되어 정월 보름마다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서, 또는 당집 앞을 지날 때마다 스스로 착하게 살려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평안하게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착하게 살아가라’는 설교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한 가지도 행하지 못하고, 서로 싸우기 일쑤인데 왜 그럴까. 세상에 교회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또 “교회나 절이 없었더라도 더 나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고 자답했다. 그는 “세상에 교회와 절이 이렇게 많은데, 왜 전쟁을 막지 못하는가”라며 다시 낙엽을 바라보았다.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600만명이나 죽는 고통을 당하고도 왜 그렇게 남을 죽이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1940년대 유대인들이 처음 팔레스타인 땅에 돌아올 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키부츠 등에 땅도 내주고 함께 살자고 했는데, 이젠 ‘처음부터 막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한다고 들었다. 영화 〈쉘부르의 우산〉의 배경이 된 전쟁은 베트남전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인들을 노예처럼 끌어다가 칠레 남부의 섬에 가둬 비행장 건설 노역을 시켰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인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자기들만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섬엔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베트남 노인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악행만 얘기하지 자신들이 한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중국도 일본이 난징학살 때 30만명이나 살육한 것을 지금까지 그토록 분개하면서도 티베트인들을 그렇게 죽인 것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도 억압만 하고 있다. 미국은 자기는 핵무기를 만 개도 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나라들만 나쁘다고 한다.”

권 선생은 “모두가 자기는 잘하고 옳은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한다”고 했다. 그것이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사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짓’임을 분명히한 권 선생의 말에 자신의 행동도, 세상의 해악도 하느님에게만 돌리던 핑계의 마음은 쓸려가 버렸다. 그러나 권 선생은 “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이 하는 것’을 보고 계신다”며 “그렇기에 홀로 있어도 나쁜 짓을 할 수 없고, 착한 일을 했어도 으스댈 수 없다”고 했다.

안동/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장애와 천대 보듬은 ‘몽실언니’처럼
자기를 녹여 꽃피운 ‘강아지똥’처럼



권정생의 문학과 삶 / 마을 뒤편 작은 개울가에 있는 권 선생의 오두막은 멀찌감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뭔가 울컥 솟구치게 할 만큼 쓸쓸했다. 이끼로 덮인 바위를 지나 들어선 앞마당 잡풀 사이에 권 선생이 불을 때 밥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솥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은 5평 남짓.(사진) 그러나 그도 평생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했다. 그가 사용하는 공간은 몸을 웅크려야 겨우 누울 수 있는 0.3평이나 될까.

장애와 천대를 안은 채 살아온 가련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몽실 언니〉의 삶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제 때 일본 도쿄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광복 후 외가가 있는 경북 청송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가족과 헤어져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했고, 전신 결핵을 앓으면서 걸식을 하다 열여덟살에 이 마을로 들어왔다. 스물두살에 다시 객지로 나가 떠돌던 그는 5년 뒤 이 마을로 돌아왔고, 스물아홉살 때부터 16년 동안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살며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하느님의 눈물〉,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승화한 작품들이었다.

고운사 경내에서 함께 걸으며 그에게 “시골 마을에서도 이제 모두 새집 지어 살아가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집도 1983년에 120만원이나 들여서 지은 집”이라며 “그런데 면에서 나온 공시지가를 보니, 89만원밖에 안 한다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마을 할머니들이 죽기 전에 그 집이라도 팔아서 돈을 쓰라고 한다”고 했다. 종지기 때와 다름없이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본 할머니들이 너무도 안타까워 하는 소리일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관찰해 쓰는 작가가 아니라 자신은 끝내 녹아 없어져 아름다운 민들레꽃으로 피어나는 〈강아지똥〉의 실제 주인공이었다.

조연현 기자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68507.html

2006년 10월 31일 인터넷 한겨레에 실린 기사를 바람결이 옮겨베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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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10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생을 종지기로 살다 이제 '그 곳'에 가 계신 권정생 선생님.

