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간만에 글이라는 걸 써봤어요. 한참을 두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제 모습이 무릇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요. 제 삶을 읽고, 그리고 저 자신을 읽는 일에 그동안 너무도 무심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듭니다. 얼마 전 읽었던 <기도의 사람 토머스 머튼>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 참 좋았드랬어요. 옮겨 적어봅니다.

"지금 내게 글쓰기는 참된 침묵과 홀로 있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통로다. 나는 글쓰기가 기도생활에도 도움이 됨을 안다. 글을 쓰기 위해 앉으면 내 안에 있는 거울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깊고 고요해서 애쓰지 않아도 거기 비친 하나님을 즉시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마치 그 오심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내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만 같다."(102쪽)

 

 부러웠어요. 글쓰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다니요! 얼마나 깨끗한 거울이 되었길래요. 저는 비록 깨끗한 거울은 못되어도 진작에 글을 끄적이곤 하였는데 그 분의 현존을 감지하지 못했네요. 게다가 오랜동안 게으름으로 인해 단필하고 있었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이 새벽 나직하게 다짐하고 잠을 청해요. "저도 글쓰기를 통해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도우소서. 그보다 먼저 저의 글이 마음을 닦고, 가꾸는 것이 되어 변변한 색경이 되게 해주소서."

 당신, 그리고 모든 당신께 이 새벽, 작은 심정을 이렇게 나눕니다. 오늘도 마음 건사!,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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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8-07-27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변한 색경 하나 마련하기 위한 글쓰기, 저도 오늘 마음 건사 잘 하고 자렵니다.
바람결님 글속엔 늘 말로 다 못할 잔잔한 물결이 위로와 기쁨과 용기를 줍니다.^^

바람결 2008-07-29 21:20   좋아요 0 | URL
어줍잖은 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되려 혜경님의 좋은 마음이 제 글의 바탕이 되는군요.
글이라는 것이 결국 누가 쓰느냐 보다는 누구에게 읽히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재삼 생각해봅니다.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일상의 무료함이 여름의 복판에서 허덕일 때, 우리를 어디론가 실어다줄 한 줄기 바람은 일상의 터전을 박차는-바로 그 순간으로부터 불어온다. 그 바람결에 자신의 몸을 되도록 나른하고, 게으르게 맡겨놓으면 우리는 어느결에 더 나른하고 더 게으른 모습으로 파다한 새로움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기대는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며, 두 이레 전, 작은 파문을 염(念)하던 나의 바램이기도 하였다.

 두말할 것도 없이 복잡다단한 일상의 무게가 짐짓 암담하게 여겨질 제면 일단 어디론가 떠나고 볼 일이다. 이색의 정취를 기대할 것도 없이, 선득해진 마음은 이미 당신을 새롭고, 낯선 공간에로 이끌고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새롭다. 새로운 당신은 노마드, 당분간 유랑의 자격이 갖춰진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떠났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거창할 것도 없이 하룻밤을 바람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선유도. 그곳은 전라북도 군산에서 뱃길로 한 시간여 남짓 되는 거리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이 섬은 "신선이 노는 섬"(島)이라는 그 명칭의 의미처럼, 한적하고, 조용하다. 다만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맞이하기 위한 약간의 소란을 제외하면 말이다. 어쨌거나 신선이 놀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빼어난 경치는 감탄할 만하다. 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지만 구석 구석 펼쳐진 해안의 정경은-짙푸른 바다와 뻘의 애무는, 안개와 섬의 포옹은, 낙조와 능선의 입맞춤은-'짠한 아름다움'이다. 선유도를 중심으로 뻗어있는 두 개의 다리는 이웃 섬, 무녀도와 장자도를 잇고 있다. 이들은 서로 기대고, 잇대어 '섬'의 외로움을 위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닮아있지 않고, 각기 다른 특유로 끌림의 정취를 선사한다. 한적하고 느슨해보이는 무녀도, 쓸쓸하고, 적막해보이는 장자도, 그리고 다소 소란스럽지만 생기넘치는 선유도까지 이들 섬의 분위기는 각기 다른 풍미를 자아낸다.

 그곳에서는 짧은 여정을 일일이 기록할 기력도 없거니와 그것이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되지도 않는다.  다만 자전거의 페달을 열심히 밟아 도착했던 무녀도의 초입에 새겨진 그곳의 유래와 역사에 대한 기록에서 건져올린 단어 한 토막만큼은 남길 필요가 있지 싶다. '서드이'.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 단어는 옛 무녀도 주민들의 생활 방침과도 같이 통용되던 말이었던가 본데 그 뜻이 기막히다.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만 살 수 있다." 함께  이 여정에 동행했던 길벗은  낮은 저녁, 헐한 횟집에서 잔주를 기울이며 이렇게 읊조렸다.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 한다라고 적혀있었다면 별로였겠지. 허지만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만 살 수 있다>라잖아. 열심히 서둘러 일해야만 하는데, 그래야 살 수 있는건데...내가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말에 그만 난감해져 몇 순배 더 돌았다.

