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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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역사를 좋아하기에 사극 드라마는 꼭 보게 된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시대 배경이 고려 말과 조선 초로 이루어지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이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시청하다 보면 국운이 다 해가는 고려를 향한 안타까움과 새롭게 세워지는 조선에 대한 역동성이 함께 느껴진다. 물론 조선을 세우고자 몸부림치는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이방원과 같은 인물들의 매력도 한몫을 한다. 기억이 남는 드라마로는 오래전 드라마인 [용의 눈물]이 있고, 최근에는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가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이런 명품 드라마가 탄생되게 되는 것에는 탄탄한 원작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원작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이다. 비록 각색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 드라마는 바로 이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원작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조선왕조실록]은 일반인이 읽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이번에 이덕일 작가가 오랜 기간의 노력 끝에 [조선왕조실록]이라는 10권짜리 대작을 출간하게 되었다.

1편은 당연히 태조 편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태조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고려 말의 상황과 조선 초의 상황이 펼쳐진다. 소설의 시작은 공민왕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공민왕과 이성계의 가문과의 영향은 매우 각별하다. 왜냐하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 때 고려로 기부를 해 왔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가문은 몽고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이미 몽고로 기부를 했었다. 지금으로 보면 친일파처럼 안 좋은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당시는 그나마 사연이 있었다. 이성계의 4대 조인 이안사는 고향이 전주였는데, 당시 전주 지주사와의 갈등으로 전주를 피해 북쪽으로 도망가다가 그를 따르는 사람과 함께 몽고에 기부를 한 것이다. 그 후 몽고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동북면에 거주하던 이자춘이 기부를 하고,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회복할 때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때부터 이성계 가문이 고려에서의 입지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공민왕은 개혁의 전반을 맡기던 신돈을 참수하게 되고, 이로 인해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하고 그도 비운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저자는 신돈의 개혁을 고려의 마지막 회생을 향한 몸부림으로 보고 그의 죽음으로 고려의 국운이 다 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신돈의 개혁은 끝났다. 이번에도 구가세족들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이것은 신돈이 몰락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고려의 마지막 개혁 정객과 그 세력이 사라진 것을 뜻했다. 신돈의 몰락으로 고려는 구가세족의 나라로 되돌아갔다. 백성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노비로 전락해도 하소연할 곳 없는 나라로 돌아간 것이다.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움직여 다른 사람에게 천명을 내릴 것을 두려워하던 공민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려 왕조는 막다른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P 105)"

공민왕 사후 우왕이 왕위를 얻고, 그는 최영의 도움으로 나름 개혁정치를 하게 된다. 그 시기 중국대륙에서는 홍건족의 한 무리를 이끌던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요동지역의 관활권을 주장한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5만 대군을 보내어 요동을 정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조민수를 포섭해 함께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부터 사실상 고려의 실권은 모두 이성계에게 넘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왕과 창왕, 공양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이색과 정몽주 같은 인물들이 이성계에게 도전했지만, 모두들 군사적인 실권이 없는 문인들이었다.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도움으로 공양왕을 몰아내고 조선을 개국한다.

우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적인 평가가 엇갈린다. 당시 조선이 명을 치는 것을 불가능했을 거라는 의견과 함께 당시의 혼란 상황에서 고려가 요동을 점령해도 명은 반격할 수가 없었다는 의견이 대립한다. 저자는 후자의 의견을 지지한다. 저자는 당시 명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한다.

"주원장은 고려군의 북상 소식에 크게 당황했다. 고려군은 정규군이고, 이에 더해 원나라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황제 노릇이 20년 만에 끝날 수도 있었다. 두려워진 주원장은 종묘서 재계하고 점을 칠 준비를 했다. 고려군이 북상하면 맞서 싸워야 하는지를 묻는 점이었다. 건국 20년, 명나라는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다. 이해(1388)만 해도 온남성이 태족 사륜발이 군사를 일으켰고, 초원으로 쫓겨난 북원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자신이 고려군과 싸우는 사이, 불만을 갖고 있던 세력이 대거 일어설 수도 있었다. (P 181)"

그러나 조선이 개국된 후 요동을 차지할 기회는 또 한 번 있었다. 정도전이 다시금 요동정벌의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요동정벌은 주원장의 사후 명의 혼란 상황과 개국공신과 왕자들의 사병을 흡수하기 위한 정도전의 묘책이었다. 그러나 결국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암살 당함으로 그 꿈은 끝나고, 이후 조선은 스스로 명에게 철저한 사대의 관계를 하는 명의 제후국으로서의 위치를 자처한다. 이 책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이었다.