"나는 죽어서 가는 천당 생각 하고 싶지 않다. 사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당신의 말씀에 새삼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한 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 죽비가 되어 저의 가슴을 적십니다.

아마도 당신께서는 이미 '천국'을 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는 삶, 그런데 그게 저에겐 너무 어렵습니다. 여전히 이기와 욕심, 냉정에 수월한 저의 마음이 그저 참담합니다. 예수께서도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셨는데, 저도 오늘밤에는 몇 번이고 암송해야겠습니다.

책상 머리맡에 한 어린 소녀가 당신에게 보낸 조사의 한 구절처럼,
"착하게 살게요" 네. 착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토요 초대석]'건물없는 교회' 실천하는 이현주 목사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납치되거나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오늘 아침도 그분들이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아내와 기도했습니다. 간밤에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으신지 눈물만 흘리시더랍니다.”

 충북 충주 엄정면 추평리 한 쇠락한 농가를 손질해 집필실로 쓰고 있는 이현주(63) 목사를 찾은 지난달 30일 ‘아프간 비극’ 때문인지 집 뒤 대나무 숲조차 미동 없이 고요했다. 삼베옷을 입고 있는 이 목사 얼굴에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감리교 신학대학을 나와 지방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이 목사는 스승인 고 변선환(1927∼1995·전 감신대학장) 박사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과격한 발언’을 했다가 교단에서 파문 당하자, 그 자신도 교단을 떠나 지금까지 야인으로 살고 있다.

 그는 일선 목회는 하지 않지만, 저술 활동으로 인간의 심성을 맑히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몇년 전부터는 ‘드림 실험교회’를 만들어 ‘건물 없는 교회’를 실험 중에 있다. 매주 전국을 찾아다니며 산이나 들에서 뜻맞는 사람과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 때에 따라 4명에서 6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 목사도 없고 장로도 없다. 그러니 예산도 결산도 필요없다. 2000년 전 예수가 이끌던 초대교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떠올려 봤다. 초야에 묻혀 사는 그에게 가지고 간 질문 보따리가 다소 무거웠으나, 피해가지 않고 성의껏 답해줬다.

―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샘물교회 신도 피랍·살해 사건으로 한국 교회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정신적 외상을 입고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들도 종교인일 텐데 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냐고 규탄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어느 종교나 창시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일을 벌일 수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도 자유스러울 수는 없습니다.”

― 아랍권 선교가 순교를 각오한 정황도 간파되고 있습니다. 과연 선교 활동이 자기 목숨이나 가족보다 귀중한 것인지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선교 중에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많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순교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누구도 순교 행위를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아랍권 선교를 동의하지 않지만, 종교적 신념으로 죽음의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을 비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있습니다. 과거 성 프란체스코는 아랍권 최고지도자 술탄을 만나러 갔다가 칙사 대접까지 받고 돌아왔습니다. 아랍권에 갔다가 살아돌아온 첫 사례일 겁니다. 그런데 그의 귀환 후 첫마디가 ‘나는 내 형제를 만나고 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만나러 왔다는데, 왜 죽이겠습니까. 그에게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별개의 문화나 종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형제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분이 있다고 봅니다.”

― 기독교인들이 중시하는 십계명에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구절 때문에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 미신이나 이단으로 치부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역으로 기독교도 비기독교인이나 이웃 종교로부터 배타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어요. 과연 이 구절에서 말하는 ‘다른 신’은 타 종교가 믿는 모든 신앙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명기한 것인지요.

