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겨진 애런. 이전에는 종요롭게 여기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 그에게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하늘을 날으는 새의 날갯짓, 협곡 사이로 내려앉은 햇살 한 줌,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바라봤던 일출.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비근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소중함을 느끼면서 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순간'의 소중함.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소중함. '가족'의 소중함 또는 잠재된 '기억'의 소중함.  

_20110618 청년부 엘림예배, <너의 127시간> 中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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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요즘 날씨 을씨년스럽습니다. 연이틀 꿈자리도 뒤숭숭하고 해서 마음 단도리할만한 책 한 권 꺼내어 들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의 소설이라면, 그가 전해주는 <성자 프란체스코>의 이야기라면 어둡고 음습한 영혼에 '햇살 한줌' 될 듯 싶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읽는 내내 따뜻합니다. 때로는 아프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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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8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9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랜동안 눈길 두지 않았던 제 서재를 둘러보았습니다.  

훨씬도 전에 써두었던 間記 몇 조각 읽다가 일순 마음이 일렁거렸습니다.  

여리고 순한 마음도, 불길같은 격정도 행간 구석 구석에 뒹굴고 있었습니다. 

갈무리해야겠습니다, 푸른 봄(靑春)의 기억들을 잘 여투어 두어야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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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기도하는 집>을 읽으며, 담담하고 우직한 문학의 한 경지를 알음 알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시간의 눈금>은, 생의 궤적을 탐색해나가는 순례자의 '무던한' 정신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어딘가에 적어두었던 책의 한 대목이 지금 이 순간 마음을 적십니다. 

"아탈리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유목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단촐하게 짐을 꾸려 풀 좋은 초원을 찾아다니는 그런 유목민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 통역 데리고, 김치 항아리 짊어지고 다니는 시대는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몽골의 초원에서 올 여름에 내린 결론은 이것. 짐을 줄이자, 나는 무거워지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한껏 가벼워지셨겠지요...? 

언젠가 당신이 그토록 좋아하셨던 카잔차키스의 말을 빌려 이런 말을 남기셨다는데요. 

"우리는 하나의 심연에서 와서 또 하나의 심연으로 간다.
이 심연과 심연 사이를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른다." 

지금쯤이면 또 하나의 심연에 당도하셨을른지요...?  그 심연에는 '쉼'이 있기를. 그 적막하고 깊은 못가에서 평안하시길. 내내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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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없이 웹 사이트를 오락가락하다가 뒤늦게 김규항 님과 진중권 님의 '논쟁'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수십 분을 앉아서 꼬빡, 내용 파악에 몰두했드랬지요. 그리 비상식적이라거나, 비합리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글 한 토막이 불씨가 되었더군요. 몇 번을 되짚어가면서 읽어보았지만 제 눈에는 별 무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3의 눈'이란 늘 그런 것이어서 당사자의 내밀한 감정까지 짚어낼 수는 없겠지요. 글의 어느 대목이 마뜩찮게 느껴졌는지 감정의 동요가 퍽 심하게 느껴지는 글이 반론으로 접수되었더군요. 재차 이어진 반론과 그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이 거듭되면서 원의原意가 점차 흐려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논쟁의 공방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는지, 논객 두 어 분의 주장이 거칠게(?) 추가되면서 그만큼 소통의 여지 또한 줄어드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원래 믿을 것이 되지 못해서 말을 거듭하면 할수록 ‘단절만 완성해가는’(김훈) 경우가 다분한데요, 꼭 그러했습니다. 논쟁이란 말 자체의 함의가 ‘말다툼’이고 보면 ‘그렇지, 뭐’하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논論이라는 말이 ‘진술하다’는 뜻과 동시에 ‘고하다’, ‘여쭈다’라는 뜻 또한 지니고 있음을 상기해본다면 분명 말하는(혹은 글쓰는) 태도나 방식 상의 문제가 도드라져 보입니다. 상대방의 글 속에서 행간을 읽어내고자 하는-겸비謙卑의 자세가 포함된-진지한 노력이 결핍된 ‘논쟁’은 쉬이 ‘질펀한 말言들의 성찬’에 불과하기에 정신의 아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난이 내깔린) 비판의 포화 속에서 두 분 모두 치열한 고뇌의 산물로 내놓은 글들이라 충분히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불통의 벽은 높아져만 가는 듯 싶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설득을 담아내기에 앞서 포용과 배려의 마음이 전제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두 분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철학적 지식도, 정치적 식견도 심히 모자란 사람에게는 분명 좋은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허나 이 논장論場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상의 난장煖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네요. 문득 루미의 문장 한 구절을 되내입니다. 

 "상호 이해는, 같은 언어를 말하는 데서 오지 않고 같은 지혜를 말하는 데서 온다. 혀를 서로 나누는 것보다 가슴을 서로 나누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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