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 고운 영화를 만날 제면 나는 짐짓 일렁인다. 그 일렁임으로 인하여 고만 영화에 대한 나의 방외인적 시각은 결여를 짐작하게 되고, 일체의 평評이나 논論은 슬그머니 멀찍한 거리로 밀려난다. 그저 하릴없이 영화의 고운 결에 따라 거닐기 시작할 때, 영화는 어느덧 나의 이야기가 된 듯 하고, 때문에 감정의 스펙트럼은 내러티브의 흐름에 귀속된 채로 부유하기 마련이다. 판단이 유보된 자리에 들어 찬 영화의 고운 결은 나를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만들어버린다. 일종의 감염이랄까?
간만에 맞이한 휴일이, 홀로된 자에게는 잔인한 시간이란 걸 깨닫게 된 건 지난 개천절의 일이다. 슴슴한 가을의 하루를 보내는 일이 내게는 버거웠던지 집 근처 영화관을 찾았고 주저 없이 <행복>을 택했다. 허진호 감독에 대한 나름의 애정은 몇 편의 전작들을 통해서 퇴적되어 왔던 바, 나는 짐짓 그 섬세를 그리며 영화를 기다렸던 터였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울었고, 그 울음은 작위가 아닌 무위였다. 많은 영화들이 때론 허장과 성세의 파노라마 속에서 관객의 눈물을 그야말로 ‘작위적’으로 지었던데 반해서 예의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결대로’ 보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
나는 이후로 며칠을 더 지내다 다시 극장을 찾았다. 잘 기억하진 못하지만, 두 번이나 극장을 찾게 만들었던 영화는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이후 처음인 듯 싶었다.(참고로 허진호 감독의 전작 <봄날은 간다>나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같은 영화는 비록 극장에서 한 번 밖에 마주하지 못하였지만 DVD를 통해서 셀 수 없이 보아오던 터였다.) 어쨌거나 내가 이 영화를 다시 찾았던 건, 서두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영화의 그 고운 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어느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이 밝힌 것처럼, 지극히 ‘통속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 주위의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었을 법도 하다. 그만큼 통속적이면서도 (통속적이라는 말의 함의하는 바와 같이) 상당히 현실적이다. 여튼 보는 이는 영화를 보면서 나의, 혹은 그 누군가의 기억을 오버랩한다. 그렇기에 영화가 주는 울림은 상당히 크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니는 가장 큰 미덕은 소위 ‘통속적’이라는 사실에 있지 않고, 오히려 많은 (통속적인) 영화들이 일쑤 겪곤 하는 시행착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는 데 있다. 그 시행착오란 영화의 통속성을 빙자해 만들어내곤 하는 ‘보편성으로 부터의 자기 초월’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많은 영화들이 내러티브의 구체 속에선 통속적이면서도 전체 속에선 일순간 범속적인 형태를 띠게됨으로 인해 소위 ‘최루성 멜로’, 혹은 ‘판타지 멜로’라는 혐의를 지니게 되곤 한다. 허나 <행복>은 구체의 결을 곱게 유지하면서 전체를 형성해간다는 측면에서 범속적이지 않다. 상당히 통속적인 제재 속에서도 말이다.
잘 모르는 말을 너무 많이도 지껄였다. 그냥 내가 느낀대로 말하자면, <행복>은 사랑과 치유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 인생의 중심, 곧 찬란한 청춘의 시절에서 어느 정도 언저리로 내몰린 이들, 영수와 은희는 하방연애下方戀愛를 시작한다. 영화는 그들의 사랑 얘기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아주 곱게 전개한다.(사랑의 절정에 이르는 과정은 상당히 즐겁고, 재미있다. 임수정과 황정민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름답다.) 그러나 어느결에 그들의 사랑도 저물고, 영수는 하릴없이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아주 흥미롭게도 농촌과 도시를 오가며 진행되고, 마치 감독은 간결하고, 단순한 삶을 상징하는 농촌의 삶이 사랑과 아주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 본디 그렇지 않은가? 현실의 복잡다단함 속에 사랑이 귀속될수록 사랑은 어려워지지 않던가? 때문에 감독은 은희의 입을 빌려 “오늘 잘 살고, 내일 또 잘살면 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성복의 시 <편지1>를 떠올렸다.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봅니다 날이 갈수록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 어느새 나는 남해 금산 높은 곳에 와 있습니다 낙엽이 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야 내게 참 멀리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이성복, <편지 1>, 전문)
이 시를 두고 문학평론가 하응백은 이렇게 적었던 적이 있다. “사랑은 불연속적인 두 개체가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심심하고, 외롭고, 허전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오락가락하다가, 그 힘든 시소놀이를 하다가, 사람은 죽는다.” (하응백, <사랑을 다 그렇다>, 일부) 결국 영화는 그들을 단순하고, 간결한 사랑 속에 가둬두질 못하고, 우리네 사랑이 곧잘 그렇듯 ‘오락가락’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 ‘그 힘든 시소놀이’끝에 은희는 죽는다.
한 후배와 다시 <행복>을 보고났을 때, 그 녀석은 이렇게 말했드랬다.
“오빠, 근데 황정민이 임수정한테 뽀뽀하는 장면 있잖아요. 그때 황정민이 너무 멋있어서 가슴이 떨리더라구요. 근데 갈수록 황정민이 못생겨지는 거 있죠? 그리고 영화 끝자락에 다다라서는 정말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있더라구요. 영화에서도 같이 사는 사람이 “자기, 못 생겨졌어”라고 했을 정도니...참...사랑이 사그러 들수록 사람은 못생겨지나봐요...”
정말 영수(황정민 분)는 갈수록 못나게 변한다. 그의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 (외면적이지만) 그는 자신을 옥죄던 병마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던 마음조차 치유된다. 말그대로 사랑의 힘이었다. 그러나 그가 언저리에서 중심의 ‘몸’으로 가닿기 시작할 때, 그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균열은 그를 휘감았던 사랑의 치유로부터 이탈하게 한다. 그도 은희가 죽어가듯이 서서히 죽어간다.

말이 참 많았다. 어쨌거나 두 배우의 연기는 두고 두고 칭찬해야할 부분이겠다. 특히 은희 역을 맡은 임수정의 연기가 빼어나다. 영화의 결에 참 잘 들어맞는다. 황정민 또한 허진호 감독의 전작 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의 그 고운 결이 주는 사랑의 회한과 눈물은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오롯하다. 물론 영화가 제 속도를 끝내 유지해내지 못한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난 그저 그 결 고운 빛이 아프고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