 “벌써 3000년도 넘은 유대 나라 계명이 왜 오늘날에도 금과옥조로 지켜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십계명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따라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가 한 분이라는 사실이 진리라면, 어찌 종교가 다르다고 너와 내가 남남일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것’ ‘타자’는 생각할 수도 없지요. 예수에게는 타자가 없었습니다. 예수가 와서 그 생각을 바꾸어 놓았던 거지요. 그런데 그를 스승으로 모시는 기독교 신자들이 아직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법은 모세의 법과 다릅니다. 모세는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예수는 오른 뺨을 맞거든 왼뺨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복수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오늘날 기독교신자들이 모두 복수를 택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9·11테러’ 사건만 해도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복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모세의 가르침을 극복했던 것인데,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모세법을 따르고 있는 셈이지요. 예수는 누구를 벌주는 분이 아니라, 한없이 기다리는 분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아프간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력을 무력으로 극복하려면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통과 통신이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동의한다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인류의 의식이 빠르게 전환될 것입니다. 간디의 비폭력 운동 등 지금까지 많은 종교적 스승들이 실험했던 방법이 옳다는 것을 납득하기만 한다면, 아프간 사태가 인류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선교를 하려면 다른 것들에 대한 인정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기독교는 하루아침에 와해되고 만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기독교 내부에서 대중적으로 설득되고 납득되면 기독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는 인류가 추앙해야 할 위대한 스승이요, 기독교는 그분의 가르침이 녹아 있는 곳입니다. 다만, 과거의 잘못된 기독교 모습이 사라질 뿐입니다.

― 피랍 사건이 마무리되면 개신교 내부에서 크나큰 자성이 뒤따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한데요.

 “사도바울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끊임없이 배우고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더욱 충실해야 합니다.미완성된 자기 모습을 너무 강요하지 말고, 자기 성숙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신앙인들은 겸손해야 하지요.”

― 누구보다 심적 고통이 클 개신교 신자나 피랍자 가족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오늘의 아프간 사태는 어느 종교이건 스승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데서 생긴 일입니다. 이번 사건의 원인을 국제사회나 탈레반에서 찾는다면 답은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깨닫게 하려고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피랍자 가족들에게는 예수님이 여러분 곁 가까이서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리고 계시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목사는 요즘 세계 지성들이 쓴 ‘기도문’을 탈고하기 위해 새벽까지 번역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근래 미국에서 발간된 기도문인데, 신·구교와 이웃종교 지도자들의 기도 내용이 망라돼 있다. 그가 기독교윤리학의 거두 라인홀트 니버(1896∼1971)의 기도문 한 구절을 들려준다. “내가 어떤 사람의 앙심과 분노를 직면한다면, 그 분노와 적개심이 내 가슴에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감정, 분노에 대해 앙갚음한다면 이 세상의 비극에 비극 하나를 더 보태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반골’로 살아온 이현주 목사. 그가 손해 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일관되게 날을 세워온 것은 무엇일까. 세속화된 교회의 변화가 아닐까.

대담=정성수 종교전문기자
사진= 남제현 기자

_출처: http://www.segye.com/Service5/ShellView.asp?TreeID=1052&PCode=0007&DataID=200708031630000193

세계일보닷컴에서 바람결이 옮겨 베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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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05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성숙에 많은 시간을 쏟을 때, 그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무릇 신앙인은 겸손해야 한다. 아...큰 울림이다. 스승님(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이라야 참다운 기독자요, 종교인이다.

Mephistopheles 2007-08-05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만에 개신교측의 종교인다운 면모를 보이시는 분을 페이퍼를 통해 만나게 되었군요..^^

바람결 2007-08-06 00:10   좋아요 0 | URL
이아무개(이현주)목사님도 실은 교단(감리교)에서 쫓겨나셨죠. 참 서글픈 일이에요. 메피님 말대로 '종교인다운 면모를 보이시는 분'들이 설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이 그저 안타깝습니다ㅠ 아마 한국의 개신교는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Jade 2007-08-0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랍자들 관련 글들 보면, 일반적인 네티즌 반응도 안좋고 암튼 기분이 별로였는데, 이 글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 물론 남은 사람들이 빨리 무사귀환 해야겠지만요 ^^

바람결 2007-08-06 00:16   좋아요 0 | URL
그래요, 제이드님. 이현주 목사님께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진리를 말씀해주셨는데, 참 새삼스럽습니다. 그건 아마도 항간을 떠도는 '애정결핍'의 말들 때문이겠지요. 세상은 소란스러운데 인간에 대한 애정을 삭혀낸 말들은 잘 보이질 않는 듯 싶어요. 저도 이 글을 읽으면서 참담했던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어요. 남은 분들의 무사귀환을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하양물감 2007-08-06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탁 와닿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고 있던 기독교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가 되는것 같습니다.