"정도전의 죽음은 비단 한 사대부의 죽임이 아니었다. 천자의 제국 고구려를 재건하려던 민족의 꿈도 함께 죽은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요동 정벌을 막은 데 대한 업보인지도 몰랐다. 정도전의 죽음으로 조선은 다시 사대주의 국가로 전락했다. 그렇게 천자국의 꿈은 정도전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P 343)"

정도전의 죽음과 함께 이성계 역시 명목상인 왕으로 몰락하게 되고, 모든 실권은 이방원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런 걸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정도전의 죽음과 이방원의 왕자의 난에 대한 이야기는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아마 2편인 정종과 태종 편에 자세히 언급될 것이라고 기대가 된다.

고려 말과 조선 초는 역동적인 시기였고, 결국 백성이 민심이 떠나면 어떤 것으로도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교훈을 주는 시기이다. 또한 이 시기는 우리 역사상에서 마지막으로 중국 대륙을 향해 꿈을 꾸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그러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감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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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등사
다와다 요코 지음, 남상욱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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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주말의 명화로 처음 혹성탈출이란 영화를 보았다. 찰톤 헤스톤이 주연한 오리지널 영화였다. 낯선 혹성에 불시착한 주인공 일행이 인간을 사냥하고 짐승처럼 다루는 원숭이들과 대면하는 내용이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마치 이물감을 느끼는 것처럼 낯설고 기괴한 세계를 접한 느낌이었다. 특히 주인공이 말을 타고 해변가로 탈출하면서 일부만 드러난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절규하던 장면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혹성탈출이 여러 차례 리메이크 될 때마다 제일 먼저 극장에 달려가서 보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헌등사]를 책을 읽으면서 혹성탈출이란 영화를 처음 봤을 때의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은 시종일관 낯설다. 소설은 시작부터 아무런 설명 없이 일본의 낯선 풍경을 묘사한다. 요시로라는 사람이 개를 대여해서 달리기를 한다. 집에 들어오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자세한 설명이 없는 무메이라는 어린아이가 요시로를 증조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점점 요시로의 독백을 통해 요시로가 백 살이 넘은 것과 70 정도이면 젊은 늙은이로 부르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메이의 건강 상태도 이야기한다. 무메이는 근육의 마치 연체동물처럼 힘이 없고, 이가 빠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다. 늙은이들은 점점 건강해지고, 아이들은 점점 건강을 잃어가는 조금은 황당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정부가 통제를 한다.

"건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들이 없어진 세상에 소아과 의사들은 노동시간이 늘어났고, 부모들의 분노와 슬픔을 일거에 받아들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실정을 신문기자 등에게 말하면 어딘가로부터 압력이 들어왔다. (P 32)"

"최근 아이들의 90퍼센트는 미열을 반려해 살아가고 있다. 무메이도 언제나 미열이 있다. 매일 열을 재면 오히려 신경질이 되고 마니까 열은 재재 말아 달라는 학교 측의 지시가 있었다. '오늘은 열이 있네요'라고 말하면 아이는 몸의 노근함을 떠올린다. 열이 나올 때마다 학교를 쉬게 한다면, 거의 학교에 갈 수 없게 되는 아이도 많이 나올 것이다. 어느 학교에나 제대로 된 의사가 반드시 한 명은 대기하고 있으니까 병에 걸렸을 때야말로 등교하는 편이 낫다. (P 50)"

더 특이한 것은 언어이다. 쇄국정책으로 인해 외국어 사용이 금지되고, 모든 언어가 일본어로 대체된다. 언어가 바뀌면서 인간의 생각들도 바뀐다. 이전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을 이제는 낯설게 받아들이고, 또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난다.