 물론 모두가 바쁘게 서둘러 일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또한 서둘러 일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제는 그만 서둘러도 되는 세상이다. 서둘러 먹다보면 체하기 마련이고, 서둘러 걷다보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니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고, 한 세계가 다른 세계와 대면하는 일이야 오죽하랴. 기다릴 줄 아는 마음과 지켜볼 줄 아는 미덕, 그 들고 나섬의 틈을 두어 '시간보다 더 느슨한'(문태준) 시간을 살아내는 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무참한 속도 경쟁에 질척해져 버렸다. 단축과 단축의 연속. 그 속에서 이 땅도 소위 '압축(농축) 근대화'를 이뤄냈고, 민주(民主)될 틈 없이 관주(官主)되어버린 이념적 지형도를 그리게 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의 삶도 3축(단축, 압축, 농축)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는 형편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사실은 서두르니 바쁘기 마련이고, 바쁘다보니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어졌다는 데에 있다. 겨를이 없어 여유도 사라졌고, 여유가 없어 삶은 팍팍해졌다. 팍팍해진 삶이란 별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별을 바라볼 줄 아는 삶은 틈과 여백, 관상과 명상이 펄펄히 살아있는 삶이다.

 그러나 무녀도에 터했전 옛 주민들의 '서두름'은 바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서두름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망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왜란의 파고 속에서 먹을 것도 넉넉치 않던 시절, 그들의 삶에서 바다는 한낮 풍경이 아닌 지난한 삶의 현장이었다. 주림을 면키 위해 그곳으로부터 먹거리를 얻어와야했고, 주민들은 무시로 넘나드는 파도와 짙은 안개 속에서도 바다로 나서야 했다. 이러한 삶의 정황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그들의 생계 수단은 뻘에서 얻어오는 해산물이었으며, 밀물과 썰물의 때가 정해져있는 그곳 바다에서 조개를 따기 위해서는 썰물이 오기 전에 그야말로 <서둘러> 일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서둘러 일해야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서 논하는 느림이란,  여유란 한가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서둘러 일해야 했던 것이지,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갖기 위해' 서두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옛 무녀도 주민들의) '최소한의 추구'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최대한의 추구'라는 각기 다른 지향은 '서두름'의 의미를 각기 다르게 채색한다.

 '서드이'. 이 단어를 하나 놓아두고, 쓸데없는 소리가 참 많아졌다. 그냥 내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당신에게 얼마나 그 '살 수 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느냐는 것이다. 한편 오늘날 우리가 열심히, 그리고 서둘러 해야할 일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 번쯤은 곰곰히 생각해볼 일이다.

 이 좋은 이야기를 듣고, 나름의 깨침을 안고 돌아온 것이 선유도를 다녀오며 얻은 것이라면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했던 바다와 사람들과 우리들의 풍경. 그 새로움의 풍경은 가차없는 일상의 반복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두 이레가 지난 지금, 그곳에서의 기억은 아득하고, 현실은 여전히 변변치 않다. 어쩌면, 쇠귀 선생님의 말씀처럼 "여행은 돌아옴"이다. "자기 자신의 정직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우리의 아픈 상처로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결국 우리들의 터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여행인 것이다. 변변치 않은 일상의 남루가 아프지 않은 것은 그 섬이  '고요한 아름다움'(도종환)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며, 무시로 나를 젖어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젖은 마음은 다름 아닌 바로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과의 대면 속에서, 그리고 그리움을 밥을 먹듯 살고 있는 우리의 사랑 속에서 틔워낸 고요한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곳에서 오래고 머물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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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30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03 0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느덧 우리는 외로움에 익숙치 않은 존재들이 되었군요.

그러나 그 사실이 어쩌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게됩니다.

무독(無獨)은 곧 유독(有毒)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니까 외로움도 외로움대로 잘 간수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 듭니다.

외로움을 잘 간직하면, 외로움을 마음에 잘 새기고, 그려넣으면

문득 차분한 그리움으로 번지겠지요.

 

한 주의 끄트머리에서, 서로가 각기 다른 생의 현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그립지만 제게 위안이 됩니다. 감사하는 독존(獨存)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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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08-05-3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하는 시간인거였군요. 전 그리 홀대 했으니,,,ㅠ

바람결 2008-06-02 01:19   좋아요 0 | URL
나비님, 반갑습니다.,

저도 그간 홀대했으나,
그리고 여전히 그와 같을 때가 없지 않지만,
요즘들어 '홀로된 시간'이 문득 감사하게 여겨집니다.
이 시간 있기에 사무치는 그리움도 있고,
그 그리움 뒤에 '함께된 시간'은 더욱 감사하겠다 싶습니다.
물론 독존獨存이 독존毒存이 되어서는 안되고, 독존篤存이
되어야겠지요? '홀로움'도 그 나름이겠지요...

라로 2008-06-04 00:47   좋아요 0 | URL
네,,,좋은 말씀이세요...많은 위로가 되었어요.^^

2008-07-06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7-22 0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지요?

지난 며칠간 함께했던 시간들이 당신에겐 행복했지만, 불안했던가봅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던 읊조림이 깊이 남아 울리고 있어요.

당신의 음성이 내 방 구석 구석에서 그렇게 옴살거리고 있답니다.

나 또한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당신 보내고 나면 다시는 올 수 없는 시간이라고도 생각했답니다.

허지만 묘한 확신에 사로잡히는 오늘은,

더 이상 지난 며칠의 일이 꿈같은 현실, 그래요, 현실이라고 믿게 된답니다.

문자 잘 받았어요. 날씨가 참 좋다고요?

날씨가 참 좋다고요 문자 잘 받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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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이성선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 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난 다리만 혼자서 허전하게 남아 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

 

간만에 뜨끈한 글맛에 취했습니다. 참 오랜만에 만나보는 한희철 목사님의 글, 참 좋습니다. 서두를 읽다가 좋은 시 있어 옮겨 적어보았습니다. 무심한 세상이라지만 무심하게 스치는 사람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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