바람결 2007-08-08 17:52   좋아요 0 | URL
짧은 기사가 해갈의 기회였다면 더할 나위없는 기쁨입니다.^^

지돌스타 2007-08-06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UncleJoe 2007-08-06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세계일보 기사네..
세계일보의 신문기사 내용이 때론 통일교 옹호성 글이 있다고 하던데...
기사가 그런거와는 상관없는거겠죠?

바람결 2007-08-08 17:57   좋아요 0 | URL
일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듯 싶습니다.
한동안 세계일보가 통일교 재단이라는 소문이 돌아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독 거부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난리들을 쳤드랬지요.
재단이 어떻든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기사를 통해 진정으로 공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그것이 오늘날의 시대에 적합한 화두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좋은 기사(혹은 신문의 일면)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탈레반 사령관은 말한다. "한국인 인질들을 감옥에 있는 우리 병사들과 맞바꾸자."
잡혀있는 탈레반 병사들을 살려주면 한국인 인질들도 살려주겠다는 말이다.

아프간 대통령은 말한다. "한국인 인질들을 살리기 위해서 탈레반 병사들을 내어줄 수 없다."
한국인 인질을 죽이게 놔두는 한이 있어도 탈레반 병사들을 풀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뒤에서 미국 대통령은 말한다. "테러범들의 말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일절 들어줄 수 없다."
사람을 살리자는 말이든 사람을 죽이자는 말이든, 테러리스트의 말이니까 아예 듣지를 않겠다는 거다.

나는 말한다. "탈레반 병사들을 풀어주어 한국인 인질들을 살려내어라."
병사들도 살리고 인질들도 살리자는 얘기다.

탈레반 병사도 사람이고 한국인 인질도 사람이고 아프간 대통령도 사람이고 미국 대통령도 사람이다.나도 물론 사람이다. 저 우주의 한 별에서 사람 아닌 누가 내려다 본다면, 탈레반 사령관과 아프간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과 나 이렇게 넷 가운데 누가 사람다운 사람이냐? 누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에 더 근본주의냐?

속히 탈레반 병사들을 풀어주어 인질들을 살려라.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면! 그리 했다가 나중에 어찌 되겠느냐는 터무니없는 핑게 집어치우고. 이것이 '사람의 아들'이신 우리 스승의 가르침이다!

_다음까페 '主式會社 드림'에서 관옥님이 적고 바람결이 베껴 옮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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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0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앞뒤전후 따지고, 재는 일이 필요없다. 그저 지금 저 한 목숨을 구하는 일만이 필요할 뿐이다.
 

감신대 기독교윤리 비정년트랙 임용을 위한 공개강좌(2007/5/3)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교회의 윤리적 실패 속에서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김준우