"아이가 태어나면 곤란해서 여성의 경우는 55세 이상, 남성의 경우는 이미 불임수술을 받은 사람이 우선시되었다. 얼굴에 주름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탈색해 나이를 속여서 취업하려고 한 여성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는데 실제 연령보다 많아 보이도록 하는 것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오래된 농기구 스위치에 영어로 'ON'과 ;OFF'로 쓰여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상하게 비추어져, 아직 젊다는 것이 탄로 나버린 모양이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이 먹은 증거이다. 전기 제품에 'ON' 'OFF'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젊은 사람은 그런 영어 단처조차 몰랐다. 영어를 학습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P 67)"

소설이 진행되며 요시로의 가족사가 등장하고, 아내인 마리카와 딸인 아마나, 그리고 손자인 도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조금은 기괴한 무메이가 태어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 모든 과정을 인생에서 겪은 요시로의 삶을 통해 일본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암시한다. 지진이나 쓰나미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만 원전 폭발이나 방사능 유출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것들이 생태계와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는 내용은 곳곳에 등장한다.

소설은 대부분 요시로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마리카나 무메이의 시점으로 변하기도 하고, 소설 말미에는 갑자기 15살이 된 무메이의 미래가 등장한다. 그 미래는 마치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처럼 끔찍하면서도 충격적이다.

다와다 요코의 작품은 처음 읽어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세계문학에 대한 낭독이나 감상에 관심이 있어서 다와다 요코의 작품의 부분적인 부분을 읽거나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한 해설을 읽은 적이 있다. 22세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낯선 독일이라는 세계로 이주해 낯선 독일어를 통해 세상을 다시 접한다. 이런 언어와 세상이 주는 낯선 경험이 그녀의 소설의 주된 주제였다. 그러나 동일도 지진 이후 침묵하는 일본 사회에 대해 사명감을 느끼고, 사회적인 소설들을 쓰고 있다. 그녀가 상상한  본의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일본의 일그러진 사회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일본 이란 사회 내부에 있기에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기괴하게 변해가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낯선 타자의 입장에서 다시 바라보는 다와다 요코의 시각은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으며 내가 좋아하는 미국 작가 필립 딕의 SF 소설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낯선 미래 세계와 그 세계에서 변형된 인간성을 그리고 있는 필립 딕의 작품성이 다나와 요코의 작품에서도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제목인 '헌등사'는 여러 가지 악양향으로 휠체어에 의지해 생명만 유지하게 된 미래의 일본 아이들 중 외국으로 밀항을 해서 자신의 건강상태를 검사를 받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일본의 실체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아마 이 헌등사라는 단어 속에 아직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많은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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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인간을 말하다 - 권력에 지배당한 권력자들의 이야기
리정 지음, 강란.유주안 옮김 / 제3의공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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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을 통해 전직 대통령의 비리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드는 생각은 결국 인간은 권력 앞에서 부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권력만큼 인간의 본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춰내는 수단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순수하고 정직했던 사람들도 일단 권력을 잡으면 부패하게 되어 있다. 비단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절대권력만이 아니다. 주변에서 작은 회사나 공동체에서 리더가 되면 소통을 닫고, 독단적으로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아래에 있었을 때의 총명과 결단력은 없어지고, 상황의 흐름을 판단하지 못하고 현실의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하물며 이런 작은 권력도 이런데 봉건국가에서 절대권력인 왕이나 권력자들은 어떠했을까? 이런 권력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책이 [권력, 인간을 말하다]라는 책이다.

[권력, 인간을 말하다]라는 책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당나라를 배경으로 당나라의 권력을 잡은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권력에 잠식되어 부패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밀과 당태종 이세민, 그리고 이세민의 밑에서 권력을 잡았던 장손무기 등이다.

이밀은 수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이 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사상을 통해 반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는다. 진취적인 사상과 빠른 결단력으로 순식간에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했으나, 막상 권력을 잡자 우현실을 판단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원래 자신의 상관이었으나 자신에게 지위를 양도한 적양을 제거함으로써 민심을 잃고, 결국 이세민에게 투항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저자는 이밀이 참모로 있을 때는 뛰어난 판단력을 가졌지만, 막상 자신이 지도자가 된 후에는 상황을 판단하지 못해 실수를 했다고 말한다.

