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팔사략 - 하 십팔사략 2
증선지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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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에 연예인들로 인한 사건들이 많다. 마약과 성 추문, 잘못된 발언과 행동 등으로 구설수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순간 사라지는 연예인들이 많다. 그 자리까기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을까? 그러나 한순간의 성공에 취해서 모든 것을 물거품을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단순 연예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한 번 성공을 하면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를 잊는다. 그래서 교만해지고,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큰일이 터지고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된다. 이것은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증선자에 의해 중국에서 전설로 알려진 삼황오제 때부터 송나라의 멸망까지 중국 역사를 집대성한 [십팔사력]을 읽다 보면 역사에서도 매번 이런 일이 반복된다. 왕조의 타락과 간신들의 득세로 중국 대륙이 혼란에 빠진다. 그러면 각 지역의 군웅이 할거하고, 이민족들이 침략해 오는 난세가 된다. 그 과정에서 한 영웅이 나오고 힘겨운 과정을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대륙을 통일한다. 그러나 황제 자리에 오른 보인이나 후대에 이르러 왕조는 향락에 빠지고, 간신들에게 휘둘리기 된다. 그렇게 왕조의 타락이 이어지고 다시금 난세가 반복된다. 이것이 십팔사략을 통해 몇 천 년을 이어오는 중국 역사의 흐름이다. 특히 십팔사략의 하권의 마지막은 송나라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이 책의 저자인 증선지가 직접 경험한 시대여서인지 몰락하는 모습이 더욱 비참하다.

 

[십팔사략]의 하권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통일한 수나라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위진 남북조시대는 진나라의 혼란을 틈타 5개의 북방민족이 침략해서 북쪽에 16국의 나라를 세우고, 진나라는 남하에서 동진을 세운 시대를 가리킨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북쪽의 혼란은 북위에 의해 어느 정도 정리된다. 북위는 선비족의 한갈래인 탈발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다. 역자는 탁발 선비족인 선비족의 갈래에서 나왔다기 보다, 따로 성장하다가 후에 선비족과 합쳐진 것으로 본다. 그 탁발 선비족이 중국의 혼란 시기에 남하하여 북위를 세웠다. 여러 이민족들이 그렇듯 북위도 후에 한족 동화 정책을 쓰고, 그로 인해 원래 북위 출신인 귀족들이 반발을 하여 난을 일으킨다. 이런 혼란 속에서 북위가 동위(후에 북제)와 북위(후에 북주)로 갈라지고 북주에서 왕권을 차지한 사람이 바로 후에 수문제로 불리는 양견이다. 그리고 양견의 아들이 바로 10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한 것으로 알려진 수양제이다. 양견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수나라를 세운다.

 

어렵게 나라를 세우고 대륙을 통일했지만 수양제와 수문제의 통치는 위 진 남북조시대의 혼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대규모 군역을 일으키고, 수많은 인원을 동원해 전쟁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전왕조의 핏줄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것처럼 자신도 죽고 자신이 핏줄들도 죽는다.

 

"당시 양견은 모든 일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이내 사람을 보내 9세의 어린 외손자 우문연을 목 졸라 죽이게 했다. 그리고는 짐짓 조정에서 그를 위해 초상을 알기고 집행하는 거애를 행했다. 수문제 양견은 5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이들 모두 제 명에 살지 못했다. -중략- 장자 양용은 훗날 폐위돼 사사됐다. 차자인 수양제 양광도 신하에 의해 목이 달아났다. 3남인 진왕 양준은 요절했다. 4남 월왕 양수는 폐위돼 금고에 처해졌다가 수양제 양광이 시해를 당하는 이른바 강도지변이 일어났을 대 죽임을 당했다. 5남 한 왕 양량은 모반을 꾀하다가 주살됐다. -중략- 수양제 양광의 세 아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한 명은 요절하고, 나머지 두 아들은 강도지변 때 주살되었다." (P 24)

 