I. 들어가는 말
기독교 신학의 존재 이유는 본질적으로 갈릴리의 예수의 삶과 죽음, 가르침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이 세상의 불의한 지배체제에 맞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하기 위한 목회에 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회를 틀에 박힌 업무, 즉 예배 인도, 설교, 심방, 신자관리 등의 협소한 업무로 축소시키는 이유는, 도날드 메서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미칠 듯 분통터지는 목소리를 기꺼이 전하려고 하지 않는 약삭빠른 카멜레온"이 되어, "이 세상 속에서의 평화와 정의라는 하나님의 보다 큰 소명 사이의 관계"를 망각하고 있으며, "목회는 온 세계에서 전투에 임하는 소명"임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이 복음에 대한 재해석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미칠 듯 분통터지게 만드는 이 세상의 지배체제에 맞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구조악, 특히 문명의 위기에 대해 민감해야 할 뿐 아니라, 교회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도 그 돌파구를 모색해야만 한다. 이 글은 20대 80의 세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제구조와 전쟁과 폭력뿐 아니라 환경파괴로 인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그 위기를 감당해야 할 교회가 당면한 위기의 윤리적 및 신학적 원인을 분석하고, 그 돌파구를 모색하려는 것이다. 최근 한국 개신교의 쇠퇴에 대한 회개의 요청은 높으며, 그 원인 분석에서도 설교학적 분석과 종교사회학적 분석은 있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윤리적 및 신학적 원인 분석은 미흡했기 때문이다. 주류 개신교의 쇠퇴 현실은 단순히 교인 감소 자체가 중요한 문제라기보다 죽임의 지배체제에 굴복하는 개신교인들의 비윤리성,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선포되는 복음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신학적 결함, 비기독교적 영성 등 보다 심각한 위기의 증상이며 신호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II.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일차적 컨텍스트는 이 세계의 고난과 죽임의 현실이며, 그것은 인류가 당면한 문명의 위기, 한마디로 대량학살의 위기, 즉 전 세계적인 종족학살(genocide)과 종자학살(biocide), 그리고 지구학살(geocide)의 위기다. 첫째로, 인류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며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에 가진 자들의 식량 독점으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종족학살, 둘째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 가운데 20∼30%가 앞으로 30년 내에 멸종할 것으로 예상될 정도에 이른 종자학살, 셋째로 이런 멸종의 규모와 속도, 삼림파괴와 사막화, 대기변화로 인해 생명의 자궁 자체를 학살하는 모친학살(matricide)의 위기로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총체적 위기다.
또한 이런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는 생명계 전체의 위기이며 이 우주 안에서 유일한 녹색별 지구의 위기라는 점에서 전 우주적인 위기로서,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최대의 윤리적 스캔들이다. 특히 대규모 멸종은 하나님의 현존의 방식들을 파괴하는 것임을 뜻할 뿐 아니라, 인류가 자멸의 벼랑 끝에서 "러시안 룰렛 게임"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최근의 여러 변화들을 통해 환경위기가 이미 어느 정도까지 악화되었는지를 피부로 확인하게 되었으며, 또한 전 세계 과학자들이 한결같이 바로 우리들의 자녀들 세대에 그처럼 엄청난 환경재앙이 닥칠 것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인류가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는 채 전속력으로 대멸종을 향해 치닫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녀들의 안전과 행복을 우선시하는 가족이기주의라는 본능적 욕구조차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사탄적인 지배체제, 그 가부장적-시장 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소비주의적인 경제-정치-군사-종교문화적 구조와 그 세계관 및 생활방식, 곧 약육강식의 경쟁과 적대감, 지배와 착취, 독점과 축적과 폭력의 구조와 자폐적 생활방식에 중독되어 그 악마적 힘에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III. 개신교 쇠퇴의 윤리적 원인