"한편 여전히 군웅들이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 있는 그때, 이밀은 왕세충과 낙양에서 격전을 벌이며 승부를 다투고 있었다. 이연과 이세민은 진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점령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 이때 이밀은 치명적인 과실을 범하고 말았다. 그의 책사인 시효화는 지금 낙양을 두고 다투지 말고 정예 부대를 선발해 서쪽으로 장안을 습격하라고 충고했다. 역사는 어찌 이렇게 똑같은가! 이는 일찍이 이밀이 양현감에게 제안한 계획이었다. 당시 양현감은 이밀의 충고를 듣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밀이 시효화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이다. 이밀은 남에게 충고를 잘했지만  남의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른바 '방관자는 정확히 볼 수 있으나 당사자는 제대로 보지 못한다'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P 31)"

권력을 잡은 후 후계 구도 때문에 붕괴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은 당 태종 이세민이다. 역사에 보면 일단 권력 앞에는 부모형제도 없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당나라 역시 계속해서 이런 싸움이 있었다. 당태종은 당나라를 세우고 절대권력을 잡았지만 아들들 간의 싸움으로 반란과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뛰어난 두 아들이 권력싸움으로 축출되고, 조금 부족한 셋째 아들 이치가 왕이 된다. 그리고 그 이치가 바로 측천무후에게 권력을 넘겨주어 당나라를 나락으로 빠뜨린 당고종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 당태종과 함께 당나라를 세운 장손무기였다. 그는 이인자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반대파들은 모두 역모로 몰려 사라졌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역모로 몰려 사라진다. 장손무기의 편에서는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권력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양귀비에게 빠져 나라를 무너뜨리 당 현종 이융기이다. 측천무후와 위 황후로 이어지는 당나라의 여인천하의 혼란기를 수습한 인물이 바로 이융기이다.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위 황후의 세력을 제거하고, 뒤 이어 자신과 함께 위 황후를 제거한 측천무후의 딸이자, 자신의 고모인 태평 공주까지 제거한다. 그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검소한 정치로 당나라 역사상 가장 태평한 시대를 만든다. 그러나 절대권력이 오래되자 그도 부패하게 된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재상 양국충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고, 자신의 은밀한 궁에 들어가 양귀비와의 향락의 세월을 보낸다. 결국 그가 총애하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양귀비마저 자신의 손으로 죽이며 권력에서 쫓겨난다. 저자는 이융기의 부패를 통해 절대권력이 반드시 부패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이융기의 비극은 '물이 차면 넘치고, 해도 한낮이 지나면 저문다'라는 간단한 변증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의 부패가 가져다준 인간성의 타락에 있다. 황산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금속을 부식시킬 수 있는 것처럼 절대 권력도 세상에서 자기 절제력이 가장 강한 사람을 자기도 모르게 변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은 영민하고 용맹스러웠던 이융기를 무능하고 어리석게 만들었고, 자신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르던 자를 무절제한 사치에 이르게 만들었다. 또한 마음속에 천하를 품었던 자를 호화로운 생활에 빠지게 했고, 겸허하게 간언을 받아들이던 자를 강퍅하고 독선적으로 변하게 했다. 권력을 누리는 것은 칼끝에 묻은 꿀을 핥는 것과 같아서 달콤함을 맛보았을 때 이미 칼끝에 상처를 입고 만다. 이융기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빠져서 나날이 계속되는 상처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P 127)"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라고 말한다. 당태종은 당시 누구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짐작하고 있는데, 오로지 자신만이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은 간신인 양국충의 인의 장막에 가려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것도 있지만, 권력자가 가지는 특유의 인지적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각 시대의 황제들은 모두 가장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장 뛰어난 스승에게 보고 배웠으며 사서오경을 읽고 도덕적 소양을 키웠다. 다시 말해 결코 어떤 황제도 천하를 잘 다스려 역사에 길이 남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또 욕망을 억누르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야 함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일단 황제가 절대 권력의 최면에 걸려 인지적 딜레마에 빠지면 욕망과 이성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렵고, 옳고 그름과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는데 있다. 또한 황제에게 진리의 기준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기 자신을 진리와 동등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의 욕망은 결국 제멋대로 분출된다. (P 144)"