당나라 역시 수나라의 왕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수나라 말엽이 되자 다시 혼란이 이어지고, 각처에서 군웅이 활거한다. 이런 혼란 상황을 정리한 사람이 당고조이 이연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당고조 이연을 움직인 사람은 후에 당태종이 되는 이세민이다. 마치 조선 개국의 이성계와 이방원의 관계와 비슷하기도 하다. 오랜 시기 동안 수많은 전쟁을 통해 겨우 당나라를 안정 시키지만 당태종 역시 어리석은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고구려와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아들 당 고종 이치에 이르러서는 유명한 측천무후가 등장한다. 원래의 이치의 첩이었던 무측천은 후에 실권을 잡고 왕족을 진멸한다. 또다시 혼란의 시기가 발생한 것이다. 그 후 당나라의 역사도 혼란과 수습의 반복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사의 난이나 황소의 난을 통해 혼란이 극에 이르고 결국에는 나라가 멸망한다. 황소의 난에 대한 기록은 마치 좀비 영화나 종말 영화를 보는 것처럼 끔찍한 기록들이 이어진다.

 

"이 소식을 들은 황소가 대로한 나머지 곧바로 진주에 대한 총공격을 내렸다. 그는 진주성 북쪽에 영채를 차린 뒤 행궁과 관사를 짓는 등 장기전에 대비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식량을 구할 길 없자 백성이 눈에 띄는 대로 잡아와 산 채로 큰 맷돌에 갈고 절구에 빻은 후 뼈가 붙어 있는 고깃덩이를 그대로 불에 구워 먹었다. 하루에 수천 명이 불에 구워졌다. 그곳이 용마채로 불린 이유다. 사람을 절구에 빻고 맷돌로 갈아먹은 성채라는 뜻이다." (P 191)

 

앞서 수나라와 당나라가 왕조의 타락으로 멸망을 했다면, 송나라는 외부의 칩입에 의해 멸망한 경우이다. 송나라는 계속해서 거락족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시달렸고, 이방민족으로 멸시하는 그들에게 금은과 비단 등을 주면서 겨우 연명했다. 결국은 금나라에게 북쪽 지역을 내주고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운다. 이것을 정강지변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실상 북송의 마지막 황제 격인 송취종이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묘사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도교에 심취한 송휘종은 육갑병법으로 소문난 사기꾼 도사 관경의 말만 믿고 도성의 방위를 맡겼다. 관경은 생년월일이 간지에 맞는 7.777명의 군사를 뽑아 육갑신병으로 칭한 뒤 길일을 택해 전투를 치러야 한다며 금나라 군사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이내 금나라 군사가 도착하자 육갑신병들과 함께 성문을 활짝 열고 맞서 싸우는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송나라 군사가 참패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송휘종 조길은 책임을 면하기 위해 장남인 송흠종 조항에게 보위를 양보한 뒤 재빨리 남쪽으로 달아났다." (P 446-7)

 

하권의 마지막은 송나라가 원나라에게 멸망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저자인 증선자가 송나라 사람이어서인지 송나라의 마지막은 애절하다 못해 절박하다.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송나라의 마지막 황제 송제병과 함께 몰살한 송나라의 관원들과 군인들의 최후가 처절하게 그려진다.

 

"육수부는 송제 병이 탄 배인 제주를 탈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제주는 규모가 크고 여러 배들이 주위에 매여 있는 환결로 인해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이에 먼저 자신의 처자를 몰아 바다에 뛰어들게 한 뒤 자신도 어린 송제 병을 업고 바다에 빠졌다. 송제 병이 붕어하자 후궁과 제신 가운데 함께 따라 죽은 종사자가 매우 많았다. 7일이 지난 뒤 바다 위에 떠오른 시신이 모두 10여만 명에 달했다." (P 615)

 

십팔사략 상하권을 읽으며 중국의 방대한 역사에 압도가 되었다. 그러나 계속 읽어가면서 느낀 결론은 방대한 역사 속에서 이민족의 침입으로 세워진 나라도 많고, 나라가 세워지고 망하기를 반복하며 극한 혼란 상황도 반복되었다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황제나 지도자들이 조금만 지혜로웠다면 막을 수 있는 혼란도 많았다. 역사를 통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다면, 인생에서도 역사의 혼란 같은 상황을 조금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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