기독교 신학의 두 번째 컨텍스트는 교회의 위기다. 즉 이처럼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절박한 죽임의 체제 속에서 구원과 생명의 복음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할 교회는 1980년대 초반까지 교회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전도활동을 벌였지만 세상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 채, 현재 주류 개신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쇠퇴와 "교회의 죽음"을 논의할 정도로 몰락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부터 일반 사람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있으며, 2000년도 이후에는 안티 기독교 운동이 "기독교 박멸"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다.
한국의 전체 비종교인 가운데 개신교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73%나 되며, 개신교가 가장 호감을 얻지 못하는 종교가 되어버린 가장 일차적인 원인은 교회가 이기적이며 보수적이며 비도덕적인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바로 개신교 목사들과 교인들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독교인들의 위선은 가장 쉽게 드러나며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첫째는, 1970년대 이후 교회성장신학이라는 개교회 중심주의에 기초하여 초대형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돈과 권력을 한 손에 쥐게 된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자칭 복음주의 목사들)의 전횡, 곧 교회세습과 재정 비리, 성추문 등으로 나타난 비윤리적 행태가 교회의 사회적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는, 개신교를 떠나는 사람들 중에서 특히 고학력자와 젊은 층이 가장 많다는 사실은 교회성장 신학에 사로잡힌 많은 개신교 목사들의 반민주적 권위주의와 반이성적이며 기복적인 신앙 태도뿐 아니라, 배타적 우월감과 폭력성, 특히 냉전적 보수주의 목사들이 시청 앞 집회들을 통해 보여준 "친미적, 반공주의적, 친자본주의적, 무력전쟁불사적, 민족화해와 협력 부정적 집단"이라는 강한 인상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로날드 사이더가 {복음주의자들의 양심의 스캔들: 왜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가?}(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Conscience: Why are Christians Living Just Like the Rest of the World, 2005)에서 수많은 통계를 근거로 하여, "거듭난" 복음주의자들은 이혼(프린스턴대학교 종교사회학자 브래드 윌칵스의 2001년 조사: 복음주의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 남부 '성경지대'의 이혼율은 미국 평균 이혼율보다 약 50% 더 높다), 돈에 대한 집착(2002년 바르나 조사: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십일조를 하는 사람은 6%에 불과하다), 혼전 동거(성경지대의 동거율 상승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다)와 성적인 방종, 아내구타, 인종차별주의(1989년 조지 갤럽 조사: 주류 개신교인보다 침례교도와 복음주의자들이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고, 남침례교도가 가장 심하다)에서 전혀 더욱 윤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오늘날 우리의 위선이 흔히 불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개신교가 외면당하는 일차적 원인은 개신교인들과 그 지도자들의 비윤리적인 행태에 있다.