마지막으로 당나라 말기의 황소라는 인물은 권력을 잡은 후의 계획이 없다면 그가 잡은 권력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 당나라 말기에 황소는 농민 반란군을 이끌고 황소의 난으로 유명한 전쟁을 일으킨다. 황소는 높은 기개와 강인함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중앙절이 오기를 기다려, 나 국화가 활짝 핀 후에는 100가지 꽃이 시들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 짙은 국화향이 장안성에 가득하니 온 장안성을 노란 국화색 황금 갑옷으로 덮어버리리... 이 시는 황소가 반란의 미학을 극치로 발휘한 작품으로서, 그의 격정적인 글에는 유구한 중국 역사 속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강인한 아름다움이 있다. (P 300)

그러나 황소의 군대는 일단 장안을 장악하자 더 이상 목표를 잃고 조직이 무너진다. 그리고 장안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많은 지도자들이 막상 권력을 잡은 후 우왕좌왕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결국 권력을 잡기 전에 얼마나 준비되었는지가 그가 잡은 권력이 얼마나 유지되는지를 말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이 역사를 조금만 참고해도 좀 더 지혜롭게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과연 권력 앞에 부패되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절대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권력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권력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역사를 통해 인간을 알고 싶다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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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3 (양장)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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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해외뉴스를 통해 시리아나 아프카니스탄 같은 혼란한 국가의 상황을 보게 된다. 사방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주변에서는 폭탄테러가 일어나 수백명씩 죽는 일이 발생한다. 놀라운 건 이런아수라장 같은 곳에서도 시장이 열리고 장사를 하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부모와 자식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남은 사람들은 또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간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만큼 삶은 끈질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학살하던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어떻게 삶을 이어갔을까? 모진 삶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살아나갔다. 그게 바로 삶의 특성일 것이다.

태백산맥 3권은 1,2권에 비해 속도감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좌우익의 학살이 한차례식 지나간 후 3권에서는 표면적으론 큰 사건 없는 시간이 계속된다. 연순 반란 사건을 일으켰던 김지회와 14연대는 지리산 속으로 숨어들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벌교 총책인 염상진을 주축으로 한 좌익들은 지리산 자락인 조계산에 숨어 반격을 준비한다. 벌교에는 경찰 토벌대를 이끌고 온 임만수 외에, 200여 명의 중대 병력을 이끌고 계엄군 사령관으로 온  심재모 중위가 등장한다. 심재모는 우익들의 지나친 복수를 금지시키고, 벌교를 안정시키며, 염상진 일당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지리산에 입산한 좌익들의 가족들의 힘겨운 삶이 그려진다. 빨갱이의 가족이나 자식이라는 비난 속에 매를 맞기도 하고,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면서도 그들은 살아남는다. 대부분 가족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남편이, 아버지가, 아들이 그 사상을 가졌기에 고초를 당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남편을, 아버지를, 아들을 끝까지 외면하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눈물겹다.

2권에서 염상진이 마을로 잡입한 사건 이후, 다시 좌익들을 가족들은 잡혀가 몰매를 맞는다. 남편이나 아들이 어디 있냐는 것이다. 알 수도 대답할 수도 없는 그들은 그냥 매 타작을 당할 뿐이다. 겨우 풀려난 가족들은 굶주림과 주변의 냉대를 당한다.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눈물겹게 그려진다. 염상진의 아내인 죽산댁은 아들 광조와 힘겹게 살아가고, 하대치의 아내인 들몰댁은 두 아들과 살아가기 위해 처갓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외서댁은 여전히 염상구에게 몸을 빼앗긴다.

이들 중에 가장 안타까운 사연은 과수원 댁의 불리는 배성오의 어머니이다. 큰아들은 공무원이고, 작은 아들은 공산당이다. 아들이 집에 들어오자 그를 숨겨 준다. 헛간에 굴을 파고 작은 아들에게 음식을 날려 주면서도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닭을 삶아 아들을 먹이는 장면에서는 너무나 애처롭다. 그런데 결국 형이 이 사실을 알고 동생을 밀고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둘째 아들이 총을 맞아 죽는 장면을 직접 눈으로 본다. 그리고 결국 그 어머니도 목을 맨다. 당시 이런 사연을 가진 가정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3권에서는 기독교 사상가인 서민영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그를 통해 백범 김구의 사상을 우남 이승만과 대조하여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승만을 기회주의자로 김구를 민족주의자로 묘사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신탁통치 반대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났네. 백범의 반탁은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 상황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우남의 반탁은 자신의 집권 욕구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기려 함이 아니었나. 여기서부터 백범은 역사적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고, 우남은 반역사적 소아 이익의 길을 택했다. 좌익 진영의 찬탁과 우익진영의 반탁이 엇갈리는 소란 속에서 이승만 중심의 남한 정부 단독 수립이 싱가포르 통신을 통해 들어온 것이 1946년 4월이었고, 우남은 마침내 6월 3일에 남조선만이라도 즉시 자율적 정부를 수립해야 ㅎ나다는 그 유명한 '정금 발언'을 한 것이 아닌가. 백범의 입장에서 보면 그 발언은 곧 민족분단의 획책이었지. 같은 민족이 서로 상대되는 주의를 앞세워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민족분단을 야기한다, 그건 백범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지, 식민지 시대에도 민족의 분단은 없었으니까. 그때부터 백범과 우남은 서로 등을 돌리 수밖에 없었느니까. (P 306)"

개인적으로 백범과 우남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저자의 시각에 전부 동조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통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좀 더 알아가게 되었다.

3권에서도 염상구의 악행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인물이 있다면 염상구라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여전히 외서댁을 통해 자신의 욕정을 채우고, 외서댁이 임신하자 그 사실을 소문을 낸다. 결국 외서댁을 자살을 시도한다. 또 안창민을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이지숙을 고문하고, 정하섭을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소화를 고문한다. 그리고 소화를 고문하는 과정에서는 임신을 한 그녀를 낙태를 시킨 것도 모자라, 그것을 통해 정하섭의 어머니와 협상을 해 돈을 챙긴다.

염상구란 인물과 벌교의 지주들의 만행을 보면 작가의 시선이 너무 좌익 쪽으로 기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태백산맥은 저자가 민족주의자이면 중도주의자인 김범우라는 인물을 통해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점점 우익의 만행과 친일 주의자인 지주와 경찰 간부 등을 등장시키며 균형이 무너지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상황의 균형을 맞춰주는 인물이 계엄군 사령관인 심재모이다. 그는 일제시대 때 학병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귀국 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군에 입대한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싸우지만, 한편으로는 친일파들도 증오한다. 저자는 심재모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우익이 모두 친일 주의자만은 아니며, 그중에서도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인물이 있음을 상기시 켜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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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2 (양장)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해방 후의 혼란 상황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첫 단추를 잘 못 끼었고, 그 결과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중에 가장 잘 못 낀 단 추가 친일청산이었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대결구도가 미 군정 이후는 좌익과 우익의 대결구도가 된다.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는 것이 가장 급했던 미 군정은 행정 유지와 좌익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일제시대 경찰들과 공무원들을 다시 기용한다. 그 결과 해방 전 친일파였던 우익이 독립운동을 했던 좌익을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한국의 해방공간에서만 벌어지는 기묘한 상황이 연출된다. 한국 현대사의 흐름은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년 만에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있다. 2권을 읽으면서 앞에 언급한 구조가 그대로 소설로 재연되고 있다. 2권에서는 여순반란사건 이후 다시금 공권력을 회복한 우익이, 이제는 좌익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다. 소설의 배경이 벌교의 소화다리 밑은 이렇게 죽은 시체들로 가득해진다. 결국 보다 못한 김범우는 이 지역의 국회의원인 최익승을 찾아가서 '아무리 공산주의자라 해도 재판 없이 총살시킬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화근이 된다.