IV. 개신교인들의 윤리적 실패에 대한 신학적 원인 분석
"거듭난" 신자들로서 가장 성경말씀대로 살고 있다고 자처하며,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조차 세상 사람들보다 결코 윤리적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신앙에 무슨 결함이 있기 때문인가?
첫째는 돈 문제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의 백합화처럼 생활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신뢰하면서 살 수 있지만(눅 12:22), 경제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제수준이 높아지고 목사들이 그만큼 부유하게 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돈을 신뢰하게 될 유혹에 넘어갈 가능성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눅 18:25). 이것은 일찍이 "돈을 벌 수 있는 만큼 벌고, 저축할 수 있는 만큼 저축하고, 줄 수 있는 만큼 주라"고 가르쳤던 요한 웨슬리 목사가 교인들이 점차 부유하게 되자, "사람들이 거의 예외 없이... 재물이 늘어가는 것과 꼭 정비례해서 그들의 은혜가 줄어든다"고 탄식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처럼 시장 자본주의가 인간과 사회의 질서뿐 아니라 교회까지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이런 상황을 김경재 교수는 "교회의 제3차 바벨론 포로기"라고 부른다.  
둘째는 개신교의 일반적인 영성의 문제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국가가 모든 기업과 개인을 "경제성장주의"와 "무한경쟁"이라는 생존경쟁 속으로 내모는 상황에서, 교회성장론을 신봉하는 많은 목사들은 "적극적 사고"에 근거하여, "축복, 다산, 건강, 번영, 성공"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포함으로써, 신자들을 그 생존경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성공하도록 부추겨왔다. "남보다 강해지는 법, 남보다 앞서나가는 법, 남을 이기고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회의 강단이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가르친 축복과 성공과 번영 중심의 "라스베가스 영성"이었고, 이런 영성에 사로잡혀 목표의식을 갖고 달려나간 사람들 중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상당수 나타나게 되었다. 반면에, 그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남들처럼 성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IMF 사태 이후 그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구조화되면서 낙오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자, 이제는 그 무한경쟁에서 이탈하여 세상의 소란함에 대해 눈과 귀를 닫고 욕심을 비움으로써 오직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에 몰두하도록 촉구하는 "백담사의 영성"도 인기를 얻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라스베가스의 영성이나 백담사의 영성은 모두 극히 개인주의적인 영성으로서, 예수가 가르친 "갈릴리의 영성," 곧 이웃들의 아픔에 대해 눈과 귀를 활짝 열고, 가슴을 열고 함께 하는 공동체의 영성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임에 틀림없다는 점이다.
셋째로, 한국 개신교의 대부분의 목사들과 교인들의 신앙의 핵심인 "사영리" 복음과 구원 이해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신학적 결함 때문이다. 즉 개신교인들의 윤리적 실패의 핵심적 원인은 복음과 구원 이해가 변질된 데 있다는 말이다. 우선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 신앙을 중심으로 한 "사영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죄의 용서의 복음"으로 축소시켜버리는 "싸구려 은총"일뿐 아니라 칭의(justification) 이후 실제적인 삶의 변화를 이끄는 성화(sactification)의 과정을 도외시한다. 또한 사영리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저 세상에서도 지옥을 면하며 축복을 얻는 "이중보험 종교," 그것도 개인적으로 "아무런 보험료도 물지 않는 화재보험"으로 전락시키며,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의 육체적 생활까지 포함하는 통전적 구원을 막아버린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한 것은 단지 16회뿐이지만 "주님"으로 고백한 경우가 420회에 달한다는 사실은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를 닮는 것이며 우리의 생활 전체에서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제자직을 뜻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넷째로, 이런 신학적 이유들은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규명되고 있는 것처럼 "예수의 복음"(gospel of Jesus)과 "예수에 관한 복음"(gospel about Jesus) 사이의 간격,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라는 "직접종교"(immediate religion)와 후대에 사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제도화된 "중보종교"(mediated religion)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중보종교가 된 기독교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배반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존 도미닉 크로산이 주장하듯, 예수는 브로커체제(brokered kingdom)에 맞서서 브로커없는 나라(brokerless kingdom)를 가르쳤는데, 교회는 또 다시 브로커체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돈 큐핏 역시, "예수는 종교적 (성전)중보종교에 대해 비판하고 반대하다 죽어갔지만, 그의 비판과 반대는 이제 새로운 종교적 중보체제의 토대로 둔갑"했으며, 교회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면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종교체계들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매우 차별적인 형태로, 또한 잔인하게 핍박하는 중보종교 체계로 발전했다."고 비판한다. 문제는 중보종교체제로 발전하는 동기가 단순히 직접종교의 카리스마를 지속적으로 전수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특히 성직자들의 특권과 안전성을 보장하기 위한 동기가 작용하여, 중보종교는 자신의 안전성을 위해 지배체제나 제국주의와도 결탁할 수밖에 없게 되고, 착취당하는 대중들(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당근과 채찍"으로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개인의 죽음 너머 저 세상의 낙원으로, 혹은 역사의 종말 이후의 낙원으로 밀쳐버리게 되었다. 또한 예수가 직접 가르친 바 없는 성육신 교리, 대속론 교리,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여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예수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억압적 교리들의 절대화, 성전체제의 정결/배제의 정치학을 다시 강조하게 되어 결국 예수를 배반하게 된다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경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V.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이처럼 절박한 인류문명의 총체적 위기와 교회 자체의 위기는 죽임의 지배체제, 곧 가부장적-자본주의적-제국주의적-소비주의적인 경제-정치-군사-종교문화적 구조와 그 세계관 및 생활방식, 곧 약육강식의 경쟁과 적대감, 지배와 착취, 독점과 축적과 폭력의 구조와 자폐적 생활방식에 교회마저 항복하거나, 중보종교체제로서 그 사탄적 구조에 복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죽임의 지배체제에 대해 체념하여, 구원은 체제에 순종하는 데 있다고 믿어 그 체제에 대한 도덕적 분노조차 갖지 못한 채 개인화된 영성에 사로잡혀 있고, 심지어 신학조차 "목회 후보생을 훈련시키기에는 너무나 지적인 오리엔테이션에만 치우친 지 오래"인 현실에서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로, 기독교 신학은 우리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실천적 삶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고백이며 반성으로서, 신학이 중보종교체제의 핵심적/절대적/객관적 장치로서 예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이 역사적 예수가 가르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 복무해야 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신비 앞에서 우리의 신학적 언어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둘째로, 우주와 생명의 신비에 대한 놀람과 표현 불가능함으로 초대하는 하나님과의 위대한 교제를 통해, 창조주의 해산의 고통과 환희뿐 아니라 무고하게 대량학살 당하는 생명체들에 대한 비탄과 분노에 대한 공감(orthopathy)이 필요하다. 150억 년의 우주 진화와 46억 년의 지구 진화, 35억 년의 생명의 진화과정 속에서 창조 사역을 계속해온 하나님께서 그 생명사의 막내인 인간이라는 한 종자에 의해 당신의 피조물들이 무차별적으로 멸종당하는 현실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일은 우리가 이 우주의 두뇌와 심장으로서 회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셋째로, 성경의 하나님은 불의와 폭력, 전쟁의 제국주의 문명에 맞서는 생명과 평화의 비폭력의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 역시 황제가 지배하는 착취와 전쟁의 체제에 맞서는 정의와 평화의 왕이며, 성령 또한 개인적 성공과 내면적 평화의 힘이라기보다는 죽임의 체제에 대해 저항할 용기를 주는 생명의 영으로 인식할 필요(orthodoxy)가 있다. 또한 교회 역시 중보종교로서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주는 기관이라기보다, 예수의 직접종교가 가리킨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오늘날의 죽임의 체제에 대항하는 "대항문화적 대항공동체"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한, 자신을 절대화하고 예수를 배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중보종교체제의 기타 요소들인 예배, 성직자, 경전, 교리, 신학 등도 모두 이 시대의 죽임의 체제를 돌파할 생명과 평화사역의 도구에 불과함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사역을 가장 크게 파괴시키는 적(敵)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사탄적인 지배체제는 이처럼 복합적이며 구조적이며 전 세계적인 세력으로서 내재적 영성까지 갖고 있는 세력이지만, 결코 신화적인 세력이 아니라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낸 세력이다. 그 죽임의 지배체제의 치명적 약점은 두려움과 이기적 탐욕에 근거한 거짓 행복감과 안전의식으로서 불신앙적인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그 가면을 벗기고 난 후 싸울 필요가 있다.
다섯째로, 죽임의 체제와의 전쟁에서 우리가 사용할 전략들(orthopraxis)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역사적 예수의 영성을 깊이 배우는 길이 예수를 닮는 첩경이며, 로마제국에 맞선 예수의 전략대로, 이 세상의 지배체제의 질서와 정반대되는 삶의 방식, 곧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생명에 대한 경이감과 경축, 청빈과 자기비움, 연민, 나눔, 사랑, 섬김, 돌봄, 협동, 연대성, 비폭력, 온유, 겸손, 부드러움, 자기희생 등의 방식이 우리가 사용할 전략들이며, 교회 공동체는 이런 생활방식을 통해 이 세상 속에 생명과 부활의 증인으로 존재할 때 구원의 빛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기 의로움과 도덕주의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여섯째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영성을 개발하고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이것은 현재 국내와 국외에서 등장하고 있는 많은 신앙 공동체 운동들처럼, 각자의 영적인 선물들을 개발하여 극대화시킬 수 있어야 하며, 희년마을교회(최철호 목사)처럼 가족 이기주의조차 극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일곱째로, 교회가 지적인 정직성에 기초한 신앙을 갖기 위해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소화할 필요가 있다. 교리 중심의 전도는 삶 중심의 전도보다 비효과적이며, 믿음 중심의 전도는 이해 중심의 전도보다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보적 작은 교회운동"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는 희망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의 목회는 죽임의 체제에 맞서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모든 운동들과 연대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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