최익승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오로지 출세만을 위해 달려온 인물이다. 일제 시대 때 그가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인 밑에서 소사를 하며 일본인과 친해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제 시대 때 권력을 잡았지만, 해방과 함께 살기 위해 도망을 가야 했다. 하지만 미 군정이 들어오고 그들 밑에서 권력을 나누어 받았다. 그리고 해방 후 쌀값이 폭등할 때 당시 부자들이 그렇듯 쌀을 매입해 폭리를 취한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권력을 비웃는 김범우에게 증오를 느낀다. 그리고 그를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가둔다. 여기에 동조하는 인물이 벌교의 경찰서장인 남인태라는 인물이다. 남인태 역시 일제시대 때 순사를 하다가 해방 후 다시 경찰이 되었다. 그는 최익승에게 사주를 받아 김범우를 가둔다. 이 과정에서 김범우는 '빨갱이'이라는 말의 무서움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

"최익승은 '빨갱이'란 말을 무수히 되풀이했다. 그 말은 지칭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건 말이 아니었다. 공격의 무기였다. 지칭이든 호칭이든 상관없이 그 말은 되풀이될수록 기묘한 마력으로 육박해 왔다. 김범우는 그 말이 되풀이될 때마다 자신의 의식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는 위축감을 느껴야 했다. '빨갱이'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는 말과는 그 색깔이나 냄새나 느낌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건 극악한 범죄자의 대명사였고 극형의 죄목이었다. 그 말은 해방 이후 수삼 년에 걸쳐 그 어떤 말보다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 느낌이 그렇게 살벌하거나 증오스럽지는 않았다. 그런데 최익승의 입에 오른 그 말은 처형의 살기를 뿜고 있었다. 그 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선택의 자유권을 상실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지만 생존권까지 좌우하게 된 상황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야 했다. (P24)"

2권에서는 벌교 지역에 진압경찰병력이 들오면서 더욱더 공산주의자 색출과 폭력과 학살이 심해지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염상진과 일행들의 가족들을 몰매를 당하거나, 구타로 죽거나, 심지어는 성적인 능욕을 당한다. 또한 이런 공산주의자 색출을 이용해 자신들을 욕심을 채우거나 부를 채우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소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여수 읍민들이고 순천 읍민들이고, 표나는 우익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동네별로 학교 운동장에 끌려나가 심사를 받는다고 했다. 눈이 감겨진 채 실시되는 그 심사는 손가락질로 좌익을 가려내는 것이었고, 거기서 지목당한 사람들은 다시 몇 마디씩 조사를 받았다. 그 간단간단한 조사에서 생사가 결판나는 것이었다. 손가락질은 이장이나 피해자 가족들이 맡았다. 그러나 간단한 조사마저 필요 없는 확실한 죄악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서 죽였다. 조사를 거쳐 좌익 혐의를 받은 사람들은 삼사십 명씩 차에 실려 가까운 산골짜기나 해변으로 끌려나가 무더기로 총살당해 죽었다. 순천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여수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그 수를 알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P 159)"


 


그렇다고 이야기가 우익의 만행에만 초점을 맞추어져 있지는 않다. 단지 2권이 다시금 우익이 벌교 지역을 장악하고 보복을 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이 부분이 더 강하게 부각될 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소설 곳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좌익들의 '공산주의 혁명'이 얼마나 허구이며, 그 허구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또한 한편으로 당시의 해방 후 토지분배의 실패 과정과 쌀값과 같은 폭동을 통해 일반 사람들이 가졌을 미 군정과 지주계급에 대한 분노도 묘사한다. 결국 이런 상황이 공산주의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2권에서는 특히 저자의 냉철한 역사의식이 돋보인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이 된 것이 단지 미군이나 좌익, 또는 우익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결정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김범우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나라의 점령군을 맞으며 우리는 새로운 역사의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첫째, 두 강대국이 내세운 명분을 무산시킬 수 있도록 일사불란한 민족적 단합을 보여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정치적 도구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며 제2의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도 실패, 둘째도 실패함으로써 식민지 상황보다 나을 것 없는 분단국가를 만드는 데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정치, 사회적 혼란과 자체 분열을 일으키는 민족적 희생이 야기되게 되었습니다. (P 376)"

글을 쓰다 보니 소설에 나와있는 정치적 상황에만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지만, 사실 이 소설은 계속해서 위대한 서사성을 가지고 매우 흥미롭게 진행되고 나간다. 이 책을 읽으며 한동안 경험하지 못한 소설 읽는 재미를 다시금 느낄 수가 있었다. 산으로 숨은 염상진 일행이 다시 벌교읍으로 집입하는 과정, 그 과정에서 안창민이 부상을 당해 숨는 이야기, 또 정하섭과 소화의 기구한 사랑 이야기 등, 소설적 재미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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